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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오전과 김옥균의 국채 조달 계획

이 시기 재정적으로 궁핍 일로에 있던 민씨정권은 묄렌도르프의 조언에 따라 당오전(當五錢) 발행을 서둘렀으나, 김옥균은 당오전과 같은 악화를 발행하면 재정적 곤란을 타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물가고를 가져와 국민생활에 해독을 끼칠 것이라 주장하면서 당오전 발행 대신 외국차관의 도입을 건의했다. 이에 왕은 당오전 발행과 차관도입을 병행하기로 하고 3백만 원 국채 모집의 위임장을 김옥균에게 주어 일본에 가게 했다. 국왕의 신임을 얻어 일본에 간 김옥균은 울릉도와 제주도 어채권(漁埰權)을 담보로 외채를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임오군변 이후 일본정부의 개화파 지지 정책이 바뀐데다가 그 정부나 민간이 3백만 원이란 거액을 차관해줄만한 사정에 있지 못해 실패했다. 당황한 김옥균은 10~20만원이라도 빌리려 했으나 그것마저 실패한 채 귀국했다. 차관도입에 실패하여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민씨 일파의 친청수구(親淸守舊)정책이 강화되어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의식은 높아져갔다.[고쳐 쓴 한국근대사, 강만길 지음, 창작과 비평사, 1994년, p186]

조선이 강대국의 등쌀에 시달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시기의 일이다. 당시 조선왕조는 임오군란으로 인한 일본의 피해(?)를 배상하기 위해 50만원의 돈을 지불해야 했다. 이외에도 인천 개항 등 격증하는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1883년 2월에 명목가치가 종래의 상평통보보다 다섯 배 더 큰 당오전(當五錢)1을 주조하여 유통시키기로 결정한다. 물가폭등이 뻔히 예견되는 이 상황을 김옥균 등 개화당(開化黨)이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김옥균이 직접 일본에 국채를 조달하러 나섰지만 실패하고 체면만 구긴 채 귀국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 결국 그 다음해의 개화파가 실행한 갑신정변으로 이어진 것이다.

만약 이때 김옥균의 국채조달이 성공하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정부 내 개화파의 입지는 커졌을 테고 그들이 이상적인 롤모델로 여기고 있던 일본의 입김도 더 세졌을 수 있을 것이다. 개화파가 일본의 침략야욕을 일찍 눈치 챘다면 자주적인 근대화가 더 빨라졌을 수도 있고 계속 친일노선을 유지했다면 한일합방이 좀 더 빨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어쨌든 역사의 모든 정변에는 경제적 원인이 내재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일화다. 그리고 김옥균이라는,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한 파란만장한 정치가에 대한 호기심도 더 커지게 하는 일화다.

  1. 당오전은 그 액면가치가 상평통보(당일전) 보다 5배 높은 것이지만 실제로 무게는 대략 2배에 불과한, 시작부터 악화(惡貨)였다.

파시스트 정부 하에서는 기업들 역시 피해자였을까?

지금까지 일본 법원은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이 제기한 소를 기각시켰다. 전쟁 배상 문제는 1965년 조약으로 끝났다는 이유였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 전쟁 배상금으로 차관을 포함해 8억 달러를 지급했으며 대부분은 개발 및 인프라 프로젝트에 사용됐다. 일본 법원들처럼 한국 하급 및 항소 법원들도 전쟁 배상 사건을 기각해왔지만 지난 봄 한국 대법원은 하급법원의 판결을 뒤집었다. 1965년 조약이 민간기업에 대한 개인의 보상청구권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 보상 전문가인 일본인 변호사 이와츠키 코지는 “개인 보상청구에 관해서는 일본과 한국 대법원이 인식 차이를 보인다”고 말했다.[일본 강제징용 피해자들 이번엔 보상받을까]

월스트리트저널이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이들의 노동력을 저임금 내지는 무임금 노동으로 착취한 일본 기업 간의 재판에 관한 소식을 보도했다. 한국의 고등법원은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이 손해배상을 청구한 피해자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며 피해자들에게 4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금액은 이 거대한 기업들의 규모에 비해서는 극히 미미하지만 그 상징적 의미 때문에 한일 정부와 일본기업들이 엄청 신경 쓰고 있을 사안이다.

기사에서 언급한대로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1965년 한일수교 당시 지불한 배상금과 차관을 통해 정부 차원과 민간 차원의 각종 손해배상을 모두 지불했다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국 정부는 그 동안 불편한 침묵을 지켜왔는데, 일본 정부의 주장이 틀린 사실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이 준 돈의 꼬리표에는 강제징용자나 한일 어업배상권이 포함시키기로 합의한 심증이 짙지만 박정희 정부는 이 돈을 그대로 포항제철 건설에 써버렸다.

드디어 1969년 12월 韓日간에 종합제철에 관한 기본협약이 체결되어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韓日 국교정상화 때 양국간에 합의된 청구권 및 對韓차관 공여액은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3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으로서 무상 및 유상자금 각 3억 달러에 대해서는 항일독립유공자보상, 對日민간청구권보상, 평화선철폐에 따른 어민보상 등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다. 朴대통령은 국민적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을 각오하면서 낭비보다는 건설이라는 견지에서 종합제철건설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pp138~139]

강제징용자 등 피해자들은 포항제철에 대해 자신들의 몫을 가져간 것에 대해 재판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포스코는 “사회 공헌 차원”에서 일제 강제징용자 재단에 100억 원을 지원한다. 이렇게 한국 정부와 한국 기업에게 발길질 당한 일제 피해자들이 찾아간 곳이 일본 기업인 셈이다. 일본 기업이 일본 정부의 독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징용자를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한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이고 현재까지 그 시도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재판은 그 최종결과에 따라 ‘파시즘 정부 하에선 모두다 피해자였다’고 주장하는 자본가들의 변명의 위선을 밝혀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제 올린 글에서도 보다시피 파시즘은 反자본주의적 행보를 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가들의 이윤착취를 보다 폭력적이고 교묘한 방법으로 정당화시켜줬다. 추축국이었던 일본 역시 이런 상황에서 예외일리 없다. 파시스트 정부의 뒤에 숨어 타민족에 대한 착취를 향유해온 기업들은 이제라도 정당한 배상을 해야 한다.

일본 엔화 하락으로 돈 번 사람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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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Y Banknotes” by TokyoshipOwn wor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조지 소로스 하면 1992년 파운드를 방어하려는 영국중앙은행과 맞장을 뜬 “환투기꾼”이자,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사유하는 “철학자”라는 독특한 삶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인물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이 억만장자 철학자가 일본 엔의 하락세에 베팅하여 파운드 전쟁에서의 노획물에 버금가는 10억 달러의 이익을 거둔 사실을 – 물론 물가가치를 고려하면 그때의 혁혁한 전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 보도했다.

엔화의 하락에 베팅하는 것은 소심한 이가 할 짓이 못된다. 일본은 몇 년간 자신의 화폐를 절하하여 경제와 주식시장을 재점화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왔다. 그 기간 동안 엔화와 일본 국채에 대해 숏포지션을 취한 많은 이들이, 화폐와 채권이 오히려 상승함에 따라 두들겨 맞았다. 일본은 월스트리트에서는 “과부 제조기”로 알려지게 됐다.[중략]

소로스의 예전의 영국 파운드 하락에 대한 매도와 달리, 소로스와 다른 헤지펀드들의 최근의 움직임들은 일본이나 엔화를 불안정하게 만든 것 같지는 않은데, 이는 부분적으로 일본 엔화의 거래가 투자자들이 좌지우지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광범위한 시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일본의 부채는 국내 투자자들이 가지고 있고, 비관적인 투자자들의 그 나라에 대한 숏포지션이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다.

동시에, 소로스의 파운드에 대한 술수는 영국중앙은행의 정책들에 반하는 것이었던 반면, 지금의 헤지펀드들은 디플레이션을 극복하려는 일본중앙은행의 정책이 성공하길 기원하면서 거래를 했다.[U.S. Funds Score Big by Betting Against Yen]

그러니까 소로스를 비롯하여 이번에 큰돈을 번 투자자들은, 1992년의 전투에서와 같이 정부의 의지에 반하는 묘수를 부릴 필요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정부로부터 욕을 먹을 일도 없었다. 그들은 떨어지는 엔화의 급류에 몸을 맡기고 돈을 벌어들이는 재미를 만끽하기만 하면 됐다. 문제는 WSJ기사에서도 말하듯 내리막이 생기는 시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엉뚱한 때에 몸을 던졌다가는 과부만 제조되기 때문이다.

엔화 약세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을 아베 정권 등장과 “무제한적 양적완화레토릭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하지만 WSJ도 지적하듯 이전 정권도 그런 시도를 했지만 지금처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본 시티은행의 다카시마 수석 애널리스트는 IMF의 새로운 환평가 모델에 근거해 적정 환율이 1달러당 95엔이고 지금 그 시점으로 복귀하는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아베는 한 계기일 뿐이란 것이다.

다카시마는 그 예로 2001년에서 2006년에도 일본은행이 양적완화를 실시했지만 외환 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사례를 들고 있다. 당시 일본의 양적완화를 무력화시킨 것은 Fed의 금리인하와 이에 수반된 달러 약세였다. 흥미롭게도 지금의 Fed 수장인 벤 버냉키는 당시 일본이 과감한 통화정책을 통해 불황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논문을 썼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은 현재 호의적인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환율에 관해서 할 말이 많을 폴 크루그먼은 한발 더 앞서가 “환율전쟁”이라는 표현은 “순전히 오해(it’s all a misconception)”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다른 저명한 경제학자 베리 아이켄그린의 주장을 빌어 1930년대의 상황조차 최악의 경우에라도 경쟁적인 환율 약세를 통해 “최초의 지점(where they started)”으로 회귀한 것이며, 이번의 “환율전쟁”이라 불리는 것도 결국에는 “순이익(a net plus)”으로 남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벤 버냉키나 폴 크루그먼이나 “환율전쟁은 근린궁핍화 정책이다”라는 전통적인 주장에서 동떨어져 있는데, 과연 그들의 예언이 어느 정도나 현실에서 실현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폴 크루그먼은 1930년대 당시 상황 악화의 원인을 금본위제 탈피에서 들고 있지만 어쨌든 당시의 상황을 “전쟁”으로 표현하는데 무리는 없고, 플라자합의도 넓게 봐서는 “환율전쟁”의 파편이 심각한 외상을 입힌 사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p.s. 현재의 “환율전쟁”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코노미스트의 긴 글이 있으니 흥미있으신 분은 읽어보시도록…(난 안 읽었다능)

지역은 돈 많은 浪人인 기업을 어떻게 유혹할 수 있을까?

The Verge라는 온라인 매체에서 일본 제조업의 상징인 거대기업 히타치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를 보도했다. 그 기사가 내 눈길을 잡아끈 이유는 기사 제목 때문이었다. 기사의 제목은 “히타치에게 좋은 것이 일본의 히타치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What’s good for Hitachi isn’t good for Hitachi, Japan)”. 무슨 의미일까 하고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 문장은, 히타치라는 이름의 기업이 기반을 두고 있는 일본의 도시 이름 또한 히타치임을 감안하고, 이를 교묘하게 활용하여 만든 문장이다.

기업 히타치와 도시 히타치의 운명은 일본의 제조업이 싹트기 시작한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구하라 후사노스케가 설립한 구하라광업소히타치광산(久原鑛業所日立鑛山)이 모체인 히타치는 광산용 전기기계의 수리공장을 1910년에 히타치市로 이전하면서 오늘의 사명을 갖게 되었고, 이후 도시와 기업은 자웅동체로서 상생해왔다. GM의 前 CEO 찰리 윌슨이 남긴 명언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이 이 도시와 기업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상황인 셈이다.

이미 이 블로그에서 몇 번 개탄했다시피, 위와 같은 명제는 점점 더 그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다. 기술진보, 자본의 경영전략, 각국의 기업유치전략 등에 따른 자본의 세계화가 주요원인이다. 히타치에게 있어서는 한 가지 사정이 더 있는데 바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히타치는 금융위기의 한파가 몰아친 2008년 7873억 엔의 순손실을 기록한다. 회사는 수익성 있는 부문을 팔아치우고, 주종목을 전자제품에서 산업기계로 바꾸며 생존을 도모했다. 이중에는 물론 해고와 고용의 해외이전도 포함되어 있다.

한때 40만 명에 달하는 고용을 창출했던 히타치의 현재 고용 인력은 323,500명이며 이중 3분의 1은 해외에 기반을 둔 인력이라고 한다. 이런 세계화 전략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히타치市는 피해를 입고 있다. 시의 인구와 제조업 인력은 지난 10년 동안 각각 20% 씩 줄었다. 시의 유일한 백화점은 2008년 문을 닫았고 극장은 한 군데도 없다. 비슷한 운명의 가메야마市 – 일명 “샤프” – 에 비해서는 나아보일 수도 있겠으나, 도시의 미래는 장기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적다는 점에서 가메야마市와 크게 다른 점은 없어 보인다.

산업과 지역경제와의 함수관계에서의 비극은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었는데, 이는 두 체제 공히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한 체제였고 지역단위 경제가 특정산업 혹은 특정기업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역시 풀어야할 숙제지만, 더 큰 문제는 지역경제가 산업 및 기업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닌, 히타치처럼 상호갈등 관계로 바뀌는 경우다. 도시의 이름을 바꾼다고 한풀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전에 HBR은 기업과 지역의 모순관계에 관한 글에서, 기업이 특정 지역에 초래한 적자에 세금을, 기업이 기여한 흑자에 세금혜택을 주는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세금이 기업에 대한 통제수단으로써 효력을 잃어가는 상황이나 자유무역의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이 해법이 실현가능할지 의문이다. 미국이 제조업 경쟁력을 되찾고 있다는 글에서 보듯, 입지의 자유를 획득한 자본은 세금, 생산성, 임금, 인프라 등의 변수를 조합해 최적화를 시도하고, 노동자와 지역은 다만 자본의 처분만을 기다릴 뿐이다.

일본의 미혼여성은 어떤 남자를 좋아할까?

일본의 미혼여성은 어떤 남자를 좋아할까? 일본 재무성의 재밌는 광고에 따르면 그들은 일본 국채를 산 남자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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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결혼 상대에 요구하는 것은?

결혼하는 남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역시 경제력! 불황이니까 너무 많은 수입은 요구하지 않지만, 반대로 성실하게 꾸준히 적은 자금을 운용하는 사람이 이상일까. (나루 시마 모모카 씨 25 세)

결혼하면 많이 아이를 갖고 싶은 거야. 그렇게 되면, 역시 나름대로 돈이 필요. 미래의 남편 분은 돈에 성실한 사람이 좋다! 날라리는 NG입니다 (웃음) (고토 나미 씨 27 세)

연애는 즐거운 것이 좋지만, 결혼한다면 절대로 건전한 사람이 좋습니다! 제대로 미래를 내다보고 저축하고 있는 남자라면, “안심하고 따라 가자!”라고 생각합니다. ♡ (마노 쥰코 씨 26 세)

Q2 결혼상대로 해주었으면 하는 자산 운용은?

어디 까지나 자산 운용이므로 “벌자”라는 발상은 별로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안정감과 안심이 되는 자산 운용이 가장 좋을까 ~ . (오노 타카노 씨 24 세)

자신의 남편이 자산 운용한다면, 안정감이 있는 것이 절대 조건! 주식 따위는 역시 전문 투자자가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생활을 생각하면 좀 무섭. (타카하시 토시 미 씨 26 세)

일본정부는 지난 6월 3일부터 개인에게 직접 3년 만기 채권을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2011年08月22日(月) ~ 2011年08月28日(日)

2011年08月28日(日)

Smantha French란 화가의 작품들. 수영을 즐기는 여성들이 물속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빛은 어떻게 처리되는지 예쁘게 표현한 하이퍼리얼리즘적인 풍의 작품들이 인상적. http://bit.ly/oWkij5
comment : 언뜻 David Hockney 도 생각난다

2011年08月27日(土)

Photo: 중앙일보의 참 오만한 헤드라인 http://tumblr.com/xkl4c1ek4s

2011年08月26日(金)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했었던 카다피의 변천사와 향후 리비아 정국전망에 관한 글(박노자) | 노동계급의 기반이 없는 상층부 소수 중심의 자원민족주의적 노선의 한계 http://bit.ly/qSH693

“경쟁시설 방지조항은 .. 민간사업자가 교통행정권을 간접통제하게 된다는 의미” 교통행정권이란 표현이 와닿는데, 민자사업이 독립채산제고 경쟁도로 신설은 곧바로 채산성 악화 내지는 파산을 의미한다는 점이 딜레마 http://bit.ly/rcRWtV

오세훈 “그 분들의 열정과 애국심은 .. 과잉복지를 경계하는 역사의 상징으로 민주주의의 새 전기를 만들 것이라 믿습니다.” | 오만과 거짓으로 점철된 사퇴회견. 과잉복지가 아니라 “사실상” 복지겠지. http://bit.ly/qTNO7j

페이스북에 foog.com 페이지 개설. 의미가 있는 것인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http://on.fb.me/pfLx1y

오세훈을 칭송하고 도와주지 않은 박근혜를 저주하는 조갑제 칼럼. 어쩌면 오 씨는 박 씨가 진작에 복지를 테마로 정했기 때문에 선거참여 독려에 나설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박 씨의 비협조를 조장했을지도? http://bit.ly/p6jVuW

감정적 분노를 표현하는 노동자들에게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흠결이 없다고 고집하며 중립과 객관에 몰입하는 지식인의 ‘왕자병’에 가깝다 http://bit.ly/nniP8s
comment : 하종강  씨의 “지식인”의 기계적 중립주의에 대한 비판

2011年08月25日(木)

Marco Rubio: Medicare, Social Security ‘Weakened Us As People,’ Made Us Lazy | 이 친구도 말끔하게 생겼지만 상당히 똘끼가 있는 듯 http://bit.ly/nbZW9z
comment : 쿠바 이민자 출신임에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권리를 제한하려는 인간이라는…

Over-and-under monorail | 레일의 위아래 양 방향으로 움직이는 뮌헨의 모노레일. 기발한 발상이었군. http://bit.ly/n5x1ls

Architectural Postcards | 정말 멋진 건축물들에 정말 멋진 사진들. 마지막 풍경은 마치 외계문명의 거주지 같은 느낌. http://bit.ly/rpwkQ1

2011年08月24日(水)

문득 홍준표가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지분을 재벌에게 매각한 후 “그들도 우리나라 국민이니 사실상 국민주 매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comment : “사실상” 패러디

전에 생각한 스마트폰앱은 정말 소신껏 음식점 평을 올리는 음식점 정보공유앱이다. 공중파나 블로그들에서도 날선 비판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집단지성(?)에 기대어 그 평가를 객관화시키자는 생각이었는데, 과연 가능할까?

commet : 이에 대한 팔로워 분들의 반응

@ruknabid 인터넷 블로그 등이 칭찬일색인건 아무래도 알바(?)때문으로 추측되는데, 알바를 막는게 핵심인듯합니다. ^^; 쉽지 않을듯 하네요..
@hyuk_seven @EconomicView 님이 말씀하신 사람들이 소신껏 음식점평을 올리는 스마트폰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몇 가지 어려운 점들이 있었다. 음식점은 워낙 그 수가 많아 데이터나 관리할 것들도 방대한데 과연 비영리로 운영이 가능할런지.
@divetou 식약청에 고시된 위생불량적발업소 리스트를 모아두기만 한 앱도 강력한 항의에 의해 내려가는 나라라…
@disqlose 포스퀘어가 좀 더 탄력 받으면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을거 같은데 칭찬 일색인 맛집 블로그 평보다 짤막한 포스퀘어 팁이 담백하고 솔직하게 느껴져서 타지에 있을 때 은근 활용하게 되더라구요.
@hyuk_seven 저도 그 쪽을 생각해봤는데 투명한 운영과 비용을 생각해보면 좀 어렵지 않@No9thatMAN 가능하다고 봐요 시도된적이 없는게 함정…
@amuluckena 음식점에서 직접 평을 작성하거나 알바들이 앱을 가득채울 수도 있지 않을@pskyd 열린 매체라면 자연히 블로그식으로 알바들한테 털릴것같네요…

오세훈의 뻘짓으로 한나라당안 내년 총선이나 그 이후 대선에서 더더욱 커질 복지에 대한 요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개연성도 커지게 되었다. 어쨌든 서울시에 국한된 이슈가 전국화되며 한나라당은 무상급식 반대에 당력을 집중한 정당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comment : 오세훈이 “보수의 전사”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어 오세훈 개인에게는 그리 손해볼 것 없는 장사였다는 분석도 있으나 결국 한나라당이 그러한 우경화로 전면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그가 설 자리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무디스, 日 신용등급 1단계 강등 http://bit.ly/pMIeUf

2011年08月23日(火)

세계의 자원분포 현황 http://bit.ly/nahfuh

The Fairy of Eagle Nebula: http://tumblr.com/xkl498dvrh
comment : 마치 말을 닮은 괴물 한 마리가 탄생하는 듯한 형상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미국, 그리고 세계경제가 키워온 버블은 부동산/증시/개인부채/소비/달러/정부부채다. 버블 6개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몸집을 키워왔다. 이중 달러와 정부부채 버블은 지금 혼란이 시작됐다.” 로버트 위더머

Photo: ‘애프터쇼크’란 책의 저자 로버트위더머의 인터뷰 기사 사진. “세계경제가 이리 될줄 이 남자는 2년 전에 알았다”는 카피가 웃겨 찰칵. http://tumblr.com/xkl49838g0

2011年08月22日(月)

박재완 “공기업 민영화로 세외수입 확대. 인천국제공항공사 민영화 법안 통과를 돕는 차원에서 국민주 매각방식 검토 중” | 애초 설비투자를 통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매각차익을 극대화하겠다는 논리는 안드로메다로 http://bit.ly/n2NfPA
comment : “인천국제공항 민영화” 시나리오의 재구성 http://foog.com/10834/ 으로 정리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교회를 상품화하여 거래하는 개신교계가 http://qr.net/eydz 무상급식으로 국가재정이 부담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http://qr.net/eyd0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위 50%만 밥주는 기적이었나?
comment : 이번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쟁에서 개신교는 – 특히 대형교회 – 그들 특유의 보수성을 감추지 않았다. 내년 총선을 대비한 기독교 정당의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릴 만큼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갈구는 날로 더해지고 있다.

보스턴 빅픽쳐 : 잠자는 사람들 http://fwd4.me/09Zp 사람들이 잠잘 때의 평화로움을 깨어 있을 때에도 유지할 수 있다면 세상엔 갈등이 사라질 텐데…
comment : 인간이 잠을 자는 이유는 어쩌면 그때만이라도 서로 싸우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신의 의지일까?

비판의 악순환 http://newkoman.mireene.com/tt/3971 왠지 공감이 ㅋㅋㅋ
comment : ㅋㅋㅋㅋ

일본의 원전사고 악화원인은 무엇일까?

France’s ASN nuclear safety authority said on Tuesday the nuclear accident at Tokyo Electric Power Co’s (9501.T) Fukushima Daiichi plant could now be classed as level six out of an international scale of one to seven. Level seven has been used only once, for Chernobyl in Ukraine in 1986. The 1979 accident at the Three Mile Island nuclear power plant in the United States was rated a level five.[French nuclear agency now rates Japan accident at 6]

일본의 대지진에 이은 후꾸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악화되고 있다. 프랑스의 핵관련 당국은 화요일 이번 사태를 레벨6급의 위험으로 분류하였는데, 레벨7까지 간 경우는 1986년의 체르노빌 사태 단 한번이었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미국에서 레벨 7로 분류할 수도 있다고 하니, 도쿄에서 불과 2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이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일본은 그야말로 국가적인 위기라고 할 수도 있다.

이번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물론 궤멸적인 지진과 쓰나미였다. 한편으로는 사태의 확산과 피폭자 수의 증가에 대해서는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던 기업인 도쿄전력(東京電力)의 정보 미공개와 늑장대응 때문이라는 비난도 들린다. 일본정부의 에다노 관방장관은 초기 원전사태가 별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가, 급기야 도쿄전력이 제대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고 호소하며 뒤늦게 정부 차원의 통합대책본부를 만들기로 하였다.

도쿄전력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데에는 그 회사가 민간 기업이며 주식이 상장되어 있기에 주가하락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아닌 게 아니라 이 기업의 주식은 지금 곤두박질치고 있다). 1951년 설립된 도쿄전력은 일본의 4200만 주민에게 전력을 공급한다. 세계 4위의 민간발전회사로 매출액은 457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 정도의 회사라면 민이건 관이건 을 떠나서 지극히 관료화된 조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한편 애초 사고가 시작된 후꾸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1호기는 1971년에 지어진 노후화된 시설임에도 여태 운영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한 NGO의 주장에 따르면 가동 당시 발전소의 수명은 30년이라고 했었다. 그러하기에 낡은 시설을 연한을 넘겨가며 계속 가동해온 것은 도쿄전력의 이윤동기, 그것을 허가한 정부의 나태함의 책임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상황에 자극받은 독일 정부는 즉시 1980년대 가동을 시작한 원전을 일시정지시켰다).

지진이라는 天災가 방사능 사고라는 人災로 진화한데에는 도쿄전력의 이윤동기가 한몫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비용대비 매출극대화는 민간기업의 본능이며 도쿄전력 역시 이러한 유혹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러한 기업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 관료주의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민간이 아무리 시장 자유주의적으로 행동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당국의 통제 하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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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kushima I by Digital Globe” by Digital Globe – Earthquake and Tsunami damage-Dai Ichi Power Plant, Japan.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우리나라의 경우 전력시장은 한국전력이라는 거대 공기업으로 오랜 기간 존재하다가 1990년대 후반 이후 전력사업구조개편의 일환으로 발전사업의 민자유치가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2001년 한전의 발전부문이 수력/원자력 1개 회사, 화력 5개 회사 등 6개의 발전회사로 분리되었다. 한전 자회사의 민영화와는 별도로 6개의 대형 민간발전사업자가 있다. 이중 문제가 되고 있는 원자력 부문은 한국수력원자력이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영화가 되었다고는 하나 한수원은 실질적으로 정부 소유인 한전(정부와 정책금융공사가 53% 소유)이 100%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 산하 기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이 도쿄전력과 다르기에 이윤동기에 덜 민감하다고 할 개연성도 있겠으나, 관료주의도 무시할 수 없는 人災의 한 요소이며 우리 역시 1978년 설치한 고리원전 1기를 2007년 10년 더 쓰기로 결정한 바 있다. 국가 역시 채산성이란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정황이다.

우리나라의 전체 발전량 중에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현재 34%에 달한다. 이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연료원은 유연탄으로 43%다. 하지만 발전단가에 있어 원자력을 따를만한 연료원이 아직까지 없으며, 유연탄 역시 온난화라는 심각한 부작용 때문에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와 있는 상황이라 단 기간 내에 대체연료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를 교훈삼아 에너지 정책의 인식을 전환하여야 할 시기다.

요컨대, 이번 사고는 에너지원으로써의 원자력에 대한 근본적 회의, 발전사업의 소유형태 및 관리운영의 시스템에 대한 반성,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보의 처리방식 등의 화두를 전 세계에 던져주고 있다. 해답은 쉽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원자력은 어느새 우리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고, 민영화의 대안이 단순히 재국유화일 수는 없는 것이고, 여전히 상당수 정보는 권력자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세기초인데 세기말과 같은 느낌이 드는 요즘이다.

가을에 생각나는 ‘아지노산뻬이(味の三平)’의 미소라멘

벌써 홋카이도(北海道) 여행을 다녀온 지 얼추 1년이 다 되어 간다. 여행이란, 늘 가기 전엔 가벼운 흥분감, 현지에서는 객지(客地)에 머묾으로 인한 적당한 피로감, 그리고 다녀온 후엔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는 긴 여운을 남기게 마련이다. 촌놈이 가장 최근에 다녀온 해외여행이 홋카이도인지라 자연스레 아직도 내 뇌리 속엔 그때의 추억이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다녀오자마자 설렁설렁 여행기를 썼지만 그때 미처 적지 못한 추억이 홋카이도의 도청 소재지 삿포로에서 먹은 맛있는 라면에 관한 추억이다. 삿포로는 겨울이면 눈축제로 유명한 곳이지만, 또한 라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미소라멘(된장라멘)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삿포로에 도착한 우리들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당연히 라멘식당이었다.

당시 분(分)단위로 여행계획을 짰던 우리 멋진 의사총각이 안내한 곳은 바로 삿포로를 미소라멘의 본고장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식당, 즉 1961년 처음 미소라멘을 개발한 ‘아지노산뻬이(味の三平)’라는 식당이었다. 소위 진짜배기 원조식당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아간 곳은 놀랍게도 조그만 상가 안에 자리 잡은 그야말로 3평(坪)짜리 – 3평은 더 되었지만 – 식당이었다.


길다란 바로 되어 있는 단촐한 테이블

도저히 원조집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일단 그 유명한 원조집이라면 근사하게 독립건물을 차려놓고 장사를 할 줄 알았는데 상가 안에, 식당가도 아닌 문구를 파는 층에 홀로 식당이 있다는 점에서 놀랐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말 그대로 원조집이었음에도 식당 어느 곳에도 – 간판에도 – “원조집이에요~”라고 자랑을 늘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조집이라는 자랑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식당에 들어간 우리는 한동안 ‘여기가 과연 그 아지노산뻬이가 맞을까’하는 대화를 나지막이 나눴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이곳은 원조집의 상호를 가로챈 짝퉁 식당일지도… 어쨌든 막 버스를 타고 도착한 여행객의 피로감으로 인해 우리는 서둘러 자리에 앉아 미소라멘을 시키고 원조집이든 아니든 식당의 음식솜씨를 기대해보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둘러본 가게 안은 깔끔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라멘을 먹는 일에 열중해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주방에 요리사 대여섯이 빼꼭히 들어가 열심히 요리를 하는 장면이었다. 특히 노년, 중년, 그리고 청년 3대가 함께 요리를 하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위 일본 특유의 대를 이은 장인정신을 눈앞에 보고 있는 심정이랄까?


정면에서 바라본 식당

잠시 후 나온 라멘을 입에 넣은 순간 우리는 모두 한 입 가득 면을 씹으면서도 “오이시~(”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된장의 구수함이 꼬들꼬들한 면이랑 나물과 잘 어울려 뱃속을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맛이었다. 그 맛과 온기는 매서운 삿포로의 겨울도 잠시 잊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든든했고, 만에 하나 굳이 이 아지노산뻬이가 짝퉁식당이어도 상관없을 만큼의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맛있는 미소라멘

덕분에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식당을 나설 수 있다. 지금도 잘한 일이라 생각되는 것이 길찾느라 수고스럽긴 했지만 본고장에 제대로 된 음식은 이런 거구나 할 만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후일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일본 요리점에서 시킨 미소라멘의 달기만한 짝퉁 맛을 보고는 ‘원조집의 맛은 이렇지 않아’라고 가볍게 비판할 수 있는 “된장질”의 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일본 여행기 – 노보리베쓰에서 도야까지

우리 일행이 머물렀던 마호로바 호텔

당초 노천목욕을 즐기는 로망을 실현하는 것도 일본행의 – 특히 홋카이도행의 – 하나의 목적이었음은 새삼 말할 나위없다. 그런데 첫날 갔던 탕에서는 노천탕이 없었다. 아내가 여탕에는 노천탕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다행히 일본은 하루마다 번갈아가며 남탕과 여탕을 바꾼다.(일종의 음양의 기(氣)를 바꿔준다는 의미라는데 정확한 유래는 모르겠음) 그래서 욘사마와 나는 아침에 서둘러 노천탕으로 갔다. 비록 시야가 확 트인 노천탕은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단풍이 어느 정도 물든 산이 보이는 노천탕이었다.

어쭙잖은(!) 로망을 어느 정도 실현시키고 끼니를 때운 후에 우리는 재빨리 도야市로 향한 여정에 올랐다. 노보리베쓰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도시는 역시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도야코(洞爺湖)라는 호수와 쇼와진잔(照和新山)이라는 산이 유명한 곳이었다. 우리의 – 아니 욘사마의 – 계획은 1)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맡기고 2) 도야코에 가서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고 3) 유람선을 타고 4) 우스잔(有珠山) 로프웨이(케이블카)를 탄다는, 야심에 찬 계획이었다.[과연 이것들을 하루에 다 할 수 있을까??]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노보리베쓰 기차역, 전형적인 시골 역이었다. 이 곳에서 기차를 타고 도야까지 가는 여정이었는데 무려 40분 연착! 시간 잘 지키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이 이토록 긴 시간을 연착해놓고도 별다른 사과도 없다. 아~ 과연 시골역이란!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고 있다. 덕분에 기차역 관광은 실컷 했다. 심심해서 역내 풍경, 역사무실, 역 입구에 서있는 곰 박제, 나무에 앉아 있던 까마귀, 현상수배자 포스터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_-

역내 풍경

역바깥 풍경.. 정말 시골역이다.

어디나 그렇지만 역시 기차여행은 근사했다. 특히 홋카이도 남부의 해안가를 타고 가는 노선인지라 수시로 넓고 푸른 바다가 보여 기분이 상쾌했다. 가져온 아이팟으로 일본여행에 어울리게 일본의 유명한 팝그룹 안젠치타이(安全地帶)의 노래를 감상했다. 욘사마가 안젠치타이가 홋카이도 출신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가져간 카메라로 바깥 풍경도 부지런히 찍어댔다.(내가 매일 흉보곤 하던 찌질한 여행객의 모습 그대로) 때마침 근사한 구름 한 덩이가 마치 포효하는 짐승의 모습을 하고서는 우리를 따라왔다. 그래서 연속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우리를 따라오던 짐승구름!

그런 와중에 도야에 도착했다.

도야로 가던 도중에 본 푸른 바다

일본 여행기 – 노보리베쓰市

우리가 일본의 홋카이도에 머무른 기간 동안 일본의 재무상이 갑자기 돌아가셨고 홋카이도의 홈구단 니혼햄 파이터스가 퍼시픽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여를 날아 도착한 신치토세 공항은 적당히 구름이 끼어 쾌적했고 공기는 맑았다. 다소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온 일본인지라, 거기에다 여행계획과 항공권 예약 등은 여행 자체보다 여행계획 수립 자체를 더 좋아한다는 설이 있는 다른 총각이 – 자신을 욘사마로 불러 달라 요구하는지라 욘사마라 부르기로 하자 – 세운지라 다른 나라에 왔다기보다는 약간 긴 국내여행을 한 느낌이었다.

신치토세 공항은 홋카이도 최대의 도시 삿포로市에서 전철로 약 40분 거리의 남단에 위치한 곳이다. 우리의 – 아내와 나, 그리고 욘사마 – 첫 목적지는 더 남쪽에 있는 노보리베쓰市. 온천으로 유명한 휴양도시다. 일본을 대표하는 온천관광지라는데 가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노보리베쓰市를 향하는 버스를 탄 후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랑비의 스산함이 느껴지는 가을날의 온천으로의 여행도 나름의 설렘이 있었다.

유황온천 특유의 계란 상한 냄새가 나는 노보리베쓰市에 다다라 도착한 호텔은 마호로바 호텔. 온천도시의 숙박시설 중에서도 고급 축에 든단다. 이 호텔을 예약한 이유는 유카타를 입고 이 호텔에서 제공하고 있는 다다미방인 호텔 룸에서 일본식 식사 대접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이 욘사마의 설명. 일본에서의 첫날을 정통(?) 일본식으로 누려보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여하튼 서둘러 체크인을 한 후 우리는 바로 노보리베쓰市 관광에 나섰다. 관광이랬자 손안에 들어올 만한 크기의 온천마을 쇼핑가와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는 산에 올라 구경하는 것이 거의 전부의 볼거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초라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슬비에 우산을 받쳐 들고 점점 심해지는 유황천 냄새를 맡으며 첫 번째 들른 곳은 지고꾸다니(地獄谷).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고, 노보리베쓰市의 마스코트(?)인 도깨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옥까지는 아니어도 기이한 외계 어디쯤의 행성 풍경을 연상시키는 살벌한 풍경이었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낮은 민둥산 사이사이로 새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교통이 지금처럼 편하지 않았을 그 옛날, 어렵사리 이 곳에 도착한 이들이라면 이 험상궂은 풍경에 현세가 아닌 듯한 착각에 빠졌을 법하다.

지고꾸다니를 뒤로 하고 산등성이를 마저 올랐다. 나무 발판으로 만든 정갈한 산책로와 산속 오솔길을 거쳐 도착한 곳은 오유야마 전망대. 전망대 아래로 직경이 한 50미터쯤은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노천 온천 오유야마가 보였다. 역시 김이 모락모락 나오고 있었다. 우리를 제외하고 유일한 한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던 아빠, 엄마, 아이 가족의 사진을 찍어주고 우리 셋도 역시 아빠 분의 도움으로 한 컷. 욘사마 담배 한대 피운 후 다음 목적지인 천연족탕으로.

그 곳은 천연 – 물론 천연이지 – 온천수가 냇가에 흐른다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서 직접 맨발을 담글 수 있다는 곳이다. 얼마나 뜨거울까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찾아갔더니 이미 일본인 서너 명이 발을 담그며 거닐고 있었다. 우리도 양말을 벗고 들어갔다. 생각만큼 온도가 높지 않았다. 높아야 섭씨 30도 후반 내지 40도 초반? 그래도 하얀 온천물에 발을 담글 수 있다는 것은 이색적인 체험임에 틀림없었다.

대충 산행을 끝마치고 터벅터벅 온천마을 쇼핑가로 내려왔다. 쇼핑가는 기껏해야 100미터 채 되지 않았고 기념품 가게에는 어느 나라의 기념품 가게나 그렇듯 관광객들을 현혹할만한 수준의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벌꿀을 이용한 식품을 만드는 어느 가게에 들러 고구마로 속을 한 떡 종류와 꿀을 넣은 아이스크림을 맛보았다. 색다른 맛이라 맛있어 하며 먹었지만 가격은 각각 100엔과 300엔, 우리 돈으로 5천원이 넘는 가격이다. 아~ 환율의 압박!

호텔에 돌아오니 5시 반 경. 7시에 식사를 차리기로 하였으니 유카타를 팬티 위에 둘둘 말아 입었다. 그러고 밖에 나오니 약간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어차피 모든 겉옷들이 사실 속은 달랑 팬티 한 장이지 않은가. 지하에 있는 탕으로 가는 와중에 허리띠를 안 둘러서, 수건을 안 가져와서 등등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치고서야 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내는 여탕에 나와 욘사마는 남탕에. 아쉽게도 혼탕은 없었고, 그 와중에 앞서 글에서 이야기한 ‘황당한 문화충격’ 사건이 있었다. 뜨뜻한 탕에 몸을 담그니 기분이 좋았지만 노천탕은 찾질 못해서 그냥 발길을 돌려야 했다.

황당한 문화충격
여행은 저와 아내, 그리고 우리 부부가 잘 아는 총각 한명과 갔습니다. 온천은 빠질 수 없는 관광코스. 기대했던(!!) 남녀혼탕은 없었고요. -_-a 남녀 탕을 하루에 한 번씩 바꿔서 운영하더군요. 그래서 아내는 여탕에, 저와 총각은 남탕으로 갔습니다. 호텔 지하에 있는 노천탕이었는데요. 룸에 비치된 유카타를 입고, 탕 안에서 쓸 작은 수건과 탕 밖에서 쓸 큰 수건을 가지고 갑니다. 저는 그냥 작은 수건을, 총각은 큰 수건을 가지고 갔습니다.

여하튼 둘 다 발가벗고 탕에 들어서는 순간, 제 눈을 의심할 장면이 눈앞에! ‘이라샤이마센’하며 반겨주는 탕의 종업원이 남자가 아닌 아줌마! @_@ 너무 당황스러운지라 갖고 있던 작은 수건으로 중요부위를 가릴 생각도 못하고 스쳐지나 왔습니다. 그런데 아줌마가 뒤따라오던 총각에게 뭐라 하더군요.(총각은 일본어 대화 가능자) 대충 큰 수건은 탕밖에 둬야 한다는 취지로 짐작되었습니다.

재빨리 몸 씻는 곳에 앉아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총각이 나가더니 결국 큰 수건을 옷 보관 바구니에 놓고 오더군요. 그 와중에 저는 ‘아.. 역시 일본은 다르구나’ 하며 처음 경험한 문화충격으로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있었죠. 화장실에서도 아줌마가 있으면 머뭇거리게 되는데 목욕탕에서 마주칠 줄이야. 어쨌든 내 옆에 앉은 총각에게 말을 건넸죠.

“야. 너무 황당하지 않냐?”

총각 왈.

“그러게. 왜 큰 수건은 못 갖고 들어오게 하는 거야?”

방에 돌아와 아내에게 물으니 노천탕은 여탕에 있었다. 하루마다 탕이 바뀌므로 내일 아침에 다시 들르면 될 일이었다. 상은 각 상으로 우리 부부가 머무는 방에 차려졌다. 회 몇 점맛보기 요리들, 된장으로 간은 한 쇠고기 요리, 그리고 샤브샤브 등이 대충의 상차림이었다. 특별히 감동할 정도의 맛은 아니었지만 여행지에서의 이국적인 상차림인지라 나름 즐기는 맛이 있었다. 서비스로 제공된 와인이 감질 맛나서 입가심으로 마시기로 하고 사온 캔 맥주를 꺼내 마셨다.

일본에서의, 홋카이도에서의, 노보리베쓰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