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김옥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돈의 힘

Assaut-Kin-Tchéou.jpg
Assaut-Kin-Tchéou” by loki11 – Le Patriote Illustré.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904년 4월, 다카하시가 영국의 이런저런 모임에서 가끔 마주쳤던 쿤 로브 Kuhn Loeb & Co. 의 제이콥 쉬프 Jacob Schiff 와 친교를 맺게 된 것이 일본의 금융사, 그리고 정치사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이 된 것이다. 유태인이었던 쉬프는 당시 유태인을 박해하던 러시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쉬프는 일본 국채 인수를 결심했을 뿐 아니라, 그의 알선에 의해 일본은 이후 4차례나 추가적인 외채 발행에 성공한 것이다.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분투와 제이콥 쉬프의 도움으로 일본은 런던뿐 아니라, 뉴욕과 파리의 시장 등에서 총액 8,200만 파운드의 자금을 조달했다. 이 외채 발행 규모는 러·일전쟁에 소요된 전비의 약 40%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한마디로 외채 발행의 성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이끈 숨겨진 요인인 것이다.[금융 대 국가 그 거대한 게임, 구라쓰 야스유키 지음, 이승녕 옮김, 중앙 books, 2009년, p30]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금융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전쟁을 시작하는 목적 상당수가 경제적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전쟁을 치르자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 수행국은 전비를 인용문의 예처럼 빌리거나 이게 여의치 않으면 남북전쟁 당시 링컨 행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화폐를 증발하기도 했다. 승전국은 배상금이나 획득한 영토에 대한 약탈의 권리를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향유할 수 있었고, 패전국은 경제적 피해와 더불어 사회적 소요까지도 감수해야 했다. 알다시피 이 전쟁 이후 일본은 우리나라를 챙겼고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 사례를 읽다보니 얼마 전 이 블로그에 올렸던 김옥균의 국채 발행 실패 사례가 생각났다. 대표적인 개화파인 그가 악화(惡貨)의 발행을 반대하며 시도했던 국채 발행 계획이 위의 경우처럼 누군가의 도움으로 성공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아마도 개화파의 정부 내 입지는 매우 커졌을 테고 갑신정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꿈꾸던 자주적인 나라 건설에 한발 더 내딛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옥균은 실패하고 다카하시는 성공했다. 대한제국은 수구세력에 의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황이었고 일본제국은 백인들의 국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돈의 힘이다.

당오전과 김옥균의 국채 조달 계획

이 시기 재정적으로 궁핍 일로에 있던 민씨정권은 묄렌도르프의 조언에 따라 당오전(當五錢) 발행을 서둘렀으나, 김옥균은 당오전과 같은 악화를 발행하면 재정적 곤란을 타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물가고를 가져와 국민생활에 해독을 끼칠 것이라 주장하면서 당오전 발행 대신 외국차관의 도입을 건의했다. 이에 왕은 당오전 발행과 차관도입을 병행하기로 하고 3백만 원 국채 모집의 위임장을 김옥균에게 주어 일본에 가게 했다. 국왕의 신임을 얻어 일본에 간 김옥균은 울릉도와 제주도 어채권(漁埰權)을 담보로 외채를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임오군변 이후 일본정부의 개화파 지지 정책이 바뀐데다가 그 정부나 민간이 3백만 원이란 거액을 차관해줄만한 사정에 있지 못해 실패했다. 당황한 김옥균은 10~20만원이라도 빌리려 했으나 그것마저 실패한 채 귀국했다. 차관도입에 실패하여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민씨 일파의 친청수구(親淸守舊)정책이 강화되어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의식은 높아져갔다.[고쳐 쓴 한국근대사, 강만길 지음, 창작과 비평사, 1994년, p186]

조선이 강대국의 등쌀에 시달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시기의 일이다. 당시 조선왕조는 임오군란으로 인한 일본의 피해(?)를 배상하기 위해 50만원의 돈을 지불해야 했다. 이외에도 인천 개항 등 격증하는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1883년 2월에 명목가치가 종래의 상평통보보다 다섯 배 더 큰 당오전(當五錢)1을 주조하여 유통시키기로 결정한다. 물가폭등이 뻔히 예견되는 이 상황을 김옥균 등 개화당(開化黨)이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김옥균이 직접 일본에 국채를 조달하러 나섰지만 실패하고 체면만 구긴 채 귀국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 결국 그 다음해의 개화파가 실행한 갑신정변으로 이어진 것이다.

만약 이때 김옥균의 국채조달이 성공하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정부 내 개화파의 입지는 커졌을 테고 그들이 이상적인 롤모델로 여기고 있던 일본의 입김도 더 세졌을 수 있을 것이다. 개화파가 일본의 침략야욕을 일찍 눈치 챘다면 자주적인 근대화가 더 빨라졌을 수도 있고 계속 친일노선을 유지했다면 한일합방이 좀 더 빨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어쨌든 역사의 모든 정변에는 경제적 원인이 내재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일화다. 그리고 김옥균이라는,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한 파란만장한 정치가에 대한 호기심도 더 커지게 하는 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