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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일류 직장인의 자살소식을 접하고

이 부사장은 삼성전자의 엘리트코스인 서울대 전자공학과, 미국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박사를 따고 일본 NTT에 근무하다가 1992년 삼성전자에 합류한 인재다.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 부사장은 주로 반도체 D램과 플래시메모리 분야에서 일 해왔으며, 2006년에는 그룹 내 최고의 엔지니어게 주어지는 ‘삼성펠로우’에 선정되기도 했다.[S급 인재 삼성전자 부사장, 업무과중에 투신자살]

직장인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춘 “S급 인재”가 운명을 달리 하셨다. 경찰은 “업무가 과중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이 씨가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번 ‘우울한 슈퍼리치’라는 글에서도 적은 바 있지만 사회적 경제적 성공과 ‘행복’이 반드시 함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언젠가 엄청난 돈을 버는 헤지펀드 투자 매니저에 관한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단위가 거의 천만 달러 단위였다. 그런 그는 인터뷰 와중에도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업무처리를 하느라 제대로 인터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래서 멍청한 생각을 했다. ‘노동시간을 1/10로 줄이고 돈을 1/10만 벌어도 남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 아닌가?’ 하는…

물론 바보 같은 소리다. 월스트리트 금융업과 같이 전 세계의 금융시장이 실시간으로 전쟁터인 상황에서 그 친구는 24시간 내내 – 잠자는 시간만 빼고 – 긴장을 늦출 수 없을 것이다. 잠깐의 방심은 소득의 일부가 아니라 전액을 날릴 수도 있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금융업 같지는 않겠지만 삼성전자의 저 부사장님도 순간의 과로나 좌절감이 삶을 빼앗아간 경우일 것 같다.

공장감독관들은 현재의 10시간 勞動法이 또한 자본의 단순한 화신으로서의 자본가에 내재하는 난폭성으로부터 자본가까지도 어느 정도 해방시켜 그에게 약간의 “敎養”을 위한 시간을 주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전에는 공장주는 돈벌이 이외의 다른 일을 위한 어떠한 시간도 가져본 적이 없고, 노동자는 노동 이외의 다른 일을 위한 어떠한 시간을 가져 본적이 없다.”[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론I[上], 비봉출판사, 1994년, p384]

노동해방은 동시에 자본해방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레버리지(leverage) 단상

레버리지(leverage)를 노동가치론에 연결시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칼 마르크스는 생산에 투여되는 자본을 불변(不變)자본과 가변(可變)자본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변한다는 표현의 대상은 그 자본이 표현하고 있는 가치(value)다. 가치는 상품이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한 기본전제로 그 표현법의 근본은 노동시간에서 시작하여 화폐로 표현할 수 있다.

資本 C는 두 부분 즉 生産手段에 지출되는 화폐액 c와 勞動力에 지출되는 v로 구성되어 있다. c는 不變資本으로 전환된 가치부분을 표시하며, v는 可變資本으로 전환된 가치부분을 표시한다. 따라서 최초에는 C=c+v이다. 예를 들면, 투하자본 500원=410원[c]+90원[v]이다. 생산과정의 끝에 가서는 상품이 나오는데, 그 가치는 c+v+s이며, 여기서 s는 잉여가치다. 예를 들면 410원[c]+90원[v]+90[s]이다.[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론I[上], 비봉출판사, 1994년, p268]

c가 불변자본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생산수단이 생산과정에서 오로지 과거의 가치를 이전하기만 할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v를 가변자본이라 하는 이유는 그가 보기에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90원을 지불한 노동력이 필요노동시간을 초과하여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즉 지불된 가치 이상의 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식을 통해 이윤율의 허상을 폭로한다. 즉 자본가들은 위 도식에서의 이윤율이 s/(c+v)=90/(410+90)=18% 라고 설명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계산방식이다. 마르크스는 불변자본이 얼마가 이전되던 노동시간의 착취도와는 관계없으므로 잉여노동/필요노동=s/v=100% 의 비율이 사태를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것을 그는 잉여가치율이라 정의한다.

다시 한번 거꾸로 정리를 해보자.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90원을 지불하고 그 보수에 해당하는 필요노동을 지출하게 한 후, 추가로 90원에 해당하는 초과노동을 지출하게 하여 100%의 잉여가치율을 실현하였다. 하지만 생산수단의 소모분을 감안하면 그 이윤율은 18%다. 회계 용어로 하자면 ‘법인세전 당기순이익’과 비슷할 것이다.

왜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아닌 잉여가치율에 주목하였는가? 그것은 그 당시 관변학자들이 위의 산식에서 18%의 이윤율을 끌어낸 후 노동시간을 축소할 경우 – 예를 들어 현재 노동시간의 18% – 그 순간 자본가는 손해를 보는 분기점에 도달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8%를 줄여도 여전히 잉여가치율은 (90X(1-18%))/90=73.8/90=82% 라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난 번에 말한 숫자의 정치학이다.

얼핏 이윤율이 대폭 감소할 것 같지만 실상 이윤율 역시 73.8/500=14.8%로 줄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심지어 당시 관변학자들은 “노동자들은 마지막에서 둘째번 1시간에 자기의 임금을 생산하고 최후의 1시간에 순이윤을 생산”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다.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투하된 자본을 보충할 뿐”이라는 논리다.

각설하고 이제 레버리지에 대해 알아보자. 자본가는 해당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비용을 모두 자기 돈으로 댈 필요 없다. 자기자본(equity)에 대한 기대수익이 타인자본(loan)에 대한 기대수익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필요자금 500원 중 20%만 자기자본으로 출자하고 나머지를 해당기간 동안 10%의 이자로 은행에서 빌리기로 했다.

실질적으로 그가 낸 돈은 100원이 되었다. 그리고 400원을 끌어 모아 500원을 투입하였다. 이를 통해 총매출은 590원이 되었다. 이윤은 90원이다. 이중 40원은 차입금에 대한 이자 10%로 지출되므로 남은 돈은 50원이다. 이제 자기자본에 대한 수익률, 즉 Return on Equity는 50/100=50%다. 애초 18%에서 수익률이 2.8배 증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버리지다.

한편 이 사업에서 노동시간을 18% 감축할 경우 레버리지를 이용한 자기자본수익률은  (73.8-40)/100=33.8/100=33.8%로 줄어든다. 이윤율의 감소율은 (18%-14.8%)/18%=17.8%인데 반해 자기자본수익률의 감소율은 (50%-33.8%)/50%=32.4%에 해당한다. 레버리지를 활용한 투자가 이윤감소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레버리지 추세보다 디레버리지(deleverage) 추세가 훨씬 급격한 이유다.

요컨대 경제의 생산과정에서 –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 유일한 가치창출의 원천은 노동이다.(자연자원은 c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치를 이전할 뿐이다) 이윤창출은 과거의 가치들과 새로 생산되는 가치들의 결합이며, 잉여가치율은 생산과정에서의 가치증분을 설명한다. 이윤율은 과거가치를 분모에 더해 잉여가치율, 즉 착취율은 희석한다. 자본가가 레버리지를 활용할 경우 이윤율을 증가시킬 수 있고, 이때 이자는 창출한 잉여가치를 전유(appropriate)하는 행위다.

“할인판매” 빵집

런던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빵집이 있다. 빵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정가판매” 빵집과, 그 가치보다 싸게 파는 “할인판매” 빵집이 그것이다.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빵집 총수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빵제조업자의 고충”에 관한 정부위원 트리멘히어(H. S. Tremenhere)의 [報告書], 런던, 1862년). 이 할인판매 빵집들은 거의 예외없이 명반이나 비누나 粗製탄산가리나 석회나, 더비셔州에서 나는 石粉이나 기타 유사한 成分을 섞어 놓음으로써 不純빵을 판매하고 있다(앞에서 인용한보고서 및 “不純빵의 製造에 관한 1855년의 委員會”의 報告 및 하설[Hassall]의 [적발된 불순품], 제2판, 런던1861년을 보라). 존 고든(John Gordon)은 1855년의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이와 같은 불순빵 때문에 매일 매일 2파운드의 빵으로 살아가는 빈민들은 이제 자기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중략] 트리멘히어는 (앞의 보고서에서) 그들은 [중략] 勞動週間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한 주일 동안 그들의 가족이 소비한 빵값을 주말에 가서야 비로소 지불할 수 있다.”[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론I[上], 비봉출판사, 1994년, p220]

이 글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노동력은 매매계약에서 확정된 기간만큼 기능을 수행한 뒤에야 비로소 지불을 받는”다는, 일종의 ‘노동력 선대(先貸), 혹은 임금 후불(後拂)’ 제도를 설명하기 위한 보충설명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대가를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받기 때문에 위와 같은 곤란을 겪는 한편, 자본가가 파산하는 경우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편 이 글을 읽고 본래 의도와 달리 드는 잡념은 이러한 것이다. 즉, 런던에 “정가판매” 빵집이 전체빵집 수의 1/4이고 “할인판매” 빵집이 3/4이면 정상(正常)적인 빵집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우리가 통상 평균이라 부르는 것이나 보통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특정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정상적인 빵집은 “할인판매” 빵집이 아닐까?

문제는 이들 빵집이 빵값을 할인하기 위해 취한 조치다. 이들은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집어넣어 단가를 낮춤으로써 노동자의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서는 정상적(!)인 영양성분이 가미된 음식을 먹어야 함에도 정상적인 빵집에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빵을 제조하여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섭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상적인 빵집은 정상적인 영양분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저렇게 장기적으로 비정상적인 영양섭취에 견디지 못하는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탈락할 경우 다른 새로운 노동력이 이 빈틈을 채워주는 일종의 노동예비군이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노동현장에서 탈락하기 전까지는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 자신의 근력을 한계상황까지 몰아붙였을 것이다. 우리의 노동시장 역시 개발시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City bakeries bridgeton 1936.jpg
City bakeries bridgeton 1936” by robert kelly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city bakeries bridgeton 1936.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실로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의 수단이 되는 생활수단, 그 중에서도 특히 음식과 관련한 소요비용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항이다. 노동대중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너무 많은 식비가 소모된다면 곧바로 임금상승 압박에 시달릴 것이고 이는 총자본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의 개발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햄버거, 라면 같은 패스트푸드다. 원래는 긴 조리시간과 많은 제조비용이 소요되었을 햄버거와 같은 음식들은 표준화, 합성식품 첨가, 대량생산 등의 처방이 가미되면서 단가를 낮출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전보다 더 싼 비용으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은 싼 임금에도 큰 불만 없이 노동현장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다. 문제는 다시 돌아가서 그것이 장기적으로 정상적인 영양분을 제공하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 세상에서 돌가루(石粉)가 들어간 빵을 판매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당장 소비자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사법당국이 처벌하고 등등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그런 무지몽매한 짓을 용서하지 않는 현명한 소비자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이치로 패스트푸드, GMO식품, 광우병 의심 소고기에 대해 현명한 소비를 하는 이의 숫자는 돌가루 빵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알아도 값이 싸니 사먹을 수밖에 없다. 가만. 19세기 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1862년 런던에서는 – 사실은 그곳이 정상적인 빵집인 – 1/4의 정가판매 빵집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21세기의 서울에는 몇 분의 1의 정상적인 식당이 있을까? 항생제 먹이지 않은 닭으로 요리된 삼계탕, 합성식품이 아닌 반찬, GMO가 아닌 야채로 만든 반찬, 중국산이 아닌 직접 담근 김치를 파는 식당이 몇 개나 될까? 돌가루는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고 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가 “할인”식당으로 뒤덮여진 후 그때는 돌가루를 먹지 않을 선택권마저 없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권하는 글 – 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상품’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

상품에는 다음과 같은 대립이 내재한다.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 사적 노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으로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모순, 특수한 구체적 노동이 동시에 추상적 일반적 노동으로서만 인정된다는 모순, 물건의 인격화와 인격의 물건화 사이의 대립, 상품변태 상의 대립들은 상품에 내재하는 이러한 대립과 모순이 전개된 운동형태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들은 공황의 可能性을, 그러나 단지 가능성만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상품유통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온갖 조건들이 필요하다.[資本論 I(上), 칼 마르크스,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143]

기본적으로 칼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은 이렇게 하나의 사물에 존재하는 양면성, 그리고 그 사이의 대립과 모순이 가지는 역동성에 주목한다. 그 역동성을 사적 유물론에 적용하면 역사 발전법칙 일반이 된다. 크게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특수한 경제시스템을 구축하거나 붕괴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위 인용문은 상품이라는, 경제학에 있어서의 기초단위에 존재하는 이러한 모순들의 종류를 나열하고 있다. 특히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 사적 노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으로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모순”이라는 표현은 결국 생산물이 시장에 나와서 판매가 되어야만 상품으로 인정받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가치가 商品體에서 金體로 건너뛰는 것은 상품의 결사적인 도약(salto mortale)”이다. 생산물이 화폐로 전환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일반적 가치형태를 취하지 못하는데 그 인정을 받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이 어려운 과정이 공황을 예고한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잘 알다시피 수많은 마케팅, 브랜딩 등을 통해 생산물을 알린다. 심지어 사기를 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류경제학에서는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화하는 과정, 즉 시장에서 판매되고 구매하는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간주한다. 그 매개체는 ‘가격’이다. 판매하고자 하는 욕구가 구매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강하면 가격은 하락하고 반대의 경우 가격은 상승한다. 수요-공급 곡선은 아름다운 자정능력을 보여주는 그래프다. 다른 종류의 주장도 있다.

초보적인 평범한 것을 가지고 그처럼 굉장히 떠들어 대는 것은 경제학 이외의 다른 과학에서는 없는 일이다. 예를 들면, J.B. 세이는, 상품이 생산물이라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다고 해서 공황에 관하여 판단을 내리려고 덤벼든다.(그는 생산물과 생산물 사이의 교환을 전제로 과잉 생산의 불가능성을 주장한다)[資本論 I(上), 칼 마르크스,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p143~144]

마르크스가 언급하고 있는 “세이”는 우리가 “세이의 법칙”으로 잘 알고 있는 그 세이다. 세이는 여러 상황을 관찰한 결과 공급이 수요를 창조한다는 법칙을 발견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소유한 뒤에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기게 된다는 요지다.

그럴듯하다. 아이폰이 나오기 전 우리는 아이폰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폰이 나오자 우리는 눈을 뜨고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왠지 성경말씀과 같은 분위기가…) 원시경제에서 양치기가 시장에서 사슴 털로 만든 코트를 보자 그 유용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양과 코트를 바꾸는 것도 같은 이치다. 시장은 새로이 창조된 사용가치를 확인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단순히 새로이 창출되는 사용가치에 대한 수요자의 발견이나 가격의 등락만으로 수요-공급이 자연스럽게 조절된다고 당연시하는 것은 잘 알다시피 마르크스의 생각, 그리고 많은 시장비판론자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직선을 지구표면에 계속 그려 가면 그것은 곡선이 된다. 제한된 실험실의 표본도 거대한 실제 시장에서는 다르게 움직인다.

아이폰과 같은 킬러앱도 “결사적인 도약(salto mortale)”이 있었고 그 동안 수많은 동급의 생산물이 시장에서 탈락했을 것이고 지금도 그렇다. 석유와 같은 단일규모로 가장 큰 거래량을 차지하는 상품의 가격은 거의 수요-공급 곡선에 의해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과거에는 전략적인 가격목표, 근래에는 선물시장에서의 거품수요에 따른 투기적 거래에 따라 등락한다.

어쩌면 생산물이 상품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의 그 여러 모순의 존재를 더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들은 기업 그 자신이며, 특히 마케팅 담당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무지한 수요자들이 상품의 사용가치를 깨닫게 하기위해 생산물을 예쁘게 디자인하고, 수많은 광고를 만든다. “세이의 법칙”만 믿고 편하게 앉아 있는 이들은 없다.

한편 “결사적인 도약(salto mortale)”의 가장 극적인 경우는 바로 이번 신용위기를 초래한 주범 중 하나인 금융상품의 생산 및 유통과정이다. 처음 모기지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MBS가 그 사용가치를 수요자들로부터 인정받았다면, 그 뒤 MBS를 기초자산으로 만들어진 CDO, CDS와 같은 파생상품은 스스로가 ‘거대한 시장’ 그 자체를 창조하였다.

CDO, CDS 상품 판매자들은 시장참여자들의 리스크헤지에 대한 욕구를 긁어모아 하나의 거대한 풀을 만든 후 그 헤지를 사들이는 대가로 상품을 팔았다. 나중에는 모기지라는 기초자산의 크기는 고려하지 않은 ‘그들만의 리그’를 창조하여 과잉생산을 부추겼다.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공황의 可能性에 대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세이의 “사람들은 어떤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주장을 변용해 말해보자면 금융파생상품 구매자들은 어떤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상품변태 상의 대립” 과정에서 추상적 일반적 노동 안에 실제로 특수한 구체적 노동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매우 미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공황의 가능성은 일시적인 시장안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각국 주요은행들은 금융파생상품의 거대한 재고를 재무제표에 먼지 쌓인 채로 덮어놓고 합당한 가격으로 산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쌈짓돈으로 산 자석담요가 실제로 신경통을 치료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고집 센 할머니처럼 말이다.

아시냐의 비극

론인간은 인간 그 자체를 [노예의 형태로] 원시적인 화폐재료로 삼은 일은 가끔 있었으나 土地를 그렇게 한 적은 없었다. 그러한 착상은 발전된 부르즈와사회에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착상이 나타난 것은 17세기의 마지막 1/3의 일인데, 그것의 실행을 전국적 규모에서 시도한 것은 그보다 1세기 뒤인 프랑스의 부르즈와 革命期[몰수한 교회토지를 근거로 1789년에 발행된 assignats]였다.[資本論 I(上), 칼 마르크스,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112]

봉건제 하에서는 당연하게도 토지는 왕이 영주에게 하사하는 것이었기에 칼 마르크스가 말한 바와 같이 토지를 화폐재료, 즉 교환가치가 실현되는 상품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것이 상품으로 취급되기 위해서는 왕정과 봉건영주가 세력을 잃어 봉건제가 해체되고 부르주와가 사회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토지를 가장 먼저 상품화시킨 것은 아시냐(assignats)를 발명한 부르주아 세력이었다.

아시냐는 혁명세력이 몰수한 토지를 근거로 – 즉 담보/기초자산으로 – 하여 발행한 화폐다. 화폐의 생성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 어떠한 정치집단이 채권을 발행할 경우 그 채권의 기초자산으로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을 담보로 잡는다면 그것은 금/은본위제가 될 것이고, 아시냐와 같은 경우는 바로 토지본위제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파생금융에서 모기지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CDO를 발행하는 기법이랄지 부동산 자산을 REITs로 유동화하는 기법 등의 원조는 아시냐인 셈이다.

재정적 위기로 말미암아 심각한 사회적 의의를 지니는 화폐개혁이 실시되었다. 1789년 11월 2일, 제헌의회는 교회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국유화된 토지재산을 화폐화(貨幣化)해야만 했다. 1789년 12월 19일, 의회는 4억 리브르의 교회재산을 매각키로 결정하고, 그에 상당하는 양의 아시냐를 국유재산을 담보로 지불보증하는 어음의 형태로 발행할 것을 결심했다. 당초 아시냐는 교회재산으로 생활할 수 있는, 연리 5%의 채권(債券)에 불과한 것이었다. [중략] 그러는 동안에도 국고는 텅빈 채로 남아 있었고 부채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다. 일련의 조치를 통해 의회는 국채인 아시냐를 더 이상 이자를 지불하지 않으며 무제한적 강제통용 능력을 지닌 화폐로 변모시켰다.[프랑사 대혁명사 上, 알베르 소부울 著, 최갑수 譯, 두레, 1984년, pp197~1980]

앞서 설명했다시피 인용문을 보면 혁명세력이 그들의 취약한 본원적 축적을 어떻게 실행하였는지 잘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은 구세력 중 가장 큰 재산가들이었던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다. 당장 몰수하기는 했지만 토지란 오랜 기간 활용하여야 부를 창출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엔 토지를 거래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토지를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고 이것의 원리금을 보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 하나의 기막힌 변장술을 선보이는데 바로 아시냐를 ‘채권’에서 ‘화폐’로 바꾼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간단하다. 아시냐를 ‘구입’해도 연리 5%의 이자를 더 이상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부를 통해 5%의 이자를 지급하는 채권이었던 것이 이제는 지불수단을 지닌 화폐로 변해서 이자도 못 받는 신세가 되었다. 고로 혁명세력은 무한발권력을 지니게 된 셈이다.

지폐는 모든 가치를 상실했고, 환거래는 붕괴되었다. 1793년 12월에 명목가치의 50%로 떨어졌던 아시냐는 혁명력 2년 열월(1794년 7월)에는 다시 31%로 떨어졌다. [중략] 국고수입이 줄고 아시냐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에 물가의 상승은 국가로 하여금 더욱 거대한 통화팽창을 하도록 자극했다. [중략] 농민과 상인들은 아시냐를 거부하고 정금(正金)만을 찾게 되었다. 아시냐에 대한 거부는 가치하락을 더욱 부채질했다.[프랑사 대혁명사 下, 알베르 소부울 著, 최갑수 譯, 두레, 1984년, p99]

혁명세력도 나름 신진세력으로서 고충이 있었겠고 경제를 하루빨리 활성화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지막지한 일이었다. 채권이었던 것이 하루아침에 화폐가 되고 그마저도 통화증발 등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으니 말이다. 결국 사람들은 금을 찾게 된다. 기초자산이 마땅히 없는 – 또는 발행자가 포기한 – 화폐가 걷게 되는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

美달러를 보자. 처음 그 화폐는 금과의 교환을 약속했다. 아시냐처럼 채권은 아니었지만 기초자산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금태환이 한계에 다다르자 이를 일방적으로 포기했다. 그리고 이후 – 아시냐처럼 폭발적이진 않지만 – 통화증발이 이어졌다. 달러 약세가 계속되고 정반대로 금 가격은 상승한다. 비슷한 이치다. 다른 것이 있다면 기축통화로써의 수요가 있기에 아직까지 휴지조각이 되고 있진 않은 셈이다.

다른 나라들이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달러에 새겨진 In God We Trust를 믿어서가 아니다. 대체재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가치론에 대한 단상

이글은 아래 ‘부’와 ‘가치’ 간의 실질적인 구별에 관한 메모 에 리에라님과 beagle2님이 달아주신 댓글에 대한 나의 보충설명 내지는 단상이다.

노동가치론은 노동을 ‘가치(value)’의 참된 척도로 보는 것이다. 아담 스미드가 – 또한 그를 비롯한 고전파 경제학자들 – 이러한 이론을 정식화한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부는 화폐에 존재한다’라고 믿는 중상주의적 견해에 대항무기로 사용하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다. 한 나라, 나아가 이 세상의 부는 어느 한 나라가 무역차액을 통해 당시의 화폐적 표현인 금을 쟁취함으로써 쌓이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노동자의 근면한 노동, 그리고 자유무역을 통한 상품의 활발한 교환을 통해 쌓여간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부’와 ‘가치’간의 구별이 필요한데 ‘부’는 본래 교환가치가 없던 자연자원과 그에 대한 노동이 결합된 것이고, ‘가치’는 그 중에서도 교환가치의 측정단위가 되는 노동만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식가치론이랄지, 인적자본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한동안 예를 들면 미래학자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식 또는 정보역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 꽤 설득력을 가지고 전파되었다. 나는 이 주장이 두 가지 천박한 편견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가치(value)’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다. 사랑도 가치 있고 우정도 가치 있다. 정보 역시 가치 있다. 다만 이때 가치는 가치론에서의 가치와는 다른 의미로 쓰일 뿐이다. 둘째, ‘노동(labour)’에 대한 편협한 사고다. 지식과 정보에 대한 탐구 역시 넓게 보아 노동의 범주에 들어간다. 탄광에서 석탄 캐는 것 – 물론 이는 매우 유용한 노동이나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막장 노동이다 – 만 ‘노동’이 아니다. 다만 노동가치론은 노동의 정도를 측정할 때에 유일하게 상호비교가 가능한 ‘노동시간’을 측정단위로 삼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정보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지식이나 정보의 측정단위를 제시하지 못할 바에야 노동가치론에 지식가치론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노동의 이분법적 사고를 좀더 들여다보자. 실제로 주류경제학에서 – 또는 사회일반에서의 –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그리고 이 중에서 정신노동의 우월적 지위를 당연시하는 입장은 다시 창조성, 상상력, 기업가 정신 등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노동일반을 이끌고, 심지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create)’한다는 주장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런 과정에서 이른바 ‘인적자본(human capital)’의 중요성도 강조될 것이다. 리스크를 부담하는 그러한 모든 창조적인 것들의 존재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노동가치론이 의미 없다는 논지를 이끄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만약 노동가치론을 주장하는 이중 어떤 이가 ‘공장에서 기계라인에서 조립만 하고 앉아 있는 노동자들’이 ‘멋진 신차 디자인을 통해 시장을 개척하는 자동차 디자이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것은 노동가치론에 대한 조악한 이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억지스러운 분리다. 우리 일상에서의 실제의 노동은 이 두 가지를 분리하기 어려우며, 실제로 많은 창조적 제안은 사실 기업의 우두머리에서가 아니라 기획단위의 노동자, 심지어 생산라인에서의 노동자들의 직무발명이 대부분이다. 인적자본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의 대다수는 현장에서 상품을 만들고 부수며 시행착오를 거친 노동자, 즉 인적자본들이 일궈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노동가치론’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고전적인 – 단순히 고전경제학만이 아니라 – 경제학의 철지난 이론이지만 옛것을 알아둔다는 의미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될까? 앞서 아담 스미드가 노동가치론을 꺼내들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해보면 현재적 의미도 어느 정도 있다고 여겨진다. 즉 현대사회 역시 ‘부는 화폐로부터 창출된다’라는 중상주의적 견해에서 크게 진전된 바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가치론은 유의미하다고 본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금융부문의 비대화로 인해 지속적으로 반복된 신용창출은 이제 단순히 산업의 혈맥 역할 뿐 아니라 스스로가 산업이 되고자 했다.(미국에서 한창 때 전체 산업이윤에서 금융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40%를 넘었었다) 하지만 노동가치론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그것은 일장춘몽일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해 금융 중상주의다. 금융부문이 가치를 ‘창출(create)’하는 것이냐 ‘전유(appropriate)’하는 것이냐의 논의를 제켜두고라도, 이 세계는 1,2차 산업의 존재 없이는 하루도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경제다. 우리가 MMF를 먹고, CDS를 타고, ABS에서 잘 수 없는 한에서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부문이 비대해진 미국은 중국으로부터의 값싼 공산품을 가져다가 생활한 것이다.

‘노동가치론이 다른 이론보다 우월한 이론이다’라고 입 아프게 떠들 필요 없이, 또 그것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무결점의 이론이라고 여길 것 없이, 그것이 가지는 함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실천하면 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노동가치론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잣대로써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케인즈가 마르크스를 개차반 취급하고 자본론이 코란과 동일한 선상의 책이라고 폄하하였지만 그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마르크스 내지는 노동가치론 등 경제학 이론을 옹호(?)해보고자 한다. 요지는 결국 우리가 그것에 기대는 한에는 사실 모든 객관적이고 엄정한 글이나 말 역시도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고,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 책들을 코란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의 ‘밀교적(密敎的)’ 지침서로 무의식중에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게임의 룰 안에서 싸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思想)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어떤 지적(知的)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實務家)들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이다. 허공(虛空)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권자(權座)에 앉아 있는 미치광이들도 그들의 미친 생각을 수년 전의 어떤 학구적(學究的)인 잡문(雜文)으로부터 빼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득권익(旣得權益)의 위력은, 사상의 점진적인 침투에 비하면,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중략]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익(旣得權益)은 아니다.[John Maynard Keynes,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조순譯, 비봉출판사(2007), pp 461~462]

성장과 분배에 관한 단상 2

리에라님께서 본문보다 더 좋은 댓글을 남겨주셔서 공유차원에서 갱신하여 재발행합니다. 원글은 2008년 6월 23일 쓴 글입니다.

A futures contract assures importers that they can sell the oil at a profit. That’s the theory, anyway. But we all know that some people on Wall Street are not above gaming the system. When you have enough speculators betting on the rising price of oil, that itself can cause oil prices to keep on rising. And while a few reckless speculators are counting their paper profits, most Americans are coming up on the short end ? using more and more of their hard-earned paychecks to buy gas for the truck, tractor, or family car. Investigation is underway to root out this kind of reckless wagering, unrelated to any kind of productive commerce, because it can distort the market, drive prices beyond rational limits, and put the investments and pensions of millions of Americans at risk. Where we find such abuses, they need to be swiftly punished.

선물거래 계약은 수입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익을 남기고 석유를 팔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해준다.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월스트리트의 몇몇 사람들이 시스템을 남용할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유가상승에 베팅한 투기자들이 많을 때에는 그것 자체가 유가 상승을 지속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몇몇 무모한 투기자들이 그들의 서류상의 이익을 계산하고 있는 동안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들이 어렵게 번 돈을 그들의 트럭, 트랙터, 또는 가족의 자가용에 넣을 기름을 사는데 더 많이 쓰면서 손해를 보고 있다. 이렇게 가격을 정상적인 범위 이상으로 올리고 수백만 미국인의 연금과 투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등 시장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생산적인 상거래와도 관련이 없는 무모한 노름을 뿌리 뽑기 위해 수사가 진행 중이다. 우리가 그러한 폐해들을 발견하여 그들을 신속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

이 연설은 누구의 연설일까?

1) 바락 오바마 2) 존 맥케인 3) 마이클 무어 4) 랄프 네이더

정답은 2번 존 맥케인이다. 폴 크루그먼 조차도 맥케인의 이러한 발언에 놀란 눈치다. 시장에 대한 절대적 신봉자여야 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이러한 발언을 한 사실이 놀랍다는 눈치다.(주2) 그는 공화당이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이유로 “자본주의 마술(the magic of capitalism)”에도 불구하고 원유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자 선물시장의 광기를 유가상승의 주범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뭐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석유메이저들이 월스트리트의 투기자들 때문에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몰아세우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찌되었든 저 연설 속에서 재밌는 문장 하나를 발견하였다.

“어떠한 생산적인 상거래와도 관련이 없는(unrelated to any kind of productive commerce)”

선물시장에서의 거래행위, 넓게 보아 금융자본의 활동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논리는 가장 공격적으로 주장한 칼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노동가치론자들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주류 경제학자들의 생각은 아니다. 그들은 생산의 3요소를 ‘토지, 노동, 자본’로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비록 선물시장에서의 금융활동을 투기적 행위로 특정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금융자본의 한 종류의 활동을 “생산”과 관계없는 행위로 규정하다니 저 연설문을 혹시 노동가치론자가 작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선(?)하다.

여하튼 금융자본의 활동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맥케인의 주장(!)에 동의할 것 같으면 우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주장되어 오던 ‘금융허브론’이 꽤나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영국, 그리고 유럽의 몇몇 강소국들은 금융지배를 통하여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였다. 보다 정확하게 그것은 이윤을 ‘창출(produce)’하였다기보다는 생산자본의 활동으로부터 얻어진 전지구적인 이윤을 ‘전유(appropriate)’하였다. 일국 내에서의 산업자본이 더 이상의 경쟁우위를 상실하였을 때에 그리고 자국 내의 금융 시스템이 경쟁우위를 확보하였을 때에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NAFTA등을 통하여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시켜 자국내 산업자본의 비용을 절감시켜주고 그 생산된 가치들을 금융자본을 통하여 국내로 다시 이전시켜 왔다. 이것이 전 지구적 성장에 대한 국가간의 분배의 형태다. 그것이 한 나라에서는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 우리나라의 금융허브론으로 돌아가면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산업자본 포기하고(주1) 금융허브 키우자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의 국제화 정도나 경제규모로는 참 난감한 소리다.

지난번 NekoNeko 님이 달아주신 코멘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이것을 예를들어 4천만 국민 모두에게 1/n씩 나누어 준다고 하면 일인당 약 7만 5천원 정도씩을 분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규모의 경제나 기회비용의 측면을 생각해 봤을때 정몽준에게 3조 재산이 가 있는 것이 더 큰 파이를 생산하는데 나을지 국민 모두에 7만5천원씩 나누어 주는 것이 소득 증대 효과 측면에서 더 나을지 고려해 볼때 아무래도 전 전자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전 지구적으로 정몽준이라는 산업자본가에게 3조의 재산을 몰아주어 그것이 자본화(資本化)되어 6조라는 실물을 생산하였으면(주3) 4천만 국민에게 1/n 씩 나눠주어 홀랑 까먹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나눠줄 수 있는 돈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주4) 그런데 이러한 도식에는 몇몇 함정이 있다.

정몽준이라는 산업자본가가 아닌 박현주라는 금융자본가에게 3조원을 몰아주면 어떠할 것인가? 그것은 생산적 활동에 투입되지 않고 맥케인도 인정하는 비생산적 활동에 투입하게 될 수도 있다. 그 금융자본이 또 다시 산업자본의 생산비용으로 투입되는 것이 아닌(주5) 맥케인이 혐오하는 석유 선물시장에 투입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유가를 급등시켜 박현주는 3조원을 벌지는 모르겠으나 그 돈은 맥케인이 표를 구걸해야할 ‘대부분의 미국인’의 주머니를 터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된 세상에서는 미국인 돈만 터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돈도 털고 전기요금과 같은 공공요금의 인상요인이니 내 돈도 턴다.

이와는 별도로 4천만 국민에게 1/n 씩 나눠주는 것은 쓸데없는 짓인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가? 그들의 가처분소득 증가가 상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여 국내 산업기반을 다져갈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당과 청와대의 유류환급금도 이러한 원리를 알고 만들어진 정책이다. 그렇게 선순환적으로 흘러가면 산업자본을 자극하여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 케인즈적인 냄새도 풍긴다. 그런데 NekoNeko 님이 1/n 씩 주지말고 정몽준에게 몰아줘야 더 큰 파이를 생산시킨다는 아이디어는 사실 ‘내수형 산업기반’보다는 과거 ‘수출주도형의 산업기반’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과거에는 유효했지만 산업구조가 바뀌고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된 오늘날까지 유효할지는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다.

요컨대 성장과 분배의 문제에 있어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진리에 근접한 것일 수 있다. 성장은 전 세계의 인간이 삽질을 해서 자연자원을 착취(labor)하는 만큼 증가한다. 화폐는 이를 통해 생산된 상품의 표현양식이다. 산업자본은 상품을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인민에게 팔아 이윤을 남기고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의 전후방에서 이를 전유한다. 인민 역시 산업자본의 전후방에서 제 몫을 가져오고(주6) 그것을 소비한다. 필요소비에 모자랄 경우 금융자본은 노동자에게 뒷돈을 대주어 또 한 번 이윤을 전유한다.(주7) 한 국가의 성장은 전 지구적 차원의 이러한 활동에서의 일국에 대한 분배의 형태일 뿐이다.

(주1) 포기까지는 아닐지라도 산업고도화(?) 정책에 의하여 경쟁우위 품목만 남기고 나머지는 산업기지 이전 등을 통해 정리하고

(주2) 사실은 비아냥거림이지만

(주3) 전 세계적으로 3조의 부가가치를 창출하였고 그것을 한국으로 온전히 가져왔다는 모양새

(주4) 물론 지독한 성장론자들은 이 돈 마저 다시 정몽준에게 몰아주자고 주장할 것이다. 좋은 시절 되면 그때 가서 나눠주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5) 즉 예를 들면 생산기지 이전에 따른 비용에 대한 시설자금대출 등

(주6) 이를 충분히 못 가져온다는 것이 마르크스 노동착취론의 주장일 것이다

(주7) 금융자본은 비생산적 활동을 한다고 여기저기서 욕을 먹어도 어찌 되었든 경제의 핏줄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