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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

자본가는 노동일을 될수록 연장해서 가능하다면 1노동일을 2노동일로 만들려고 할 때, 그는 구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판매된 이 상품의 특수한 성질은 구매자에 의한 이 상품의 소비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노동일을 일정한 표준적인 길이로 제한하려고 할 때 그는 판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이율배반이 일어나고 있다. 즉, 쌍방이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에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296]

자본론에서 처음으로 “투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이다. 결기가 차고 넘치는 “불온서적”치고는 꽤 늦게 투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느낌이다. 여기서 투쟁이라는 표현은 바로 냉철한 상품교환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하는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을 의미한다.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갈등은 통상 거래가격에 대한 갈등일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보통의 거래는 상품의 양도 시점과 가격의 지불 시점을 일치시킨다. 그런데 어떤 상품은 – 대표적으로 노동력 – 이 양자 간의 시점이 일치하지 않아1 갈등을 초래한다. 또는 시점이 일치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과대추정 혹은 과소추정되어 갈등을 일으킨다. 역사적으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판매자인 노동자계급에 의해 그 가격이 과소추정되었다는 주장에 따라 노동시간의 단축 등의 투쟁을 촉발하였던 것이다.

결국, 노동자계급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력을 시장에서 제값을 받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이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과 유급휴가의 확보라는 결실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역사적 재평가에 급제동을 걸고 있는 조류가 새로 등장하고 있으니, 그것은 플랫폼 경제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해체다. 이 조류는 자유로운 노동력의 소유자인 노동자를 플랫폼에 예속시켜 마치 봉건시대의 농노처럼 플랫폼의 농노로 후퇴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 맑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의 주장이다.2 노동시간은 노동자 각각의 특성에 따른 저마다의 노동시간이 아닌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서만이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3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균일한 노동력의 보유자인 조직 노동의 투쟁을 통해서 보다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자본이 택한 전략은 이 노동자성의 해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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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lin HeijnenDSCF2049.jpg, CC BY-SA 2.0, Link

이미 서구국가에서의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이전과 같은 노동조직은 약화되어왔다. 그런 한편으로 우버와 같은 플랫폼 경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제거시켰다. 즉, 노동력의 구매자인 자본가는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에게 ‘너는 더 이상 나에게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운행 서비스와 같은 용역을 파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운행 서비스라는 사용가치를 창조해내는 노동력이라는 교환가치를 보유한 노동자로부터 기적처럼 노동자성을 삭제함으로써 노동자를 개인사업자(혹은 자신의 자동차를 생산수단으로 하는 자본가)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에 각국 사법체계가 어느 정도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성과도 얻어내고 있으나 아직도 자본은 아직 조직적 행동 역량이 떨어지는 배달 노동자와 같은 이들에게 노동시간이 아닌 업무성과라는 기만적인 노동관행을4 강요함으로써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을 피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 지부장에 따르면 쿠팡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배송현황 애플리케이션은 휴게시간에도 접속할 수 있어 정규직 전환을 위해 쉬는 시간에도 배송을 계속하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한다.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상대평가를 하는 터라 노동자끼리 배송물량 경쟁을 부추긴다. 또 최근 사측이 인센티브 정책을 변경하면서 그 기준을 알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일하는 일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정규직도, 계약직도] 쿠팡 노동자 2명 또 쓰러졌다, 매일노동뉴스, 2021년 3월 9일]

쿠팡이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대다수를 일용직으로 채용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쿠펀치라는 어플을 통해 매일 일용직을 ‘선별’ 채용하는 것이다. 쿠팡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상시직을 제안하고 있다고 했지만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을 제안한다. 3개월·9개월·12개월 쪼개기 계약을 하고, 이렇게 2년을 다 채운 노동자 중에서 극히 일부만 ‘선별적으로’ 무기계약직을 시켜 준다.[쿠팡의 쪼개기 계약, 노조탄압 수단되나, 매일노동뉴스, 2021년 6월 10일]

사업자등록을 한 적도 없고 사업한다고 표방하지도 않았지만 배민·쿠팡·네이버 같은 플랫폼사업자가 미리 세금을 떼고 인적용역 사업자로 보고해 졸지에 ‘사업자’가 된 그들은 자신이 왜 사업자인지, 수입 대비 소득률은 왜 전문직보다 높은지 의아해한다. 플랫폼경제가 커지고 플랫폼노동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무시로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만 정부와 국회는 문제의식도 고민도 없다.[고삐 필요한 ‘플랫폼경제’, 경향신문, 2021년 6월 10일]

이 기사들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기술문명이 이루어낸 새로운 업적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노동자성 제거, 극한경쟁을 통한 24시간이라는 제한된 노동시간 내에서의 노동력 쥐어짜기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조직화되고 집단화된 노동이 ‘9시 출근 5시 퇴근’이라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 얻어낸 노동시간의 집단적 통제를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인센티브 (혹은 패널티) 제공이라는 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의 자발적(?) 노동을 추출해내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기술 봉건주의”가 다소 과한 표현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봉건제의 농노가 토지에 예속되어 있던 것처럼 오늘날의 플랫폼 노동자는 애플리케이션에 예속되어 있는 노예일지도 모른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했던 자본주의의 거래방식이 새로운 질적 국면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대를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지금 투쟁을 촉발할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이제 투쟁은 노동일에 대한 투쟁과 함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오늘 나의 눈길을 끈 두 개의 보고서

성장에 단독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하위 중산층 및 빈민층 가구와 나머지 사회 사이의 점증하는 차이이다. 교육이 관건이다. 빈자들이 교육에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 성장을 해치는 불평등 뒤에 숨어 있는 주요 요인이다. [중략] 보고서는 불평등이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메커니즘이 가난한 사회경제적 배경 출신의 아이들의 교육기회를 손상시키는 것, 사회적 이동성을 저감시키고 숙련기술 개발을 저해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였다. [중략] 성장에 따른 불평등의 효과는 단순히 나머지 사회와 가장 가난한 10% 사이가 아니라 하위 40%와의 사이의 갭에서 기인한다. OECD는 반(反)빈곤 프로그램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현금 증여와 고품질의 교육, 트레이닝, 헬스케어와 같은 공공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제고가 장기적으로 기회에 대한 더 많은 평등을 창출하는 핵심적인 사회적 투자이다. 보고서는 또한 세금이나 사회적 급여와 같은 재분배 정책이 경제적 성장을 저해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들이 잘 설계되어 목표를 정하고 실행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Inequality hurts economic growth, finds OECD research]

OECD의 최신 보고서는 불평등이 경제 성장에 명백하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 배경은 주요하게 자녀교육의 기회를 박탈하여 사회적 이동성을 제약한다는 것, 이 경제적 불평등은 하위 40%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공공 서비스가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정책이 잘 설계만 된다면 경제성장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내 짐작에 경제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사상적 전제를 무너트릴지도 모를 상황 때문에 이 보고서의 상당 부분을 거부하지 않을까 싶다.

예로, 인용한 OECD의 글을 읽고 있자니 오늘자 주요언론에서 보도한 한국경제연구원의 보고서 소식이 떠올랐다. “급격히 떨어지는 잠재성장률, 이민확대가 해법”이라는 이 보고서는 한국의 현재와 같은 인구변화가 지속될 경우 잠재성장률이 급격하게 낮아질 것이라 우려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누적 기준으로 2060년까지 1천7백만 명이 넘는 대규모의 이민 개방을 제시했다. 이 대안은 주요하게 노동가능연령층의 양적 축소 우려에 대한 대안이지만 우려스러운 것은 노동력을 마치 무역품처럼 외부조달을 통해 편하게 조달하려는 발상이다.

이 발상은 경제성장이 노동력의 평등 확대를 통한 노동력의 질적 성장에서 찾으려는 OECD의 보고서와는 다른 전제에서 시작하여 결과적으로 다른 대안을 내놓은 발상으로 여겨진다. 즉, 한국경제연구원의 보고서는 노동력 부족은 외국에서 국내에 이주하고픈 산업예비군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이에 대한 사회적 영향에 대한 고려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발상이다. 이 대안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보고서가 제시한 정책은 “단순 노동 인력의 국내 정주화를 위한 정책 마련”이나 “종합적·체계적인 정책 추진을 위한 콘트롤타워” 등이다.

노동력을 자원으로 여겨 “인적자원”이라 이름붙이고 이 자원의 양적조절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동하는 발상은 이미 오늘날의 조직사회에서 당연시여기며 실천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은 통상 인력의 구조조정을 의미한다. 단순 노동력의 부족은 이주노동자로 채운다. 그 과정에서 사회의 임금 평균은 낮아져 기업수익은 커진다. 그 와중에 OECD 보고서는 불평등을 완화시켜 경제성장을 추인하자는 입장이고, 한국경제연구원의 보고서는 대규모 이민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인하자는 입장이다. 당신은 둘 중에 어떤 대안을 지지하겠는가?

‘1984’가 말하는 전쟁의 본질

전쟁 행위의 본질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대중을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게 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그들을 지혜롭게 하는 데 사용되는 물품들을 박살내거나 하늘로 날려버리거나 바다 속 깊이 빠뜨리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가 실제로 파괴되지 않는다고 해도 무기 공장은 소비 물자 생산에 사용될 노동력을 소모시키는 역할을 한다.[1984, 조지 오웰 씀, 정회성 옮김, 민음사, 2005년, p268]

조지 오웰의 작품 ‘1984’에서의 집권세력인 오세아니아 정부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은 에마뉘엘 골드스타인1이 자신의 저서에서 서술한 전쟁의 본질이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전쟁이 내포한 본질은 오히려 후자라는 사고의 역발상이 흥미롭다.

전쟁은 고대로부터 다른 이의 경제적 자산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고, 오늘날에는 일국의 군수산업이 여타 국가의 전쟁을 통해 융성하고 해당 노동자나 지역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 전체적인 범위로 보면 골드스타인의 말이 옳을 것이다. 궁극에는 무의미하게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처음에 서로의 아이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끔찍한 살육을 자행하고 있지만 본질은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진정 그들을 위해서라면 복수를 위해 백린탄을 터트려 양민을 학살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 특히 이스라엘은 – 광기어린 공포로 노동력을 소모하고 있을 뿐이다.

예전에 ‘군사 케인즈 주의’의 허상에 대해서도 쓴 적 있지만 군사행동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정신적으로 성숙치 못한 행동일 뿐이다. 집권세력의 권력 온존을 위해 끊임없이 조장되는 전쟁 위기론에 국민은 애국주의에 고취되어 현실의 고통을 잊거나 정당화한다. 그런 의식에 성숙함은 없다.

가리타니 고진은 ‘전쟁의 영구 포기’를 선언한 일본 헌법 9조의 평화주의 조항을 통해 일본이 진정한 어른이 됐다고 주장하였다. 점령군에 의해 강제된 것이고 모순되게도 자위대라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순은 아베라는 미숙아가 헌법을 부정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노동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 전 세계가 전쟁을 영구적으로 포기하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할인판매” 빵집

런던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빵집이 있다. 빵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정가판매” 빵집과, 그 가치보다 싸게 파는 “할인판매” 빵집이 그것이다.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빵집 총수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빵제조업자의 고충”에 관한 정부위원 트리멘히어(H. S. Tremenhere)의 [報告書], 런던, 1862년). 이 할인판매 빵집들은 거의 예외없이 명반이나 비누나 粗製탄산가리나 석회나, 더비셔州에서 나는 石粉이나 기타 유사한 成分을 섞어 놓음으로써 不純빵을 판매하고 있다(앞에서 인용한보고서 및 “不純빵의 製造에 관한 1855년의 委員會”의 報告 및 하설[Hassall]의 [적발된 불순품], 제2판, 런던1861년을 보라). 존 고든(John Gordon)은 1855년의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이와 같은 불순빵 때문에 매일 매일 2파운드의 빵으로 살아가는 빈민들은 이제 자기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중략] 트리멘히어는 (앞의 보고서에서) 그들은 [중략] 勞動週間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한 주일 동안 그들의 가족이 소비한 빵값을 주말에 가서야 비로소 지불할 수 있다.”[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론I[上], 비봉출판사, 1994년, p220]

이 글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노동력은 매매계약에서 확정된 기간만큼 기능을 수행한 뒤에야 비로소 지불을 받는”다는, 일종의 ‘노동력 선대(先貸), 혹은 임금 후불(後拂)’ 제도를 설명하기 위한 보충설명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대가를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받기 때문에 위와 같은 곤란을 겪는 한편, 자본가가 파산하는 경우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편 이 글을 읽고 본래 의도와 달리 드는 잡념은 이러한 것이다. 즉, 런던에 “정가판매” 빵집이 전체빵집 수의 1/4이고 “할인판매” 빵집이 3/4이면 정상(正常)적인 빵집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우리가 통상 평균이라 부르는 것이나 보통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특정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정상적인 빵집은 “할인판매” 빵집이 아닐까?

문제는 이들 빵집이 빵값을 할인하기 위해 취한 조치다. 이들은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집어넣어 단가를 낮춤으로써 노동자의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서는 정상적(!)인 영양성분이 가미된 음식을 먹어야 함에도 정상적인 빵집에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빵을 제조하여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섭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상적인 빵집은 정상적인 영양분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저렇게 장기적으로 비정상적인 영양섭취에 견디지 못하는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탈락할 경우 다른 새로운 노동력이 이 빈틈을 채워주는 일종의 노동예비군이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노동현장에서 탈락하기 전까지는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 자신의 근력을 한계상황까지 몰아붙였을 것이다. 우리의 노동시장 역시 개발시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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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bakeries bridgeton 1936” by robert kelly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city bakeries bridgeton 1936.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실로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의 수단이 되는 생활수단, 그 중에서도 특히 음식과 관련한 소요비용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항이다. 노동대중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너무 많은 식비가 소모된다면 곧바로 임금상승 압박에 시달릴 것이고 이는 총자본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의 개발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햄버거, 라면 같은 패스트푸드다. 원래는 긴 조리시간과 많은 제조비용이 소요되었을 햄버거와 같은 음식들은 표준화, 합성식품 첨가, 대량생산 등의 처방이 가미되면서 단가를 낮출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전보다 더 싼 비용으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은 싼 임금에도 큰 불만 없이 노동현장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다. 문제는 다시 돌아가서 그것이 장기적으로 정상적인 영양분을 제공하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 세상에서 돌가루(石粉)가 들어간 빵을 판매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당장 소비자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사법당국이 처벌하고 등등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그런 무지몽매한 짓을 용서하지 않는 현명한 소비자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이치로 패스트푸드, GMO식품, 광우병 의심 소고기에 대해 현명한 소비를 하는 이의 숫자는 돌가루 빵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알아도 값이 싸니 사먹을 수밖에 없다. 가만. 19세기 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1862년 런던에서는 – 사실은 그곳이 정상적인 빵집인 – 1/4의 정가판매 빵집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21세기의 서울에는 몇 분의 1의 정상적인 식당이 있을까? 항생제 먹이지 않은 닭으로 요리된 삼계탕, 합성식품이 아닌 반찬, GMO가 아닌 야채로 만든 반찬, 중국산이 아닌 직접 담근 김치를 파는 식당이 몇 개나 될까? 돌가루는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고 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가 “할인”식당으로 뒤덮여진 후 그때는 돌가루를 먹지 않을 선택권마저 없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권하는 글 – 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How to release the next boom

FT.com에 올라온 기사다. 미래 경제의 인구구조의 중요성에 대한 시사점이 있을까 해서 해석했는데 그다지 영양가 있는 글은 아닌 것 같다. 여하튼 경제에 있어 인구구조의 변화는 노동력 제공과 연금 수혜층의 변화와 긴밀히 관련되기에 자원이나 기술변화 만큼이나 중요한 변수인 것은 사실이다. 글쓴이가 지적했다시피 이제 여러 국가에서 전통적인 노동관행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노동관행을 수립하고 집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차이점은 민주적인 국가의 경우 그것을 사회적 합의와 적절한 반대급부를 통해 실행에 옮기는 반면, 비민주적인 국가는 그것을 폭력적인 형태로 관철시켜낸다는 점이다.

어려운 시절에는 언제나 미래 경제에 대해 비관적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기간 동안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과 1997~2000년의 아시아/신흥시장 위기는 그다지 실망스럽지 않았다. 오늘날 금융과 경제의 안정에 대한 신호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향후 몇 년간의 경제성장이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장기적인 침체에 대한 현재의 일치된 의견은 또다시 틀린 것일 수도 있을까?

경제성장은 시장의 연속적인 발견과 확장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예를 들어 증가하는 노동력, 더 낮은 무역장벽, 자본이동, 그리고 자본투자와 기술변화 사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솟아난다. 1920년대의 예상치 못한 붐 시기에는 플로리다로부터 시작된 미국 전역의 투기적인 부동산 붐과 찰스 폰지의 불손하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생산량, 제조업, 생산성, 대량생산의 확산, 그리고 내구재의 물결이 있었다. 1945년 이후 재건설, 무역장벽의 축소, 고도로 탄력적인 노동력 공급, 강화된 교육 지식, 빠른 기술진보에 근거한 다소간의 연속적인 확장에도 불구하고 경기침체에 대한 예측이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허다한 통상적인 이유로 경제에 대해 우울한 전망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꺼림칙한 이유는 이 위기가 우리에게 지난 25년 동안의 두 가지 주요한 성장 드라이브를 잃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생존 가능한 은행 시스템의 회복과 부채 부담의 해결, 가계의 것 그 다음에 정부의 것, 은 수년간의 경제상태에 달려있다.

반면 위기와 연금계획 들에 대한 그 영향이 통상 서구 경제 인구의 20~25%에 해당하며 이제 막 은퇴를 하려는 베이비붐 세대에 초점이 모이고 있다. 붐 세대 이후, 그리고 특히 베이비붐의 여성들은, 지난 25년간의 경제팽창의 척추였다. 우리는 거대하고 중요한 동력을 잃을 수도 있다. 근로연령 인구와 65세 이하의 예상되는 변화는 약화되는 경제성장과 개인 및 국가에 대한 점증하는 금융 스트레스로 귀결될 연령 구조의 눈에 띄는 이동의 영향 아래 있다.

더욱 제한된 신용 환경과 빠른 노령화의 경제적 암시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경제 하락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가정은 조만간 예전의 상태로 회귀할 것이라고 믿는 것만큼이나 근시안적이다. 새로운 동력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조정되고 촉진되어야 한다.

시장의 크기는 아마도 신흥시장들에서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확장할 것이다. 중국경제가 10~15년 사이에 미국을 압도할 것이라는 몇몇 확신들은 엉뚱한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나 중국과 다른 대규모 신흥시장의 빠른 추격은 거의 의심할 나위가 없다. 세계무역에서의 그들의 지분은 확장할 것이고 최빈국들은 농업무역의 장벽이 낮아지게 된다면 그로부터 혜택을 입을 것이다. 그러므로 강하고 존경받는 조직들이 발달된, 그리고 부상하고 있는 경제권의 수요와 이해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노동력 공급의 압박은 드러나지 않는 부분, 즉 55세 이상과 여성들이라는 두 그룹의 노동력의 참여를 증진시키는 전략을 통해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더 긴 노동기간, 노동조직의 변경, 보다 확대된 육아기능 제공, 그리고 업무에서의 가족친화적인 정책이 관련될 가능성이 크다. 몇몇 대기업들은 이미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노동 공급의 질(質)과 생산성은 대학을 포함한 교육 시스템의 강화와 근로기간 동안의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확장에 따라 급격히 개선시킬 수 있다.

기술변화는 아마도 정보기술이 지난 20년의 기간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미래의 경제성장의 경계를 다시 정의할 것이다. 새로운 IT 어플리케이션들이 생산, 디자인, 그리고 정보의 보급을 증대시킬 것이다. 물질의 발전은 전자, 교통, 에너지 시스템과 의료를 개선시킬 것이다. 원천공학이 의료, 식품, 생산, 플라스틱, 화학, 연료 등에서 새로운 생산품과 과정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개별 원자와 분자에서 보다 싸고 정확한 생산품을 내놓는 나노기술이 잠재적으로 자동화와 로보틱스를 혁명화할 것이다. 그리고 나노, IT, 그리고 유전자 과학의 혼합이 어떠한 혁신도 그러했던 것처럼 두드러질 것이다.

투자자는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데 자신들의 판단력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성장 동력들은 우리가 그것을 억압하려 행동하지 않을 경우에만 출현할 것이다. 신흥국가와 선진국가의 이해관계가 모든 이들의 적절한 타협을 통해 수용되는 더 나은 세계화는 효율적인 국가기관과 국제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인구학적 변화는 노동시장과 교육정책을 통해 상쇄될 수 있다. 새로운 생산과 노동과정들은 인프라스트럭처, 보다 포괄적인 노동시장, 훈련과 교육의 합법적인 실행 및 개선을 이끄는 가능한 변화들로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어려운 시기라도 어느 누구도 경제적 우울증이 미리 규정된 것이라 상상해서는 안된다. “정부 대 시장” 논쟁에서 교묘한 점은 이제 후자가 피고석에 앉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제 좋거나 싫거나 간에 큰 정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약 정부가 최종 붐의 조각을 고르는 것을 포함하여 다음 붐을 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엄격한 검사가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UBS 투자은행의 경제조언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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