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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드는 현대의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데이빗 리카도와 아담 스미드는 무역협정 안에 들어 있는 투자자-국가분쟁해결제도의 포함에 대해 어떤 말을 할 것인가? 그들은 생물학 약품의 판매에 5년 혹은 8년의 독점권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우리의 무역 파트너들에게 기본적인 노동 및 환경 조건을 준수하도록 확인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환율조작은 어떠한가? 그리고 대량의 자본이동에 따른 인터넷이나 해외에서의 일자리에 대한 서비스의 거래는 어떠한가? 비교우위 이론은 새로운 이슈를 제기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아직 이것들은 현재 TPP 협정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들이다.[Sander M. Levin – Testimony before the U.S. 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

미국 국제 무역 위원회의 ‘TPP에 대한 미국경제와 특정 산업분야에 관한 영향’ 청문회에서의 샌더 레빈 미 하원 민주당 의원의 발언이다. 레빈 의원은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기본적으로 미국에서의 노조 등 노동자 측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미FTA 체결 시에는 한국이 자동차 시장을 충분히 개방하지 않았다는 등의 주장을 하면서 반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입장에서 상기 발언을 읽어보면 미국의 진보진영이 가지고 있는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일면을 관찰할 수 있다.

위에 나열한 여러 현대적 자유무역협정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조항들에 대해 과연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담 스미드는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아담 스미드가 주창한 자유무역은 기본적으로 농산물 수입 통제 등을 통해 이득을 보려던 경쟁력 떨어지는 자산가의 기득권 타파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런데 투자자-국가분쟁해결제도나 장기 독점판매권이 아담 스미드의 그런 이상과 부합하는 것일까? 오히려 기득권의 보호가 국제적으로 확산된 측면이 있다.

샌더 의원의 이어지는 증언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무역”에 대한 서구의 – 특히 미국의 – 믿음은 1980년대 미국의 對일본 무역적자에 대한 경험으로 강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하나의 신조가 된 더 적은 정부개입과 “자유”무역은 이후 NAFTA나 각종 FTA로 정당화되고 있다. 이런 일련의 무역협정에서 당사국들은 어떤 교훈을 얻은 것일까? 여전히 투자자-국가분쟁해결제도나 독점적 판매권을 “자유”무역이라 여기는 것일까? 이 글 등을 읽어보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기도 하다.

이번이 생물학 생산품에 대한 시장 독점권에 대한 조항이 등장한 첫 사례다. 그리고 이는 많은 TPP 조약국들에 대한 새로운 의무조항이다. 이 조항으로 인해 다음 개발단계에 있는 제네릭 약품이나 바이오시밀러(biosimilar)의 경쟁이 지연될 것이고, 이는 적정한 약품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 개발도상국 혹은 심지어 호주에서의 많은 시민들이 이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 의미한다. TPP 의무조항은 장래에 적정한 약품에 대한 접근을 향상시키기 위해 취해질 시스템의 개혁을 어렵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현재의 지적재산권을 옥죌 것이다.[TPP Intellectual Property Chapter is “A Disaster for Global Health”]

노동가치론에 대한 단상

이글은 아래 ‘부’와 ‘가치’ 간의 실질적인 구별에 관한 메모 에 리에라님과 beagle2님이 달아주신 댓글에 대한 나의 보충설명 내지는 단상이다.

노동가치론은 노동을 ‘가치(value)’의 참된 척도로 보는 것이다. 아담 스미드가 – 또한 그를 비롯한 고전파 경제학자들 – 이러한 이론을 정식화한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부는 화폐에 존재한다’라고 믿는 중상주의적 견해에 대항무기로 사용하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다. 한 나라, 나아가 이 세상의 부는 어느 한 나라가 무역차액을 통해 당시의 화폐적 표현인 금을 쟁취함으로써 쌓이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노동자의 근면한 노동, 그리고 자유무역을 통한 상품의 활발한 교환을 통해 쌓여간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부’와 ‘가치’간의 구별이 필요한데 ‘부’는 본래 교환가치가 없던 자연자원과 그에 대한 노동이 결합된 것이고, ‘가치’는 그 중에서도 교환가치의 측정단위가 되는 노동만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식가치론이랄지, 인적자본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한동안 예를 들면 미래학자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식 또는 정보역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 꽤 설득력을 가지고 전파되었다. 나는 이 주장이 두 가지 천박한 편견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가치(value)’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다. 사랑도 가치 있고 우정도 가치 있다. 정보 역시 가치 있다. 다만 이때 가치는 가치론에서의 가치와는 다른 의미로 쓰일 뿐이다. 둘째, ‘노동(labour)’에 대한 편협한 사고다. 지식과 정보에 대한 탐구 역시 넓게 보아 노동의 범주에 들어간다. 탄광에서 석탄 캐는 것 – 물론 이는 매우 유용한 노동이나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막장 노동이다 – 만 ‘노동’이 아니다. 다만 노동가치론은 노동의 정도를 측정할 때에 유일하게 상호비교가 가능한 ‘노동시간’을 측정단위로 삼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정보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지식이나 정보의 측정단위를 제시하지 못할 바에야 노동가치론에 지식가치론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노동의 이분법적 사고를 좀더 들여다보자. 실제로 주류경제학에서 – 또는 사회일반에서의 –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그리고 이 중에서 정신노동의 우월적 지위를 당연시하는 입장은 다시 창조성, 상상력, 기업가 정신 등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노동일반을 이끌고, 심지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create)’한다는 주장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런 과정에서 이른바 ‘인적자본(human capital)’의 중요성도 강조될 것이다. 리스크를 부담하는 그러한 모든 창조적인 것들의 존재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노동가치론이 의미 없다는 논지를 이끄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만약 노동가치론을 주장하는 이중 어떤 이가 ‘공장에서 기계라인에서 조립만 하고 앉아 있는 노동자들’이 ‘멋진 신차 디자인을 통해 시장을 개척하는 자동차 디자이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것은 노동가치론에 대한 조악한 이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억지스러운 분리다. 우리 일상에서의 실제의 노동은 이 두 가지를 분리하기 어려우며, 실제로 많은 창조적 제안은 사실 기업의 우두머리에서가 아니라 기획단위의 노동자, 심지어 생산라인에서의 노동자들의 직무발명이 대부분이다. 인적자본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의 대다수는 현장에서 상품을 만들고 부수며 시행착오를 거친 노동자, 즉 인적자본들이 일궈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노동가치론’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고전적인 – 단순히 고전경제학만이 아니라 – 경제학의 철지난 이론이지만 옛것을 알아둔다는 의미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될까? 앞서 아담 스미드가 노동가치론을 꺼내들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해보면 현재적 의미도 어느 정도 있다고 여겨진다. 즉 현대사회 역시 ‘부는 화폐로부터 창출된다’라는 중상주의적 견해에서 크게 진전된 바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가치론은 유의미하다고 본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금융부문의 비대화로 인해 지속적으로 반복된 신용창출은 이제 단순히 산업의 혈맥 역할 뿐 아니라 스스로가 산업이 되고자 했다.(미국에서 한창 때 전체 산업이윤에서 금융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40%를 넘었었다) 하지만 노동가치론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그것은 일장춘몽일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해 금융 중상주의다. 금융부문이 가치를 ‘창출(create)’하는 것이냐 ‘전유(appropriate)’하는 것이냐의 논의를 제켜두고라도, 이 세계는 1,2차 산업의 존재 없이는 하루도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경제다. 우리가 MMF를 먹고, CDS를 타고, ABS에서 잘 수 없는 한에서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부문이 비대해진 미국은 중국으로부터의 값싼 공산품을 가져다가 생활한 것이다.

‘노동가치론이 다른 이론보다 우월한 이론이다’라고 입 아프게 떠들 필요 없이, 또 그것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무결점의 이론이라고 여길 것 없이, 그것이 가지는 함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실천하면 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노동가치론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잣대로써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케인즈가 마르크스를 개차반 취급하고 자본론이 코란과 동일한 선상의 책이라고 폄하하였지만 그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마르크스 내지는 노동가치론 등 경제학 이론을 옹호(?)해보고자 한다. 요지는 결국 우리가 그것에 기대는 한에는 사실 모든 객관적이고 엄정한 글이나 말 역시도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고,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 책들을 코란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의 ‘밀교적(密敎的)’ 지침서로 무의식중에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게임의 룰 안에서 싸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思想)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어떤 지적(知的)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實務家)들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이다. 허공(虛空)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권자(權座)에 앉아 있는 미치광이들도 그들의 미친 생각을 수년 전의 어떤 학구적(學究的)인 잡문(雜文)으로부터 빼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득권익(旣得權益)의 위력은, 사상의 점진적인 침투에 비하면,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중략]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익(旣得權益)은 아니다.[John Maynard Keynes,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조순譯, 비봉출판사(2007), pp 461~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