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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value)’와 ‘부(wealth)’

이번 금융위기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인 Nick Beams라는 분이 2008년 말 호주에서 가졌던 강연의 일부분을 발췌한 내용이다. 현재 약 5편까지 진행되고 있고 기회가 되면 주요부분을 발췌하도록 하겠다.[원문보기]

끊임없이 증가하는 생산과정의 범위는 자본주의 경제의 금융구조의 변화를 추동한다. 이는 이제 자본이 축적과정을 이어나가기 위해 개별 자본가들의 능력 이상으로 자라나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자원을 빨아들여야 한다. 두 가지의 거대한 금융적 발전이 이를 가능케 했다. 신용과 은행시스템의 발전, 그리고 합자회사 혹은 주식회사의 출현.

사회 모든 분야의 돈이 은행으로 모이게끔 만드는 이른바 신용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기업에게 개인이나 심지어 개인들이 모인 집단의 능력을 월등히 초과하는 규모의 자원을 제공한다. 자본가는, 마르크스가 설명하길, 이제 다른 사람들의 돈의 단순한 관리자가 될 뿐이다. 이 돈이 없으면 루퍼트 머독도 평범한 시민에 불과할 뿐이다.

자본을 공급하는 대가로 은행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자지급의 형태로 수령한다. 은행과의 대출계약이나 기업의 회사채 발행은 채권자에게 정기적인 이자지급을 약속한다. 즉 그 소지자는 소득을 보장받는다.

주식의 발행을 통해 설립되는 주식회사의 경우에는 화폐자본을 공급한 대가로 재산권을 보장받는다. 그들이 회사의 일부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매체인의 주주라고 해서 당신이 가게에 들어가 그 회사의 부분적인 소유주라는 이유로 물건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상품은 기업화된 법인의 소유물이다. 당신이 보장받는 것은 배당의 형태로 지급되는 이익의 일부분이다.

신용과 주식소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시장을 갖게 되었다. 채권과 주식과 같은 소득 형태를 수여하여 그것들이 거래되는 금융시장. 그리고 이들 금융자산의 가격은 오르고 떨어진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고팔면서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신용 혹은 주식의 형태로 제공되는 화폐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하는데 공급된다. 그것들은 생산자본이 되어 노동계급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데 관여한다. 이는 또한 화폐만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식과 채권은 마르크스가 “상상의(imaginary)” 자본, 혹은 가상(fictitious)자본이라 부른 것들이다. 그것들은 최종적으로는 생산자본이 착취한 잉여가치의 지분을 소득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의 세계에서, 즉 가상자본의 세계에서는 금융자산을 거래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는 황홀한 세계다. 환상의 세계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화폐의 조작을 통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관리자의 영리한 조작과 거래를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노동이 모든 이윤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짧은 문단을 통해 강연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조력자로서의 금융과 자본시장의 성격이 잘 묘사하고 있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다소 혼란의 여지도 있을 것 같다. 특히 강연자가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창출되고 이자나 배당은 그것의 일부일 뿐이라고 하였으면서 다시 가상자본을 통해 스스로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모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치(value)’와 ‘부(wealth)’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가치는 그것이 화폐로 표현되기 전의 모습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것의 측정단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명확치 않은 것 같으나 – 또는 내가 무지해서 모를 수도 –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노동시간의 형태로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부는 마르크스주의에서 그것의 명확한 의미를 부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화폐의 형태로 표현이 가능하다.

따라서 금융시장에서 거래를 통해 축적되는 – 정확하게는 전유되는 – 막대한 부는 사실은 한 사회, 혹은 전체사회의 가치(value)를 뛰어넘는 화폐증발로 인한, 즉 일종의 인플레이션에 의해 촉발된 거품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예컨대 유동성의 비정상적인 공급을 통해 올라간 부동산 가격은 가치의 증가가 아닌 화폐가치의 절하라 할 수 있다.

음모론, 프리드먼, 그리고 자유

케인즈의 일반이론에서의 주요주제 하나는 공황조짐이 있는 상황에서의 통화정책이었다. 그러나 밀턴 프리드먼과 안나 슈워츠는 그들의 “미국에서의 화폐의 역사” 에서 Fed는 대공황을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중에 이 주장은 프리드먼 그 자신의 것들을 포함한 인기 있는 저작들에서 Fed 가 공황을 초래했다는 주장으로 변신했다.
A central theme of Keynes’s General Theory was the impotence of monetary policy in depression-type conditions. But Milton Friedman and Anna Schwartz, in their magisterial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claimed that the Fed could have prevented the Great Depression ? a claim that in later, popular writings, including those of Friedman himself, was transmuted into the claim that the Fed caused the Depression.[Was the Great Depression a monetary phenomenon?, Paul Krugman, 2008.11.28]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주장을 세상의 모든 일을 유태자본의 음모로 환원시키는 음모론자들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당시 연준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이자율을 낮추어 경제활동에 활력을 불어넣기보다는 무자비하게 통화량을 수축시켰다. 그리하여 1929년 457억 달러에 달하던 통화량이 4년 후인 1933년에는 3백억 달러에 불과해서 극심한 디플레가 조장되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1929년 대공황의 주범이 연준은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겠지만 유수의 경제학자들간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경제학자인 스탠퍼드 대학의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교수도 1996년 1월 방송국 대담에서 그러한 사실을 인정했다.[세계 경제를 조종하는 그림자 정부(경제편), 이리유카바 최, 2002년, 해냄출판사, p154]

한편 이 책에서는 말미에 지급준비금 보유율을 1백 퍼센트까지 증가시켜야 한다거나 월별 인구 증가 예상에 준해 월별 화폐 공급량을 산출한다는 등의 COMER(통화경제개혁위원회 : committee on monetary economic reform)라는 단체의 주장을 싣고 있는데 그다지 맘에 와 닿는 주장은 없다. 잘은 몰라도 통화주의 이론을 조악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주1). 한편 이들이 이론적 지주로 여기는 프리드먼은 어떠한 세계를 꿈꾸고 있을까? 그의 글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터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래 글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페비언 사회주의와 뉴딜 자유주의(주2)로 향한 여론의 흐름은 이제 약화되었지만, 앞으로 나타날 여론의 물결이 아담 스미드나 토마스 제퍼슨의 정신에 입각한 자유의 확대와 정부의 축소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마르크스나 모택동의 정신에 입각한 일당독재정부로 향할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선택의 자유, 밀턴 프리드먼, 박우희譯, 1980년, 주식회사 중앙일보, p190]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프리드먼은 “마르크스나 모택동의 정신에 입각한 일당독재정부”는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그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담 스미드나 토마스 제퍼슨의 정신에 입각한 자유의 확대와 정부의 축소”일 것이다. 아담 스미스라면 이미 국부론을 통해 경제학의 기반을 다진 이고 그 다음으로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내 관심을 끄는 이는 토마스 제퍼슨이다. 왜 프리드먼은 토마스 제퍼슨을 끄집어냈을까? 그것은 그가 바로 알렉산더 해밀턴이라는 인물과 대척점에 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더 해밀턴은 누구인가? 그는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이다. 그는 미국의 건국 이후 영국의 영란은행을 흉내 낸 중앙은행을 설립하였고, 미국의 경쟁력 약한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 자유무역을 반대하였고, 당시 13개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주정부를 아우르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기에 많은 이들의 많은 반발을 샀다. 그를 반대한 부류는 월스트리트와 금융을 금권주의의 탐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남부의 부유한 농산물의 자유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는 이들, 그리고 신생미국이 영국과 같은 강력한 정부보다는 보다 자유로운 자치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었다. 그 중심에는 토마스 제퍼슨이 있었다.

자본주의 캠프 선봉에는 해밀턴이 있었고, 민주주의 캠프 선봉에는 제퍼슨이 있었다.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주의자 Federalist 들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했으며, 특히 금융과 상업활동에서 정부의 개입을 강조했다. 지역적으로는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방을 기반으로 했다. 반면 제퍼슨이 이끄는 공화주의자 Republican(놀랍게도, 오늘날 민주당의 원조인 이들을 당시에는 ‘공화당’이라고 불렀다)들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을 지지했고 이들의 지역기반은 남부였다. 농민들과 대지주들이 공화당의 지지 세력이었다. [머니맨, 헨리 브랜즈, 차현진 해설.옮김, 청림출판, 2008년, p92]

자 이제 편이 갈라졌다. 프리드먼이 아담 스미스와 함께 제퍼슨을 언급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절대적인 가치인 자유를 – 특히 경제활동의 자유를 – 마르크스나 모택동이나, 그리고 결정적으로 해밀턴과 같은 강력한 중앙정부 주창자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봉건제나 절대군주제에서 정당성을 획득한 주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절대군주 하에서의 경제에 대한 독재로 인한 폐해는 실제로도 심하였다고 한다.

특히 프리드먼의 주특기(?)인 통화문제에 있어 군주의 횡포가 심했는데 그것은 바로 무절제한 화폐 초과공급을 말하는 것이다. 즉 화폐주조권을 가지고 있던 절대군주는 금함량을 속이는 방법 등으로 화폐를 유통시켜 자신의 사금고를 채우곤 했다. 발권기관의 수익을 뜻하는 시뇨리지의 어원도 불어의 ‘군주 seigneur’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이러니 나라의 경제는 피폐해져 인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게 찌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절대군주제는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거기에서부터 자유주의는 싹트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프리드먼이 대표하는 시장자유주의는 마르크스, 모택동, 해밀턴이 지향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이토록 피를 흘려가며 지켜온 자유를 빼앗아가는 행위라고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와 모택동은 좌익을 대표하고 오히려 해밀턴은 금권주의를 대표하는 바, 상반된 이들 같지만 둘 다 시장의 자유를 유린한다는 점에서는 공범인 셈이다. 더 나아가 ‘그림자 정부’의 저자 이리유카바 최는 현대의 자본주의는 사실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시장의 지배자인 자본가가 경제사에 등장한 이래 권력층은 – 심지어 절대군주조차도 – 자본가의 자유는 유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들은 공생관계를 변함없이 맺어왔다. 프리드먼이 싫어하는 해밀턴은 유치산업(幼稚産業) 보호론을 통해 미국에서의 자본가의 육성을 도모했었다. 독재자 박정희는 재벌의 독점권을 옹호하였다. 오늘날 미국정치의 경우에는 부시 행정부처럼 정부 자체가 자본가로 메워지기도 했었다. 그들에게 있어 주요한 패퇴는 기껏해야 아직 대지주가 힘을 발휘하던 시절의 영국에서 ‘곡물법(corn law)’을 폐지할 힘이 없었던 시기나, 대공황으로 인한 금융억압으로 인해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던 정도였다.

해군이 면직산업 발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은 1753-63년의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 함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영국이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영국이 패배했다면 인도나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내놓도록 요구 당했을 것이므로 면직산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넬슨 제독이 해상권을 장악한 덕분에 랭카셔의 수출은 1793-1815년 사이에도 급속하게 증가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면직산업의 미래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식민제국과 해군력이 원료 공급지와 시장을 하나로 묶는 것을 도와줌으로써만 영국 면직산업은 유지될 수 있었다.[면직산업과 의료,시장, 통상로 보호의 문제, 강철구, 2008.8.11]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의 글이다. 이 당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정치체제는 말할 것도 없이 군주제였다. 그들은 비록 독재자이긴 하였지만 자신들의 권한을 자국 산업의 성장을 위해 사용했다. 그러한 면에서 어쩌면 시장참여자 중에서 자본가에는 애초에 강력한 국가로부터 찾아올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 월街의 사태를 보더라도 그들은 든든한 조력자가 아닌가 말이다.

한편 앞서 살펴본 화폐주조권이 독점되어 있기에, 연준이 – 현대판 군주(?) – 그것을 잘 못 사용하였기에 그들 자체가 대공황의 주범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앞서 언급한 “미국에서의 화폐의 역사”에서 연준이 최종대부자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하여 은행 공황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책적 실수도 있었지만 금본위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측면도 있다. 더 나아가 이번 금융위기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원인이 결합되어 폭발한 당시의 대공황을 단순히 통화의 수축만을 원인으로, 그것도 음모론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의 실패를 바탕으로 최종대부자의 기능을 없애버리자는 – 또는 통화량 조절이외에는 다른 짓은 하지 말라는 – 발상은 허리띠를 안 매고 다니면 살이 빠질 것이라는 착각에 불과할 뿐이다.

이쯤에서 프리드먼이 보호하고자 하는 자유가 도대체 어떠한 자유인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이것이 아닐까?


“나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한 것은 고맙다. 그러나 내가 보너스를 받을 자유는 빼앗지 말라.”

최상위 임원들의 임금과 보너스를 강력히 제한하겠다는 발표 하루 뒤 AIG는 이들 임원 중 몇몇은 내년에 “유지 보너스”로 수백만 달러를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One day after announcing strict limits on salaries and bonuses for its top tier of executives, AIG revealed that some of those executives will receive millions in “retention bonuses” next year.[AIG to pay retention bonuses to executives, Financial Times, 2008.11.26]

(주1) 원래 통화주의 자체가 조악한 것일지도…

(주2) 여기에서의 자유주의는 우리가 오늘 날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사상적 뿌리와는 다르다. 이는 미국에서는 자유주의, 즉 liberalism을 1차 세계대전 당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진보당의 작가들이 진보주의 progressivism의 대체물로써 선점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블로그에서

어느 블로그에서

신용위기로 말미암아 마르크스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상한 것은 이 위기는 마르크스(이론)에 별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 위기는 전후 대부분의 어떠한 경기후퇴보다도 덜 마르크수주의적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위기는 실물경제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경기후퇴는 수요부족과 결합된 실물 자본재의 과잉축적이 이윤율을 떨어뜨리고 그 다음에 자본을 파편화되어, 일자리가 줄어들고 슬럼프로 이어지는 것이다.
The credit crunch is making Marx fashionable again. Which I find odd. Strictly speaking, this crisis has made Marx less relevant, not more.
Our current crisis is a less Marxist one than almost any post-war recession.
To Marx, crises originated in the real economy. Recessions occur when an over-accumulation of real capital equipment combine with a lack of demand to cause a falling rate of profit and then capital-scrapping, job cuts and slump.

라는 주장에 대해 정말 수준 높은 댓글들이 많이 달렸다. 댓글 수준으로는 최고의 블로그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그 중 촌철살인과도 같은 댓글 하나만 소개

이 위기를 촉발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낮은 이윤과 은행들 간의 경쟁에서 비롯된 서버프라임 대출이 아니었던가?
Is not one of the main triggers of the crisis, subprime lending, due to low profits and competetion from the banks?

코미디언이었던 마르크스

만약 이런 국유화 조치들이 사회주의 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칼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루초 마르크스의 그것에 가깝다.
If these nationalizations smack of socialism, it is closer to the Marxism of Groucho than of Karl.

앞서의 글에서 인용한 기사의 다른 멘트다. 프래니와 AIG의 국유화 조치 등 美행정부의 일련의 행동들이 우왕좌왕 개념이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Floyd Norris라는 기자의 미국식 유머다. 사실 이 농담을 이해하려면 그루초 마르크스 Groucho Marx 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칼 마르크스 다음으로 좋아하는 마르크스 집안사람인데 미국의 코미디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코미디언이다. 기자는 바로 그래서 이번 조치들을 그루초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비꼰 것이다.  이번 기회에 그의 영화를 몇 편 소개한다.

***

Marx 하면 어떤 인물이 떠오르는지? 사회진보운동이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Karl Marx 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Marx (들)이 있다. 옛날 코미디 팬이라면 머릿속에 이들을 떠올렸을 법하다. 그들은 바로 30~40년대 헐리웃 슬랩스틱 코미디의 대표주자로 활약했던 Marx 형제들이다. Chico, Harpo, Groucho 등 세 명이 가장 널리 알려진 – 초기에 Gummo 와 Zeppo 라는 다른 두 형제가 같이 활동하였으나 곧 은퇴하였다 – 이들 형제는 서커스단에서의 오랜 무명생활 끝에 헐리웃에 진출하여 반사회적이고 무질서한 슬랩스틱을 선보이며 큰 인기를 얻었다.

Marx Brothers 1931.jpg
Marx Brothers 1931” by Ralph F. Stitt – This image is available from the United States Library of Congress‘s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 under the digital ID cph.3c2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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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들의 코미디에는 세 형제의 나름의 캐릭터와 특기가 일관되게 연출되는 일종의 시트콤 또는 시리즈 – 그러니 사실 개별 영화의 제목은 ‘Marx 형제 무엇을 하다’ 정도 되어야 맞을 – 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Chico 는 이탈리아 악센트가 강한 영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로 뛰어난 피아노 연주가 장기이며, Harpo 는 농아의 역할을 하지만 뛰어난 하프 솜씨와 재밌는 표정연기를 선보였다. 마지막으로 Groucho 는 – 이 분이 때로 장남으로 오해를 받는데 사실 Chico 가 둘째고 이 양반은 셋째라고 – 숱 검댕이 눈썹과 네모난 수염을 하고서는 아무데서나 시가를 벅벅 피워대면서 상대방을 조롱하는 반영웅적인 캐릭터로 형제 중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다.

우디 알렌은 이러한 Groucho Marx 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코미디언이라고 칭송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그의 작품 The Purple Rose of Cairo 에서 그들의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푸념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였고, Marx 형제의 작품 Horse Feathers 의 삽입곡에서 영감을 받아 Everyone Says I Love You 를 만들기도 하는 등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들은 분명 Charlie Chaplin 도 아니고 Buster Keaton 도 아니다. 비록 그들의 작품에서는 Charlie Chaplin 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페이소스도 없고 Buster Keaton 의 작품과 같은 곡예 같은 스턴트이나 빈틈없는 극구성도 결여되어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한 판 흐드러지게 놀고 즐기는 것, 바로 희극의 원초적 목적을 달성한다는 순수정신이 구현되면 그것으로 그들은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Let’s Have Fun, It’s Playtime!

  • Monkey Business(1931)

그들의 세 번째 작품이다. Zeppo 까지 네 형제가 미국으로 향하는 유람선의 밀항자로 출연하고 있다. 배 안에서 만난 갱스터의 납치극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루고 있다. 역시 형들의 뛰어난 활약에 비해 가장 나이어린 Zeppo 의 활약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 Horse Feathers(1932)

Groucho Marx 가 한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여 라이벌 학교와의 축구시합에서 이길 수 있도록 납치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다소 반사회적인 작품이다. 거기에다 이 학장은 자신의 아들(Zeppo)의 정부까지도 넘봐 마침내 나머지 형제들이 그 한 여인과 동시에 결혼한다는 황당하고 심지어 무정부주의적이기까지 한 결론으로 끝을 맺고 있다. 단어를 가지고 치는 말장난이 맛깔스러운데 먼훗날의 소위 개그의 원조가 바로 이런 스탠딩 개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A Night At The Opera(1935)

그들의 작품 중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인데 오페라 극단에서 벌어지는 치정과 성공의 스토리가 영국과 미국, 그리고 이 사이를 오가는 유람선을 배경으로 짜임새 있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확실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다 비발디의 오페라 등 여러 고전적인 노래의 향연, 예외 없이 등장하는 Marx 형제의 뛰어난 악기 연주 솜씨, Groucho 의 물오른 코미디 연기 등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들의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 이 작품에서는 Zeppo 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 The Big Store(1941)

백화점의 유산 상속자이자 인기가수인 Tommy Rogers(Tony Martin)가 그의 백화점 지분을 헐값에 넘기고 음악교육에 전념하려고 하자 백화점 경영진 중 하나가 그의 재산을 가로채려 하고 Marx 형제가 이 음모를 막는다는 모험극이다. 이 작품에서는 Groucho 의 노래와 군무 등 뮤지컬적인 요소가 대폭 강화되었다. 하지만 짧은 러닝타임 동안 이러한 볼거리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극적인 부분이 등한시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어정쩡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정말 맑스는 옳은 게 하나도 없을까?

요즘 이러저러한 주제로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누느라 자주 가는 블로그에서 어떤 분이 “맑스가 옳은 것도 있다고 외치는 정신못차린 공산당 잔당들이 있다”고 하시기에 – 물론 그 분은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하셨지만 – 나는 나대로 ‘정말 맑스가 옳은 것은 하나도 없나?’라는 의문이 들어 또 책꽂이에서 책 한권을 꺼내 일부를 발췌해보기로 했다. 옮긴 글은 Karl Marx 의 공산당선언.

이것은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를 전제적(專制的)으로 침해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전제적 침해는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운동이 경과하면서 스스로를 극복해 갈 것이다. 전제적 침해는 생산양식을 전면적으로 변혁시키는 피할 수 없는 방책이다. 나라마다 그 방책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아주 일반적으로 적용될 것이다.

1. 토지 소유의 폐지와 모든 지대를 국가 경비로 전용
2. 소득에 대한 고율의 누진세
3. 모든 상속권의 폐지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 몰수
5. 국가자본 및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
6. 운송수단을 국가 수중으로 집중
7.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 및 생산도구의 증대. 공동계획에 의거한 토지의 개간 및 개량
8. 모두에게 동등한 노동의 의무 부과. 농업을 위한 산업군대의 육성
9. 농업과 공업의 결합. 도농간의 격차 점진적 해소. 인구 분포의 전국적 균일화
10. 공립학교에서 모든 어린이에 대한 무상교육 실시. 오늘날과 같은 아동들의 공장노동 폐지. 교육과 생산활동의 결합 등등.

[레즈를 위하여 中 제2부 다시 번역한 공산당선언, Karl Marx, 장석준 번역, pp 312~313]

과연 이중에서 오늘날 몇 가지나 현실사회에서 실현되고 있을까 한번 짚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자기가 위에 나열된 주장 중 몇 가지나 동의하는지 세어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다섯 개가 넘으면 당신도 유사 빨갱이? ^^

미쳐가는 이라크에서의 민간군사기업

최근 재밌게 본 미드 중에 Dexter 라는 시리즈가 있다. 주인공은 마이애미 경찰서에 근무하는 형사(보다 정확하게는 형사(detective)가 아니라 감식반(forensics)이다.) Dexter Morgan 인데 특이하게도 형사인 동시에 연쇄살인자다. 어린 시절 범죄현장에 방치되었다가 그 현장을 발견한 형사 Harry 에게 입양된 그는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으나 몸속에 내재해있는 폭력성향을 잠재우지 못한다. 이런 그의 본능을 알아챈 Harry는 결국 그의 살인본능을 인정하지만 그 분출구를 또 다른 연쇄살인자들에게만 향하게 하는 일종의 ‘Harry의 원칙’을 Dexter에게 가르친다. 결국 Dexter는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이라는 희한한 캐릭터로 탄생한다.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의 현대판 해석으로 볼 수도 있고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나 공권력을 배경으로 한 사적(私的)살인이나 뭐가 다르냐는 냉소로 읽힐 수도 있는 이 시리즈는 뭐니 뭐니 해도 사실 형사가 바로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묘한 일탈감과 해방감을 관객들에게 안겨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여하튼 개인적으로는 알량한 지적허영의 소유자답게 소위 ‘Harry의 원칙’이 자본주의의 법률과 제도와의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는 그 비판자들, 특히 Karl Marx로부터 태생부터 살인자임을 들켜버렸다. Karl Marx는 자본주의의 살인무기는 바로 잉여노동의 착취임을 자본론에서 밝혀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재 내에서의 기업은 그가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이건 불특정 다수를 죽이는 연쇄살인범이건 간에 살인범은 살인범일 뿐이라는 원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본인이 신경 쓰건 말건) 그런데 자본주의 시스템이 이 살인범에게 부여한 원칙이 있다. ‘자본주의 판 Harry의 원칙’

즉 이 원칙은 ‘너희가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다만 (나에게 또는 불특정 다수에게) 물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자본주의가 잘 굴러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도가 있으니 그 한도는 지켜달라.’라는 자본주의의 법률과 제도를 말한다. 이러한 것들에는 예를 들면 독점금지, 아동노동금지, 8시간 노동, 노동3권 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여갔다.(물론 그것은 지역적 편차가 있으며 때로 역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나마 제1세계에선 사회구성원의 상호감시 속에서 나름대로 제법 꾸준히 지켜져 오고 있다.

그런데 Common Dreams 의 Contractors Gone Wild라는 글을 읽어보면 ‘자본주의 판 Harry의 원칙’이 적어도 이라크 전쟁에 뛰어든 민간군사기업에게만큼은 개 짖는 소리임을 알 수가 있다. 그간 민간군사기업의 과다청구, 전투병 기능에의 개입, 민간인 학살 등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여러 고발이 있어왔다. 그런데 최근 ‘의회 민주적 정책 위원회(the Senate’s Democratic Policy Committee)’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세 명의 내부고발자가 전하는 내용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고 있다.

KBR의 직원이었던 Frank Cassaday는 회사가 배달하여야 할 (사막 지방에서 특히 귀중품인) 얼음들이 다른 직원들에 의해 중간에서 가로채어져 다른 물품들과 교환되었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또한 KBR 직원들은 수시로 군용품을 훔쳐냈는데 이중에는 중화기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한다. 역시 KBR 직원이었던 Linda Warren에 따르면 궁전이나 각종 청사의 재건축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각종 문화재 및 귀중품을 훔쳐 eBay 에 팔곤 했다 한다.

한층 놀라운 증언은 DynCorp 의 하청업체에서 일했던 Barry Halley의 입에서 나왔다. 그에 따르면 이라크의 업체직원들은 일종의 ‘매춘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매춘부들은 쿠웨이트에서 바그다드로 장갑자동차로 수송되었다고 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렇게 매춘부 수송을 위해 장갑자동차가 이용되는 바람에 다른 미션에 있는 이들이 이 차를 사용하지 못해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위의 범죄들은 어쩌면 부도덕한 개인직원들의 범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문회에서의 세 내부고발자들이 그들의 상관에게 위와 같은 사실을 보고했을 때에 다른 곳으로 발령 나거나 심지어는 억류되기도 하고 종국에는 해고되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회사가 그 사실을 방조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그 범죄들을 조장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아무리 최신 운영기법인 민영화를 통해 전쟁수행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이라크 전쟁일지라도 그 주체들의 행태에는 유사 이전의 야만적인 살육전에 비해 업그레이드 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나는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가가 궁금할 따름이다. ‘Harry의 원칙’은 도대체 어디 간 것일까? 우리는 그 원인을 자본주의가 아닌 인간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할까? 우리는 과연 살인범의 살인본능 치유는 고사하고 그것을 통제할 수는 있는 것일까?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교수 채용을 호소합니다”

서구 지성사에서 가장 걸출한 지식인이자 실천가였던 카알 마르크스. 여전히 그의 주장이 유효함에도 이 땅의 최고학부라는 서울대학교에서 김수행 교수의 퇴임으로 말미암아 그 학문적 전통이 씨가 마를 위기라고 한다. 대학의 직업양성소화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일인가? 어쨌든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교수의 채용을 호소하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의 호소문을 전재한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교수 채용을 호소합니다!

지금은 겨울방학 중입니다. 그러나 ‘경제학 연구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신의 배움을 사회에 바람직하게 기여코자 고뇌하는 많은 대학원생들이 밤늦도록 연구실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저희들의 연구를 헌신적으로 지도해주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늘 소중한 가르침을 주시는 경제학부 교수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 스승 중 한 분으로서 마르크스경제학을 지난 20여 년 동안 가르쳐 오신 김수행 교수께서 올해 2월 정년퇴임을 하십니다. 그와 더불어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의 존폐 여부를 놓고 많은 이들이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 설마 마르크스경제학이 서울대에서 없어지겠냐면서도, 후임 교수에 대한 논의조차 교수님들 사이에서 거론되지 않거나 언급을 애써 삼가시는 상황을 보며 저희들은 우려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마르크스경제학은 경제학부 뿐만 아니라 서울대 전체의 학문 발전과 다양성 유지에 큰 기여를 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을 양성하여 한국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오늘의 상황에 저희는 무척 안타깝습니다. 더 나아가 저희는 마르크스경제학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상황 자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단순히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전공 영역 하나가 사라진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 학부, 나아가 서울대와 한국사회에도 큰 손실을 야기할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채용되지 않고 마르크스경제학이 서울대에서 사라진다면, 경제학부는 스스로 학문의 다양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다양한 학문의 섭렵은 진정한 학문적 발전의 기본 조건입니다. 마르크스경제학은 주류경제학의 이론과 논리와는 다른 관점에서 경제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는 신고전학파 중심의 주류경제학 이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경제학에서 다루고 있지 않거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문제들을 자본주의 비판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면서 한국사회의 변화에 기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사라지게 되면, 주류경제학만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경제학부에서 학문적 다양성은 점점 더 위축될 것이며, 이에 따라 학문의 창의적 발전은 크게 저해될 것입니다.

둘째, 마르크스경제학이 사라진다면 관련 석·박사 연구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영향을 줄 것입니다. 평생 자신의 업적이자 연구자로서의 삶의 길잡이가 될 학위 논문을 지도해 줄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후임 교수가 없다는 것 자체가 그들 자신의 삶에서 매우 큰 시련이 될 것이며, 사실상 학문적인 ‘사망선고’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지도교수를 잃어 대학원생들의 연구가 인위적으로 단절되는 이런 상황을 경제학부에서 방관한다면, 대학원 사회는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일로 매우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될 것 입니다.

셋째,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를 뽑지 않는다면, 이는 학문의 수요자인 학생의 권리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일입니다. 마르크스경제학은 지난 20여 년 동안 많은 수강생들이 배우고 고민해온, 경제학부의 공식 교과목입니다. 그런데도 이 과목을 담당할 교수가 없다면, 정작 수업의 가장 큰 당사자인 학생들은 부실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강사를 활용하는 방안은 장기적인 처방이 될 수 없습니다. 강의와 논문지도를 담당할 교수가 없다는 것은 곧 마르크스경제학 연구 및 교육의 실질적인 폐지를 의미합니다. 결국 마르크스경제학을 비롯한 더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수많은 학생들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다음과 같이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마르크스경제학을 강의하고, 학문적 재생산을 보장할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학문의 다양성과 경제학부 학문 재생산의 안정성, 학생들의 기본적 권리를 위해 서울대 경제학부는 마르크스경제학 교수를 반드시 채용해야 합니다. 저희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은 존경하는 교수님들께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2008년 2월 18일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바라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대학원생 일동

관련기사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42485

헐리웃 파업, 새로운 미디어의 탄생을 촉발할 것인가

미드팬들을 따분하게 만들고 있는 헐리웃 작가조합의 파업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주1)

워너브로스(Warner Brothers), 유니버셜(Universal), 디즈니(Disney) 등의 냉대때문에 가슴에 대못이 박힌 작가조합이 전혀 새로운 우회로를 개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통적인 헐리웃 스튜디오 방식이 완전히 혁신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즉 명망 있는 영화와 TV 작가들, 몇몇 배우들, 감독,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투자가들이 함께 모였는데 이들은 스튜디오 제작방식이 아닌 새로운 벤처의 탄생을 선언한 것이다. 영화작가 Aaron Mendelsohn은 대중에게 콘텐츠를 직접 전하는 전혀 새로운 모델이라고 천명하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들은 각종 프로그램과 영화를 인터넷을 통하여 배포함으로써 스튜디오의 지배에 도전한다는 구상이다. 이번 구상은 어쩌면 파업 그 자체로부터 배양되었을지도 모른다. 파업을 지지하는 단편을 만든 George Hickenlooper는 바로 파업 비디오 덕분에 인터넷을 통해 시청자에게 콘텐츠를 직접 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Woody Allen이나 Jay Leno 같은 유명 연예인이 출연한 실험적인 작품 Speechless는 벌써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Speechless 감상하기
http://www.mcnblogs.com/mcindie/archives/2007/12/woody_allen_spe.html
http://www.deadlinehollywooddaily.com/speechless-21/

이제 어쩌면 우리는 헐리웃 작가들의 신작을 스크린이 아닌 Google이나 YouTube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Jay Leno나 David Letterman과 같은 유명 토크쇼 사회자들은 벌써부터 이런 방식으로의 접근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이번 파업의 빅이슈 중 하나가 바로 인터넷을 통한 수입을 스튜디오가 작가들과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돌파구가 또한 인터넷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대중문화의 새로운 돌파구로써의 인터넷의 중요성과 가능성이 새삼 확인되는 장면이다.

또한 작가와 스튜디오의 배후에 또 다른 이질적인 세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작가들은 스튜디오가 자신들에게는 인터넷을 통한 수입이 불확실하다고 떠들면서도 월스트리트에 가서는 투자를 끌어오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인터넷의 가능성을 떠들어댔다고 비난하였다. 한편으로는 작가조합은 그들 뒤에 있는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은 ‘자유로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운동(free and open source software movement)’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평등주의적 시스템을 신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호~ 월스트리트 대 오픈소스 운동! 이거 재밌겠는데?

Hickenlooper는 Jordan Mechner(주2)와 짝이 되어 프로젝트를 개시했는데 하루 단위로 발표되는 필름을 만들고 있다. 저예산으로 하루 단위로 배포되는 이 영화는 George Clooney가(!)… 출연하지는 않지만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배우들이 출연하고 30일에서 50일 정도까지 연재되다가 최종적으로 DVD로 출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자면 이미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하드웨어의 성능이 일취월장하면서 이러한 생산방식의 혁신은 예고되어 왔다. 그러나 여전히 거대 스튜디오의 힘은 막강하였기에 그리고 그에 소속되어 있는 작가들은 여전히 법적으로 어디까지나 고용인이었기에 이러한 시도는 그리 많은 호응이나 동기를 부여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구석으로 내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작가조합은 스스로의 능력을 다른 수단을 통해 배출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생산방식의 서막을 알리고 있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이러한 양상들이 Karl Marx가 분석하였던 생산력에 조응하지 못하는 생산관계의 타파의 한 사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즉 거대 스튜디오들은 여태껏 생산수단을 소유한 전통적인 공장장의 위치였다. 그들은 제작 공간, 배우, 제작 장비, 배포망 등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 작가들은 공장의 노동자였다. 그들에겐 생산수단과 배포망이 없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인터넷, PC의 발달 등 하드웨어/소프트웨어는 괄목상대할 만큼 발전하였다. 어느덧 이미 노동자들은 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게끔 된 것이다. 새로운 Punk Rock 의 시대, DIY(Do It Yourself)의 시대가 왔음에도 작가들은 눈치를 못 채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공장장이 정당한 이윤을 공유하지 않으려 욕심을 부리자 – 개과천선하기 이전의 스크루우지처럼 –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응수하였고, 피켓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궁리를 하다 보니 그들의 손에는 생산수단과 약간의 투자를 지지해줄 오픈소스 운동가들이 있었던 것이다. 유레카!

하지만 여전히 장벽은 곳곳에 존재한다. 우선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이 월스트리트와 완전히 다른 종자라고 믿을만한 구석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이라고 투자수익률의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그들 모두에게 Richard Stallman과 같은 정신적 지도자 이미지를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정수익 없는 작가주의 영화는 그들을 지치게 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커다란 스크린이 아닌 YouTube의 화면으로 블록버스터의 감동을 느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싶다. 몇몇 실험적인 작품들은 나름대로 호응을 얻을 것이지만 최신식 전투기가 360도 회전하면서 창공에서 해면으로 수직으로 비행하면서 적군에게 포화를 퍼붓는 장면을 소화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영화는 진실의 전달체인 동시에 꿈의 공장이기도 하다.

뭐 이외에도 내가 또는 그들조차 알지 못하는 갖가지 장벽이 존재할 것이다. 혁명은 고달픈 것이다.(주3)

지난번에 David Byrne 이 Wired.com 에 올린 기고문을 번역하여 전달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음악이나 영화 등 대중문화는 이미 생산력의 혁명기에 접어들었음이 분명하다. 70년대 Punk Rock 운동에도 DIY정신이 있었고 덕분에 언더그라운드의 중흥기도 마련되었지만 그랬음에도 여전히 좌익 밴드 The Clash 조차 대형 레이블과 계약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생산관계는 여전히 강고하였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문화노동자들에게 이 강고한 벽마저도 부술 정도의 힘을 갖게끔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실험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솔직히 밑질 것도 별로 없지 않은가.

 

(주1) 작가조합의 파업의 실마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가운데 LA 시의회는 파업으로 인한 LA의 피해액이 3억8천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2) 이 양반 누구냐면 그 위대한 게임 the Prince of Persia 의 개발자다! 한마디 더 하자면 노래 ‘마법의 성’이 바로 이 게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지.

(주3) 차베스에게 펀딩을 부탁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