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노동가치론

바클레이스의 LIBOR 조작 스캔들 단상

영국의 투자은행 바클레이스의 LIBOR 조작 스캔들의 여파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 사건은 금리를 민간 기업이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조작이 정부당국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시장에 더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금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금융회사에게 있어 생산원가나 같은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금리 조작은 가격담합과 같은 의미를 가지기에 이번 행위를 셔먼 반독점법 위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셔먼법 제1조는 부당하게 거래를 제한하는 계약(contract), 담합(combination) 또는 결탁(conspiracy)을 금지하고, 제2조는 단독의 독점행위 및 독점의 시도 행위와 함께 독점하려는 결탁을 금지한다. 그리고 클레이튼법 제3조는 임차인이나 구매자가 임대인이나 판매자의 경쟁자의 상품을 이용하거나 거래하지 않는다는 조건, 합의 또는 양해 아래 체결된 임대차 또는 상품 매매계약을 위법하다고 규정한다. (…) [The Sherman Antitrust Act (1890), 출처, 재인용]

이 사건은 당초 내부고발자의 고발에 따라 미국의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2008년 5월부터 수사에 착수한 건이다. CFTC는 2010년 봄에 금리조작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영국의 금융당국에 협조를 요청했고, 이후 사건수사는 영미의 공조 하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관련 기사 보기) 현재 바클레이스는 혐의사실을 인정하고 법정에 가지 않는 대신 영미의 규제당국에 4억5천만 달러의 합의금을 내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그렇다면 바클레이스는 왜 Libor를 조작했는가? 은행은 2007년 후반기부터 2009년 5월까지 자체 조달 금리를 낮게 보고한 것을 인정했는데, 은행이 금융위기 동안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고(속이고?) 싶었고 다른 은행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트레이더들이 파생금융상품에서 돈을 벌기 위해 금리신고에 부당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관련 기사 보기) 금리조작으로 투자자도 속이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인 셈이다.

리보를 기준으로 산정된 이자를 받는 채권 투자자는 은행들이 금리를 낮게 조작하면 그만큼 손실을 보게 된다. 금리가 올라갈 경우 이득을 보는 파생상품을 보유한 투자자들 역시 손실을 입는다. 영국 금융당국은 은행들이 리보를 조작한 뒤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 부당한 이익을 얻은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현재 리보에 연계한 금리 파생상품의 전 세계 시장 규모는 약 800조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못믿을 리보…소송 확산 가능성]

한편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허술한 Libor 산정 방식 때문이다. Libor는 영국은행협회(BBA)가 매일 오전 16개 은행으로 구성된 패널이 제출한 금리 가운데 중간값 평균으로 정한다. Libor는 사실상 자체 조달 금리인데, 이 금리를 당사자가 보고한 셈이다. 그런데 BBA는 금리를 물어보지만 사실여부 체크는 안 한다. 트레이더는 매일 몇 베이시스포인트 씩 금리를 낮추는 것이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다고 말했다.(관련 기사 보기)

주) 몇 개 은행이 금리를 제출하는지는 보도마다 다른데 어떤 언론은 20개라고 하고, 예전에 번역하여 정리한 자료에는 15개의 금리라고 한다. 하나금융연구소의 보고서에서는 18개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개별 은행들의 리스트를 적어놓아 가장 신뢰도가 높다.

그렇다면 맑고 깨끗한 금융시장에서 바클레이스만이 악랄하게 금리를 조작한 것인가? CFTC는 이번 조사 과정에서 여러 은행들이 공모해 금리 조작을 조직적으로 진행해왔을 가능성도 제기되면서 씨티그룹, HSBC, RBS, UBS 등도 함께 조사하였다. 특히 영란은행(BOE)이 바클레이스의 행위를 공모했을 것이란,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역시 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혐의는 사태의 의미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

이 시점에서 ‘금리라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물음을 던져봐야 할 것 같다. 금리는 돈에 대한 가격이다.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은행 시스템이 미래의 돈의 가치에 대한 최상의 추측에 기초해” 결정할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 금리가 틀렸을 상황을 가정해보라고 말하고 있다. 금리란 것이 전능한 존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어떤 “주어진 가격”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약삭빠른 인간들이 금리를 자기들 이익을 위해 조작하는 경우 말이다.

우리는 은행 시스템이 미래의 돈의 가치에 대한 최상의 추측에 기초해 오늘의 이자율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추측이 결국은 미래 돈의 공급 및 수요와 관련한 전 세계 수없이 많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무수한 시장 예측에 기반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틀렸다고 해보자. 은행가들이 이자율을 조작해 당신이 빌리거나 그들에게 되갚아야할 돈을 두고 내기를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내기는 그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줄 것이다. 그들은 시장이 실제로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내부 정보, 당신과 공유하지 않을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리보 스캔들’, 월가가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금리의 제일 밑바닥 금리는 각국의 중앙은행, 더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에서 책정하는 정책금리에 바탕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지급불능의 위험이 사실상 없다고 간주하는 이 금리는 정부의 신용도를 바탕으로 하는 돈의 가격이며, 그 다음 단계로 금융기관, 기업, 가계 등이 자신의 신용도에 따라 가산 금리를 더하는 방식으로 금리가 정해질 것이다. Libor는 이 중에서도 벤치마크 금리로 인기 있는, 신용도 높은 금리로 행세해왔다.

하지만 금융위기 당시 신용이 깨지면서(credit crunch) 정책금리를 내리는데도 시장은 서로를 믿지 못하여 금리가 큰 폭으로 오르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와중에 바클레이스는 스스로의 신용을 조작하기 위하여 Libor를 조작한 것이다. 일반기업으로 치면 회사가 멀쩡하다고 선전하기 위해 회사채를 낮은 금리에 발행하는데 성공했다고 사기를 친 셈이다. 자신의 조달 금리를 스스로가 보고할 수 있는 금융회사의 특권을 악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한 토론에서 경제전문가인 Max Keiser는 바클레이스의 이러한 조작, 이를 방임 내지는 공모한 영란은행의 행위를 두고 “공산주의적 방식”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시장이 가격을 결정하게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시장이 결정하는 그 가격의 기초가격은 다른 가격과 달리 중앙은행의 정책금리를 통해 결정되는 태생적 한계가 – 물론 정책금리는 중앙은행이 원하는 시장금리로 유도하는 역할에 그치지만 – 있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즉, 금융업이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1,2차 산업 가치생산의 촉매 역할을 통해 가치를 전유(appropriate)하는 것이라는 ‘노동가치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 체제가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정책입안자는 거시경제 이익률의 선순환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정책금리를 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금리와 시장금리에 괴리가 발생하면 이를 조정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든다. 그런 면에서 담합이나 가격조작은 사실 국가 차원에서는 합법이다.

참고할만한 글

노동가치론에 대한 단상

이글은 아래 ‘부’와 ‘가치’ 간의 실질적인 구별에 관한 메모 에 리에라님과 beagle2님이 달아주신 댓글에 대한 나의 보충설명 내지는 단상이다.

노동가치론은 노동을 ‘가치(value)’의 참된 척도로 보는 것이다. 아담 스미드가 – 또한 그를 비롯한 고전파 경제학자들 – 이러한 이론을 정식화한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부는 화폐에 존재한다’라고 믿는 중상주의적 견해에 대항무기로 사용하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다. 한 나라, 나아가 이 세상의 부는 어느 한 나라가 무역차액을 통해 당시의 화폐적 표현인 금을 쟁취함으로써 쌓이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노동자의 근면한 노동, 그리고 자유무역을 통한 상품의 활발한 교환을 통해 쌓여간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부’와 ‘가치’간의 구별이 필요한데 ‘부’는 본래 교환가치가 없던 자연자원과 그에 대한 노동이 결합된 것이고, ‘가치’는 그 중에서도 교환가치의 측정단위가 되는 노동만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식가치론이랄지, 인적자본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한동안 예를 들면 미래학자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식 또는 정보역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 꽤 설득력을 가지고 전파되었다. 나는 이 주장이 두 가지 천박한 편견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가치(value)’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다. 사랑도 가치 있고 우정도 가치 있다. 정보 역시 가치 있다. 다만 이때 가치는 가치론에서의 가치와는 다른 의미로 쓰일 뿐이다. 둘째, ‘노동(labour)’에 대한 편협한 사고다. 지식과 정보에 대한 탐구 역시 넓게 보아 노동의 범주에 들어간다. 탄광에서 석탄 캐는 것 – 물론 이는 매우 유용한 노동이나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막장 노동이다 – 만 ‘노동’이 아니다. 다만 노동가치론은 노동의 정도를 측정할 때에 유일하게 상호비교가 가능한 ‘노동시간’을 측정단위로 삼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정보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지식이나 정보의 측정단위를 제시하지 못할 바에야 노동가치론에 지식가치론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노동의 이분법적 사고를 좀더 들여다보자. 실제로 주류경제학에서 – 또는 사회일반에서의 –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그리고 이 중에서 정신노동의 우월적 지위를 당연시하는 입장은 다시 창조성, 상상력, 기업가 정신 등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노동일반을 이끌고, 심지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create)’한다는 주장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런 과정에서 이른바 ‘인적자본(human capital)’의 중요성도 강조될 것이다. 리스크를 부담하는 그러한 모든 창조적인 것들의 존재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노동가치론이 의미 없다는 논지를 이끄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만약 노동가치론을 주장하는 이중 어떤 이가 ‘공장에서 기계라인에서 조립만 하고 앉아 있는 노동자들’이 ‘멋진 신차 디자인을 통해 시장을 개척하는 자동차 디자이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것은 노동가치론에 대한 조악한 이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억지스러운 분리다. 우리 일상에서의 실제의 노동은 이 두 가지를 분리하기 어려우며, 실제로 많은 창조적 제안은 사실 기업의 우두머리에서가 아니라 기획단위의 노동자, 심지어 생산라인에서의 노동자들의 직무발명이 대부분이다. 인적자본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의 대다수는 현장에서 상품을 만들고 부수며 시행착오를 거친 노동자, 즉 인적자본들이 일궈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노동가치론’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고전적인 – 단순히 고전경제학만이 아니라 – 경제학의 철지난 이론이지만 옛것을 알아둔다는 의미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될까? 앞서 아담 스미드가 노동가치론을 꺼내들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해보면 현재적 의미도 어느 정도 있다고 여겨진다. 즉 현대사회 역시 ‘부는 화폐로부터 창출된다’라는 중상주의적 견해에서 크게 진전된 바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가치론은 유의미하다고 본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금융부문의 비대화로 인해 지속적으로 반복된 신용창출은 이제 단순히 산업의 혈맥 역할 뿐 아니라 스스로가 산업이 되고자 했다.(미국에서 한창 때 전체 산업이윤에서 금융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40%를 넘었었다) 하지만 노동가치론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그것은 일장춘몽일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해 금융 중상주의다. 금융부문이 가치를 ‘창출(create)’하는 것이냐 ‘전유(appropriate)’하는 것이냐의 논의를 제켜두고라도, 이 세계는 1,2차 산업의 존재 없이는 하루도 제대로 굴러갈 수 없는 경제다. 우리가 MMF를 먹고, CDS를 타고, ABS에서 잘 수 없는 한에서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부문이 비대해진 미국은 중국으로부터의 값싼 공산품을 가져다가 생활한 것이다.

‘노동가치론이 다른 이론보다 우월한 이론이다’라고 입 아프게 떠들 필요 없이, 또 그것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무결점의 이론이라고 여길 것 없이, 그것이 가지는 함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실천하면 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노동가치론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잣대로써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케인즈가 마르크스를 개차반 취급하고 자본론이 코란과 동일한 선상의 책이라고 폄하하였지만 그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마르크스 내지는 노동가치론 등 경제학 이론을 옹호(?)해보고자 한다. 요지는 결국 우리가 그것에 기대는 한에는 사실 모든 객관적이고 엄정한 글이나 말 역시도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고,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 책들을 코란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의 ‘밀교적(密敎的)’ 지침서로 무의식중에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게임의 룰 안에서 싸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思想)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어떤 지적(知的)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實務家)들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이다. 허공(虛空)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권자(權座)에 앉아 있는 미치광이들도 그들의 미친 생각을 수년 전의 어떤 학구적(學究的)인 잡문(雜文)으로부터 빼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득권익(旣得權益)의 위력은, 사상의 점진적인 침투에 비하면,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중략]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익(旣得權益)은 아니다.[John Maynard Keynes,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조순譯, 비봉출판사(2007), pp 461~462]

‘부’와 ‘가치’ 간의 실질적인 구별에 관한 메모

그러나 이 논리 자체는 노동뿐만 아니라 토지도 또한 상품의 가치에 뭔가를 기여한다는 낡은 반대론에 대처하지는 못했다. ‘부’와 ‘가치’ 간의 실질적인 구별이 올바르게 확립되자 비로소 토지의 역할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명이 가능했다. 물론 매우 일찍부터 상품의 사용가치는 그 교환가치와는 다르다는 것이 인식되고 있었다. 유명한 물과 다이아몬드의 예증은 스미드 이전의 여러 저작자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상품의 교환가치는 종종 그것의 효용과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지적했던 경제학자들도 허치슨 이전에 있었다. 그러나 리카아도가 항상 ‘부’(사용가치의 합계로 그것의 창조에는 토지와 노동이 함께 공헌한다)와 ‘가치’(그것은 노동만에 의해 결정된다)에 대해서 강조했던 구별이 정확히 정식화되었던 것은 (비록 몇몇 초기의 경제학자들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이 구별을 채용했다 하더라도) 잠시 후의 일이었다. 일단 이러한 방식으로 토지가 가치의 결정요소에서 제외되어 버리면 남는 문제는 오직 노동이 상품의 가치를 주는 것은 그것에 지불된 보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 그 자체의 지출을 통해서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뿐이었다. [노동가치론의 역사, 로날드 L. 미크 지음, 김제민 옮김, 풀빛, 1985년, p100]

성장과 분배에 관한 단상 2

리에라님께서 본문보다 더 좋은 댓글을 남겨주셔서 공유차원에서 갱신하여 재발행합니다. 원글은 2008년 6월 23일 쓴 글입니다.

A futures contract assures importers that they can sell the oil at a profit. That’s the theory, anyway. But we all know that some people on Wall Street are not above gaming the system. When you have enough speculators betting on the rising price of oil, that itself can cause oil prices to keep on rising. And while a few reckless speculators are counting their paper profits, most Americans are coming up on the short end ? using more and more of their hard-earned paychecks to buy gas for the truck, tractor, or family car. Investigation is underway to root out this kind of reckless wagering, unrelated to any kind of productive commerce, because it can distort the market, drive prices beyond rational limits, and put the investments and pensions of millions of Americans at risk. Where we find such abuses, they need to be swiftly punished.

선물거래 계약은 수입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익을 남기고 석유를 팔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해준다.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월스트리트의 몇몇 사람들이 시스템을 남용할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유가상승에 베팅한 투기자들이 많을 때에는 그것 자체가 유가 상승을 지속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몇몇 무모한 투기자들이 그들의 서류상의 이익을 계산하고 있는 동안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들이 어렵게 번 돈을 그들의 트럭, 트랙터, 또는 가족의 자가용에 넣을 기름을 사는데 더 많이 쓰면서 손해를 보고 있다. 이렇게 가격을 정상적인 범위 이상으로 올리고 수백만 미국인의 연금과 투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등 시장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생산적인 상거래와도 관련이 없는 무모한 노름을 뿌리 뽑기 위해 수사가 진행 중이다. 우리가 그러한 폐해들을 발견하여 그들을 신속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

이 연설은 누구의 연설일까?

1) 바락 오바마 2) 존 맥케인 3) 마이클 무어 4) 랄프 네이더

정답은 2번 존 맥케인이다. 폴 크루그먼 조차도 맥케인의 이러한 발언에 놀란 눈치다. 시장에 대한 절대적 신봉자여야 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이러한 발언을 한 사실이 놀랍다는 눈치다.(주2) 그는 공화당이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이유로 “자본주의 마술(the magic of capitalism)”에도 불구하고 원유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자 선물시장의 광기를 유가상승의 주범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뭐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석유메이저들이 월스트리트의 투기자들 때문에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몰아세우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찌되었든 저 연설 속에서 재밌는 문장 하나를 발견하였다.

“어떠한 생산적인 상거래와도 관련이 없는(unrelated to any kind of productive commerce)”

선물시장에서의 거래행위, 넓게 보아 금융자본의 활동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논리는 가장 공격적으로 주장한 칼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노동가치론자들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주류 경제학자들의 생각은 아니다. 그들은 생산의 3요소를 ‘토지, 노동, 자본’로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비록 선물시장에서의 금융활동을 투기적 행위로 특정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금융자본의 한 종류의 활동을 “생산”과 관계없는 행위로 규정하다니 저 연설문을 혹시 노동가치론자가 작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선(?)하다.

여하튼 금융자본의 활동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맥케인의 주장(!)에 동의할 것 같으면 우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주장되어 오던 ‘금융허브론’이 꽤나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영국, 그리고 유럽의 몇몇 강소국들은 금융지배를 통하여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였다. 보다 정확하게 그것은 이윤을 ‘창출(produce)’하였다기보다는 생산자본의 활동으로부터 얻어진 전지구적인 이윤을 ‘전유(appropriate)’하였다. 일국 내에서의 산업자본이 더 이상의 경쟁우위를 상실하였을 때에 그리고 자국 내의 금융 시스템이 경쟁우위를 확보하였을 때에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NAFTA등을 통하여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시켜 자국내 산업자본의 비용을 절감시켜주고 그 생산된 가치들을 금융자본을 통하여 국내로 다시 이전시켜 왔다. 이것이 전 지구적 성장에 대한 국가간의 분배의 형태다. 그것이 한 나라에서는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 우리나라의 금융허브론으로 돌아가면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산업자본 포기하고(주1) 금융허브 키우자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의 국제화 정도나 경제규모로는 참 난감한 소리다.

지난번 NekoNeko 님이 달아주신 코멘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이것을 예를들어 4천만 국민 모두에게 1/n씩 나누어 준다고 하면 일인당 약 7만 5천원 정도씩을 분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규모의 경제나 기회비용의 측면을 생각해 봤을때 정몽준에게 3조 재산이 가 있는 것이 더 큰 파이를 생산하는데 나을지 국민 모두에 7만5천원씩 나누어 주는 것이 소득 증대 효과 측면에서 더 나을지 고려해 볼때 아무래도 전 전자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전 지구적으로 정몽준이라는 산업자본가에게 3조의 재산을 몰아주어 그것이 자본화(資本化)되어 6조라는 실물을 생산하였으면(주3) 4천만 국민에게 1/n 씩 나눠주어 홀랑 까먹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나눠줄 수 있는 돈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주4) 그런데 이러한 도식에는 몇몇 함정이 있다.

정몽준이라는 산업자본가가 아닌 박현주라는 금융자본가에게 3조원을 몰아주면 어떠할 것인가? 그것은 생산적 활동에 투입되지 않고 맥케인도 인정하는 비생산적 활동에 투입하게 될 수도 있다. 그 금융자본이 또 다시 산업자본의 생산비용으로 투입되는 것이 아닌(주5) 맥케인이 혐오하는 석유 선물시장에 투입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유가를 급등시켜 박현주는 3조원을 벌지는 모르겠으나 그 돈은 맥케인이 표를 구걸해야할 ‘대부분의 미국인’의 주머니를 터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된 세상에서는 미국인 돈만 터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돈도 털고 전기요금과 같은 공공요금의 인상요인이니 내 돈도 턴다.

이와는 별도로 4천만 국민에게 1/n 씩 나눠주는 것은 쓸데없는 짓인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가? 그들의 가처분소득 증가가 상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여 국내 산업기반을 다져갈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당과 청와대의 유류환급금도 이러한 원리를 알고 만들어진 정책이다. 그렇게 선순환적으로 흘러가면 산업자본을 자극하여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 케인즈적인 냄새도 풍긴다. 그런데 NekoNeko 님이 1/n 씩 주지말고 정몽준에게 몰아줘야 더 큰 파이를 생산시킨다는 아이디어는 사실 ‘내수형 산업기반’보다는 과거 ‘수출주도형의 산업기반’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과거에는 유효했지만 산업구조가 바뀌고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된 오늘날까지 유효할지는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다.

요컨대 성장과 분배의 문제에 있어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진리에 근접한 것일 수 있다. 성장은 전 세계의 인간이 삽질을 해서 자연자원을 착취(labor)하는 만큼 증가한다. 화폐는 이를 통해 생산된 상품의 표현양식이다. 산업자본은 상품을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인민에게 팔아 이윤을 남기고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의 전후방에서 이를 전유한다. 인민 역시 산업자본의 전후방에서 제 몫을 가져오고(주6) 그것을 소비한다. 필요소비에 모자랄 경우 금융자본은 노동자에게 뒷돈을 대주어 또 한 번 이윤을 전유한다.(주7) 한 국가의 성장은 전 지구적 차원의 이러한 활동에서의 일국에 대한 분배의 형태일 뿐이다.

(주1) 포기까지는 아닐지라도 산업고도화(?) 정책에 의하여 경쟁우위 품목만 남기고 나머지는 산업기지 이전 등을 통해 정리하고

(주2) 사실은 비아냥거림이지만

(주3) 전 세계적으로 3조의 부가가치를 창출하였고 그것을 한국으로 온전히 가져왔다는 모양새

(주4) 물론 지독한 성장론자들은 이 돈 마저 다시 정몽준에게 몰아주자고 주장할 것이다. 좋은 시절 되면 그때 가서 나눠주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5) 즉 예를 들면 생산기지 이전에 따른 비용에 대한 시설자금대출 등

(주6) 이를 충분히 못 가져온다는 것이 마르크스 노동착취론의 주장일 것이다

(주7) 금융자본은 비생산적 활동을 한다고 여기저기서 욕을 먹어도 어찌 되었든 경제의 핏줄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 경제 위기 :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에 대한 독후감

고대 사람들은 부(wealth)가 어떻게 창출되는가 물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남의 것을 뺏으면 되지.”

전쟁을 해서 뺏고, 도둑질을 해서 뺏고, 노예로 만들어서 뺏고 등등 뺏는 방법은 지금보다 훨씬 투박했다. 그리고 솔직했다. 괜히 대량살상무기가 위험하다 화염병을 던지니 위험하다 핑계대지 않았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였고 패자는 노예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사람들이 좀더 세련(?)되게 살기 시작했을 때에 그들은 무역을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전쟁과 도둑질이 손쉬운 돈벌이였지만 더 머리를 굴려 돈을 버는 방법도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야한 경제이론이 등장한다.

“무역을 하려면 상품거래의 표준이 되는 등가물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금(金)이다. 금을 많이 가지는 자, 또는 나라가 부자다.”

이것이 중상주의(mercantilism)의 단순논리다. 우리는 적게 쓰고(수입하고) 남이 많이 쓰게 해서(수출해서) 차액을 남기는데 그것이 금의 형태로 체현되는 것이고 그 나라에 금이 많으면 그 나라는 부자라는 것이 논리였다.

이를 반박한 것이 바로 아담 스미스 등이 주창한 노동가치론이다. 금을 서로 뺏고 빼앗겨도 금의 총량은 더 많이 캐내지 않는 한은 불변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점점 윤택해진다. 그것은 금이 더 많아져서가 아니라 바로 노동을 통해 자연자원을 쓸모 있는 물건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당연한 이치다. 과격급진 이론이 아니고 그저 사실일 뿐이다.

이후 무슨 정보가치론이니 뭐니 하는 이상야릇한 궤변으로 오염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동가치론은 경제학에 있어서 하나의 공준이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생산의 3요소로 토지, 노동, 자본을 들면서 노동을 격하시키지만 나머지 두 개의 것은 경제학적으로는 노동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변화가 없는 것들이다. 토지는 부의 원천이랄 수 있고 자본은 혈맥의 역할을 하나 결국은 노동이 투입되어야 기능한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이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이 투입되면서 자본가가 투입된 노동에 상응하는 가치를 노동자에게 지급하지 않았다는 논리직관을 통하여, 잉여가치라는 핵심개념을 도출해낸다. 이 잉여가치가 결국 사회전체의 부의 증분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이 어떤 노동이냐 하는 것은 때로 혼선도 있지만 대체로 1차, 2차 노동이다. 3차, 즉 금융업을 포함한 서비스업부터는 1,2차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나눠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금융위기에 대한 해석에서 바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전제를 당연시하는 것이다.

즉 금융업은 그 자체로는 가치(value)를 창출하지 못한다. 그것을 전유(專有 ; appropriation)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세상 모든 노동자들이 1,2차 노동을 하지 않고 금융업에만 종사한다고 가정해보자. 창출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은 자명하다. 아이슬란드 전 인구가 금융업에 종사하며 타국의 화폐를 뺏어오는 것은 가능하지만 전 세계 모든 인구가 금융업에 종사하며 타국의 화폐를 뺏어오는 것은 금을 둘러싼 중상주의보다 더 어이없는 체제일 뿐이다.

결국 1,2차 노동으로부터 창출되는 잉여가치의 총량은 산술적임에도 그것을 전유하려는 금융업 등 서비스업의 기능이 기하급수적으로 활발해지면 사회는 두 가지 길로밖에 갈 수 없다. 화폐증발과 신용창출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키든가 아니면 그 금융기능이 마비되든가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된다. 지난 몇 십년간 급속도로 발달해온 자본주의는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을 왔다 갔다 하다가 이번에 후자의 길로 깊숙이 접어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Nick Beams가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고유모순이 바로 이것이다. 사회 전체가 요구하는 청구권, 예를 들면 이자, 지대, 집값 등은 노동으로부터 창출되는 잉여가치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면 그 잉여가치 비율은 여러 사정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점점 그 청구권은 늘어만 간다. 금융화, 증권화, 집값 상승 등이 청구권에 거품을 형성한다. 그리고 빵~ 하고 터진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자유화가 그것을 치유할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위와 같은 프로세스를 부정한다. 케인지언들조차 정부가 유동성을 공급하면 자본주의는 치유될 것이라고 말한다. 기업이 부채비율이 높아지면 건전성이 악화된다. 결국은 퇴출의 길로 접어든다. 유동성을 공급하는 국가는 어떻게 되는가? 건전성이 악화된다. 그 국가는 퇴출되지 않는 불사의 존재일까? 미래세대는 그들의 영원한 인질인가?

세계 경제 위기 :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 (2)

다음은 사회주의평등당(the Socialist Equality Party) 호주지부의 국가서기인  Nick Beams가 2008년 11월과 12월에 걸쳐 호주 여러 도시에서 가졌던 강의를 요약 발췌한 내용이다. 번역이 일치하지 않은 점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우리가 증명해야할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어떻게 이 금융위기가 발생하였는가? 어떻게 18개월 전 발생했던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의 340억 달러가 연루된 문제가 미국 금융 시스템과 전 세계의 금융시장에 57조 달러에 달하는 재앙으로 발전했는가? 어떻게 지구상의 수억 명의 사람들이 그들이 관련되지도 않고 통제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위기로 인해 고통 받는가? 어떻게 자산담보부증권, CDS와 같은 고도로 복잡한 금융상품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토록 깊은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가? 왜 이러한 금융위기가 침체와 전쟁에의 위험을 증대시키면서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의 붕괴를 초래하는가? 이것들이 이 강의에서 우리가 들여다 볼 이슈들이다.

자본주의의 ABC

자본주의의 동력은 사용 또는 수요를 위한 생산이 아니다. 더군다나 시장을 위한 생산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본의 축적, 이윤의 창출이다. 가장 간단한 형태에서 축적과정은 M 이라는 화폐형태의 자본에서 시작한다. M은 더 큰 양의 자본인 M’으로 바뀐다. 즉 자본의 초기량에 그 증분 “델타 M”을 더한 것이다.

이 증분의 원천은 생산과정에서 노동계급으로부터 착취한 잉여다. 자본으로써의 화폐는 생산수단과 함께 노동자의 노동력(labour power)을 구입하는데 쓰인다. 이 노동력 또는 일할 능력은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구입 가능한 상품(commodity)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계약의 형태로 판매되는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value)는 노동자 가족의 생활유지에 필요한 음식, 의류, 주거 그리고 기타 필수재(necessities)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주1)

그러나 이러한 필수재 들의 가치(노동자의 임금)는 생산과정에서 자본가에 의해 공급되는 상품에 노동자가 부가하는 가치와 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말로 노동자의 임금은 그들이 생산과정에서 기여한 가치보다 적다. 이 차이가 잉여가치(surplus value)의 원천이다. 노동력이 생산과정에서 소비되지만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상품은 그 안에 추가적인 또는 잉여의 가치를 체현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장에서 M’ – M에 델타M을 더한 – 를 실현하기 위해 팔린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생산력의 거대한 축적을 추동한다. 이전 양식들과 달리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지속적인 갱신에 주력한다. 축적은 노동생산성의 증가에 의존한다. 경쟁의 압박은 이러한 과정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본의 모든 부문은 소멸의 고통에 두려워하며 생산성을 증대시켜야만 한다. 생산과정의 항구적인 규모증대는 자본주의 경제의 금융구조의 변화를 초래했다. 이는 이제 자본의 축적과정이 단순히 개별 자본가의 능력을 훨씬 초과하여 진행되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자원(resource)에서 조달된다. 두 개의 극적인 금융발전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신용 및 은행 시스템과 합자회사 또는 주식회사의 형성.

사회 모든 분야의 돈이 은행으로 모이게끔 만드는 이른바 신용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기업에게 개인이나 심지어 개인들이 모인 집단의 능력을 월등히 초과하는 규모의 자원을 제공한다. 자본가는, 마르크스가 설명하길, 이제 다른 사람들의 돈의 단순한 관리자가 될 뿐이다. 이 돈이 없으면 루퍼트 머독도 평범한 시민에 불과할 뿐이다.

자본을 공급하는 대가로 은행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자지급의 형태로 수령한다. 은행과의 대출계약이나 기업의 회사채 발행은 채권자에게 정기적인 이자지급을 약속한다. 즉 그 소지자는 소득을 보장받는다.

주식의 발행을 통해 설립되는 주식회사의 경우에는 화폐자본을 공급한 대가로 재산권을 보장받는다. 그들이 회사의 일부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매체인의 주주라고 해서 당신이 가게에 들어가 그 회사의 부분적인 소유주라는 이유로 물건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상품은 기업화된 법인의 소유물이다. 당신이 보장받는 것은 배당의 형태로 지급되는 이익의 일부분이다.

신용과 주식소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시장을 갖게 되었다. 채권과 주식과 같은 소득 형태를 수여하여 그것들이 거래되는 금융시장. 그리고 이들 금융자산의 가격은 오르고 떨어진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고팔면서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신용 혹은 주식의 형태로 제공되는 화폐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하는데 공급된다. 그것들은 생산자본이 되어 노동계급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데 관여한다. 이는 또한 화폐만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식과 채권은 마르크스가 “상상의(imaginary)” 자본, 혹은 가상(fictitious)자본이라 부른 것들이다. 그것들은 최종적으로는 생산자본이 착취한 잉여가치의 지분을 소득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의 세계에서, 즉 가상자본의 세계에서는 금융자산을 거래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는 황홀한 세계다. 환상의 세계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화폐의 조작을 통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관리자의 영리한 조작과 거래를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노동이 모든 이윤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 초기 시절부터 금융시장은 그것을 말살하거나 최소한 통제하고 싶어 하는 –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 전체를 흔들지는 않고 –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자본주의의 나쁜 부분을 규제하자”가 그들의 구호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듯이 자본주의의 “좋은 면”은 “나쁜 면”과 구분할 수 없다. 사실 때로 “나쁜 면”이 역사적인 발전의 추동력이 되기도 했었다. 한 예로 합자회사라는 수단을 통한 집중화(Centralisation)는 짧은 시기에 철도라는 거대 사회간접자본의 설치를 가능케 했다.

가상의 자본과 부채의 증가

수많은 통계들에서 지난 30여 년간 금융 시스템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수치 중 하나는 부채수준이다.

1981년 미국 신용시장은 GDP의 168%로 추정되었다. 2007년 그것은 350%로 증가한다. 금융자산은 1980년의 GDP의 다섯 배였는데 2007년에는 열 배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늘어난 부채는 점점 더 생산자본의 확장 보다는 금융시장 그 자체의 금융활동을 위해 사용되었다. 은행과 다른 금융기관이 취득한 부채는 1997년 미국 GDP의 63.8%에서 2007년 113.8%로 늘었다. 2004년 대형 투자은행의 자기자본 대비 자산 비율은 23이었다. 2007년에는 30이었다.

이토록 레버리지 비율을 늘이는 것은 그들의 수익 때문에 그렇다. 만약 어떤 자산이 매년 10%씩 가치가 증가하는 1억 달러의 자산이라면(연말에는 1.1억 달러의 가치가 될) 그리고 이 자산이 1천만 달러의 자본(equity)과 5% 이자의 9천만 달러 대출(borrowing)로 구성되어 있다면 연말에 4백5십만 달러의 이자를 치르고 난 뒤 이윤은 5백5십만 달러가 될 것이다. 이는 수익률이 55%라는 것을 의미한다.(주2) 이 과정의 핵심은 값싼 신용(cheap credit)에 의한 자산가치의 증가다. 화폐가 싸면(주3) 그것은 자산시장에 투입될 것이다. 시장은 주식이나 다른 상품 또는 주택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자산 거품의 형성에 관련하여 그러한 폰지 스킴이 종국에는 붕괴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대단한 지적능력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관련된 것은 개인적인 실패나 지적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금융시장 그 자체의 구조다. 신용이 저렴한 한에는 그리고 자산가치가 오르는 한에는 모든 금융기관이 참여하도록 강요당한다. 시티그룹의 CEO 척 프린스는 2007년 7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이 멈추면, 유동성의 관점에서,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흐르는 동안은 당신은 일어나서 춤을 춰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춤추고 있다.”

이제 음악이 멈췄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는 지난 수십 년간 쌓여져 온 부채의 산의 붕괴의 방아쇠가 되었다. 이 붕괴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10%의 수익이 예상되는 1억 달러의 자산이 이제 5%의 수익밖에 창출할 수 없다. 그러면 자산가치가 5천만 달러로 줄 것이다. 시장전체의 자산가치가 반절로 줄어든 것이다.

그런데 빌린 돈 9천만 달러로 구입한 자산을 가정해보자. 자산의 시장가치가 줄어든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은행의 부채는 여전히 9천만 달러다. 그러나 자산은 그것을 구입할 시 투입된 가치만큼도 안 된다. 어떻게 부채를 갚을 것인가? 현금을 얻기 위해 다른 자산을 팔수도 있다. 그러나 경계를 뛰어넘어 이런 일이 벌어지면 특정자산의 가치는 떨어지고 위기는 악화될 것이다.

앞에서 가상의 자본은 최종단계에서 노동계급으로부터 착취한 잉여를 원천으로 하는 소득에 대한 청구권이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자본은 그것이 종국적으로 의존하는 것 이상으로 자랄 수 있다. 금융시장 조작은 가상의 자본의 엄청난 성장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특정 시점에서 이 확대는 멈추고 위기가 폭발한다. 자본은 이 불균형을 극복하여야 한다. 서로 연관된 두 개의 과정 : 잉여가치 증대를 위해 노동계급 착취를 심화시키는 방법, 그리고 자본의 총 부문을 부도내거나 제거함으로써 가용 잉여가치에 대한 그들의 청구권을 없애버림으로써 남아있는 자본 부문의 지분을 보존하는 것.

그러한 “재평가”는 단순히 회계 상의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지적하였듯이 “폭력적이고 날카로운 위기”를 통해 갑작스러운 가치하락, 실질적인 불경기, 재생산 과정의 중단을 수반한다.

[원문보기]

(주1) 이 부분이 사실 노동력을 상품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의 논쟁의 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데 다른 상품들이 정확히 투입된 가치대로 측정할 수 있다고 간주될 수 있는 반면 노동력은 여기서 말하듯이 단순히 필수재의 가치에 상응한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는 가격(price)으로 측정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고, 필수재 그 자체의 범위도 그야말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예전에 휴대전화가 사치재였다면 지금은 필수재라 할 수 있다. : 역자 주

(주2) 물론 이는 시간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 나눗셈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 역자 주

(주3) 이자를 화폐에 대한 가격이라고 간주한다면 저금리는 화폐가 싸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역자 주

‘가치(value)’와 ‘부(wealth)’

이번 금융위기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인 Nick Beams라는 분이 2008년 말 호주에서 가졌던 강연의 일부분을 발췌한 내용이다. 현재 약 5편까지 진행되고 있고 기회가 되면 주요부분을 발췌하도록 하겠다.[원문보기]

끊임없이 증가하는 생산과정의 범위는 자본주의 경제의 금융구조의 변화를 추동한다. 이는 이제 자본이 축적과정을 이어나가기 위해 개별 자본가들의 능력 이상으로 자라나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자원을 빨아들여야 한다. 두 가지의 거대한 금융적 발전이 이를 가능케 했다. 신용과 은행시스템의 발전, 그리고 합자회사 혹은 주식회사의 출현.

사회 모든 분야의 돈이 은행으로 모이게끔 만드는 이른바 신용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기업에게 개인이나 심지어 개인들이 모인 집단의 능력을 월등히 초과하는 규모의 자원을 제공한다. 자본가는, 마르크스가 설명하길, 이제 다른 사람들의 돈의 단순한 관리자가 될 뿐이다. 이 돈이 없으면 루퍼트 머독도 평범한 시민에 불과할 뿐이다.

자본을 공급하는 대가로 은행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자지급의 형태로 수령한다. 은행과의 대출계약이나 기업의 회사채 발행은 채권자에게 정기적인 이자지급을 약속한다. 즉 그 소지자는 소득을 보장받는다.

주식의 발행을 통해 설립되는 주식회사의 경우에는 화폐자본을 공급한 대가로 재산권을 보장받는다. 그들이 회사의 일부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매체인의 주주라고 해서 당신이 가게에 들어가 그 회사의 부분적인 소유주라는 이유로 물건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상품은 기업화된 법인의 소유물이다. 당신이 보장받는 것은 배당의 형태로 지급되는 이익의 일부분이다.

신용과 주식소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시장을 갖게 되었다. 채권과 주식과 같은 소득 형태를 수여하여 그것들이 거래되는 금융시장. 그리고 이들 금융자산의 가격은 오르고 떨어진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고팔면서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신용 혹은 주식의 형태로 제공되는 화폐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하는데 공급된다. 그것들은 생산자본이 되어 노동계급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데 관여한다. 이는 또한 화폐만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식과 채권은 마르크스가 “상상의(imaginary)” 자본, 혹은 가상(fictitious)자본이라 부른 것들이다. 그것들은 최종적으로는 생산자본이 착취한 잉여가치의 지분을 소득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의 세계에서, 즉 가상자본의 세계에서는 금융자산을 거래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는 황홀한 세계다. 환상의 세계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화폐의 조작을 통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관리자의 영리한 조작과 거래를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노동이 모든 이윤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짧은 문단을 통해 강연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조력자로서의 금융과 자본시장의 성격이 잘 묘사하고 있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다소 혼란의 여지도 있을 것 같다. 특히 강연자가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창출되고 이자나 배당은 그것의 일부일 뿐이라고 하였으면서 다시 가상자본을 통해 스스로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모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치(value)’와 ‘부(wealth)’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가치는 그것이 화폐로 표현되기 전의 모습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것의 측정단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명확치 않은 것 같으나 – 또는 내가 무지해서 모를 수도 –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노동시간의 형태로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부는 마르크스주의에서 그것의 명확한 의미를 부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화폐의 형태로 표현이 가능하다.

따라서 금융시장에서 거래를 통해 축적되는 – 정확하게는 전유되는 – 막대한 부는 사실은 한 사회, 혹은 전체사회의 가치(value)를 뛰어넘는 화폐증발로 인한, 즉 일종의 인플레이션에 의해 촉발된 거품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예컨대 유동성의 비정상적인 공급을 통해 올라간 부동산 가격은 가치의 증가가 아닌 화폐가치의 절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