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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누구인가?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바쁜 시기도 있었고 나름대로 시련의 시기도 있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단 탓이다. 이제 좀 삶이 안정되었으니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까 한다. 예열 차원에서 역사학자 박태균 씨의 통찰력 넘치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강의 영상을 올린다. 한반도의 현대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 박정희에 대한 연구야말로 한반도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열쇠 하나를 제공하는 연구가 아닐까 싶다.

한 경제지의 과욕은 어떻게 왜곡을 촉발시키나

한국경제신문이 사고를 친 것 같다. 2015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Angus Deaton)의 저서 <The Great Escape: Health, Wealth, and the Origins of Inequality>를 번역 출간하는 과정에서 그의 저서를 고의 또는 부주의하게 오역하였다는 의혹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몇몇 누리꾼들의 문제제기로 본격적으로 알려졌고, 몇몇 이들이 디턴 교수 본인에게도 이메일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친절한 디턴 교수는 제보자에게 친히 답장을 보내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알려줬다고 한다.

한국경제신문은 이 책의 번역(?)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판매 전략을 ‘피케티 대 디턴’의 구도로 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책 소개의 첫 줄은 “소득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토마 피케티 교수의《21세기 자본》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로 시작한다. 책 겉표지의 띠지로 예측 되는 하단부에는 “피케티 VS 디턴”이라고 못을 박았다.1 그리고 책 제목은 아예 원저의 “건강, 부, 그리고 불평등의 기원”이란 부제를 없애고 “위대한 탈출” 위에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를 달았다.

디턴 교수의 책 내용이 책 표지에 확연하게 보이는 기획의도에 맞는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확인하지 못했다. 설사 불평등이 성장을 촉발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학자가 그 학자적 양심으로 서술한 내용이고 이 책을 포함한 그의 이론 전반이 노벨상 등으로 평가받은 것이니 그 자체로 존중해줄만하다. 다만 우선 교보문고의 책 소개는 “불평등은 발전을 자극할 수도, 발전을 막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 적고 있어 한경이 택한 부제가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갖게 한다.

이러한 의심을 더 짙게 만드는 정황을 김공회 씨가 블로그에서 지적했다. 김공회 씨의 분석에 따르면 번역서는 “부(part), 장(chapter), 절(section)의 제목이 대부분 바뀌었고, 절의 경우 원문의 절 구분을 빼는 동시에 없던 절 제목을 집어넣기도 했고, 원문의 내용 중 일부를 자기들 멋대로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리를 옮기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엔 원문에 없는 것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고 지적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경이 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번안 또는 심지어 오역을 한 것이다.

한편, 자유경제원은 지난 10월 14일 아예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과 한국에 주는 메시지”라는 이름의 세미나까지 열었다. 세미나를 소개하는 글은 강원대 윤리교육과 신중섭 교수의 말을 빌려 “중진국 함정에 걸려 꼼짝 못하고 북한과 통일을 꿈꾸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피케티가 아니라 디턴이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그가 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디턴은 아마도 “불평등이 성장을 촉발시킨다”고 주장하는 디턴을 암시하는 것이겠지만 세미나 발표 요약에도 디턴이 그러한 주장을 했다는 발표는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세계를 관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나 영감보다도 사실(fact)에 대한 엄정함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훌륭한 관점이라도 대등한 사실관계를 비트는 감정이 개입된다면 이는 곧 편파적인 – 또는 “당파적”이라고 미화되기도 하는 – 주장으로, 그리고 그 주장이 “진실(truth)”로 포장된다고 생각한다. 관점은 여럿이되 사실은 하나여야 한다. 그런데 한경은 뭔가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한 경제학자의 저사가 담고 있는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이 혐의가 사실이라면 이는 심각한 범죄다.

“금융부문이 너무 크다”

BIS는 “금융의 발달에 대한 복잡한 실질효과는 두 가지 중요한 결론을 말해준다. 첫째, 금융부문의 크기는 생산성 성장에 뒤집어진 U자형의 효과를 초래한다. 즉, 금융 시스템이 더 커지면 실질성장이 줄어드는 지점이 있다. 둘째, 금융부문의 성장은 생산성 성장에 장애물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Cournède, Denk, Hoeller (2015)가 서술하길 “금융은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나 과잉인 경우도 있다.” [The Financial Sector is Too Big]

어느 산업부문이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특히 금융부문의 크기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는 금융위기 이후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의문일 것이다. 자금의 융통이라는 금융의 기본책무는 인용한 글에서처럼 어느 순간에는 경제성장에 있어 필수요소였다. 우리나라 역시 경제개발 시기에는 은행 돈을 빌리는 것 자체가 특혜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과잉유동성의 시대다. 그림자 금융, 마이크로 금융, PE 등 기존 금융을 대체하는 주체들이 덩치를 키워가고 있다. 지급결제 기능이 또 하나의 금융의 기본책무지만 이제 편의점에서 과자 하나도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세상이다. 금융은 생산의 촉매 역할을 할 뿐인데 원재료의 생산과정은 신통치 않은데 촉매만 과다하면 당연히 역(逆) U자 형을 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장과 분배에 관한 단상 2

리에라님께서 본문보다 더 좋은 댓글을 남겨주셔서 공유차원에서 갱신하여 재발행합니다. 원글은 2008년 6월 23일 쓴 글입니다.

A futures contract assures importers that they can sell the oil at a profit. That’s the theory, anyway. But we all know that some people on Wall Street are not above gaming the system. When you have enough speculators betting on the rising price of oil, that itself can cause oil prices to keep on rising. And while a few reckless speculators are counting their paper profits, most Americans are coming up on the short end ? using more and more of their hard-earned paychecks to buy gas for the truck, tractor, or family car. Investigation is underway to root out this kind of reckless wagering, unrelated to any kind of productive commerce, because it can distort the market, drive prices beyond rational limits, and put the investments and pensions of millions of Americans at risk. Where we find such abuses, they need to be swiftly punished.

선물거래 계약은 수입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익을 남기고 석유를 팔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해준다.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월스트리트의 몇몇 사람들이 시스템을 남용할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유가상승에 베팅한 투기자들이 많을 때에는 그것 자체가 유가 상승을 지속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몇몇 무모한 투기자들이 그들의 서류상의 이익을 계산하고 있는 동안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들이 어렵게 번 돈을 그들의 트럭, 트랙터, 또는 가족의 자가용에 넣을 기름을 사는데 더 많이 쓰면서 손해를 보고 있다. 이렇게 가격을 정상적인 범위 이상으로 올리고 수백만 미국인의 연금과 투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등 시장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생산적인 상거래와도 관련이 없는 무모한 노름을 뿌리 뽑기 위해 수사가 진행 중이다. 우리가 그러한 폐해들을 발견하여 그들을 신속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

이 연설은 누구의 연설일까?

1) 바락 오바마 2) 존 맥케인 3) 마이클 무어 4) 랄프 네이더

정답은 2번 존 맥케인이다. 폴 크루그먼 조차도 맥케인의 이러한 발언에 놀란 눈치다. 시장에 대한 절대적 신봉자여야 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이러한 발언을 한 사실이 놀랍다는 눈치다.(주2) 그는 공화당이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이유로 “자본주의 마술(the magic of capitalism)”에도 불구하고 원유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자 선물시장의 광기를 유가상승의 주범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뭐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석유메이저들이 월스트리트의 투기자들 때문에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몰아세우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찌되었든 저 연설 속에서 재밌는 문장 하나를 발견하였다.

“어떠한 생산적인 상거래와도 관련이 없는(unrelated to any kind of productive commerce)”

선물시장에서의 거래행위, 넓게 보아 금융자본의 활동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논리는 가장 공격적으로 주장한 칼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노동가치론자들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주류 경제학자들의 생각은 아니다. 그들은 생산의 3요소를 ‘토지, 노동, 자본’로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비록 선물시장에서의 금융활동을 투기적 행위로 특정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금융자본의 한 종류의 활동을 “생산”과 관계없는 행위로 규정하다니 저 연설문을 혹시 노동가치론자가 작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선(?)하다.

여하튼 금융자본의 활동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맥케인의 주장(!)에 동의할 것 같으면 우리는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주장되어 오던 ‘금융허브론’이 꽤나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영국, 그리고 유럽의 몇몇 강소국들은 금융지배를 통하여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였다. 보다 정확하게 그것은 이윤을 ‘창출(produce)’하였다기보다는 생산자본의 활동으로부터 얻어진 전지구적인 이윤을 ‘전유(appropriate)’하였다. 일국 내에서의 산업자본이 더 이상의 경쟁우위를 상실하였을 때에 그리고 자국 내의 금융 시스템이 경쟁우위를 확보하였을 때에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NAFTA등을 통하여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시켜 자국내 산업자본의 비용을 절감시켜주고 그 생산된 가치들을 금융자본을 통하여 국내로 다시 이전시켜 왔다. 이것이 전 지구적 성장에 대한 국가간의 분배의 형태다. 그것이 한 나라에서는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 우리나라의 금융허브론으로 돌아가면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산업자본 포기하고(주1) 금융허브 키우자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의 국제화 정도나 경제규모로는 참 난감한 소리다.

지난번 NekoNeko 님이 달아주신 코멘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이것을 예를들어 4천만 국민 모두에게 1/n씩 나누어 준다고 하면 일인당 약 7만 5천원 정도씩을 분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규모의 경제나 기회비용의 측면을 생각해 봤을때 정몽준에게 3조 재산이 가 있는 것이 더 큰 파이를 생산하는데 나을지 국민 모두에 7만5천원씩 나누어 주는 것이 소득 증대 효과 측면에서 더 나을지 고려해 볼때 아무래도 전 전자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전 지구적으로 정몽준이라는 산업자본가에게 3조의 재산을 몰아주어 그것이 자본화(資本化)되어 6조라는 실물을 생산하였으면(주3) 4천만 국민에게 1/n 씩 나눠주어 홀랑 까먹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나눠줄 수 있는 돈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주4) 그런데 이러한 도식에는 몇몇 함정이 있다.

정몽준이라는 산업자본가가 아닌 박현주라는 금융자본가에게 3조원을 몰아주면 어떠할 것인가? 그것은 생산적 활동에 투입되지 않고 맥케인도 인정하는 비생산적 활동에 투입하게 될 수도 있다. 그 금융자본이 또 다시 산업자본의 생산비용으로 투입되는 것이 아닌(주5) 맥케인이 혐오하는 석유 선물시장에 투입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유가를 급등시켜 박현주는 3조원을 벌지는 모르겠으나 그 돈은 맥케인이 표를 구걸해야할 ‘대부분의 미국인’의 주머니를 터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된 세상에서는 미국인 돈만 터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돈도 털고 전기요금과 같은 공공요금의 인상요인이니 내 돈도 턴다.

이와는 별도로 4천만 국민에게 1/n 씩 나눠주는 것은 쓸데없는 짓인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가? 그들의 가처분소득 증가가 상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여 국내 산업기반을 다져갈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당과 청와대의 유류환급금도 이러한 원리를 알고 만들어진 정책이다. 그렇게 선순환적으로 흘러가면 산업자본을 자극하여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 케인즈적인 냄새도 풍긴다. 그런데 NekoNeko 님이 1/n 씩 주지말고 정몽준에게 몰아줘야 더 큰 파이를 생산시킨다는 아이디어는 사실 ‘내수형 산업기반’보다는 과거 ‘수출주도형의 산업기반’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과거에는 유효했지만 산업구조가 바뀌고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된 오늘날까지 유효할지는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다.

요컨대 성장과 분배의 문제에 있어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진리에 근접한 것일 수 있다. 성장은 전 세계의 인간이 삽질을 해서 자연자원을 착취(labor)하는 만큼 증가한다. 화폐는 이를 통해 생산된 상품의 표현양식이다. 산업자본은 상품을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인민에게 팔아 이윤을 남기고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의 전후방에서 이를 전유한다. 인민 역시 산업자본의 전후방에서 제 몫을 가져오고(주6) 그것을 소비한다. 필요소비에 모자랄 경우 금융자본은 노동자에게 뒷돈을 대주어 또 한 번 이윤을 전유한다.(주7) 한 국가의 성장은 전 지구적 차원의 이러한 활동에서의 일국에 대한 분배의 형태일 뿐이다.

(주1) 포기까지는 아닐지라도 산업고도화(?) 정책에 의하여 경쟁우위 품목만 남기고 나머지는 산업기지 이전 등을 통해 정리하고

(주2) 사실은 비아냥거림이지만

(주3) 전 세계적으로 3조의 부가가치를 창출하였고 그것을 한국으로 온전히 가져왔다는 모양새

(주4) 물론 지독한 성장론자들은 이 돈 마저 다시 정몽준에게 몰아주자고 주장할 것이다. 좋은 시절 되면 그때 가서 나눠주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5) 즉 예를 들면 생산기지 이전에 따른 비용에 대한 시설자금대출 등

(주6) 이를 충분히 못 가져온다는 것이 마르크스 노동착취론의 주장일 것이다

(주7) 금융자본은 비생산적 활동을 한다고 여기저기서 욕을 먹어도 어찌 되었든 경제의 핏줄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작부터 바닥을 드러낸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개인적으로는 이번 개각에서는 (정운천 같은 친구야 어찌 되건 말건) 강만수를 내쳐야 진정으로 반성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아직 반성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유임되었다. 다만 최중경 기획재정부 1차관이 경질되었고 새로이 임명된 김동수 차관은 물가 전문가라고 한다. 이명박의 경제정책 기조가 성장에서 물가관리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실 강만수는 물론이거니와 최중경도 경질될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이명박 정부하에서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네들이야말로 이명박 정부의 “70년대 개발독재 + 21세기 신자유주의”라는 희한한 경제기조에 가장 잘 따를 충복들이기 때문이다. 최 차관 경질사유가 “현 경제팀이 성장률 목표 달성을 위해 고환율 정책을 펴다 물가상승을 유발”하였다는데 이거야말로 747이라는 허무맹랑한 구호로 당선된 대통령 말 잘 들은 죄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7%/연 성장률을 달성한다는 발상을 하며(주1), 그 성장률을 운하를 파서 달성하겠다고 하며(주2), 이도 저도 여의치 않으니까 기획재정부 장관이 나서 약한 원화를 조장하는 발언을 하며(주3), 그나마 리스크관리 차원에서 환헤지를 한 기업과 금융기관을 비도덕적 집단으로 몰아붙이고(주4), 이도 저도 다 안 되니까 경제위기를 촛불집회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다른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행동을 무슨 이유로 어이없어하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게 있어 그의 가장 어이없는 모습은 틈만 나면 경제위기를 부르짖는 모습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그가 민간기업의 CEO 시절 굳어진 버릇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기업의 CEO는 직원들을 다그치는 차원에서 곧잘 있지도 않은 위기를 예언한다. 신년사에 CEO는 흔히 기업의 제2의 도약의 시기라느니 죽기 살기로 뛰어야 할 험난한 시절이라느니 하는 주문을 하곤 한다. 적어도 직원들의 위기감 강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 측면에서는 일정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국가의 수반이라면 이야기가 틀리다. 국민들은, 그리고 시장은 CEO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다. 이 예측불가능의 복잡계는 대통령이나 경제수반의 발언에 제각각의 행동양식을 보이는데, 때로 발언주체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러기에 일반적으로, 상식이 있는 지도자라면 자신이 책임지는 나라의 경제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삼가며, 오히려 때로 의도적으로 잘 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해서 국민을 안심시키고 시장을 안심시켜 때로 현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그 발언 자체로 좋아지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입성 이후로 틈만 나면 ‘경제위기’니 ‘제3오일쇼크’니 ‘촛불집회가 대외신인도를 떨어트린다느니’ 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이래서야 내가 해외투자자라도 투자를 하기 싫을 지경이다. 공황을 뜻하는 영단어가 괜히 panic이 아니다. 경제는 심리다. 위기라고 생각하면 어느새 위기가 된다. 멀쩡하던 은행도 예금자들이 불안에 떨며 예금을 인출하면 – 이른바 bank run – 어쩔 수 없이 부실은행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은행장도 아닌 대통령이 지금 나라 망한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성장률을 논할 때는 지났다. 이제는 저성장을 용인해야 한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내수경제 시스템으로의 전환, 자원절약형 경제 시스템으로의 전환(주5)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불어 현재 경제피폐로 망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는 북한을 포용하는 한반도 경제권의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앞길이 구만리인데 정부는 이제야 물가관리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주1) 이명박 재임기간 동안 연 7% 성장을 유지하면 임기말에 우리나라 경제규모는 30% 이상 증가한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주2) 사실 이 방법은 노무현도 써먹은 방법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BTL민자사업에 하수도 관거를 끼워 넣어 성장률을 상향시켰다. 하지만 적어도 하수관거는 필요불급한 시설이다.

(주3) 미국이 아무리 달러가 똥값이 되었을지언정 미재무부 장관은 늘 자신들의 기조는 ‘강한 달러’라고 노래를 부른다.

(주4) 이는 반절은 맞는 말이고 반절은 틀린 말이지만 적어도 기획재정부 장관이 시장에 대고 그 따위 독설을 퍼붓는다는 것 자체는 몰상식한 짓이다

(주5) 아~ 이명박 정부는 최근 대체에너지원으로 가장 크게 각광받고 있는 태양광 발전소에 대한 정부지원을 중단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열심히 짓겠다는 결정도 내렸다.

성장과 분배에 관한 단상

경제가 어려울때는 분배보다는 성장이 우선이라고 외친다.. 하지만 경제가 아무리 잘되더라도, 재벌(대기업)들, 돈있는 자들이 잘살지… 하루살이 일용직 근로자는 항상 어렵게 산다.”

이 생각에 대한 (예전의.. 어쩌면 현재도?) 나의 생각…

우리가 이야기하는 성장은 무엇인가? 지구적인 차원에서 성장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개발을 통해 물질문명이 얼마나 발전하였는가의 문제를 말한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담론에서 거론되는 성장이란 사실 개별국가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결국 성장이란 지구적 차원에서 생산되는 ‘부(Wealth)’가 어떻게 개별국가에 분배되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결국 성장은 분배의 또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성장은 노동의 결과이고 분배는 그 성장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장과 분배’ 이분법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분배란 무엇인가? 국가단위에서 보면 국가단위로 할당된 부가 어떤 계급에 의해 향유되는가 하는 문제가 핵심 포인트이다. 부는 어떤 형태로든 분배가 된다. 그것이 적정하게 배분되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어떠한 분배가 적정한 분배인가? 이는 또다시 성장, 즉 국제적인 관점에서의 분배의 문제와 동일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오늘날 국적을 불문하고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하루 2달러 미만의 삶을 영위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극빈층의 상당수는 소위 남반구, 즉 빈국에 집중되어 있다. 애초에 개별국가에 대한 분배가 현재의 경제 체제 하에서 정당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필자는 현재의 분배가 정당한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고 보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배라는 단어는 그러한 국제 간 분배 불균형의 일국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현재 분배되어야 할 부의 크기가 나눠가져야 할 사람의 전체효용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한가? 많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고 필자 역시 상당부분 동의한다. 나라사이에서건 개인사이에서건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분배가 적당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최빈국들은 인간 이하의 삶의 조건 속에서 굶어죽거나 약이 없어 죽어가고 있으며, 기타 국가들은 신용카드 남발, 각종 대출상품의 남발 등의 가수요 유발을 통해 경제 사이클을 유지시켜 나가고 있다.

요컨대 성장과 분배 이분법에 있어 ‘성장’은 사실은 분배의 또 다른 표현이며 보다 정확하게 성장은 지구적 차원에서 창출된 ‘부(Wealth)’의 표현양식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부는 명백히 분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부를 오직 교환가치 실현을 통한 일국의 가치전유(즉 국가간 분배가 잘못 표현된 용어로써의 국가의 성장)로만 사고하는 방식은 이러한 전제조건을 무시하고 있는 허위의식이다.

한 나라의 분배의 양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개인의 분배를 유보시키라는 주장이 대표적인 허위의식이다. 최빈국의 인민들이 분배를 유보하여 오늘날 그들이 잘살고 있는가, 그들이 정말 하루 2달러밖에 얻을 수 없을 만큼의 노동밖에 투여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면 의외로 답이 쉽게 나온다. 이런 원론적인 문제를 되짚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성장론자들은 그들의 성장우선론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설파할 것이다. 최고급의 거품욕조에서 샴페인을 즐기며…..

2004-04-19

너무나 차이나는 프랑스와 한국의 우익

최근 이래저래 스캔들 메이커가 되고 있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가히 혁명적인(!) 발언을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AFP 통신에 따르면 그는 지난 화요일 주 35시간 근무제를 폐지하겠다는 강경발언-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야 주 40시간 근무라 해도 부러울 판이다. – 에 따른 반발 직후인 수요일에는 기업이윤을 주주배당, 노동자, 투자에 대해 각각 1/3씩 나누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국내언론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매일경제는 AFP의 기사내용을 거의 번역한 것이나 진배없는 내용으로 별도의 의견 없이 기사를 게재하였다. 조선일보는 사르코지의 이러한 발언이 주 35시간 근무제 폐지에 따른 좌익과 노동계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회유책이라고 논평하였다. 지난번 프랑스 파업당시 강경책으로 일관한 사르코지에 대한 찬양에서부터 최근 그의 연애 스캔들까지 사르코지를 밀착취재하고 있는 동아일보는 굳이 이 기사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그의 발언의 진위가 무엇이든 솔직히 부럽다.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사르코지가 우익에 트로이의 목마를 타고 몰래 잠입한 좌익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물론 농담이다) 적어도 노동자에게 이 정도는 베풀어야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감내하자는 발언을 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사르코지로 비견될만한 어느 분이 비슷한 시기에 하신 말씀을 들어보자. 노동을 자원봉사 하듯이 하란다. 이른바 실용 리더십이라고 두 양반이 닮았다는 보도도 있던데 참 한숨 나온다.

어쨌든 그의 발언은 엄밀하게 말해 뭐 좌익적인 발언도 아니고 분배에 중점을 두겠다는 발언도 아니다. 그것은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곧 노동자이고 이들의 가처분소득이 늘어나지 않으면 경기진작은 있을 수 없다는 자본주의 경제의 평범한 진리를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회주의 블록 붕괴 이후의 자비심을 잃은 주주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유연성 증가에 따른 노동자 임금손실분을 카드론이나 모기지론과 같은 미래소득에 대한 저당으로 해소하려 하였고 그 부작용이 지금 서브프라임에서 터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글들은 사르코지의 해당 발언에 관한 AFP 기사의 전문번역이다. 원문은 여기를 클릭하실 것.

Sarkozy proposes companies pay a third of profits to employees
사르코지가 기업에게 이윤의 3분의 1일 종업원에게 줄 것을 제안하다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스 사르코지가 수요일 기업이윤의 1/3은 주주와 투자분으로 남겨놓은 양과 같은 양만큼 종업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의회에서 “기업이윤의 1/3이 각각 주주, 종업원, 그리고 투자에 쓰이는 체제는 일관되고 논리적인 체제입니다.” 라고 발언하였다.

그는 “그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를 분명히 말하고 무엇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 역자주)를 말해야 할 겁니다.” 라고 덧붙였다.

중도우익 정부를 감독하는 사르코지는 프랑스의 관습과 경제를 개혁하여 성장과 삶의 수준을 촉진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당선되었다.

이미 지난해 초 대통령 캠페인 당시부터 뜨거운 이슈였던 구매력에 관한 대중적 관심은 여전히 여론조사에서 투표자들의 최우선 관심사이다.

사르코지는 그의 급진적인 제안이 구매력을 촉진시키는데 일조할 것이고, 이와 더불어 그가 이행하고자 하는 노동시간 연장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윤분배가 구매력과 상관없다는 발언, (또는) 임금분배를 위해 내가 제안했던 것만큼이나 근본적인 혁명(적 조치 : 역자주)이 구매력과 상관이 없다는 발언은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나는 소비력에 관한 이 문제를 (종업원)의 참여와 이윤분배에 대한 일종의 혁명으로 제안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그가 화요일에 금년에 결론내고 싶다고 말한 주당 35시간 노동이라는 뜨거운 이슈로 돌아가 대통령은 이것이 분명히 소비력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분명히 주 35시간 노동은 소비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임금인상에 급브레이크가 걸렸기 때문입니다.”

주 35시간 노동을 끝내자는 사르코지의 화요일의 발언은 좌익으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샀고 우익으로부터는 찬사를 받았다.

이 이슈는 어떻게 프랑스 경제와 후한 사회복지 체제를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들의 피뢰침으로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