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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6개 이상의 택배”를 토해내는 컨베이어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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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강도의 증대는 같은 시간 내의 노동력 지출의 증가를 의미힌다. 그러므로 노동강도가 보다 높은 노동일은 노동강도가 보다 낮은 노동일에 비해서, 비록 각각의 노동일은 같다고 하더라고, 더욱 많은 양의 생산물로 체화된다. [중략] 그리하여 노동일의 길이가 불변인 경우, 강도가 높아진 하루의 노동은 증대된 가치로, 그리고 [화폐가치가 불변인 경우에는] 더욱 많은 화폐로 나타날 것이다. 1노동일에 창조되는 가치는 그 강도가 사회적 표준강도로부터 이탈되는 정도에 따라 변동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노동일은 이제는 더이상 불변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자본론 I하,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659]

칼 맑스는 매뉴팩쳐 시대에서 대공업 시대로 넘어가는 19세기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자본가가 어떻게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창출해내는가를 밝히기 위해 자본론을 집필하였다. 맑스는 시스템을 분석하기 위해 우선 자본을 불변(不變)자본과 가변(可變)자본으로 분류한다. 그는 대공업 시대에 등장한 기계라는 생산수단은 기계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가치를 가감 없이 생산물에 이전하는 불변(不變)자본으로 기능하는 반면,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필요노동보다 더 많은 잉여노동을 생산물에 체현하는 가변(可變)자본으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이 상황에서 자본가는 시장의 경쟁에서 이기고자 “사회적 표준강도”를 초과하는 노동강도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쥐어짠다.

오후에 트럭이 도착하자 컨베이어벨트가 택배를 울컥울컥 토해내기 시작했다. 초당 6개 이상의 택배가 눈앞을 지나갔다. “하나씩 들고 옮길 시간 없어. 그냥 던져요, 빨리!” 지시와 함께 박스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취급주의’, ‘위험’, ‘유리’ 등 경고문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1초의 휴식시간도 없이 작업은 이어졌다. 분류 파트에 있던 노동자가 다리가 아팠는지 탁자에 걸터앉자 관리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작업장에서 앉는 거 아니에요. 일어나세요.” 작업의 종료를 알린 건 관리자도, 시계도 아닌 컨베이어벨트였다. 주간 물량을 마감하는 오후 5시 30분이 되자 컨베이어벨트가 작동을 멈췄다.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는 4시간 반 동안 휴식시간은 0초였다.[“이곳은 21세기 막장”···기자 5인이 뛰어든 쿠팡 물류센터]

“초당 6개 이상의 택배”를 토해내는 컨베이어벨트는 맑스의 분류에 따르면 불변자본이다. 컨베이어벨트는 우직하게 기계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가치를 아낌없이 배송물에 이전한다. 또 한편으로 기계는 자신과 공동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노동자, 즉 가변자본의 보다 많은 가치 창조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한다. 즉, 기계는 노동자가 잠시도 앉아서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높은 노동강도로 작동하여 같은 노동일에 더 많은 가변의 가치를 창조하게끔 하는 것이다. 분류가 빨리 끝나면 배달을 빨리할 수 있고 [화폐가치가 불변인 경우에는] 더욱 많은 화폐로 나타날 것이다. 또한 사회적 표준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배달을 하면 업계의 시장점유율도 높아질 것이다.

노동시간의 강제적 규제를 공장주에 대하여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으로 보며 도매상에 대하여 공장주 자신을 보호하는 것으로 보는 런던의 한 공장주는 다음과 같이 발한다. “우리 사업에 대한 압력은 수출업자들 때문에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범선으로 상품을 발송하여 일정한 계절이 시작될 때 목적지에 도착하게 하여, 범선과 기선 사이의 운임의 차액을 착복하려고 노력하거나, 또는 그들이 경쟁자들보다 먼저 외국시장에 나타나려고 두 개 기선 중 빠른 편을 택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5차 보고서 p117, 자본론 I하 p605에서 재인용]

사실 자본론은 상당 부분 산업자본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쿠팡과 같은 유통자본에 대한 서술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인용문에서도 보다시피 유통자본은 당시에도 공장주를 닦달할 만큼 노동강도에 대한 욕망이 강했다. 우리는 유통자본이 운임의 차이로 인한 차액, 빠른 도착을 통한 시장 독점 등의 욕망이 있었기에 공장주로 하여금 노동시간을 늘리도록 강요하였다는 사실을 그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최근의 일련의 사태를 보며 우리는 오늘날 플랫폼 경제 시스템 속에서도 유통자본의 이런 욕망이 크게 식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다. 오히려 컨베이어벨트나 AI와 같이 제조업을 흉내낸 최신 기계의 도입으로 노동강도에 대한 욕망은 더욱 집요해지고 조밀해졌다.

“時間의 主人”은 누구인가?

그보다도 더 큰 이익은 노동자 자신의 시간과 고용주의 시간 사이에 드디어 명백한 구별이 생겼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이제 자기가 판매하는 시간이 언제 끝나고 언제부터 자기 자신의 시간이 시작되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을 미리부터 정확히 알고 있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시간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미리 배정할 수 있게 된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59년 10월 31일, p52) 그것(공장법)은 노동자들을 자기 자신의 時間의 主人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그들을 정치적 권력의 궁극적 장악으로 향하게끔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그들에게 부여하였다.(같은 보고서 p47)[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384]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정해놓고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時間의 主人”이라 칭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공장감독관으로서는 – 특히 노동자에게 온정적이었을 공장감독관이라면 더욱 – 자못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에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영국 사회는 19세기 중반 당시 가장 선진화되었던 자본주의 시스템이었으니 이미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과 갈등이 표출되었고 결국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치열한 내전(內戰)의 결과로 노동자는 ’10시간 노동법’이나 ‘아동노동 금지’라는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時間의 主人”으로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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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ino Antero Bergius – http://www.uta.fi/koskivoimaa/tyo/1900-18/index.htm, Public Domain, Link

앞서 말했듯이 노동시간의 규제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개혁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부수적 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자본가는 이전의 가내 수공업 중심의 상품생산 시스템을 대규모로 지어진 건물 내에서의 기술집약적인 프로세스로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 발달로 대규모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1 노동자는 그들의 정치적 의지를 표현할 조직화가 용이해졌고2,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노동력은 사회적 평균의 균질화로 이어져 단일한 노동시간 제한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내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기술발전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들 이롭게 만들었던 셈이다.

요기요 AI는 먼저 들어온 주문을 제쳐두고 뒤에 들어온 주문을 우선 배달하라고 명령했다. 첫 번째 주문을 한 손님은 화가 날 터이지만, 욕은 라이더가 들어야 한다. 돌발 상황도 벌어졌다. 12층에 올라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계단으로 뛰어간 라이더, [중략] 주소를 잘못 적은 손님 때문에 20분 동안 헤맨 라이더, 조리가 늦어져 식당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라이더까지. AI는 이런 변수를 계산하지 않는다. [중략] 누군가는 우리를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라 부르지만 족쇄와 ‘캐삭’ 사이를 아슬아슬 달리는 평범한 노동자일 뿐이다. 디지털일터에 AI라는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됐다. AI에 대한 규제와 통제 없이 플랫폼노동 대책도 없다.[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다]

이제 기술발전이 자본가에게만 유리한 시스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오늘날의 플랫폼 경제가 처음에 “공유경제(共有經濟)”라는 기만적인 이름표를 달고 사회 모두에게 이로운 시스템인 것처럼 행세했으나 이내 플랫폼이 자본에 의해 점령될 경우 “공유경제”는 그 즉시 “플랫폼은 사유(私有)지만, 사회적 비용은 공유(共有)”인 시스템으로 고착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칼 맑스가 서술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인 것처럼 보였고 아직도 플랫폼의 점령자들은 그러하다 주장하고 있는 우리의 “자유로운 생산자”도 사실은 자신이 AI라는 신개념 콘베이어벨트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19세기 노동자보다 더 퇴행적인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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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to by CEphoto, Uwe Aranas or alternatively © CEphoto, Uwe Aranas, CC BY-SA 4.0, Link

이제 그들은 더 이상 “時間의 主人”이 아니다. AI는 그들의 편의대로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임의로 늘려버린다. AI는 배달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사정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 정부는 집권 초기 주52시간 근무제라는 엉성하지만, 그럼에도 살인적인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해 다소 개혁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였지만, 플랫폼 경제의 자본은 다시 노동자에게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생산자)” 혹은 “개인사업자”라는 직함을 씌워주고서는 노동시간 제한의 “족쇄”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해방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 AI라는 족쇄를 씌워서 그들이 “時間의 主人”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21세기의 정부와 공장감독관은 새로운 노동법을 만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본을 감독해야 한다. 자본가의 행태와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이차산업 중심의 대규모 공장을 짓던 자본과 그곳에서 근무하던 노동자에게 적용되던 법과 제도는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 어떤 자본은 플랫폼을 선점하자마자 지분을 일본의 사모펀드에게 넘겨 엄청난 투자금을 받아 그걸로 플랫폼을 독점하였고, 미국 주식시장에 회사를 상장시킨 후 창업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피해 모든 공식직함을 던져버렸다. 그런데 때마침 그 플랫폼의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화재의 진화는 한국 사회가 부담하였으며 그 보험료는 한국 보험사에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늘 그랬듯이 자본은 “時間과 空間의 主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