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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화(無人化)의 그림자

이전 글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지금 자본은 또 다시 도래한 인플레이션 시대 등에 대비하여 노동자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자본은 무인화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는 제조업이 대공장으로 재편되던 시기에 기계화를 통해 노동력을 대체하려던 시도와 동일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1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은 제조업에 비해 일관된 공정이 아니고 고객과 직접 대면하여 응대를 해야 하는 서비스업에서 이러한 무인화가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비스업 노동 중에서도 소비자가 요즘 가장 빈번하게 접하게 되는 무인화 서비스는 소위 “키오스크“라 불리는 무인단말기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무인단말기 앞에서 커피나 음식을 주문하고 직원에게 완성된 제품을 받는 서비스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커피나 음식의 제조마저 로봇이 제조하는 매장이 등장하고 때로는 이 과정도 눈요기로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종래에는 완전한 무인화 매장에서 우리는 종업원의 도움도 없이 제품을 받는 행위가 일상화될 것이다. 지금의 현재가 어쩌면 과거 사람들이 꿈꿨던 미래세계다.

그러면 이러한 무인화 서비스의 신세계는 과거의 SF영화가 그렸듯이 아름답고 깔끔한 미래의 세계에 부합하는 그런 세계일 것인가? 불행하게도 그러한 세계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림자가 몇 겹 짙게 드리워져 있다. 첫 번째 그림자는 그 세계는 당연하게도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는 사회라는 점이다. 두 번째 그림자는 그 세계는 무인화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소수자를 배제하는 사회라는 점이다. 세 번째 그림자는 그 세계는 자본이 부담해야 할 각종 비용을 공공에게 전가시키는 사회라는 점이다.

An automat in Manhattan, New York City in 1936.
By Berenice Abbotthttps://digitalcollections.nypl.org/items/510d47d9-4f4a-a3d9-e040-e00a18064a99, Public Domain, Link

첫 번째, 어떤 면에서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며 필수 노동인력이 줄어드는 마당에서 무인화 노동은 어쩔 수 없는 대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릇 모든 기술 발전이 그렇듯 무인화 기술 역시 친자본이냐 친노동이냐에 따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소비자에게 결재노동을 전가시키는 “셀프 결재” 기능의 도입에 따라 대규모소매점에서 지난 몇 년간 많은 노동자가 해고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노동자의 해고를 용이하게 하는 셀프 결재의 도입이 상당 부분 소비자의 양심적인 결재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2

두 번째, 무인화 노동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장애인 등 소수자 소비자를 배제하고 있다. 며칠 전에 시각장애인이 한 햄버거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무인단말기를 이용하여 제품을 구매하는 시위(!)를 벌여 한 매체가 보도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 혹은 휠체어 이용자가 단말기를 이용하는 것 자체가 시위로 둔갑할 만큼 단말기 이용은 장애인에게는 엄청난 도전이다. 이렇듯 많은 서비스 노동자를 배제한 무인화 서비스는 서비스 이용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이나 다른 소수자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 되는 그런 신세계다. 차별적인 서비스라 아니할 수 없다.

세 번째, 소위 “공유경제”가 그렇듯 무인화 서비스 역시 주요한 이윤의 원천 중 하나는 여태의 기존 서비스가 치러야할 치안, 안전, 보건 등 기본적인 서비스에 소요되는 비용을 공공에게 전가시키는 서비스라는 심증이 짙어지고 있다. 매장 이용자가 범죄나 사보타주와 같은 행동을 할 때 이전 같으면 상주하고 있는 직원이 그러한 상황을 통제하겠지만, 무인화 매장에서는 행정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당연하게도 자본이 부담해야할 비용을 부담하지 않은 결과다. 무인화 매장의 지속 가능성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정도에서 살펴보듯이 서비스 노동의 무인화는 인구구조 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동시에 소수자의 서비스 이용에 대한 대안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해결해야할 장벽이 많은 그런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맑시즘적 입장에서 보면 노동력이라는 가변자본이 기계라는 불변자본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현상도 가속화될 소지도 있을 것이다. 거칠게 보아도 노동자는 기계와 달리 감가상각비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단기적인 비용절감을 넘어선 이윤율 저하는 소자본에게 특히 치명적일 것이다.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

Vaughan ignored the remark. “I don’t want you to close the beaches,” he said.
“So I see.”
“You know why. The Fourth of July isn’t far off. and that’s the make-or-break weekend. We’d be cutting our own throats.”
“I know the argument, and I’m sure you know my reasons for wanting to close the beaches. It’s not as if I have anything to gain.”
[중략]
Brody sighed. “Shit,” he said. “I don’t like it. it doesn’t smell good. But okay, if it’s that important.”
“It’s that important.” For the first time since he had arrived, Vaughan smiled. “Thanks, Martin,” he said, and he stood up. “Now I have the rather unpleasant task of visiting the Footes.”
“How are you going to keep them from shooting off their mouth to the Times of the News?”
“I hope to be able to appeal to their public-spiritedness,” Vaughan siad, “just as I appealed to yours”
[Jaws, Peter Benchley, 三志社, 1984년, pp 86~92]

Steven Spielberg의 걸작 영화로 잘 알려진 Jaws의 원작 소설 중 일부분이다. 뜨내기 여인이 해변에서 상어의 습격으로 추정되는 공격을 당해 온 몸이 찢긴 채 해변에서 발견된 다음 날, 이에 해변을 폐쇄하려는 경찰서장 Martin Brody와 이를 말리는 읍장 Larry Vaughan의 설전을 묘사한 장면이다.

읍장의 논리는 여름 한철 장사로 그 해를 탈 없이 지내는 조그만 휴양지촌인 Amity가 뜨내기 여자의 죽음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경찰서장 Brody는 공공의 안녕을 위해 2~3일 간 해안을 폐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자치조례에 따라 자신을 해임할 수도 있다는 읍장의 협박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읍장이 서장의 입을 막으려는 또 다른 논리 역시 서장의 논리와 유사하다. 즉, 그것은 바로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이다. 서장의 논리가 불특정 다수인 공공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목적이라면, 읍장의 논리가 공공, 즉 Amity 읍민들의 경제적 이해를 해치지 않겠다는 – 더불어 스스로 부동산 개발업자인 자신의 경제적 이해도 – 의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서장에게 가장 큰 위협은 읍장의 해임 협박이었지만 그 역시도 읍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 즉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정서에 공감한 바도 크다. 소설에서는 그 해 여름 장사를 망칠 경우 Amity읍민의 1/3이 생활보호 수당을 받아야 할 정도의 가난한 읍으로 그리고 있다. 투표에 의한 선출직인 서장 역시 이러한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동일한 문제에 봉착할 경우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여야 할까? 경제적 피해는 다수에게 미치지만 상어의 습격은 극소수, 그 또한 지극히 희박한 확률 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자의 보호가 더 시급한 문제라고 판단하면 될까? 원작에서 Amity읍은 전자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어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결국 후자의 결정으로 선회하였다. 우리 역시, 특히 ‘경제적 이익’과 결부된 의사결정에서는 ‘경제적 요소’가 일차적인 고려사항이 되는 경우가 많다.

FTA에서 그러했고, 환경문제와 경제적 이익이 상충할 때에 그러했고, 지난 선거철 뉴타운 이슈가 그러했고, 기업 및 공공기관의 구조조정 시에 경쟁력 강화라는 슬로건을 채택할 때에 그러했다. 하지만 때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적은 확률적 문제에 불과하기에 간과되었던 ‘상어의 습격’으로 인해 그간 얻었던 경제적 이익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때도 있었고, 지불할 개연성도 있는 상황이 많다.

이는 또한 소수자의 보호의 이슈일수도 있다. 즉, 다수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과 소수자의 이익을 보호하여야 하는 것이 있을 때에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라는 논리를 들어 소수자의 이익(또는 권리)을 쉽게 포기하곤 한다. 하지만 다수의 이익을 관철하는 것이 대의민주제에 반드시 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해변의 안정이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든지 해변에 나가서 수영하는 한 상어의 습격은 무차별적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요컨대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이라는 개념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공화제를 채택한 이래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크기와 내포하는 의미가 변화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왕이나 귀족이 누리던 특혜를 공공(public)이 함께 누린다는 이상향의 큰 틀은 당연시되지만 세세한 항목은 때때로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했고 공공 스스로에 의해 수정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전의 공공성 개념이 그랬듯 21세기 형 공공성은 어떠해야 할지는 결국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공공정책 수행의 제약조건

지난번 [공공의 이익 vs 사적 이익]이라는 글에서 아래와 같이 적은 바 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국민의 돈을 걷어서 그들이 늙었을 때 적정수익을 합쳐 연금을 줘야 하는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는 기관이다. 국민연금은 그래서 마땅히 최대의 수익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연금이 터널을 인수해 MRG를 기반으로 수익을 창출하려고 했는데 도가 승인권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혈세”를 절감하였다. 이때 국민, 더 구체적으로 강원도민은 국민연금 편을 들어야 할까 강원도 편을 들어야 할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국민연금이 대변하는 이해관계자의 숫자가 강원도가 대변하는 이해관계자의 숫자보다 크다. 강원도민의 세금이 “혈세”1인만큼 국민연금 납부금도 “피의 납부금”일 수 있다. 액면으로만 보면 강원도는 세금절감이라는 이유로 보다 큰 공공의 이익을 침해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내 미래의 연금수익이 미시령 터널을 통과하는 통행자가 더 싼 값에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쓰였다는 소리다. MRG가 있기에 또한 통행료 인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독자들이 헷갈리게끔 일부러 약간 트릭을 썼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위 사례를 단순히 보면 언뜻 강원도가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글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이해관계와 강원도의 이해관계가 꼭 상충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금전적이냐 사회효용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즉 국민연금은 연금가입자에게 화폐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투자이익의 최대화가 사업추진의 목적이라면 강원도는 어느 정도는 미시령 터널 이용이라는 – 화폐가치로의 환원이 쉽지 않은 – 사회적 효용의 극대화가 사업추진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그 사회적 효용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갈등하는 이해관계자들의 수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정 정도의 타협을 감수할 수도 있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어느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에서 수적 다수의 의견이 대체적으로 옳은 의견이고 설사 그렇지 않다 치더라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특정 사안이 결정되면 그에 따라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하여야 할 것이 다수일지라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상대적 소수의 의견이 여전히 관철되어야 할 것들이 다수 존재함을 유의해야 한다. 즉 수적으로는 다수이나 권력관계에서 소수인 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뿐만 아니라(주1) 수적으로도 소수인 이의 이해관계가 상대적 다수의 이해관계를 침해한다 할지라도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다면 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적 다수가 금전적 이해에 매몰되어 상황을 그르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지난 총선 여러 선거구에서 불었던 이른바 뉴타운 열풍으로 인한 다수당의 승리도 이러한 경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국제관계에서 보면 거대한 인구의 중국이나 미국이 경제적이나 정치적인 이해관계때문에 적은 인구의 나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나는 “다수에 의한 이기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각설하고 질적 양적 소수를 보호하여야 함이 타당한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장애인에 대한 교통정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은 분명히 권력관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소수다. 그렇기에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는 대중교통을 장애인까지 배려한 방식으로 조직하려면 사업타당성 측면에서는 분명히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배려하기 위한 비용은 지출되어야 하고 오늘날에도 많은 장애인들이 이를 관철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점점 사회적 인식도 바뀌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러한 질적/양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배려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개인적으로는 그 배려를 통한 효용의 가치측정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연금이 미시령 터널 인수를 통해 얻어지는 이익은 수익률이라는 숫자로 명확하게 표시되고 주주에 대한 배당금으로 실현된다. 하지만 미시령 터널 이용을 통해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효용을 얻었는지는 참으로 측정하기 어렵다. 심지어 일부 사회적 효용은 그 정당성마저 의심받을 때도 있다.(주2) 이것이 공공정책 시행의 딜레마다.

사회적 효용을 계량화시키는 방식에 대해 사회 대다수가 동의할 시점이 언제쯤이나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주1) 이에 관련하여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여기 등장하고 있는 국민연금이고 또한 국민건강보험이다. 이들 공적기금은 각각 가진 사람이 더 내고 못 가진 사람이 더 혜택을 받는 평등주의적 성격이 강한 공적부조다.

(주2) 이를테면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피해 받는 어느 도롱뇽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문제는 혹자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환경과 생태보호의 차원으로 다가오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그깟 도롱뇽 몇 마리 때문에 뭐하는 짓이냐는 비난을 받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특히 도시정책에서는 때로 사회적 효용이라는 것이 이해관계자에 따라 제각각으로 나눠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