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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間의 主人”은 누구인가?

그보다도 더 큰 이익은 노동자 자신의 시간과 고용주의 시간 사이에 드디어 명백한 구별이 생겼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이제 자기가 판매하는 시간이 언제 끝나고 언제부터 자기 자신의 시간이 시작되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을 미리부터 정확히 알고 있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시간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미리 배정할 수 있게 된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59년 10월 31일, p52) 그것(공장법)은 노동자들을 자기 자신의 時間의 主人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그들을 정치적 권력의 궁극적 장악으로 향하게끔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그들에게 부여하였다.(같은 보고서 p47)[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384]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정해놓고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時間의 主人”이라 칭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공장감독관으로서는 – 특히 노동자에게 온정적이었을 공장감독관이라면 더욱 – 자못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에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영국 사회는 19세기 중반 당시 가장 선진화되었던 자본주의 시스템이었으니 이미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과 갈등이 표출되었고 결국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치열한 내전(內戰)의 결과로 노동자는 ’10시간 노동법’이나 ‘아동노동 금지’라는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時間의 主人”으로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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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노동시간의 규제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개혁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부수적 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자본가는 이전의 가내 수공업 중심의 상품생산 시스템을 대규모로 지어진 건물 내에서의 기술집약적인 프로세스로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 발달로 대규모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1 노동자는 그들의 정치적 의지를 표현할 조직화가 용이해졌고2,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노동력은 사회적 평균의 균질화로 이어져 단일한 노동시간 제한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내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기술발전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들 이롭게 만들었던 셈이다.

요기요 AI는 먼저 들어온 주문을 제쳐두고 뒤에 들어온 주문을 우선 배달하라고 명령했다. 첫 번째 주문을 한 손님은 화가 날 터이지만, 욕은 라이더가 들어야 한다. 돌발 상황도 벌어졌다. 12층에 올라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계단으로 뛰어간 라이더, [중략] 주소를 잘못 적은 손님 때문에 20분 동안 헤맨 라이더, 조리가 늦어져 식당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라이더까지. AI는 이런 변수를 계산하지 않는다. [중략] 누군가는 우리를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라 부르지만 족쇄와 ‘캐삭’ 사이를 아슬아슬 달리는 평범한 노동자일 뿐이다. 디지털일터에 AI라는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됐다. AI에 대한 규제와 통제 없이 플랫폼노동 대책도 없다.[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다]

이제 기술발전이 자본가에게만 유리한 시스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오늘날의 플랫폼 경제가 처음에 “공유경제(共有經濟)”라는 기만적인 이름표를 달고 사회 모두에게 이로운 시스템인 것처럼 행세했으나 이내 플랫폼이 자본에 의해 점령될 경우 “공유경제”는 그 즉시 “플랫폼은 사유(私有)지만, 사회적 비용은 공유(共有)”인 시스템으로 고착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칼 맑스가 서술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인 것처럼 보였고 아직도 플랫폼의 점령자들은 그러하다 주장하고 있는 우리의 “자유로운 생산자”도 사실은 자신이 AI라는 신개념 콘베이어벨트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19세기 노동자보다 더 퇴행적인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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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to by CEphoto, Uwe Aranas or alternatively © CEphoto, Uwe Aranas, CC BY-SA 4.0, Link

이제 그들은 더 이상 “時間의 主人”이 아니다. AI는 그들의 편의대로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임의로 늘려버린다. AI는 배달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사정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 정부는 집권 초기 주52시간 근무제라는 엉성하지만, 그럼에도 살인적인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해 다소 개혁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였지만, 플랫폼 경제의 자본은 다시 노동자에게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생산자)” 혹은 “개인사업자”라는 직함을 씌워주고서는 노동시간 제한의 “족쇄”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해방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 AI라는 족쇄를 씌워서 그들이 “時間의 主人”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21세기의 정부와 공장감독관은 새로운 노동법을 만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본을 감독해야 한다. 자본가의 행태와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이차산업 중심의 대규모 공장을 짓던 자본과 그곳에서 근무하던 노동자에게 적용되던 법과 제도는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 어떤 자본은 플랫폼을 선점하자마자 지분을 일본의 사모펀드에게 넘겨 엄청난 투자금을 받아 그걸로 플랫폼을 독점하였고, 미국 주식시장에 회사를 상장시킨 후 창업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피해 모든 공식직함을 던져버렸다. 그런데 때마침 그 플랫폼의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화재의 진화는 한국 사회가 부담하였으며 그 보험료는 한국 보험사에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늘 그랬듯이 자본은 “時間과 空間의 主人”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

자본가는 노동일을 될수록 연장해서 가능하다면 1노동일을 2노동일로 만들려고 할 때, 그는 구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판매된 이 상품의 특수한 성질은 구매자에 의한 이 상품의 소비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노동일을 일정한 표준적인 길이로 제한하려고 할 때 그는 판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이율배반이 일어나고 있다. 즉, 쌍방이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에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296]

자본론에서 처음으로 “투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이다. 결기가 차고 넘치는 “불온서적”치고는 꽤 늦게 투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느낌이다. 여기서 투쟁이라는 표현은 바로 냉철한 상품교환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하는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을 의미한다.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갈등은 통상 거래가격에 대한 갈등일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보통의 거래는 상품의 양도 시점과 가격의 지불 시점을 일치시킨다. 그런데 어떤 상품은 – 대표적으로 노동력 – 이 양자 간의 시점이 일치하지 않아1 갈등을 초래한다. 또는 시점이 일치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과대추정 혹은 과소추정되어 갈등을 일으킨다. 역사적으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판매자인 노동자계급에 의해 그 가격이 과소추정되었다는 주장에 따라 노동시간의 단축 등의 투쟁을 촉발하였던 것이다.

결국, 노동자계급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력을 시장에서 제값을 받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이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과 유급휴가의 확보라는 결실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역사적 재평가에 급제동을 걸고 있는 조류가 새로 등장하고 있으니, 그것은 플랫폼 경제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해체다. 이 조류는 자유로운 노동력의 소유자인 노동자를 플랫폼에 예속시켜 마치 봉건시대의 농노처럼 플랫폼의 농노로 후퇴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 맑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의 주장이다.2 노동시간은 노동자 각각의 특성에 따른 저마다의 노동시간이 아닌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서만이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3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균일한 노동력의 보유자인 조직 노동의 투쟁을 통해서 보다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자본이 택한 전략은 이 노동자성의 해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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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www.flickr.com/people/37818606@N00″>Franklin Heijnen</a> –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www.flickr.com/photos/franklinheijnen/29759890963/”>DSCF2049.jpg</a>, CC BY-SA 2.0, Link

이미 서구국가에서의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이전과 같은 노동조직은 약화되어왔다. 그런 한편으로 우버와 같은 플랫폼 경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제거시켰다. 즉, 노동력의 구매자인 자본가는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에게 ‘너는 더 이상 나에게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운행 서비스와 같은 용역을 파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운행 서비스라는 사용가치를 창조해내는 노동력이라는 교환가치를 보유한 노동자로부터 기적처럼 노동자성을 삭제함으로써 노동자를 개인사업자(혹은 자신의 자동차를 생산수단으로 하는 자본가)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에 각국 사법체계가 어느 정도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성과도 얻어내고 있으나 아직도 자본은 아직 조직적 행동 역량이 떨어지는 배달 노동자와 같은 이들에게 노동시간이 아닌 업무성과라는 기만적인 노동관행을4 강요함으로써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을 피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 지부장에 따르면 쿠팡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배송현황 애플리케이션은 휴게시간에도 접속할 수 있어 정규직 전환을 위해 쉬는 시간에도 배송을 계속하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한다.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상대평가를 하는 터라 노동자끼리 배송물량 경쟁을 부추긴다. 또 최근 사측이 인센티브 정책을 변경하면서 그 기준을 알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일하는 일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정규직도, 계약직도] 쿠팡 노동자 2명 또 쓰러졌다, 매일노동뉴스, 2021년 3월 9일]

쿠팡이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대다수를 일용직으로 채용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쿠펀치라는 어플을 통해 매일 일용직을 ‘선별’ 채용하는 것이다. 쿠팡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상시직을 제안하고 있다고 했지만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을 제안한다. 3개월·9개월·12개월 쪼개기 계약을 하고, 이렇게 2년을 다 채운 노동자 중에서 극히 일부만 ‘선별적으로’ 무기계약직을 시켜 준다.[쿠팡의 쪼개기 계약, 노조탄압 수단되나, 매일노동뉴스, 2021년 6월 10일]

사업자등록을 한 적도 없고 사업한다고 표방하지도 않았지만 배민·쿠팡·네이버 같은 플랫폼사업자가 미리 세금을 떼고 인적용역 사업자로 보고해 졸지에 ‘사업자’가 된 그들은 자신이 왜 사업자인지, 수입 대비 소득률은 왜 전문직보다 높은지 의아해한다. 플랫폼경제가 커지고 플랫폼노동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무시로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만 정부와 국회는 문제의식도 고민도 없다.[고삐 필요한 ‘플랫폼경제’, 경향신문, 2021년 6월 10일]

이 기사들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기술문명이 이루어낸 새로운 업적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노동자성 제거, 극한경쟁을 통한 24시간이라는 제한된 노동시간 내에서의 노동력 쥐어짜기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조직화되고 집단화된 노동이 ‘9시 출근 5시 퇴근’이라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 얻어낸 노동시간의 집단적 통제를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인센티브 (혹은 패널티) 제공이라는 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의 자발적(?) 노동을 추출해내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기술 봉건주의”가 다소 과한 표현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봉건제의 농노가 토지에 예속되어 있던 것처럼 오늘날의 플랫폼 노동자는 애플리케이션에 예속되어 있는 노예일지도 모른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했던 자본주의의 거래방식이 새로운 질적 국면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대를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지금 투쟁을 촉발할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이제 투쟁은 노동일에 대한 투쟁과 함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월요일 아침을 여는 노래

Stereolab은 1992년 데뷔앨범 Peng!을 내놓은 이후 작년까지도 새 앨범을 내놓는 등 꾸준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영국밴드다. 60년대의 프렌치 멜로디팝 풍의 음악을 추구하는 이들의 음악은, 여름철 깔끔한 카페에서 냉커피를 마시며 즐기면 어울릴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들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Ping Pong은 그 평화로운 멜로디 속에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가사를 숨겨놓고 있어서 무척 흥미롭다. 경제적 순환주기를 역설적 유머로 서술하는 가사는 Karl Marx의 사적유물론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이 노래의 흥겨운 멜로디로 활기찬 월요일을 맞으시되 가슴속에는 서슬 퍼런 反骨 정신을 간직하시길~

비디오 보기

괜찮아 역사적 패턴은 경제적 사이클이 어떻게 하나의 순환 고리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세 가지 단계로 회전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슬럼프와 전쟁,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올 때는 : 역자 첨가) 더 한 정도로 돌아오지.
더 큰 슬럼프와 더 큰 전쟁들, 그리고 더 작은 회복.
더 규모가 큰 슬럼프와 더 확장된 전쟁들, 그리고 더 폭 좁은 회복.
넌 언젠가는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세상은 스스로 알아서 잘 굴러가기 때문이야.
괜찮아 언제나 다시 회복되니까.
아무 걱정할 것 없어. 세상은 더 나아질 뿐이니까.
그저 수백만이 직업과 집을 잃는 것일 뿐이고 어떤 때는 이 점이 강조되지.
피의 전쟁에서 그저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을 뿐이야.
괜찮아.
그저 그들이 잃는 것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의 목숨일 뿐이야.
그저 그들이 잃는 것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의 목숨일 뿐이야.
걱정하지 말고 행복해져. 세상은 자연스럽게 더 나아질 거야.
걱정하지 말고 행복해져. 세상은 자연스럽게 더 나아질 거야.
덤, 덤, 덤, 더 덤 덤, 더 더 데 두 데 덤 덤 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