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Karl Marx

세계화 혹은 ‘공간의 압축’이 만들어 놓은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은 대공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서로 다른 지방의 노동자들 상호간에 연계를 맺어주는 교통수단의 증대에 의해 촉진된다. 그런데, 이러한 연계만 맺어지면 어디서나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는 허다한 지방적 투쟁들은 하나의 전국적 투쟁,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지방도로를 갖고 있던 중세의 시민들이 수세기를 필요로 했던 단결을, 철도를 갖고 있는 현대 프롤레타리아들은 몇 년도 안되어 달성한다.[공산주의당 선언,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 1, 김세균 감수, 박종철출판사, p409]

맑스-엥겔스주의의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공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매뉴팩처에서 자본주의의 생산성 증대는 부르주아지가 개별 소규모 공장 혹은 가정에서 행해지던 생산기능을 대규모 공장에 모아서 분업화함으로써 가능했다. 대규모 공장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또한 노동자들에게도 중요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곳곳에 산재해있던 노동자들이 단일 장소에 모이고 소통하면서 이른바 “노동계급”이라는 의식이 고양된 것이라고 보았다.

교통수단의 발달도 마찬가지 이치다. 자본가에게 있어 교통수단의 발달은 시장의 확대라는 장점을 극대화시켜준다. 교통수단이 지방도로에서 철도로 바뀌게 되면 원료를 보다 안정적으로 빠르게 조달이 가능하며, 상품 역시 보다 더 많이 신속하게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있기에 자본의 거대화와 독점화는 더욱 촉진된다. 이것은 또한 인용문에서 분석한 것처럼 노동자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전국화된 투쟁을 보다 많은 규모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엥겔수주의의 뛰어난 점은 이렇게 서로 적대하는 계급이 흥미롭게도 같은 수단을 통해 갈등이 전국화되고 극대화될 수 있다는 통찰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공장은 노동력 수탈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철도는 시장의 확대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계급투쟁을 전국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그 폭발적인 생산성 증가만큼이나 같은 속도로 계급모순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것이랄 수 있다.

Teplovoz Eel2 (2).jpg
By Unknown author – Центральны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инофотофоноархив Украины им. Г.С.Пшеничного, Public Domain, Link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일당독재 또는 일인독재로 형해화되어 있는 21세기에 맑스-엥겔스의 통찰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 공간은 인터넷에 의해 그 한계가 더욱더 좁혀졌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세계의 자본가와 노동자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돈을 벌고, 소통하고, 동시에 가짜뉴스에 현혹된다. 자본순환, 계급의식, 또 반대로 혐오의식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극단화된다. 맑스-엥겔스가 바라던 바람직한 투쟁의 집중도 없잖아 있지만, 세계적 우민화도 동시진행형이다.

더불어 교통수단의 발달과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세계화로 – 즉, 공간의 압축 – 인해 지구인은 값싼 상품이라는 호재(好材)를 공유하게 되었지만, 더불어 악재(惡材), 이를테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 유행도 함께 겪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공간의 압축은 계급모순의 심화뿐 아니라 정치극단화, 유행병과 같은 부작용까지도 함께 공유하게 되는 상황을 불러온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의 압축은 자본주의의 축복이자 재앙인 셈이다.

그리고 공간의 압축은 맑스-엥겔스의 생각만큼 계급의식을 평준화하진 못했다. 세계화는 제조업의 저임금 국가로의 이전을 초래했고 선진국의 노동자계급은 일자리를 뺏기며 우경화되었다. 이는 해당 국가의 정치극단화를 불러왔고 세계는 다시 나홀로 금리인상, 전쟁, 에너지 쟁탈전 등의 양상으로 블록화되고 있다. 더불어 기후변화 등 자본주의 모순을 깨닫는 여론도 공간의 압축으로 실시간 공유되는 측면도 있으나 그 추동력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당당치킨은 진정 당당한가?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당당치킨’이라는 유령이.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각국의 소비자는 치솟는 의식주 및 에너지 비용으로 고통받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년 전보다 6.05% 뛰면서 외환위기 이후 23년 7개월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근원인플레이션과 에너지·식료품 가격 인상 영향이 컸다. 이러한 탓에 소비자들은 한 푼이라도 저렴한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가격 상승은 각종 외식 품목도 예외가 아니다. 5월 외식 물가지수는 작년 12월보다 4.2% 상승, 전체 소비자 물가상승률 3.4%를 웃돌았다. 특히 가격이 가장 많이 오른 외식 품목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라이드치킨이다. 39개 외식 품목 가격이 모두 작년 말보다 올랐는데 치킨(6.6%)의 상승률이 가장 높았고 이어 자장면(6.3%), 떡볶이(6.0%), 칼국수(5.8%), 짬뽕(5.6%) 등의 순이었다.

주요 치킨 프랜차이즈가 원가 상승 등을 이유로 가격을 올리고 있는 와중에, 윤홍근 제너시스BBQ 회장은 지난 3월 라디오에서 “치킨값이 3만원은 돼야 한다”고 발언하여 소비자를 충격과 공포에 빠트렸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당당치킨’이다. 홈플러스에서 2022년 7월 출시한 자체 브랜드 상품으로 1마리 기준 6,990원(달콤양념 치킨은 7,990원)에 판매하여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15일 오전 9시 45분. 개장을 15분 앞둔 경기도 안양 홈플러스 평촌점 입구에 손님 2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오전 10시, 마침내 직원이 셔터를 올리고 문을 열었다. 손님들이 잰걸음으로 입장했다. 몇몇은 뛰어들어 갔다. [중략] 목표는 지하 1층 즉석식품코너에서 한 마리 6990원에 판매하는 ‘당당치킨’. 광복절이자 말복이었던 이날 홈플러스는 당당치킨을 1000원 추가 할인된 5990원에 전국 매장에서 5000마리 한정 판매했다.[치킨 3만원 시대에 6990원… 이번엔 맛과 가격 모두 통했다]

대형 유통업체가 가성비 좋은 치킨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롯데마트는 2010년 12월 ‘통큰치킨’을 출시했는데 가격은 5천 원이었다. 당시 치킨 프랜차이즈의 치킨 가격은 1만 원 중후반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저렴한 가격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프랜차이즈 업계는 대기업의 횡포로 골목상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행정부도 이에 호응하며 롯데는 사업을 철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여전히 프랜차이즈 업계는 ‘통큰치킨’ 사태 당시와 유사한 논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치솟는 외식 가격에 대한 소비자들의 체감지수는 그러한 논리를 짓누르고 있다. 특히 3, 4천 원에 달하는 배달 플랫폼의 배달료가 더해지면 당당치킨의 가성비는 더욱 두드러지기에 “삐끼상품”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당당치킨을 직접 구입하기 위해 판매대 앞에 줄을 서고 있다.

이 와중에 프랜차이즈 진영에서의 내부 분열 양상도 눈에 띈다. 최근 한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에서 익명을 요구한 한 유명 프랜차이즈 치킨 가맹점의 점주는 본사에서 받는 생닭 가격이 6천 원 이상이라면서 “엄청 비싼 것이다. 같은 호수 생닭을 시장에서 사면 반가격 정도, 내지는 더 좋은 제품 살 수 있다”고 증언했다. 골목 상권의 자영업자를 죽이고 있는 이가 홈플러스 하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기름값도 마찬가지다. 회사는 파리바게트에 납품되는 기름과 성분이 완벽히 동일한 기름을 쓰는 걸로 안다. 그런데 파리바게트는 가맹점주들에게 16.5kg 기름을 주고 7만4800원을 받는가 하면, 우리는 15kg짜리 기름을 받고 ‘배’에 가까운 13만8270원(부가세 포함)을 낸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당당치킨 가격을 맞추겠나. [중략] 가격이 3~4배가 차이난다면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BHC 가맹점주의 울분 “팔면서도 소비자들껜 죄송합니다”]

그간 최저임금이 오를 때마다 소상공인들은 임금 상승 탓에 영업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었다. 임금 상승으로 원가 부담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임을 전제하더라도 왜 그 소상공인들은 재료비나 임대료와 같은 다른 부담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을까 의아해하곤 했는데, 이번에 재료비에 대한 본사의 횡포에 대해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본사의 인플레이션 핑계는 핑계일 뿐이었다.

이제 당당치킨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가성비가 좋은 프라이드치킨을 만들 수 있을까? 유통업계 관계자는 “대형마트는 기존 인력과 시설, 매장을 이용해 인건비, 임대료 등이 따로 들지 않는 구조“라고 의문의 일부를 해소해줬다. 생닭 값에 관해서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주와 유통업계 관계자의 일부 증언이 엇갈리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량 구매를 통해 단가를 맞출 것이다.

가맹점에 납품하는 생닭 값을 높여 받는 프랜차이즈 본사와 달리 홈플러스는 직영점에 거의 원가에 생닭을 납품한다고 가정한 후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부담하는 인건비, 임대료, 기타 유틸리티 비용을 절감하여 가격을 맞추는 상황인 것이다. 왜 인건비가 들지 않을까? 프라이드치킨을 생산할 신규 인력을 고용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유통업계 관계자는 돈이 따로 안 든다고 한 것이다.

[한상인/홈플러스 메뉴개발 총괄] “원가를 낮추기 위해 원재료를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박리다매이긴 하지만 저희도 손해 보면서 장사하는 건 아니거든요.”[중략]
[홈플러스 조리 노동자] “인건비는, 지금 있는 인건비로 인원을 쥐어짜는 거예요. 노동자들은 죽어나는 거라고요. [중략] 그 시간에 맞추려면 죽어라 하고 해야 해. 진짜 화장실도 못 가지. 어떨 때는 진짜 참다 참다 막 뛰어다녀요. 숨도, 진짜로 나쁜 말로 숨도 못 쉬게 몰아치니까.”
조리 노동자들은 원래 닭강정, 로스트치킨, 초밥 등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당당치킨’이 폭발적 인기를 끌자, 평일 연장근무는 물론 쉬는 날에도 불려나온다고 합니다. 원래 하던 일에 더해, 하루에 40마리에서 최대 150마리 치킨 튀기기가 추가된 겁니다.[“종일 닭 튀기느라 화장실도 못 가요” 6,990원 당당치킨의 그늘]

장사를 고약하게 배웠다. 메뉴개발 총괄은 원가를 낮추기 위해 원재료를 희생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대신 노동력을 희생하고 있는 상황으로 여겨진다. 얼마의 초과근무 수당이 지급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당한’ 당당치킨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천 원을 넘기지 않게 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칼 맑스는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연장하려는 동기의 하나로 기계의 도덕적(무형의) 가치감소에 대한 두려움을 든다. 기계의 도덕적 가치감소는 “기계에 있어 같은 구조의 기계가 보다 싸게 재생산되거나 보다 우수한 기계가 경쟁자로 나타나면 교환가치를 잃게”1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 경우 기계는 매장 등 기존 인프라를 의미하며 우수한 기계는 가격을 더 낮춘 치킨을 만들어낼 경쟁자를 의미한다.

이미 이마트와 롯데마트 등 경쟁자들이 홈플러스와 유사한 가성비의 치킨을 내놓아 시장을 빼앗기 위해 장전을 한 상태다. 이마트는 행사 기간이긴 하지만, 한 마리에 5980원 짜리 프라이트치킨을 판매하기도 했다. 홈플러스는 게임체인저로서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그동안 빠르게 브랜드를 안착시켜야 하기에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방법으로 브랜드의 도덕적 가치감소를 최소화하려는 전략이다.

요컨대, 기존 프랜차이즈와 홈플러스 모두 이윤 창출의 원천 중 하나는 여전히 가맹점주와 노동자, 즉 인간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라는 점이 동일하다.2 프랜차이즈는 ‘치킨 3만 원의 시대’를 부르짖으며 가맹점주의 희생을 강요하고 홈플러스는 ‘치킨 6천 원의 시대’를 부르짖으며 노동일을 연장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비즈니스 환경이 변화해도 노동착취가 이윤 창출의 주원천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다.

시민 사회 바깥에 있는 특수한 존재가 된 현대 국가

중세로부터 나온 민족들의 경우에 부족 소유는 다양한 단계들 – 봉건적 토지 소유, 단체적 동산 소유, 매뉴팩처 자본 – 을 거쳐서 대공업과 보편적 경쟁에 의해서 조건지어진 현대적 자본으로, 공동물의 모든 가상을 벗어 던지고 소유의 발전에 대한 어떤 간섭도 배제한 순수한 사적 소유로 발전한다. 이 현대적 사적 소유에 조응하는 것이 현대 국가인데, 이 현대 국가는 조세로 인해 점차적으로 사적 소유자들에 의해 매수되고 국채 제도로 인해 사적 소유자들의 수중에 떨어져서, 그 존립은 증권거래소에서의 국채 증권의 등락 속에서 사적 소유자들, 즉 부르주아들이 국가에 부여하는 상업적 신용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부르주아지는 그들이 바로 더 이상 하나의 신분이지 않고 하나의 계급인 까닭에, 더 이상 지방적으로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자신을 조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들의 평균적 이해에 보편적 형식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동체로부터의 사적 소유의 해방을 통해서 국가는 시민 사회와 나란히 있는, 그리고 시민 사회 바깥에 있는 특수한 존재가 되었다.[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중 독일이데올로기, 번역 최인호 외, 감수 김세균, 박종철출판사, pp259-260]

‘소유’라는 개념이 온전하게 완성되는 시기는 현대 국가에 이르러서라는 점, 그리고 국가는 그 사적 소유자가 갖다 바치는 세금에 “매수”되고 그들이 구입한 국채 증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맑스와 엥겔스의 통찰이다. 조세권을 국가의 횡포가 아닌 실은 국가가 사적 소유를 인정하게끔 만드는 당의정(糖衣錠)이라는 인식이 ‘과연 뭐든지 삐딱하게 보는 좌익 듀오답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고, 국채 제도로 인해 국가가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국가를 시민 사회로부터 분리해 별도의 특수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서술하는 이 대목이 현대 국가의 경제사를 관통하는 정확한 분석이라는 점에서 새삼 그들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현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날 국채의 구입자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제 채권 시장은 각국의 정부출연기관, 연기금, 금융기관, 기타 갖가지 사적 소유자의 돈을 위탁받은 신탁(펀드, 리츠 등)들이 각국의 국채, 공사채, MBS, 회사채 등을 사들이고 되파는 국제적인 규모의 시장이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산업자본 융성의 시기를 거쳐 금융자본의 제도적 틀이 국제적으로 기반을 잡게 되면서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각국 정부의 통화나 금리 정책은 온전히 시민 사회의 목표와 부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요즘 시장을 보며 특히 공감하게 되는 구절이라 옮겨 적어보았다.

“의식적 지배”에 대한 단상

개인의 현실적 정신적 부 Reichtum는 전적으로 그의 현실적 관련들의 풍부함 Reichtum에 달려 있다는 것이 위에 의거하여 명백해진다. 이를 통하여 비로소 개별적 개인들은 여러 상이한 국민적 또는 지역적 한계로부터 해방되며, 전세계의 생산과(또한 전세계의 정신적 생산과도) 실천적 관련을 맺게 되고, 또한 세계 전체의 전면적 생산(인간의 창조물)을 향유할 능력을 획득하는 상태에 놓여진다. 이 공산주의 혁명을 통하여 전면적인 의존성, 즉 개인들의 세계사적 협업의 이 최초의 자연 성장적 형태는, 인간 상호간의 작용으로부터 창출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힘으로서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이러한 힘들에 대한 통제와 의식적 지배로 바뀌게 된다.[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중 독일이데올로기, 번역 최인호 외, 감수 김세균, 박종철출판사, p218]

맑스와 엥겔스가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낯선 힘에 대한 의식적 지배”를 말할 때의 그 힘이란 무엇일까?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독일이데올로기’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당시까지 인민의 의식을 지배해왔던 지배계급의 관념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그 관념론일 수도 있고, 그 관념론에 의해 온존하고 있던 억압적인 생산관계일수도 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자연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풍부해진 정신력과 물질문명을 통해 자연의 변덕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자원을 채취하고 더 많은 주거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의식적 지배”를 통한 이득은 사적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당연하게도 자본의 차지다.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는 이 이득이 좀 더 많은 계급과 공유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체제조차 “의식적 지배”는 자연의 파괴를 지양해야 한다는 체제적 고민은 없었다. 그리하여 체제를 불문하고 무의식적으로 진행된 – 왜곡된 형태의 – “의식적 지배”의 결과로 자연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손해에 대한 비용은 이득의 향유자가 치르지 않기에 – 부(負)의 외부효과 – “세계사적 협업”은 말뿐인 공허한 외침이 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구(舊)사회주의권에서 이 편견은 더 두드러진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 저자의 암시인바, 그들은 인민에 의한 자연정복 또는 자연개조를 사회주의의 승리로 보았다는 정황이 책의 곳곳에 제시되고 있다. 중국의 수많은 댐건설, 소련의 대규모 목화재배 농장들은 이러한 비극의 증거이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들이라고 시장 효율적으로 물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도시는 먼 곳의 물을 끌어다 분수 물로 써버리는 천박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사회주의는 ‘계획적’으로 낭비했을 따름이다.[‘강의 죽음’을 읽고]

다만,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체제로 자리 잡고 있는 와중에도 인류는 “탄소중립”이라는 구호를 통해 “세계사적 협업”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유럽 경제가 – 특히 독일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와중에 유럽이 값싼 러시아의 가스에 마약처럼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들이 외쳐왔던 재생에너지를 통한 “탄소중립”도 그럴싸한 화장술이었음이 드러났다. 인류가 “낯선 힘을 의식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풍부함 Reichtum”에 기반한 “세계사적 협업”이 필수적인데 그 풍부함이 허상으로 드러나 약하게나마 유지되었던 “탄소중립”이라는 협업도 위기에 처할 것 같은 위기감이 생기고 있다.

올해 가장 잘한 일

별로 성과도 없이 바쁜 한해였기에 블로그에 글을 많이 남길 수 없었다. 비즈니스적으로는 그저 그런 한 해였지만, 올해 그나마 성과가 있다면 칼맑스의 자본론을 3권까지 완독한 것, 그리고 그에 이어서 루돌프힐퍼딩의 금융자본을 읽고 있다는 것(자본론을 다 읽고 나면 당연히 논리의 흐름이 금융자본주의로 이어져야 할 것 같기에 읽고 있는데 그런 심증이 더 깊어진다), 비틀즈 모든 앨범을 들은 것, 롤링스톤즈의 모든 앨범을 듣고 있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기회가 되면 각각의 감상문을 올리고 싶지만, 1분기를 넘게 해결이 안 되고 있는 건이 있어 아직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편. 모두들 즐거운 연말연시 보내시기 바랍니다.

“時間의 主人”은 누구인가?

그보다도 더 큰 이익은 노동자 자신의 시간과 고용주의 시간 사이에 드디어 명백한 구별이 생겼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이제 자기가 판매하는 시간이 언제 끝나고 언제부터 자기 자신의 시간이 시작되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을 미리부터 정확히 알고 있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시간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미리 배정할 수 있게 된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59년 10월 31일, p52) 그것(공장법)은 노동자들을 자기 자신의 時間의 主人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그들을 정치적 권력의 궁극적 장악으로 향하게끔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그들에게 부여하였다.(같은 보고서 p47)[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384]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정해놓고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時間의 主人”이라 칭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공장감독관으로서는 – 특히 노동자에게 온정적이었을 공장감독관이라면 더욱 – 자못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에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영국 사회는 19세기 중반 당시 가장 선진화되었던 자본주의 시스템이었으니 이미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과 갈등이 표출되었고 결국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치열한 내전(內戰)의 결과로 노동자는 ’10시간 노동법’이나 ‘아동노동 금지’라는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時間의 主人”으로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Työpäivä päättyy Tampellassa.jpg
By Eino Antero Bergius – http://www.uta.fi/koskivoimaa/tyo/1900-18/index.htm, Public Domain, Link

앞서 말했듯이 노동시간의 규제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개혁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부수적 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자본가는 이전의 가내 수공업 중심의 상품생산 시스템을 대규모로 지어진 건물 내에서의 기술집약적인 프로세스로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 발달로 대규모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1 노동자는 그들의 정치적 의지를 표현할 조직화가 용이해졌고2,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노동력은 사회적 평균의 균질화로 이어져 단일한 노동시간 제한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내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기술발전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들 이롭게 만들었던 셈이다.

요기요 AI는 먼저 들어온 주문을 제쳐두고 뒤에 들어온 주문을 우선 배달하라고 명령했다. 첫 번째 주문을 한 손님은 화가 날 터이지만, 욕은 라이더가 들어야 한다. 돌발 상황도 벌어졌다. 12층에 올라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계단으로 뛰어간 라이더, [중략] 주소를 잘못 적은 손님 때문에 20분 동안 헤맨 라이더, 조리가 늦어져 식당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라이더까지. AI는 이런 변수를 계산하지 않는다. [중략] 누군가는 우리를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라 부르지만 족쇄와 ‘캐삭’ 사이를 아슬아슬 달리는 평범한 노동자일 뿐이다. 디지털일터에 AI라는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됐다. AI에 대한 규제와 통제 없이 플랫폼노동 대책도 없다.[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다]

이제 기술발전이 자본가에게만 유리한 시스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오늘날의 플랫폼 경제가 처음에 “공유경제(共有經濟)”라는 기만적인 이름표를 달고 사회 모두에게 이로운 시스템인 것처럼 행세했으나 이내 플랫폼이 자본에 의해 점령될 경우 “공유경제”는 그 즉시 “플랫폼은 사유(私有)지만, 사회적 비용은 공유(共有)”인 시스템으로 고착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칼 맑스가 서술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인 것처럼 보였고 아직도 플랫폼의 점령자들은 그러하다 주장하고 있는 우리의 “자유로운 생산자”도 사실은 자신이 AI라는 신개념 콘베이어벨트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19세기 노동자보다 더 퇴행적인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Manila Philippines Pizza-Taxi-in-Makati-Business-District-01.jpg
By Photo by CEphoto, Uwe Aranas or alternatively © CEphoto, Uwe Aranas, CC BY-SA 4.0, Link

이제 그들은 더 이상 “時間의 主人”이 아니다. AI는 그들의 편의대로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임의로 늘려버린다. AI는 배달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사정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 정부는 집권 초기 주52시간 근무제라는 엉성하지만, 그럼에도 살인적인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해 다소 개혁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였지만, 플랫폼 경제의 자본은 다시 노동자에게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생산자)” 혹은 “개인사업자”라는 직함을 씌워주고서는 노동시간 제한의 “족쇄”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해방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 AI라는 족쇄를 씌워서 그들이 “時間의 主人”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21세기의 정부와 공장감독관은 새로운 노동법을 만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본을 감독해야 한다. 자본가의 행태와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이차산업 중심의 대규모 공장을 짓던 자본과 그곳에서 근무하던 노동자에게 적용되던 법과 제도는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 어떤 자본은 플랫폼을 선점하자마자 지분을 일본의 사모펀드에게 넘겨 엄청난 투자금을 받아 그걸로 플랫폼을 독점하였고, 미국 주식시장에 회사를 상장시킨 후 창업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피해 모든 공식직함을 던져버렸다. 그런데 때마침 그 플랫폼의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화재의 진화는 한국 사회가 부담하였으며 그 보험료는 한국 보험사에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늘 그랬듯이 자본은 “時間과 空間의 主人”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

자본가는 노동일을 될수록 연장해서 가능하다면 1노동일을 2노동일로 만들려고 할 때, 그는 구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판매된 이 상품의 특수한 성질은 구매자에 의한 이 상품의 소비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노동일을 일정한 표준적인 길이로 제한하려고 할 때 그는 판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이율배반이 일어나고 있다. 즉, 쌍방이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에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296]

자본론에서 처음으로 “투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이다. 결기가 차고 넘치는 “불온서적”치고는 꽤 늦게 투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느낌이다. 여기서 투쟁이라는 표현은 바로 냉철한 상품교환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하는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을 의미한다.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갈등은 통상 거래가격에 대한 갈등일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보통의 거래는 상품의 양도 시점과 가격의 지불 시점을 일치시킨다. 그런데 어떤 상품은 – 대표적으로 노동력 – 이 양자 간의 시점이 일치하지 않아1 갈등을 초래한다. 또는 시점이 일치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과대추정 혹은 과소추정되어 갈등을 일으킨다. 역사적으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판매자인 노동자계급에 의해 그 가격이 과소추정되었다는 주장에 따라 노동시간의 단축 등의 투쟁을 촉발하였던 것이다.

결국, 노동자계급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력을 시장에서 제값을 받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이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과 유급휴가의 확보라는 결실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역사적 재평가에 급제동을 걸고 있는 조류가 새로 등장하고 있으니, 그것은 플랫폼 경제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해체다. 이 조류는 자유로운 노동력의 소유자인 노동자를 플랫폼에 예속시켜 마치 봉건시대의 농노처럼 플랫폼의 농노로 후퇴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 맑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의 주장이다.2 노동시간은 노동자 각각의 특성에 따른 저마다의 노동시간이 아닌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서만이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3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균일한 노동력의 보유자인 조직 노동의 투쟁을 통해서 보다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자본이 택한 전략은 이 노동자성의 해체인 것이다.

UberEats cyclist in Amsterdam.jpg
By Franklin HeijnenDSCF2049.jpg, CC BY-SA 2.0, Link

이미 서구국가에서의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이전과 같은 노동조직은 약화되어왔다. 그런 한편으로 우버와 같은 플랫폼 경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제거시켰다. 즉, 노동력의 구매자인 자본가는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에게 ‘너는 더 이상 나에게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운행 서비스와 같은 용역을 파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운행 서비스라는 사용가치를 창조해내는 노동력이라는 교환가치를 보유한 노동자로부터 기적처럼 노동자성을 삭제함으로써 노동자를 개인사업자(혹은 자신의 자동차를 생산수단으로 하는 자본가)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에 각국 사법체계가 어느 정도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성과도 얻어내고 있으나 아직도 자본은 아직 조직적 행동 역량이 떨어지는 배달 노동자와 같은 이들에게 노동시간이 아닌 업무성과라는 기만적인 노동관행을4 강요함으로써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을 피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 지부장에 따르면 쿠팡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배송현황 애플리케이션은 휴게시간에도 접속할 수 있어 정규직 전환을 위해 쉬는 시간에도 배송을 계속하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한다.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상대평가를 하는 터라 노동자끼리 배송물량 경쟁을 부추긴다. 또 최근 사측이 인센티브 정책을 변경하면서 그 기준을 알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일하는 일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정규직도, 계약직도] 쿠팡 노동자 2명 또 쓰러졌다, 매일노동뉴스, 2021년 3월 9일]

쿠팡이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대다수를 일용직으로 채용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쿠펀치라는 어플을 통해 매일 일용직을 ‘선별’ 채용하는 것이다. 쿠팡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상시직을 제안하고 있다고 했지만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을 제안한다. 3개월·9개월·12개월 쪼개기 계약을 하고, 이렇게 2년을 다 채운 노동자 중에서 극히 일부만 ‘선별적으로’ 무기계약직을 시켜 준다.[쿠팡의 쪼개기 계약, 노조탄압 수단되나, 매일노동뉴스, 2021년 6월 10일]

사업자등록을 한 적도 없고 사업한다고 표방하지도 않았지만 배민·쿠팡·네이버 같은 플랫폼사업자가 미리 세금을 떼고 인적용역 사업자로 보고해 졸지에 ‘사업자’가 된 그들은 자신이 왜 사업자인지, 수입 대비 소득률은 왜 전문직보다 높은지 의아해한다. 플랫폼경제가 커지고 플랫폼노동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무시로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만 정부와 국회는 문제의식도 고민도 없다.[고삐 필요한 ‘플랫폼경제’, 경향신문, 2021년 6월 10일]

이 기사들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기술문명이 이루어낸 새로운 업적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노동자성 제거, 극한경쟁을 통한 24시간이라는 제한된 노동시간 내에서의 노동력 쥐어짜기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조직화되고 집단화된 노동이 ‘9시 출근 5시 퇴근’이라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 얻어낸 노동시간의 집단적 통제를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인센티브 (혹은 패널티) 제공이라는 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의 자발적(?) 노동을 추출해내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기술 봉건주의”가 다소 과한 표현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봉건제의 농노가 토지에 예속되어 있던 것처럼 오늘날의 플랫폼 노동자는 애플리케이션에 예속되어 있는 노예일지도 모른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했던 자본주의의 거래방식이 새로운 질적 국면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대를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지금 투쟁을 촉발할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이제 투쟁은 노동일에 대한 투쟁과 함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