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이 투표권을 얻을 경우 정치권력이 사회주의 세력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실제로 서구에서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은 20세기 초반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기반으로 강력한 야당, 심지어는 집권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나치는 그러한 계급전선에서 블루오션을 찾았다. 하층계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심을 지니고 있는 쁘띠부르죠아가 그들의 공략대상이었다. “계급”으로까지 부를 수 있는 성질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이러한 현존재로서의 계급과 그것의 지향이 다른 이 애매한 계층은 오늘날까지 이른바 중산층, 부동층, 화이트칼라 등 다양한 표현으로 불리며 선거의 향방을 좌지우지하는 대상으로 자리잡아왔다.
정치가가 선거에 임해 사회공동체의 공동선(公同善)을 추구하는 것이 이익이냐, 혹은 개개인의 물적(物的)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이익이냐를 가늠할 적에 이들 계층이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었다.
적어도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서구사회에서는 68년 세대라는 짧은 일탈의 경험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보수화의 경향을 보여 왔고, 반면 이른바 후진국에서는 정치적 민주화라는 의제와 맞물려 보다 헌신적인 쁘띠부르죠아 계층이 형성되어 – 소위 학생운동 세력 들 – 일정 정도 정권교체에 일조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형식으로서의 정치적 민주화가 달성된 나라는 그 투표성향, 나아가 정치성향이 서구의 그것과 비슷하게 개개인의 물적욕망의 실현을 용이하게 하는 정책에 보다 많은 지지를 보내는 경향이 있다. 이제 그들은 민주화 투사라기보다는 스스로가 자본주의자인 것이 더욱 친숙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민주대의제 시스템에 있어 이들의 성향에 대한 분석과 정책대응은 날로 중요해질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치는 참 선진적인 정치의식을 가진 정치집단이었던 셈이다. 바로 ‘공포심’이라는 심리적 측면을 이용한 정치를 창안한 셈이기 때문이다.
공포심과 우민화 둘 다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들입니다.
바른 지도자라면 국민들의 막대한 에너지를 밝고 올바른 쪽으로 신바람나게 유도하는 그런 기술도 구사할 줄 알아야하는데, 인류 역사상 그런 지도자는 얼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과 3S를 통한 우민화로 효율적으로 통치해왔고 아직도 그 잔상이 진하게 남아있죠.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국을 보면 공포심 뿐만 아니라 사행심을 이용하는 정치도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가가 3천 간다고 떠벌린다든가 있지도 않은 뉴타운 계획을 공약으로 내세운다든가 하는 거요.
뭐가 되었건 긍정적인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요. 공포심이나 사행심을 자극해서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끌려 오면 옳타구나하고 이용해먹을 것이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서 올바른 인식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할텐데 그게 안 되고 있으니까 참 안타깝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분석이시군요. 음… 로또정치라고 해야할까요? 🙂
보수는 끊임없이 너희를 우리로 끌어들이고, 진보는 우리에서 너희를 끄집어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불만 하나 트랙백 해봅니다.
음.. 심오한 말씀이십니다. egoing님만의 독특한 표현이 가끔 부럽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