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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좌빨”의 경제분석 보고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질이 높고 결과물도 굉장히 공평한, 매우 튼튼하고 포괄적인 교육 체제를 지니고 있다. –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소득수준의 학생들 사이에서의 독해와 수학의 격차가 매우 낮다. 그러나 고용 상황은 복합적이다. 실업은 매우 적지만, 노동력 참여 수준은 그저 그렇고 여성의 참여는 선진경제 중에서 가장 낮다. 남녀 간 임금차이 또한 예외적으로 높은데, 이는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하려는 동기를 저해하는 요소다. 부패는 또 다른 염려사항인데, 힘 있는 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지대(地代)를 우려내는 것을 용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지대는 소수의 대가족 경영 기업들에게 높은 정도로 집중되어 있고, 이는 규제 시스템을 통해 보호받고 있다. 부동산과 금융자산 소유는 매우 낮은 반면, 건강보험을 포함한 사회 보장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 지레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한국은 다른 선진 경제와 비교할 때 이전(移轉) 이전에는 가장 평등한 소득수준을 가지고 있다(“移轉前 지니”는 두 번째) 세후에는 보다 불공평하게 바뀐다(“移轉後 지니”는 18위).[The Inclusive Growth and Development Report 2015, World Economic Forum, September 2015, 41p]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 WEF)이 이번 달에 발간한 보고서 중에서 한국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다. WEF는 각국의 정치나 경제, 그리고 학계를 좌지우지하는 이들이 1년에 한 번씩 스위스의 다보스에 모여서 립서비스를 하는 행사를 여는 것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비영리 법인이다. 사상적으로 좌우를 따질 계제는 아닌 것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비즈니스프렌들리”한 단체인 것은 분명하다. 인용문을 읽어보면 한국에 관한 비판이 이런 성격의 단체가 낸 보고서치고는 꽤 강경하다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다.

  • 교육은 공평하며 포괄적으로 학습수준이 높음
  •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의 참여 및 임금불평등이 열악함
  • 부패로 인해 각 분야 유력자의 지대 착취가 발생함
  • 재벌의 치대 착취는 매우 집중돼있고 제도적으로 보호받음
  • 평등한 소득수준이 재분배 과정을 통해 불평등한 수준이 됨

지적한 내용으로만 보면 WEF는 현 정부의 공약이나 현재의 경제정책 전반이 실패했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만 같다. 재벌의 지대 착취를 근절하겠다는 것은 애초 이 정부가 선거과정에서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내걸었던 공약사항이다. 하지만 집권 후 이 슬로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삼성 등 재벌의 변칙적 후계과정은 “애국”이란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재벌의 부패와 범죄에 대해서는 일과성 처벌이 있어왔지만 곧 “경제를 살리자”는 명분으로 면죄부를 주는 봉건적 상황이 재연됐다.

이를 위해 박 후보는 ▲경제적 약자에 도움되는 경제민주화 ▲국민경제 부작용의 최소화와 효과의 극대화 ▲대기업 집단의 장점은 살리되 잘못된 점은 반드시 바로잡기 등을 3대 추진원칙으로 제시했다. 이와 함께 ▲경제적 약자 권익 보호 ▲공정거래 관련법 집행체계의 획기적 개선 ▲대기업집단 불법행위 및 총수일가 사익편취 엄중 대처 ▲기업지배구조 개선 ▲금산분리 강화 등을 5대 분야로 내세웠다.[박근혜, ‘경제민주화 5대 공약’ 공식발표]

“경제민주화” 슬로건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취임 초기 잠시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 주장으로 다시 표면에 오르는 듯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재계와 보수언론의 거센 반발 속에 정책은 용두사미가 되었고, 활시위는 엉뚱하게 노동계로 향해져 소위 “노동개혁”이 없기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 인양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고령의 고임금노동자의 임금을 깎아 청년실업자를 채용하자는 주장은 언뜻 수긍이 가는 듯한 주장이지만, 결국 이는 해묵은 임금기금설에 불과하며, 자본가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정치적 선동이다.

여성노동의 불평등한 상황은 이른바 “경단녀” 이벤트로 해결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일회성 대증요법에 불과할 뿐으로 이것이외에 현 정부가 親노동적 행보를 취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기존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아 취업자를 늘리자는 발상은 그나마 WEF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평등한 소득수준을 더 악화시킬 가능성만 높다. 가장 극적인 WEF의 비판은 우리나라가 열악한 재분배 과정으로 인해 선진경제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되었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증세(增稅)”는 이 정부에서 일종의 금기어다. 철저한 현실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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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rittePipe” by Image taken from a University of Alabama site, “Approaches to Modernism”: [1].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현 정부가 경제를 정상으로 만들려면 WEF가 지적한 내용만 제대로 이행해도 될 것 같다. ▲ 재벌의 변칙적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순환출자 등 해소 ▲ 높은 지대를 통한 자영업 착취 방지를 위한 임대차 보호제도 ▲ 여성 등 소수자의 고용/임금 차별 방지를 위한 제도 정비 ▲ 재분배과정이 정상화하는 증세 및 복지증대 방안 강구 등. 한꺼번에 다 하자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문제는 마인드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벌을 “특별사면”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를 복직시켜야겠다는 마인드를 가져본 적이 있는가?

그들의 동정심도 쓸모가 있다

인플레이션 대 ‘동정’이라는 싸구려 희극을 보라. 복지국가 정책이 이 나라(와 전全문명세계)를 거의 경제적 파탄(그 전조는 바로 인플레이션이다)에까지 몰아넣었지만, 압력을 행사하는 집단들은 비생산적인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이 기부하라고 요구하면서 반대자들에게는 ‘동정심’이 없다고 소리 지른다. 동정 그 자체는 밀은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자라게 할 수 없다. 이미 망한(즉 자신의 자원은 다 소모해버린 채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고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사람(혹은 나라)의 ‘동정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中 말의 입으로부터(1975년), 아인 랜드 저, 이종욱/유주현 역, 자유기업선테, 1998년, pp 144~145]

복지국가 정책이 어떻게 인플레이션을 촉발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글 나머지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그의 다른 에세이 ‘평등주의와 인플레이션’을 보면 그는 불가항력 등으로 인해 어그러지는 생산 체계로 말미암아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비추어보면 그는 아마도 생산 없이 소비만 하는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사람이 생산 체계를 왜곡시켜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이미 망한” 사람이나 나라에서 새로운 활력이 솟아나 그들의 동정심이 다시 생산자에게 도움을 줬던 역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지 궁금하다. 실업급여, 건강보험, 대외원조와 같은 복지는 어쨌든 장기실업, 건강악화, 정정혼란과 같은 더 큰 비용을 발생시킬 사태악화를 막는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벗어난 노동자나 貧國은 생산자의 일원으로 복귀해 경기선순환에 참여하며 ‘동정심’ 클럽의 일원이 되었다.

‘전 국민 스마트폰 시대’가 되었으니 더 좋은 세상이 된 것일까?

경제적 불평등이 증가하게 될수록 잘 사는 이들은 더 못사는 이들과 보다 적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나누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중요한 상품들을 – 건강보험, 교육, 보안 서비스, 교통, 레크리에이션 서비스 – 민간부문에서 개별적으로 구입하거나 사적인 커뮤니티 혹은 가난한 이들을 배제시킬 목적의 조닝 제도에 의해 관할되는 지방자치제 안에서의 공동으로 구입하고, 그럼으로써 이러한 상품들이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공공적으로 공급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출처]

이코노미스트의 “Why aren’t the poor storming the barricades?”이라는 기사가 인용한 미시간 대학교 철학교수인 엘리자베스 앤더슨의 글이다. 이글은 오늘날 아무리 가난한 이들일지라도 이전 세대에서는 더 잘사는 사람들이 살수조차 없었던 많은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 예를 들면 냉장고나 휴대폰 등 – 세상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자와 빈자간의 차이에 대해 유념하여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는 글이다. 즉, 가난한 이들이 각종 재화와 서비스 중에서도 특히 집합재와 공동재 등과 같은 소위 “공공재”에로의 접근권이 제한받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공재는 위에서 언급한 건강보험, 교육, 치안, 교통 등 사회발전을 위한 하부구조로써 공공유틸리티, 공공서비스, 사회간접자본, 복지 등 다양한 이름1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집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것은 각국이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늘어나는 소요(needs)에 부응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던 것이 빈부차가 심해지면서 인용문에서 설명하듯이 여러 서비스들이 민영화되거나 보다 값비싼 사적재(私的財)로 대체되면서 공공적 사용이 배제되거나 질이 하락하고 있다.

“공공재”로 불리는 많은 것들이 경제학적으로는 비배제성/비경합성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인 동시에 시장에 의해 공급되어 특정 세력을 배제시키게 되면 사회의 유지 및 발전에 저해될 것이라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기에 공공재로 공급된 것이다. 보편적 교육이 없으면 “결과의 평등” 이전에 “기회의 평등”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기에 공립학교가 공급된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제 이러한 배제 없는 서비스 이용을 부자들 혹은 부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반대하기에 빈부차가 여전히 유의미하다.

불평등은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을 질투하게 만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이들이 그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로부터 박탈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Why aren’t the poor storming the barricades?]

아무리 가난한 이라도 웬만하면 집에 TV는 있고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집만 나서면 실업자가 거리를 배회하는 근린에 거주하고, 몸이 아파도 여력이 안 돼 병원에 가지 못한다면 사회의 지탱가능성은 더욱 희미해질 것이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을 체감으로 알고 있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경제정책을 복지에 중점을 맞추어 시행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2 그 와중에 현 정부는 예산부족을 핑계로 등록금 인하 공약을 파기했다. 이젠 놀랍지도 않지만.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신영석 부원장은 ‘한국형 복지모델의 전망과 모색’ 보고서에서 지난해 9월 표본추출한 만 19세 이상의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조사한 결과 [중략] ‘경제성장을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한다’와 ‘복지정책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응답은 각각 54.7%와 42.0%로 나타났다. 연령대별로 경제성장이 더 중요하다는 응답은 60▪70대 65.0대, 50대 67.3%, 40대 60.1%로 40대 이상은 60% 이상이었으나 30대와 20대는 37.1%와 39.8%로 나타나 대조적인 양상을 보였다. 반면 복지정책의 중요도에 대해서는 30대와 20대가 61.3%, 56.8%의 높은 응답률을 보인 것과 달리 40대는 38.6%, 50대는 31.2%, 60▪70대는 26%에 그쳤다. [세계일보, 60,70대 65% “복지보다 성장 우선”, 2014.1.20]

우리나라는 복지체제로의 이행이 가능할까?

나는 북구 여러 나라의 경제가 지금 활황을 보여주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안심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인구적으로 봐도 소국인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나라가 서구선진국에 못지않은 국가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이들 나라의 ‘국민부담율’(세 부담과 사회보험료 부담의 합계)이 70퍼센트를 가볍게 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7할을 정부에게 흡수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식 발상에서는 전체주의 국가이고 수탈국가가 되는 것이다. [중략] 덴마크에서는 ‘자기가 투자를 하든가 해서 리스크를 안는 것보다는 정부에게 자금을 맡겨 장래의 생활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 같은 제도가 운영되겠지만, 지금의 일본에서는 그 정도로 정부를 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징수된 세금의 사용방식이 지금보다 훨씬 투명하고 납득성이 높은 것으로 바뀌지 않는 한 북구와 같은 수준의 사회복지 시스템을 도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지음, 이남규 옮김, 기파랑, 2009년, pp337~339]

미국 자본주의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말에서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하며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딴 저자는 뼛속깊이 미국식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흡수하고 일본사회에 이 구조를 주입시키려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2008년 미국의 신용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신념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쓴 책이 이 거창한 제목의 책이다. 아무튼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를 통째로 부정하기보다는 인용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미국식 자본주의와는 또 다른 자본주의인, 북구식의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고 평등이 강화된 그러한 자본주의를 원하는 것 같다.

저자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자기책임, 무한경쟁, 시장숭배, 승자독식의 논리가 지배적이며 이런 논리는 전통적으로 신뢰, 계열화, 연공서열, 평등주의 등을 강조하던 일본식 자본주의와는 맞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물론 일본식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던 그런 특징이 무사안일주의나 거대관료화와 같은 부작용으로 이어졌음은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부작용을 미국식 자본주의로 고치려 했던 것은 잘못이었음을 반성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일본사회와 일정 정도 유사한 국내사회와 비교하여도 일정한 시사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저자가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나라의 국민부담률이 70퍼센트를 가볍게 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여부는 조금 의심스럽다. 내가 찾아본 바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스웨덴의 국민부담률이 45.7%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나라의 국민부담률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경이적으로 높다. 한국과 일본의 국민부담률은 2012년 현재 각각 25.0%와 26.9%다. 이 수준은 미국의 24.8%와 유사하고 OECD 평균인 33.8%에 크게 미달한다. 한국일보의 8월 12일자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는 향후 4년 내에 국민부담률을 30% 수준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국민부담률을 올리는 주요수단은 세수증대와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의 보험료율을 올리는 방법이 있다. 세수증대는 박 정부가 주장했던 지하경제 양성화나 세무조사 강화 등의 방법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율 인상 등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박 정부는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세제개편안을 내놓았지만 야당과 여론의 비판을 받아 일정 부분 계획을 수정하였다. 분명히 개편안이 만만한 월급생활자의 책임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런 사안조차 강한 반발에 부닥친 것은 이 사회가 개혁을 위한 사회적 자본이 얼마나 일천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즉, 오랜 군사독재와 지지 기반이 약한 정권교체 등 안정적 정치일정 경험이 부족한 남한 정치의 특성으로 인한 첨예한 갈등은 지속적으로 합리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저해하고 있다. 소위 뚝심있는 정책 추진을 위한 정치적 자본이 부족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분명 정치적으로는 수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미약하나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내수 위주의 복지체제로 가려는 경향이 있음에도 야당과 그 지지자들은 현 정부의 정당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우를 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보편적 복지”를 지향한다는 민주당이 세제개편안을 “세금폭탄”이라 비난한 것이 그 사례다.

정치적 이념 지향과 경제적 이념 지향의 이러한 모순된 혼란은 소위 “민주화 세력”의 경제적 지향이 자의든 타의든 시장개방과 규제철폐, 그리고 한미FTA 추진 등 오히려 미국식 자본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고 지지자들도 뚜렷한 경제체제에 대한 고민이 없는 와중에 더욱 강화됐다. 사회는 어느새 승자독식과 약자배제의 이데올로기에 익숙해져 인근 주거지역에 임대 아파트를 짓는 것을 반대하는 등의 이기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기도 한다. 수구적인 정치체제는 이러한 토양 속에서 강화된다. 그리고 현 정부는 자신들의 복지강화 정책이 반대에 부닥친다면 바로 그 명분으로 발을 뺄 것이다.

사회성과연계채권, 증세 없는 복지 확대의 진정한 대안인가?

복지를 위한 재원조달은 다시 납세자의 부담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모든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여 복지를 확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중략] 공공복지 논쟁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혁신적 방안으로서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미국과 영국 정부를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는 “열린 정부”(Open Government) 구상이다. 사회성과연계채권(Social Impact Bonds : SIB)은 열린 정부의 기본 철학을 자본시장을 통해 구현하는 방안이다. [중략] 사회성과연계채권이란 사업성과 목표달성을 조건으로 하는 정부의 지급보증 약정을 바탕으로 사회사업 주체가 원리금의 상환이 사회성과와 연계된 채권을 민간투자자에게 발행하는 내용의 투자계약을 의미한다. 사회성과연계채권 투자구조에 있어, 정부는 사회성과연계채권 발행기구인 SIBIO(Social Impact Bond-Issuring Organization)와 사회적 서비스 계약을 체결하고, SIBIO는 민간 투자자들에게 채권을 발행하여 해당 사회사업의 운영자금을 조달하며, 정부는 약정된 사회적 성과가 달성된 경우 예산절감 효과를 고려하여 SIBIO에게 성과보상을 지급하고, SIBIO는 성과보상을 다시 채권자에게 상환하는 내용의 계약관계를 가지게 된다.[사회성과연계채권(SIB)의 증세 없는 복지 확대의 원리, 자본시장 Weekly 2012-40호, 연구위원 김갑래]

사회성과연계채권은 보아 자본주의가 처한 두 가지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인 것처럼 보인다. 첫째, 재정투입 없는 공공서비스 제공이다. 정부의 역할이 증가하면서 점점 더 적기의 서비스 제공이 어려워지고 있는 와중에 이는 매우 매력적인 요소다. 그리고 실제로는 민간투자사업 등을 포함한 민영화를 통해 이런 애로사항을 해소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신자유주의 반대론자 등에게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공익을 우선해야 할 공공서비스가 이윤 때문에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 비판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사회성과연계채권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장점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공익과 이윤을 매치시키는 것이 사회성과연계채권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대안이다.

즉, 인용문에서 보듯이 사회성과연계채권은 “약정된 사회적 성과가 달성된 경우 예산절감 효과를 고려하여 성과보상을 지급”하기에 공공서비스가 애초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용이하다는 뜻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내가 예전에 썼던 글 “민영화, 두 가지 접근법”에 보면 기존의 민영화와 사회성과연계채권이 가지는 차이를 알 수 있다.

민간의 자금으로 건설되고 운영되는 교도소는 통상 민간 사업자에게 침대 개수마다 일정금액을 수수료로 지불하고 있다. 인권운동가나 민영화 반대론자 등 비판자들은 이들 민간 기업들이 정부에 로비를 하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민간 사업자는 정부가 교도소의 운영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니 더 많은 교도소를 민간에 이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심지어 입법로비 등을 통해 인종차별적인 판결과 수감, 불필요한 수감기간 연장 등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중략] 이들은 소위 “사회영향채권(social-impact bonds)”을 발행하여 모인 자금으로 정부와의 계약을 통해 교정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얻은 이윤을 투자자들과 나눈다는 계획이다. [중략] 즉 앞서의 미국 민간 기업들이 더 많은 수감자들로부터 이윤을 창출하였다면 사회영향채권의 투자자들과 사업시행자들은 수감자들이 출소한 후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 재범률이 낮아질 경우에 단계적으로 높아지는 수익률에 따라 성공보수를 받게 된다. 확실히 이윤동기가 이전 교도소와 달리 제공하는 서비스의 본래 목적에 상당 부분 부합하는 면이 있다.[민영화, 두 가지 접근법]

인용문에서 보듯이 감옥이라는 공공서비스를 똑같이 민간의 손에 맡기는 방식이지만, 전자가 오히려 재소자의 양산(?)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소지가 있는 반면, 후자는 범죄율 감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개연성이 크다 할 수 있다. 후자의 방식은 예를 들면 투자자의 수익률을 재범률과 반비례하여 보장하는 방식으로 시행할 수 있다.

요컨대 여태의 민영화와는 다른 채권이라 할 수도 있다. 물론 문제도 있다. 그 채권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당시 누군가와 농담으로 출소자가 범죄를 저질러도 걸리지만 않으면 돈을 주겠다고 투자자가 회유할 수도 있겠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또 다시 꼼수가 등장할 수도 있는 기술적 어려움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기술적 어려움은 정밀한 설계나 시행착오 등을 통해 조절 가능할 것이고, 또 하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기존의 공공서비스 민영화가 정부재정의 부외금융(off-balance)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회성과연계채권 역시 일종의 복지의 증권화 및 유동화를 통한 부외금융에 불과한 미봉책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결국 이 채권은 “고쳐 쓰는 자본주의”의 최신 버전인데, 고쳐 쓸 때는 고쳐 쓰더라도 과연 계속 증세 없이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재범률이 낮아지면 장기적으로 감옥의 수요가 적어지니 장기적으로 재정이 건전해지겠지만, 단기적으로 이들 나라가 처한 구조적인 재정적자를 메워줄 수는 없다.

기업들은 점점 더 초국적화되어 엄청난 수익을 올리면서 일국의 조세체제를 “합법적으로” 회피하고 있고, 소득세 역시 획기적인 증가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포퓰리적적인 세금감면, 양극화로 인한 세금면제 계층의 확대 등은 재정적자의 골을 더 깊게 만드는 요소다. 사회성과연계채권은 그 깊은 상처를 감싸기에는 너무 작은 반창고다.


미국의 재정적자 전망 및 적자의 사유(출처)
Bonus : 밋롬니의 구체적인 세금감면 계획

선거 소회 – 민주통합당의 패착에 관하여

어제 트위터를 보면 진보개혁 성향의 많은 트위터러 들이 소위 말하는 집단 “멘붕” 상황에 시달린 것 같다. 그간 청와대와 여권의 뻘짓을 보았을 때 많은 야권성향의 유권자들이 여소야대 상황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 내리라고 여겼던 상황이었을 텐데, 결과는 예상 밖으로 여당의 – 사실상의 박근혜의 – 압승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나는 여야 간 균형추가 어떻게 될 것이라 예측하지 않았기에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인 편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통합당이 선거기간 동안 저지른 몇몇 패착이 떠오르며 화가 나기는 했었다.

사후약방문이지만 민주통합당의 패배의 배경을 몇 개 들어보자면, 결과적으로 1) 한미FTA 등을 둘러싼 이념적인 혼선, 2) 박영선 의원이 지적한 “보이지 않는 손”이나 김용민 씨의 처리에 대한 우유부단한 지도부의 대처, 3) 불법사찰 등 총선 이슈의 의제선점 실패 등의 원인이 거론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배경은 당의 정체성과 지지층 일부의 괴리감에서 온 혼선일 것이다. 민주통합당에게는 현재의 한미FTA 이외의 대안이 없었고 다만 반MB의 관성만 있었을 뿐인데 이 부분이 보수 성향 지지층의 이탈을 불렀을 것이다.

두 번째 배경은 김영삼, 김대중과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1인 지도체제가 아닌 상황이 불러온 불가피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명숙 체제는 분명 정도를 벗어난 지도력 부재를 만방에 보여주었다. 김용민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한명숙 씨의 코멘트는 “걱정이 많이 된다.”였다. 이후 사태가 악화될대로 악화된 후 한 말은 “사퇴를 권고했으나 본인이 표로 심판받겠다 하더라.”였다. 이건 지도력도 아니다. 이 역시 당의 정체성과는 다른 일부 지지층의 인기영합주의에 따른 “전략공천”의 – 실은 전략은 없었던 – 패착이 되었다.

세 번째 배경이 어쩌면 앞으로 민주통합당이 대선까지 짊어지고 나가야할 가장 근본적인 숙제일 것이다. 이제 불법사찰은 대선까지 끌고나갈 성격의 이슈가 아니다. 물론 진상은 파헤쳐야 하겠지만 박근혜 씨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MB의 책임이다.”라 할 것이고 지지자들도 수긍할 것이다. 남은 것은 복지다. 가처분소득의 감소와 내수부진으로 인해 저성장 사회가 우려되는 현 상황에서, 복지는 박근혜 씨도 전면적으로 내세울 이슈인데 이마저 빼앗기면 자칭 타칭 “진보개혁” 정당의 정체성마저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다시 세 가지 배경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을 형성한다. 내가 자주 가는 블로그의 선거분석 글을 보면 한미FTA에 대한 입장변화가 민통당의 악수였다고 하는데 나는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 공감하고, 어떤 식으로든 지금과 같은 기회주의적 태도를 버리고서 색깔을 선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존의 FTA를 긍정한다면 각종 복지정책이나 경제민주화 조치와 배치되는 부분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는 과제가 남는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지도력과 결단력일 것이다. 한명숙 씨에게는 결여된.

p.s.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이다. 근소하게 승리했으면 여태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논공행상에 바빠 대선에서 동일한 뻘짓을 반복했을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

p.s. 2 오늘 자정 이후로 진보신당은 정당등록이 취소되어 더 이상 당명을 그대로 쓸 수 없게 된다고 한다. 타율적으로 “신”자를 떼게 되었다.

복지는 反자본주의적인가?

비버리지는 전후의 복지 공급에 관해 네 가지 가정을 세웠는데, 그 전부가 다음 세대 동안 영국의 정책으로 흡수되게 된다. 공공 의료 서비스, 적절한 국가연금, 가족 수당, 완전 고용이 그것이다. 이중 완전 고용은 그 자체로 복지 공급은 아니지만, 전후 건강한 성인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정규 직업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되었기에 다른 모든 것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 가정에 따라 실업보험과 연금, 가족 수당, 의료 서비스와 기타 복지의 풍부한 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비용은 노동 인구 일반에 부과한 누진세는 물론 임금에 부과된 세금으로 지불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중대했다. 개인 건강보험에 들지 못한 일하지 않는 여성들이 처음으로 의료 서비스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 거의 구빈법과 자산 조사 제도가 강요하는 굴욕과 사회적 의존은 제거되었다. 복지 국가의 시민은 이제 공적 부조가 필요한 (추정컨대) 드문 경우에 당연한 권리로서 이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포스트워 1945~2005, 플래닛, 2008년, pp 136~137]

1942년 발표되어 전후 영국 복지정책의 근간을 수립한 비버리지 보고서에 관한 이야기다. 이 보고서는 영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W. H.비버리지가 정부의 위촉을 받아 사회보장에 관한 문제를 연구 · 조사한 보고서다. 완전고용을 정책목표로 정했다는 사실에서 풍기는 케인즈 주의적인 분위기는 영국의 출발이 대륙의 그것과 달랐음을 잘 알 수 있다.

한편 토니 주트는 그의 저작 ‘포스트워’에서 비버리지 보고서가 특히 보편적 복지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쟁 이전의 유럽이 비록 다른 대륙에 비해서는 복지 수준이 월등하였지만 그 복지가 노동자 개인이나 특수계층에게 집중되었다면 영국이 채택한 의료 서비스의 대상은 그 범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였다는 설명이다.

즉, 전간기 영국에서 실업 수당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자산 조사’를 통해 결정되었는데, 19세기 구빈법의 ‘최소 선정 least eligibility’ 원칙에 근거하여 공공 지원 신청자가 수급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빈곤이 실제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국의 전후 복지 제도는 이러한 자산 실사를 통한 차별성이 가지는 폭력성을 제거한 것이다.

사람들이 밥 좀 먹여 달라고 요구하자 지배계급은 분배보다 성장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이제 성장이 어느 정도 됐으니 분배를 하자고 말하자 지배계급은 그 분배를 “복지포퓰리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원문]

어제 트위터에서 올린 글이다. 요즘 틈만 나면 등장하는 “복지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이 짜증나서 올린 글이다. 많은 이들이 이에 공감하여 리트윗을 했지만 반론도 있었다. 반론의 요지는 북구의 복지가 언제나 좋은 것이란 국민의 시선이 변화할 필요가 있으며 “자신에게 알맞은 복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시장에게 맡기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이분의 주장은 보편적 복지에서 선택적 복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복지 자체를 시장화하자는 주장에 가까워 보인다. “복지를 시장에서 선택하자”는 표현은 엄밀하게는 맞지 않을 것이다. 복지의 영역을 축소화하여 그 부문을 상품화하여 시장에 넘기는 표현이 맞을 것인데, 이를테면 보편적인 건강보험을 시장화하는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이후, 이미 공공서비스로 인식되던 여러 가지 것들이 시장화되긴 했다. 유럽식 복지의 한 축을 구성하던 영국에서 바로 그러한 보편적 복지가 폐해가 크다면서 등장한 민영화는 이런 시장화를 시행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재정위기의 논쟁이 뜨거운 상황에서 언제든지 고려 가능한 옵션이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영역에서의 복지를 축소하는 것이 올바른 대안일까? 그 수혜자가 시장에서 선택하게 하면 최적의 대안이 도출될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이 전후 유럽인들의 생각이었고 그들이 택한 대안은 보편적 복지였다. 절대적 빈곤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을지 몰라도 한편으로 그것은 극단적 선택에 대한 중도적 해결책이기도 했다.

현대 유럽의 복지 국가가 탄생한 배경에도 동일한 동기가 숨어 있었다. 1940년대의 통념에 따르면, 지난 전간기의 정치적 양극화는 경제 불황과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둘 다 사회적 절망이, 부자와 빈자를 가르는 엄청난 간극이 키워냈다. 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려면, ‘인민의 상태’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토머스 칼라일은 100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은 누군가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저절로 벌어질 것이다. 누구도 만족시키지 않는 방식으로”[같은 책, p 132]

복지 국가의 전반적인 취지는 사회적 재분배였지만 (다른 제도보다 재분배의 의미가 조금 더 컸지만) 전혀 혁명적이지 않았다. ‘부자들의 피를 빨아먹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즉각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느낀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장기적으로 실질적인 수혜를 입은 자들은 전문직과 상인들로 구성된 중간 계급이었다. [중략] 유럽의 복지 국가는 사회 계급들을 분열시켜 상호 간 적대하게 만들기는커녕 이전보다 더욱 긴밀하게 결합시켰고, 따라서 복지 국가의 보존과 방어는 공동의 관심사가 되었다.[같은 책, pp 138~139]

요컨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온존하는 와중에서의 보편적 복지는 자본주의 지지자들이 보기에 더 극단적인 방식을 방지하고자 하는 사회 안정책이다. 복지는 못사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수혜차원이라기보다는,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중산층에게까지 혜택이 전염됨으로써 이런 사회를 보호해야겠다고 하는 보수적인 사회를 조성하는 역할도 한 것이다.

남한에서는 남북대치 상황 등으로 인한 이념적 극단성이 좀 더 기묘한 측면이 있다.  경제 국면으로 보면 우리도 복지에 대한 당위성이 초정파적으로 공유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이제야 집권당이 찔끔찔끔 이야기하고 있고, 좌파를 자처하는 정당조차 ‘소비의 사회화’ 공약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다. 복지는 사실 생각만큼 “좌파”적이 아님에도 말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복지가 지속가능한 대안이냐 하는 문제는 별도로 논의될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과연 남한 사회에서의 복지 확충을 “복지포퓰리즘”이라 딱지 붙이며 – 포퓰리즘을 절대악적인 뉘앙스로 쓰는 나라에서 – 재정위기의 심각한 원인이라고 매도하는 분위기가 올바른 – 최소한 형평에 맞는 – 논의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복지포퓰리즘” 드립을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비디오가 하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