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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청년에게 각자도생 이외의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특히 젊은 층일수록 부동층의 비중이 높아서 정치권이 표심을 잡기 위해 열중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기사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으나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그 기사의 ‘베스트 댓글’이었다. (아래 참조) 이글을 쓴 사람들은 그 정치적 성향을 굳이 나누자면 “진보”측으로 여겨진다. 흔히 진보진영에서는 보수적인 투표성향의 노인층에 대항하여 청년층이 투표를 해야 한다는 – 즉 청년층은 야권을 지지할 것이라는 –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젊은 부동층은 벚꽃구경가느라 투표안한다. 지들 앞길을 지들이 망친다.”
“10대 20대에서 43%. 그러나 투표를 하는 사람은 4.3% 정도??”

실제로도 청년층의 대통령 지지도를 보면 反여권 성향이 강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관계를 제외하고는 위 베스트 댓글이 비아냥대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여태의 투표에서도 청년층의 투표율은 결코 낮지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투표해서 뽑은 정치권이 실제로 청년층을 위해 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1 이는 주요하게 이미 청년층의 비중이 갈수록 작아지는 과소대표성 경향을 보이고 있고, 정치권이 이를 간파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4년 ILO 보고서는 각국 청년의 교육 및 고용현황을 비교하였는데, 이를 보면 우리 청년의 열악한 처지가 잘 드러난다. 보고서에는 1996년 및 2006년 각국의 교육수준을 지수로 표현해놓았는데, 우리나라는 각각 5.96과 7.34를 기록하였다2. 이 수치는 각 년도 2위, 1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반면 성인소득 대비 청년소득과 고용률은 1996년 꼴찌에서 두 번째, 2006년에는 꼴찌를 기록했다. 요컨대, 남한은 최고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이 가장 열악한 고용수준에 시달리는 나라다.

각국 노동시장에서의 청년층의 교육수준

출처 : At work but earning less : minimum wages and young people, Damian Grimshaw, ILO, 2014, p13 에서 재구성

성인소득 대비 청년소득

출처 : 같은 보고서 p16 에서 재구성

청년고용률

출처 : 같은 보고서 p16 에서 재구성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가 보자.. 청년의 상황이 이러한데 앞서도 언급하였다시피 정치권이 청년층을 위해 한 일은 별로 없다. 많은 청년층 노동자들이 해당사항일 최저임금을 올리는데 인색하던 여권이 부랴부랴 총선공약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내놓았지만, 이런 그들이 또 지자체에서 실시하던 청년수당에 대해서는 예의 “포퓰리즘”이라고 맹비난한 바 있다. 보수층은 “흙수저”3, “헬조선”이란 유행어에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며 비난하고, 진보층은 투표를 안 해서 그런 것이라 비아냥댄다.

이 나라는 여태의 노동자와 자본가의 역학구도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 와중에 노년층은 정치4, 경제5, 문화6 등에서 권력을 잡고 기득권을 놓지 않고 있어 노자(勞資)간의 대립에 중층적으로 고통 받는 新노동계급이 형성되고 있다. 더군다나 젠더의 문제로 가면 한층 복잡해진다. 남녀간 임금차이는 세계최고 수준이고 문화적으로도 “여혐”문화가 일상화되고 있다. 고통 받는 청년, 여성, 노동의 이슈가 맞물려 피해의식을 특정계층에 쏟아 붓는 양상으로 추측되는 상황이다.

사회가 청년에게 各自圖生 이외의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이것은 “좌빨”의 경제분석 보고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질이 높고 결과물도 굉장히 공평한, 매우 튼튼하고 포괄적인 교육 체제를 지니고 있다. –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소득수준의 학생들 사이에서의 독해와 수학의 격차가 매우 낮다. 그러나 고용 상황은 복합적이다. 실업은 매우 적지만, 노동력 참여 수준은 그저 그렇고 여성의 참여는 선진경제 중에서 가장 낮다. 남녀 간 임금차이 또한 예외적으로 높은데, 이는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하려는 동기를 저해하는 요소다. 부패는 또 다른 염려사항인데, 힘 있는 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지대(地代)를 우려내는 것을 용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지대는 소수의 대가족 경영 기업들에게 높은 정도로 집중되어 있고, 이는 규제 시스템을 통해 보호받고 있다. 부동산과 금융자산 소유는 매우 낮은 반면, 건강보험을 포함한 사회 보장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 지레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한국은 다른 선진 경제와 비교할 때 이전(移轉) 이전에는 가장 평등한 소득수준을 가지고 있다(“移轉前 지니”는 두 번째) 세후에는 보다 불공평하게 바뀐다(“移轉後 지니”는 18위).[The Inclusive Growth and Development Report 2015, World Economic Forum, September 2015, 41p]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 WEF)이 이번 달에 발간한 보고서 중에서 한국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다. WEF는 각국의 정치나 경제, 그리고 학계를 좌지우지하는 이들이 1년에 한 번씩 스위스의 다보스에 모여서 립서비스를 하는 행사를 여는 것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비영리 법인이다. 사상적으로 좌우를 따질 계제는 아닌 것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비즈니스프렌들리”한 단체인 것은 분명하다. 인용문을 읽어보면 한국에 관한 비판이 이런 성격의 단체가 낸 보고서치고는 꽤 강경하다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다.

  • 교육은 공평하며 포괄적으로 학습수준이 높음
  •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의 참여 및 임금불평등이 열악함
  • 부패로 인해 각 분야 유력자의 지대 착취가 발생함
  • 재벌의 치대 착취는 매우 집중돼있고 제도적으로 보호받음
  • 평등한 소득수준이 재분배 과정을 통해 불평등한 수준이 됨

지적한 내용으로만 보면 WEF는 현 정부의 공약이나 현재의 경제정책 전반이 실패했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만 같다. 재벌의 지대 착취를 근절하겠다는 것은 애초 이 정부가 선거과정에서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내걸었던 공약사항이다. 하지만 집권 후 이 슬로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삼성 등 재벌의 변칙적 후계과정은 “애국”이란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재벌의 부패와 범죄에 대해서는 일과성 처벌이 있어왔지만 곧 “경제를 살리자”는 명분으로 면죄부를 주는 봉건적 상황이 재연됐다.

이를 위해 박 후보는 ▲경제적 약자에 도움되는 경제민주화 ▲국민경제 부작용의 최소화와 효과의 극대화 ▲대기업 집단의 장점은 살리되 잘못된 점은 반드시 바로잡기 등을 3대 추진원칙으로 제시했다. 이와 함께 ▲경제적 약자 권익 보호 ▲공정거래 관련법 집행체계의 획기적 개선 ▲대기업집단 불법행위 및 총수일가 사익편취 엄중 대처 ▲기업지배구조 개선 ▲금산분리 강화 등을 5대 분야로 내세웠다.[박근혜, ‘경제민주화 5대 공약’ 공식발표]

“경제민주화” 슬로건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취임 초기 잠시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 주장으로 다시 표면에 오르는 듯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재계와 보수언론의 거센 반발 속에 정책은 용두사미가 되었고, 활시위는 엉뚱하게 노동계로 향해져 소위 “노동개혁”이 없기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 이 꼴 인양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고령의 고임금노동자의 임금을 깎아 청년실업자를 채용하자는 주장은 언뜻 수긍이 가는 듯한 주장이지만, 결국 이는 해묵은 임금기금설에 불과하며, 자본가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정치적 선동이다.

여성노동의 불평등한 상황은 이른바 “경단녀” 이벤트로 해결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일회성 대증요법에 불과할 뿐으로 이것이외에 현 정부가 親노동적 행보를 취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기존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아 취업자를 늘리자는 발상은 그나마 WEF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평등한 소득수준을 더 악화시킬 가능성만 높다. 가장 극적인 WEF의 비판은 우리나라가 열악한 재분배 과정으로 인해 선진경제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가 되었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증세(增稅)”는 이 정부에서 일종의 금기어다. 철저한 현실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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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rittePipe” by Image taken from a University of Alabama site, “Approaches to Modernism”: [1].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현 정부가 경제를 정상으로 만들려면 WEF가 지적한 내용만 제대로 이행해도 될 것 같다. ▲ 재벌의 변칙적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순환출자 등 해소 ▲ 높은 지대를 통한 자영업 착취 방지를 위한 임대차 보호제도 ▲ 여성 등 소수자의 고용/임금 차별 방지를 위한 제도 정비 ▲ 재분배과정이 정상화하는 증세 및 복지증대 방안 강구 등. 한꺼번에 다 하자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문제는 마인드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벌을 “특별사면”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를 복직시켜야겠다는 마인드를 가져본 적이 있는가?

“무상급식”에 대해 주절거린 트윗 모음

# “무상급식”도 사실 “마녀사냥”, “혈세” 등처럼 단어 내에 선입견이 포함된 안 좋은 네이밍이다. 따지고 보면 대개의 재정집행이 이미 무상이지만 그들을 “무상도로”, “무상경찰”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조금은 불가피한 면이 있긴 했다. 이 개념을 정책으로 선도적으로 쓴 정치조직이 바로 민주노동당인데, 당시 정책을 간결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슬로건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었다. 그 슬로건이 바로 “무상교육, 무상의료”.

# 무상급식에 대해 보수가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이유는 급식이라는 서비스가 가지는 고유한 특성, 즉 배제/경합 가능성이다. 공공재는 배제와 경합이 어렵다는 경제학적 원리가 내재되어 있고 도로나 치안 등이 대표적인 데 급식은 이와는 다르기에 공격하기 쉽다.

# “공공재(Public Goods)”와 “공익성(Public Interest)”는 특정 재화/서비스의 공통적인 속성이면서도 그렇지 않기도 한데, 공익성이라는 특성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급식을 공공재로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 등.

# 급식이 또 하나의 교육이 되는 과정에는 급우와 같은 음식을 먹으며 평등 의식을, 건강한 급식을 먹으며 생산 노동의 소중함을 배우는 것 등이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도지사가 급식을 거부하고 학교가 성적순으로 밥을 주는 사회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원문

대한민국 가계소비의 큰 멍에, 교육비

총가계지출액에서 식료품비와 같은 필수재 소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엥겔계수”라 하고,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엔젤계수”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소득수준에 따른 엥겔계수와 엔젤계수는 어떠할까? 최근 산업연구원이 ‘우리나라 가구의 소비지출 행태 분석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이러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분석결과는 익히 짐작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13년 소득수준별 엥겔계수와 엔젤계수 비교(명목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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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 Meta 자료 재구성한 자료를 산업연구원 보고서에서 재인용
주 : 2인 가구 이상

즉, 우리나라의 가구는 소득이 적을수록 식료품에 더 많이 소비하고 교육에 더 적게 소비하는 반면, 소득이 많을수록 식료품에 더 적게 소비하고 교육에 더 많이 소비하고 있다. 이러한 소비성향은 사실 예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문제는 2013년 현재시점에서 과거와 비교해서 고소득층으로 갈수록 엔젤계수가 더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저소득층으로 갈수록 엔젤계수는 낮아졌다.

2003년 소득수준별 엥겔계수와 엔젤계수 비교(명목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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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 Meta 자료 재구성한 자료를 산업연구원 보고서에서 재인용
주 : 2인 가구 이상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 가계의 최종 소비지출 대비 교육비 지출비중이 6.7%로 미국(2.4%). 영국(1.5%), 독일(1.0%)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 교육비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자녀들의 학원비다. 2012년 기준 교육비 지출액 대비 학생학원 교육비 비중은 56.2%다. 공교육이 싼 것도 아니다. 교육비 중 우리나라의 가계부담은 21.5%로 OECD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OECD 공교육비 중 민감부담 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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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OECD, “Education at a glance” 2013.

그렇다면 가계는 교육비 지출을 얼마나 부담스러워 할까? 통계청이 2013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설문응답자의 73%(매우 부담 31.6%, 약간 부담 41.4%)가 교육비 지출이 부담스럽다고 응답했다. 세대별 교육비 부담을 어떨까? 현대경제연구원의 한 보고서를 보면 엔젤계수로는 40대(17.8%), 50대(17.2%)가 가장 교육비 부담이 크다. 가장 소비활동이 왕성할 40~50대가 교육비에 눌려 살아가고 있다.

이러다보니 빚이 늘고 있다. 203년 우리나라 교육비 관련 가계부채는 28.4조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택담보대출 받아 교육비로 쓰는 것이다. 지출 항목 상으로 교육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부동산은 교육관련 변수가 매우 큰 지출항목이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강남의 한 학군 유명한 아파트의 월세는 1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소득별 세대별로 차이는 나지만 자녀교육 올인의 나라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소득별로 교육비 지출 비중이 다르고 이런 경향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교육 불평등에 따른 부의 대물림 현상이 일어날 개연성이 높다. 또한 소득수준을 가리지 않고 공교육, 사교육에 대한 지출이 여타 나라에 비해 높다. 가계 대부분은 이러한 지출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고 가장 소비가 왕성한 40~50대에서 교육비 지출비중이 높다. 비용의 적지 않은 부분은 빚을 얻고 있다.

내수를 진작시키겠다며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꺼내든 카드가 LTV, DTI 완화 카드다. 이상에서 알아본 가계의 상황을 보면 그 정책이 어떤 식으로 작용할 것인가를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다. 사람들은 늘어난 LTV 여유분만큼 돈을 빌릴 것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교육비 등 생활자금을 쓸 것이다. 또는 전세대출로 좋은 학군에 전세 얻는 데 쓸 것이다. 집값이 오를지도 의문이고 올라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가장 채산성 없는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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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s Academy mosaic from Pompeii” by Unknown – http://www.departments.bucknell.edu/History/Carnegie/plato/academy.html.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대부분의 학생에게 대학은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학위취득으로 생애소득을 증진시킬 수 있다. 순현재가치(net-present-value) 조건으로 보면 59만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부채에 빠져드는 – 특히 학위를 마치지 못한 미국인의 47%와 영국인의 28% – 증가하는 학생들에게 그건 단순히 돈값을 못하는 것이 된다. [중략] 자동화는 블루칼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화이트칼라에게도 같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향후 수십 년 내로 직업의 47%가 자동화될 위기에 처해질 것이다.[Creative destruction]

대량생산의 시대 이전까지 소수만이 전유하는 권리였던 고등교육이 중산층에게까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어찌되었든 경제적 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 정부의 고등교육 육성책은 “인적자원”의 육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 인적자원은 고등교육을 통해 고도성장 기간 동안 높은 NPV를 향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급과잉과 수요부족의 구조적 경향 때문에 이런 높은 수익성은 옛말이 되고 있다. 교육은 가장 채산성 없는 비즈니스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를 대체할 비즈니스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 등으로 온라인 교육 등 저렴한 값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일류대학 학위가 성공의 첩경 심지어는 그 출발점정도로 여기고 있다. 사회의 저성장에 따른 이런 눈높이의 하향화는 대안이 뚜렷치 않은 상태에서 역설적으로 경쟁을 더 부추기고 있는 상황이다. 교육이 단순히 교육 그 자체만의 해법이 아닌 경제 및 사회정책과 결합되어야 할 이유다.

자본주의 남한이 시행할 계획경제 정책

소비시장은 매우 효율적이지만 또한 ‘욕구 충족’이라는 낭비적인 메커니즘에 의존하고 있다. 소비시장은 많은 쓰레기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깃의 소비자를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생산품을 쏟아 부어 소비자가 감당 못할 만큼의 양을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소비사회의 ‘교육시장’은 시장의 이런 일반적인 논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국가는 최근 몇 십 년 동안 고등교육기관의 수와 학생의 수는 전례 없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학교육과 고등교육 학위의 가치는 떨어졌다.[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택광/박성훈 옮김, 자음과 모음, 2013년, p130]

폴란드에서 태어나 공부를 했고 맑스주의 이론가이자 교수로 재직했지만 역설적이게도 폴란드 공산당의 반시오니즘으로 인해 영국으로 망명하여야 했던 현존하는 지식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유다.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에서의 과잉생산 경향을 충실히 서술하고 있으며, 이 논리를 그대로 교육‘상품’ 시장에 적용하고 있다. 바다 건너 유럽에 머무는 철학자의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교육현실만큼 이 사유에 걸맞은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삼성의 서류전형 부활과 이 업무를 각 대학의 총장에게 위임한, ‘일개 기업에 의한 각 대학총장 신규보직 인사발령’ 사건이 아니라도 이미 우리 대학은 자본에게 포섭되어 있는 상태다. 가장 큰 이유는 바우만의 생각처럼 우리나라에 대학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원부족의 국가에서 압축 성장을 통한 경제발전을 기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인력자원’의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그 주된 수단은 대학교육을 통한 고등교육 인력의 양성이었다.

결과론적으로 그 전략은 주효했다. 세계시장에서 손꼽히는 기업도 몇 개 가지게 되었고 학생들의 수학능력은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우리 경제가 저성장기에 진입했으며 인구가 계속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대학 시장은 과잉공급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에 따라 우리 교육시장에서는 취업난, 학벌 인플레이션, 대학수요의 수도권 집중화, 특목고의 명문대 입학과점 등의 각종 부작용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강남의 학부모들은 이제 자녀들의 “SKY” 진학을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닌 ‘사람 구실하며 살기 위한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다. 그 이외 대학은 공급과잉의 교육시장에서 상품으로써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의 상품 과잉공급 이론을 생생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분들이라고나 할까? 정부 역시 입학정원 축소가 이 시장의 필수 과제임을 인지하고 있다. 자본주의 남한이 시행할 계획경제 정책이다.

시장에 맡기라는 배부른 소리를 할 여유가 없다.

우리 사회는 “해병대 캠프” 참사로부터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최근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해병대 캠프”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교관”이라는 자가 학생들을 구명조끼도 없는 상태에서 바다 속으로 밀어 넣는 바람에 다섯 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학교, 프로그램 진행업체, 고용된 노동자들에게서 음주, 재하청, 시간제 고용 등 사고를 예언하는 각종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어쨌든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살펴보자면 구명조끼 없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안전 불감증”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은 앞으로 “사설 캠프”가 아닌 상표 등록이 완료된 “정식 해병대 캠프”에서 안전조치가 취해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모든 갈등은 제거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사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모두 얻고 사회는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말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학생들이 자발적이라기보다는 학교의 일정에 따라 참가하였고 이러한 캠프는 각 학교에서 꽤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포털에서 검색해보니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업체가 꽤 됐으며, 그들이 내세우는 주요 프로그램을 학생들의 이런 “교육과정”용뿐만 아니라 “기업연수”용으로도 홍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사회전체가 “병영캠프”로 평생교육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언제부터 이 사회는 “병영캠프”를 사회의 평생교육 과정으로 간주하게 되었을까? 미디어오늘의 보도에 따르면 매스미디어는 꽤 오래전부터 “병영캠프”를 “극기 훈련”을 위한 훌륭한 과정으로 홍보해왔고, 많은 학교와 기업들은 학생과 직원의 “정신무장”을 위해 캠프참여를 독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 무장”은 삐딱한 내 시각으로는 훈육의 대상인 학생과 직원을 복종의 문화에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사실 더 구조적으로 보면 학교와 기업은 본래 구성원을 서열문화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고유목적 중 하나이므로 그런 과정이 새삼스러울 것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우리의 고유한 병영문화1와 안보 과민증상2이 결합되면서 그 양상이 좀 더 폭력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학교와 공장, 또는 사무직일지라도 대량생산체제에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군사적 규율의 연장선으로 간주한 것이 그 동안의 역사다.

규율과 복종이 노동자의 의무라면 노동권과 부당노동에 대한 저항 등은 노동자의 권리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이 노동자가 될 학생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겠다는 계획에 대해 주류사회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곽노현 교육감 시절 서울시교육청은 근로기준법 등을 포함한 노동인권교육을 실시할 계획을 가진 바 있다. 여당과 사용자 단체는 강하게 반발하였다. 의무는 있으되 권리는 없는 절름발이 교육을 받으라는 것이다.

어쨌든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으면 이를 방지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재발방지책을 세우는 것은 당연한 순서고 나아가 사태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학생들을 얼차려 줘서 복종이 살아남을 길이라 가르치는 극단적인 훈육이 과연 옳은 교육인지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고, 지엽적인 문제만 가지고 변죽을 울리는 보도를3 보면 과연 이 사회는 시행착오의 로드맵이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든다.

p.s. 그런데 왜 “병영캠프”는 훈련병으로 박박 기는 프로그램밖에 없나? 만약 사단장의 지위를 경험할 수 있는 “병영캠프”가 있다면 내 돈 내고 참가하고 싶다.

p.s.2 억울하게 죽은 다섯 명의 젊은이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