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이라는 표현에 대해 딴죽걸기

강준만 교수의 “중산층은 포로수용소에 갇혔다”란 글을 읽어보았다. 소싯적 언론평론인가 하는 책에 연재되었던 그의 글을 심각하게 읽었던 때 이후 새삼스럽게 정말 오랜만에 그의 글을 정색을 하고 읽은 것 같다.

여전히 달필이시다. 거침이 없다. 하지만 개인적인 느낌을 솔직히 말하자면 다 여태 남들이 했던 이야기의 재탕이라는 느낌이다. 그만의 톡톡 튀는 독설과 표현들이 몇 개 있으나 – 대표적으로 포로수용소 – 뭐 그러한 중산층에 대한 허위 이데올로기가 스스로를 옥죄는 또 하나의 도그마라는 사실은 이미 서구 신좌파들이 줄곧 떠들어대던 단골메뉴다. 예를 들면 “소비사회에 포섭된 쁘띠부르주아지” 뭐 이런 표현 들이 다 그런 것들 아닌가.

결론 부분도 지극히 평이하다.

“진보 진영을 대변하는 논객들의 글을 읽어보시라. 구구절절이 옳고 아름답다. 그런데 대부분 거대담론이다. 비분강개다. 비진보·반진보 세력의 양심 없음, 어리석음, 파렴치함을 공격하는 걸로 진보 진영에 표를 주는 유권자가 늘 거라고 믿는 방식이다.”

글의 말미에 무슨 의무감마냥 들어간 이 딴죽은 “진보 진영”의 선도 안 그어놓고 싸잡아 이야기하고 있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이래 우리나라의 우익들은 중도우파부터 극좌파까지 싸잡아 좌파, 내지는 진보 세력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그렇다면 집권까지 해본 중도우파를 가리키는 것인지 의미 있는 정치세력도 못된 사민주의 이하 좌측의 진영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떤 세력범위로 상정을 한다손 치더라도 저 문구는 비아냥거림이지 건설적인 비판이 아니다. 강준만 교수의 글에는 저런 비난을 할 정도의 사실관계가 하나도 적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을 하려해도 우리나라 진보 진영이 저 정도는 아니었다. 통일전선이니 인민전선이니 이런 거대담론에서부터 좌파진영에서 그동안 해온 노력을 본다면 저 정도 독설을 들어먹을 정도는 아니다.

서론이 – 서론도 아니고 딴 소리 – 무척 길었는데 사실 그의 글을 읽고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다름 아니라 ‘중산층’이라는 단어가 적절한 표현이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자 함이다.

중산층(中産層)이라는 표현을 우리나라에서 누가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쓰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것이 영어의 middle class 를 번역한 표현인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로 짐작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번역과정에서 불필요한 문자가 하나 더 붙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산(産, produce)’이다. 영어를 직역하자면 ‘중간계급’(주1)인데 번역된 중산층을 풀어서 살펴보면 ‘중간 정도로 산출하는, 즉 소득을 올리는 계층’이 되는 것이다.

한편 영어의 middle class 와 대비되는 다른 class 는 무엇이 있는가. 위로는 upper class 와 아래로는 underclass(주2) 그리고 이 표현들은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되는가. 각각 상류층(上流層)과 하류층(下流層)이다. 희한한 일이다. 이들 계층은 중산층과 마찬가지로 본 뜻에 문자를 하나 첨가하였는데 상산층이나 하산층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바로 ‘류(流, stock 또는 flow)’라는 문자를 쓴다.

요컨대 우선 upper, middle, under class 가 각각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각각이 지니는 사회학적 개념의 다양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구도를 말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이는 그 출발이 사회학에서 ‘사회적 서열’에 따른 계층적 특성을 해석하고자 함이 주목적이었지 엄밀히 말해 경제적 개념은 아니다.

강준만 교수는 “중산층은 경제·사회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적 개념이다”라고 새로운 용도를 발견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쓰려고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말 표현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流와 産이라는 문자가 덧대지면서 마치 경제적인 개념인양 인식되어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강 교수 뿐 아니라 수많은 우리 지식인들은 그냥 그것이 당연히 경제적 개념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주류경제학에서는 애초에 계층을 나누어서 사고하는 방식이 아니므로 그런 표현을 쓰지를 않는 것으로 알고 있고(쓴다 해도 아마도 노동 경제학이나 후생 경제학 정도에서?), 반골의 경제학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도 middle class 와 대비될 수 있는 쁘띠부르주아지(petit-bourgeoisie)는 가장 핵심적인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는 사회학적인 개념일 뿐이다. 물론 후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자본주의 이론이나 통일전선 이론에서 이 계층에 대한 좌익의 태도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긴 하였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은 경제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중산층 vs 중류층(中流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기왕에 이 표현을 쓸 것 같으면 중류층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1) 상류층, 하류층의 표현과 일맥상통하다 2) 같은 한자어권인 중국과 일본도 중류층이란 표현이 더 일반적이다 3) 중류층이 이 계층의 의식과 물적조건을 더 잘 표현해준다.

세 번째 이유가 가장 결정적인 것인데 바로 이 점이 대한민국 사회의 부에 대한 인식을 더욱 잘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소득의 기준으로 부를 평가하기보다는 자산의 기준으로 부를 평가하는 것을 좋아한다. 현재 얼마 버는가도 중요하지만 자산이 얼마냐에 더 관심이 많기에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도 기를 쓰고 부동산, 주식 등 자산의 취득에 열중한다.(주3)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 사회는 부모로부터의 재산증여, 부동산 등 비생산 노동을 통한 부의 축적 등의 동기가 많고 그를 통해 중산층으로의 진입에 성공하는 경우가 더욱 흔하다.

그러니 강 교수의 다음 글에도 나와 있듯이 middle class 라는 자각인식이 소득과 거의 관계없이 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2006년 한국종합사회조사에선 월소득이 500만원대인 사람 중 26.6%가 자신이 하위 계층이라고 답한 반면, 400만원대인 소득계층에선 그 비율이 5.1%에 불과했으며, 100만원 미만 소득계층에선 61%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평가했고, 36.5%만이 하위 계층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 인용문은 또한 앞서 말한바 더 나아가 중류층 이데올로기가 경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강 교수의 표현에 따르자면 심리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중산층이라는 표현에 대한 지루한 딴죽을 건 이유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글을 쓰는데 있어 어느 단어를 고르느냐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 하는 것은 그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자기가 싸질러 놓은 일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는 표현이 얼마나 공분을 일으키고 있는지 보면 잘 알 수 있다. 특히나 지적논쟁에 있어서는 섬세한 단의 취사선택이 어쩌면 대통령 연설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강준만 교수의 글은 애초 중산층이라는 표현이 이미 경제적 표현이 아님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으나 여태 통상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여 왔던 선입견에 대하여 스스로 나름 통찰력을 가지고 관찰하였다고 자부하면서 중산층도 아닌 것들이 중산층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살고 있다는 The Matrix 와 같은 시나리오를 써낸, 엄밀하게 보면 중산층의 애초 뜻풀이 글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산층의 원 뜻인 middle class 는 원래 쓰기부터 그런 의미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차후에는 그나 다른 이들이 중산층이라는 소재로 글을 쓸 때에는 단순 뜻풀이보다는 좀 더 발전된 논리의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써본다.

(주1) 영어에는 ‘계급’과 ‘계층’이 차별성이 없으므로 계급으로 표현한다

(주2) 이 표현은 low class, lower class, working class 등 다양한 표현이 있다.

(주3) 사실 우리나라가 정도가 심한 것일 뿐이지 자본주의 일반의 인민들이 대개 그렇지 않은가

13 thoughts on “‘중산층’이라는 표현에 대해 딴죽걸기

  1. Pingback: 하민혁의 통신보안

  2. Jayhawk

    저도 중류층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언급하신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만 덧붙인다면,

    근대이후의 계급사회(특히 20세기후반)는 아무래도 “산(産, produce)”보다는 “비(費. consume)”의 개념으로 계급을 나누어야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들 드신 것처럼, 소득을 얼마나 올리나, 자산이 얼마나 있느냐는 모두 플러스적 산(産, produce)의 개념이지만 실제로 해당 계급으로 인식하는 본인 스스로들은 산의 인식을 배제하고 어느 정도 누리고 있느냐, 즉 마이너스적인 비(費. consume)의 개념으로 스스로의 계급을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사결과가 대표적이지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도 자신이 쪼들리게 소비하고 있다고 평가(사교육, 대출수준 등)한다면 하류층이라고 평가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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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소비의 개념을 계급/계층 분석에 도입하는 것도 분명 의의가 있을거 같네요. 특히나 요즘처럼 소득이나 자산 뿐만 아니라 소비까지 양극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것 같습니다. 오늘 신문에선가 보니 사교육비가 가계지출의 20%를 넘어섰다더군요. 학원비 내다가 굶어죽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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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리스인마틴

    어쩌면 소득수준만으로 정하기가 거시기한 부분이 있는가 봅니다.
    월소득 500이면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소득이 많은 계층과의 접촉이 잦은 애매한 계층이므로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것같고
    소득이 낮을 수록 위보다는 더 낮은 사람을 돌아보게 되므로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일 수도 있겠고요.

    다르게 말하면 위만 쳐다보고 악착같이 더 벌어야지 했기에 아직도 배고픈 계층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군요.
    (포스트와 상관없는 댓글이 되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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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아~ 어느 계층/계급과 어울리느냐에 따른 상대적 우월감이나 박탈감도 무시할 수 없겠군요! 예전에 제가 포스팅한 아파트 주민들의 임대 아파트 주민들의 격리욕구도 비슷할 것 같네요.

      (절대 포스트와 상관 있는 댓글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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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승환

    괜찮은 정도의 삶의 질을 누리며 먹고 사는데 별 문제 없는 계층… 을 정의하려고 해도…

    이 나라에서는 정의하기가 너무 힘들 듯 하네요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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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말씀하신대로 특히 이 나라에서 삶의 질의 수준이 어느 정도냐를, 어느 계층이 되어야 살만 한거냐를 규정하기가 어려운 것 같고요. 특히나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세계 각국이 공히 그런 쪽으로 나아가는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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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아거

    강준만의 글이 ‘소비사회에 포섭된 쁘띠부르주아지’같은 주장의 재탕같다는 지적에 일정 부분 공감합니다.
    또 지적하셨다시피, middle class를 marxism에서 논하는 계급적 관점에 따라 논의할 수 없음은 분명하지요.
    다만 ‘소비사회에 포섭된 쁘띠”같은 문화주의 논의가 대체로 자기 만족식 결론으로 끝나는 데 반해, 강준만은 현실적 충고를 주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고종석식 진보주의라는 글이나 다른데서 볼 수 있는 것은 강준만은 자신의 분석이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는 셈이죠. 그는 과학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을 무시해서 정치를 할 수 있냐는 주장인 셈이죠.
    개인적으로 강준만의 모든 글에 동의는 하지 않지만, 한국의 진보가 성공할 수 없는 요인으로 이 ‘심리적 middle class”에 대한 논의를 많이 하는 작업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대부분이 노동자인 도시 사무직 종사자들이 5년전에는 노무현을 찍었다가 이들 중 상당수가 이명박으로 돌아섰거나 기권을 했다는 것,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른바 진보나 개혁적 보수 진영은 영원히 지역교 신봉자들과 강부자 연합군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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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아거님이 글을 남겨주셨군요.

      아거님의 글에서 강준만 교수의 글을 알게 되었으나 아거님 글에 대한 소회라기보다는 강 교수 글 자체의 소회라 따로 트랙백을 보내진 않았습니다. 이해바라고요. 🙂

      강교수의 현실감각이야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은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고종석식 진보주의에 대한 글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런 맥락이라 여겨지네요.

      그래서 말씀하신바 그러한 현실감각을 가지고 정치 또는 운동을 하여야 할 것이고 특히나 사회구성원 대다수를 설명하고 있는 중산층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 대상 들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 부분이 거대담론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많이 결여되어 있어서 저도 답답해 했던 문제입니다.

      다만 제 윗글에서 짧게 지적하였지만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강교수의 원글이 그러한 문제인식을 본격적으로, 또는 시론으로라도 제기하려 했다면 그렇게 ‘진보진영은 말은 아름다우나 현실감각이 없어’라는 식으로 인상비평으로 끝내서는 안되었을 문제겠죠.

      진보진영이 어디서 어디까지를 이야기하며 말씀하신 노무현 지지자가 왜 이명박측으로 돌아섰는가에 대한 분석도 곁들여 주었으면 훨씬 다듬어진 글이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솔직히 강교수의 글에 대한 제 느낌은 그가 진보진영에게 받은 그 느낌 그대로이더군요. 말은 아름다우나… 그래서? 정도로요.

      암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 가트로그 RSS구독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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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성지인

    처음엔 중산층이란 말이 무수히 많은 번역된 한자어들과 같이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본문에 그게 아니라고 되어 있고, 잠깐 보고오니 정말로 일본에선 ‘중류층’이라고 쓰는군요.

    주류경제학에선 계층을 나누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충격적으로 와닿는군요. 경영학적 관점만 가득한 저에게는 특별히 더 충격적이네요.
    (특히나 요즘 경영학은 어떻게든 시장/고객을 쪼개고 나누고 합치고 비틀고 하고 있는 마당이라…)

    그리고 middle class가 소득이 아니라 자산의 기준에 있다는 말씀은 굉장히 당연하지만 생각치 못했던 이야기네요.

    덧.
    저같은 경우엔 강준만 교수의 글을 읽고 ‘응 그래’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 세 글자까지만. 😉

    Reply
    1. foog

      경영학에서는 소비계층을 세분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니까 계층을 이런저런 기준으로 나누거나 조합하는 방식이 많을 것으로 추측되네요. 앞으로 성지인님으로부터 좋은 경영학 이야기 들으러 블로그에 자주 들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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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beagle2

    foog님 글은 빼놓지 않고 읽는데 이 글은 이제서야 봤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중상위 수준 이상의 소득-교육을 갖춘 피고용자들을 중간계급으로 규정하고 (이택광 선생님의 풍자대로 강만수의 규정이 제가 생각하는 중간계급과 상당히 가까운 듯 합니다.) 그 이하 중간층은 그냥 중간층 혹은 “서민”이라고 규정하곤 했습니다. 중류층도 둘로 구분했던 건데 왜냐하면 ‘중하위 평균적 소득계층-중류층 노동자’와 ‘중상위 소득계층-상류층 노동자’들의 의식은 비슷한면도 있으면서 미묘하게 다른 면도 분명히 있더라구요. 이런저런 사람들을 겪으며, 제딴엔 어렴풋하게나마 foog님이 말씀한대로 “class라는 개념엔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구도가 녹아있다”는 걸 깨닫고선 이렇게 구분했던건데 지금 곰곰 생각해보니 개념없이 막 썼었었네요.

    아무튼 잘 읽었습니다.

    계급문제를 다룬 가디언의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는데 거기선 태생이 계급규정에 강한 영향을 미치나 보더군요.

    http://www.guardian.co.uk/uk/2007/oct/20/britishidentity.socialexcl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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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영국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규정이 다른 나라보다 더 철저하므로 태생이 많은 영향을 미칠거라 추측이 되네요. 소개글 잘 읽을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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