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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하여

미국과 유럽에서 여러 상업은행들이 파산했으나, 협동조합은행은 단 한 곳도 파산하지 않았다. 영국 최대의 협동조합은행인 ‘더 코퍼러티브 뱅크(The Co-operative Bank)’는 영업이익이 ‘07년 79억파운드(약 14조원)에서 ‘12년에는 133억 파운드(약 23조)로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오히려 증가했다. 네델란드 국민의 50%가 조합원으로 가입된 네델란드 라보방크(Rabobank)는 무배당원칙과 내부적립만으로 42조원의 자기자본을 축적하고 있으며, 금융위기가 닥친 2008년에 오히려 20%나 순이익이 급증한 바 있다. [중략] 이처럼 협동조합은행들이 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성장을 유지한 것은 다른 은행들이 부동산이나 위험 부담이 큰 대형 수익 사업 진출을 통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 반면, 협동조합은 본연의 사업영역과 다른 의사결정을 할 때 조합원들의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조합원을 위한 최상의 상품과 서비스에 집중하는 전략이 영업 확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공존을 위한 실험 협동조합모델, 제조업에도 가능할까’]

무절제한 “시장 자본주의”의 대안의 하나로 “협동조합 모델”의 가능성을 살펴본 LG경제연구원의 보고서 중 일부다. 상업은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CEO의 투자의지, 이윤 극대화 추구 동기, 그리고 신속한 의사결정 등 자본주의 기업이 일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미덕(?)이 결여된 점이 오히려 협동조합은행의 미덕이 된 역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의사결정에 관한 구조적 특성의 차이에 관한 언급은 지난 금융위기의 원인을 주로 “도를 넘어선 탐욕”으로 설명하려는 것보다는 보다 유익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특정 기업의 특정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의 동기가 어떠하건 간에, 소수의 의지에 의한 의사결정은 득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는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한 고민은 계속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언급한 사례를 우리나라에 대입해보면 저축은행의 부동산PF 에로의 집중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 이코노미스트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모저축은행의 행장이 모시중은행의 후순위채 수익률이 높은데 살지 말지 고민을 하기에 사라고 했더니, 사지 않고 결국 “그동안 하던 부동산PF”나 계속 하더니 망했다고 한다. 독단적이고 바보 같은 결정이었다.

물론 의사결정 과정이 협동조합 모델을 취하게 되면 비전문가적인 – 반드시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 목소리가 득세할 우려도 있다. 의사결정을 민주화하기 위해 사외이사를 도입한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는 단점이다. 하지만 금융위기를 몰고 왔던 파생상품의 탄생과정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소위 “전문가”들끼리의 의사결정에 의한 오류도 만만치 않다.

주식회사의 형태에서,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도 참여시키려는 시도도 있긴 하지만, 결국 어찌 됐든 주식회사는 주주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의사결정을 소수의 의한 독단으로 흐르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 재벌은 순환출자를 통해 극히 소수의 지분을 가진 재벌 일족이 “오너”행세를 하며 의사결정을 한다.

삼성이 오늘날의 삼성으로 자란 데에는 “반도체를 만들겠다”는 현명한, 그리고 “독단적인” 의사결정이 선행된 점은 있다. 하지만 그런 의사결정은 LG도 했고, 현대도 했고, 동부도 했지만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삼성 또한 자동차 시장 진출이란 어리석은 의사결정도 했다. 실패의 뒤치다꺼리는 정부가 해줬다. 독단적인 의사결정의 리스크는 상존한다.

곁가지 의사결정의 신탁(信託)에 관해

“순환출자 금지”는 “경제민주화”의 답이 아니고 풀이과정이다

대선에서의 경제 분야에선 최대이슈가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다. 그리고 이 화두에서 양 진영이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공약은 “대기업집단의 순환출자”에 관한 공약이다. 순환출자라는 것은 “한 그룹 안에서 A기업이 B기업에, B기업이 C기업에, C기업은 A기업에 다시 출자하는 식으로 그룹 계열사들끼리 돌려가며 자본을 늘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출자방식에 대해 박 캠프는 “신규 순환출자 금지”를, 문 캠프는 “순환출자 금지 및 기존분 3년 내 해소”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삼성의 순환출자를 통한 지배구조(출처)
 

순환출자의 가장 큰 문제는 가공자본의 형성을 통해 경제력을 집중함으로써 기업의 의사결정과정과 건전한 경제행위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한국 “재벌”의 역사는 이러한 순환출자 등을 통한 문어발식 확장으로 양적성장을 극대화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양 진영은 이러한 퇴행적 경제행위가 경제 시스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상황인식을 공유하며 이를 금지함으로써 그 부작용을 막으려는 계획인 것이다. 이들 간의 가장 큰 차이를 살펴보자면, 문 캠프는 박 캠프와 달리 기존 순환출자도 해소하라는 것이다.

이 차이가 어떻게 재벌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블로거 이정환의 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보자면 재벌의 입장에서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신규 순환출자 금지” 정도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박근혜의 당선을 바랄 것이다. 그것이 “경제민주화”의 파급력을 최소화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회자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는 절름발이 “경제민주화”다. 순환출자의 부작용 해소는 그 전체과정의 일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독일도 1930년대와 40년대 나찌체제에서는 기업간 상호소유로 엮인 콘체른의 비중이 컸지만, 1945년 패전후 콘체른이 해체되고, 독점 방지법 등이 제정되었으며, 이원적 기업지배구조가 발달해서, 일부 잔존하는 순환출자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런 안전장치들이 부재하거나 부실하기 때문에 재벌들로의 경제력 집중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략] 독일에서는 대기업들이 이원적 기업지배구조를 갖도록 법률로 강제되고 있습니다. [중략] 즉, 대기업에 이사회와 별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감사회가 있어서 이사의 임명권과 해임권을 가지고 있는데, 감사회는 주로 주주 대표와 종업원 대표들로 구성됩니다. 이런 지배구조에서는 이사회가 가공자본을 형성하려 할 경우 종업원 대표나 주주대표들이 반대를 하기 때문에 문어발식 확장을 할 수 없습니다.[다른 나라는 왜 삼성 같은 순환출자가 없을까요?]

인용 글에서 보다시피 결국 핵심은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다. 재벌의 순환출자가 가지는 가장 큰 모순은 “소유-지배의 괴리”다. 우리 재벌은 하나같이 “회장님”이라는 거창한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 지분으로 “그룹”의 의사결정을 진두지휘한다. 이는 주식회사 제도의 근간에도, 주주자본주의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 순환출자 금지는 주식회사 제도의 본래 취지로 가기 위한 교량일 뿐이며,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경제민주화”의 보다 진일보한 형태인 이해자 자본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나 경제단위의 의사결정이 꼭 “민주화”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판단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회장님의 고독한 결단”이 주효하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고, 엄청난 정보의 양을 소수의 판단에 맡겨둘 수 없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다층적인 의사결정 구조 일인지배 구조보다 우월하다는 상황인식도 만만찮고, 기왕에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를 꺼낸 이들이 의사결정 구조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이처럼 서구의 하의상달식 경제민주화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정치권이, 그것도 대선 공약으로 제시한 후 비로소 논의가 시작됐다. 그런데 제시된 경제민주화 비전에 진정 민주적인 요소는 없어 보인다.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발언권 강화를 위한 장치도, 이해 당사자들 간의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겠다는 내용도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요구해야 할 주체들의 목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것도 특이하다. 경제민주화는 작업장에서, 사업체에서, 지역에서, 근로자와 소비자, 지역주민, 소액주주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는데 말이다.[경제민주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순환출자 금지”는 “경제민주화”의 답이 아니고 풀이과정이다.

자기자본수익률이 가지는 한계와 그 극복방안에 관하여

1917년 제네럴모터스가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듀퐁이 회사의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때,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새로운 단계로 상승했다. [중략] 듀퐁은 엔지니어에서 재무전문가로 변신한 유망한 직원인 도날드슨 브라운(Donaldson Brown)을 보내 디트로이트를 정리하게 한다. 브라운은 단순한 사실 하나를 언급한다. : 자기자본수익률(ROE, Return on equity)은 세 부분의 등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매출에 대한 이익률에 자산대비 매출비율을 곱하고, 자본대비 자산비율을 곱해서 산출된 것이다. [중략] 그는 만약 판매자들이 매출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주력하고, 관리자는 그들의 물리적 시설에서 매출을 쥐어짜서 나오는 매출에 보상을 받고, 재무 관리자는 그들이 필요한 자본의 양을 최소화시키는데 집중한다면, ROE는 자연스레 나올 것이라는 것을 이론화했다.[End the Religion of ROE]

ROE를 어떤 방식으로 계산하든지 간에 오늘날 기업의 의사결정에서 가장 흔하게 적용하고 있는 지표가 되어버렸다(오늘날에는 주로 투입과 산출에 대한 시간적 가치를 고려한 내부수익률[IRR, Internal Rate of Return]으로 계산한다). 그런데 이 글의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의사결정은 두 가지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오직 주주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사업의 사회에 대한 영향을 무시한다는 점, 둘째, 사회복지에 중요한 인적자원을 자본에 대한 효율의 극대화 차원에서 바라본다는 점 등이다.

ROE의 이러한 한계는 주주자본주의가 비판받는 지점과 유사하다. 즉, 주주의 투입인 자본(Equity)에 대한 이익(Return)만을 중요시하는 계산법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인용문에서 예로 든 인적자원, 즉 노동자나 소비자 등)에 대한 고려가 없기에 사회에 외부불경제(external diseconomy)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수정노선을 추구하는 이는 주주자본주의를 이해관계자자본주의로 대체하자고 주장한다. 인용문은 회사의 의사결정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공식을 바꾸자는 제안에 가깝다.

지난번 경제학자 스티글리츠가 GDP가 유효한 지표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경기가 나빠져서 전업주부가 파출부 일을 하면 그의 행복지수는 줄어들 것임에도 GDP가 올라가는 모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고민은 인적자원의 극대화와 사회복지의 역관계와 유사한 고민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근본문제는 우리가 고려하여야 할 다른 요소들을 어떻게 계량화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고, 지금도 사회효용성 분석에 적용하고 있지만 정답은 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 지점에서 정치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이윤보다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구호는 ‘월스트리트’ 시위는 물론 수많은 反신자유주의 운동에서 등장하는 구호인데, 이를 ROE에 도입하여 노동자들의 복지를 감안하면 될 것이다. 그 비중을 얼마나 어떻게 계량할 것인가 하는 부분은 계급간의 세력관계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계량분석 밖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서 그것은 계량화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진실로 인민 대다수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전문가 집단 등에 의해서 말이다.

p.s. 그런데 위 구호는 사실 ‘소수를 위한 이윤보다 다수를 위한 이윤이 우선이다’가 더 현실적일 듯?

의사결정의 신탁(信託)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시장에서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혼합 경제에서는 위험 가능성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힘이 널리 확산되고 분산되어 있는 반면, 사회주의 제도 안에서는 중앙 집권화 되었다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위험이 비용으로 ‘전환’된다. 사회주의 제도 안에서 비용은 관리 가격으로 국민들에게 부과된다. 자본주의 제도 안에서 비용은 보험이 생산과 분배 과정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물건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에게로 떨어진다. [국가의 퇴각, 수잔 스트레인지 지음, 양오석 옮김, 푸른길, 2001년, p203]

이렇듯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은 위험을 감수하는 이, 재화나 용역을 이용하는 이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이다. 또는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다. 하다못해 일회용 라이터를 사더라도 그 가격에는 판매회사가 화재보험에 가입한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이번 구제금융에 – 새로운 이름은 “예외적인 지원(exceptional assistance)”이라고 – 특히 분노하는 것이 있다면, 반(反)시장적인 저항이나 반(反)자본주의적인 저항도 있겠지만 상당 부분 구제금융을 받은 기관들이 ‘보편적이지만 반드시 정확하지만은 않은’ 시장의 규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여태의 수익은 천문학적인 보수로, 또 나아가 구제금융 받은 돈까지 이른바 잔류보수(retention bonus)라는 명목으로 가져가는 반면 위험감수에 대한 비용은 수잔 스트레인지가 사회주의 제도에 대해 묘사한 것처럼 국가가 – 결국은 국민이 – 부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모순된 상황을 월스트리트의 탐욕이나 부패한 정치가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거대집단으로 – 때로는 개별국가보다도 큰 단위로 – 성장한 금융 및 제조업 등의 산업부문은 이미 몇 번 강조하였다시피 단순히 자본가의 사리사욕을 채워주는 이상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개별 국가, 나아가 문명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존재를 유지시킬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문들이 소유권 상으로 사유화되어 있는 한편, 더 나아가 이익창출 – 동시에 수반되는 위험감수 – 의사 결정이 여러 보완책에도 불구하고 – 예를 들면 이사회나 주주총회 – 여전히 극소수 소위 경영진의 수중에 놓여 있다는 점이 현 경제체제의 문제 중 하나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의사결정단위를 좀더 확대하여 노동자평의회 혹은 그 이상의 공동체 단위에서 위험을 감수하기로 의사결정을 하였다면 적어도 그에 수반되는 비용이 사회적으로 처리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좀더 관대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러한 의사결정 과정은 선입견에 의해서건 또는 경영학적인 명민한 연구에 의해서건 여전히 집단주의적 사고에 의해서보다는, 번뜩이는 상상력의 소유자 또는 전문가의 ‘고뇌에 찬 결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더 낫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결국 소유권이 사유화 또는 집중화의 모순을 극복하고 좀더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할지라도 – 이는 사실 꽤 진척이 되어 있는데 공모펀드랄지 연기금 등이 투자를 할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 여전히 그 재산권자들이 의사결정을 소수의 경영진 또는 전문가에게 신탁(信託)할 경우 소위 공정성 시비가 재연될 개연성이 클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제도 하에서는 결국 유효한 수단들이 법제화 등의 각종 규제, 언론 등을 통한 사회적 감시, 그릇된 또는 부도덕한 결정에 대한 징벌 정도 일 것이다. 그나마 그 징벌도 권력자들에게는 예외가 적용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