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의 날

오랜만에 평일에 휴가를 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영화 네 편을 봤다. 네 편 모두 로맨틱 코미디. 그야말로 ‘로맨틱 코미디의 날’이라 할 수 있다. 처음 고른 영화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실수로 ‘네 번의 장례식’이라고 쓸 뻔 했다. 공포영화냐?). 풋풋한 미모가 돋보였던 시절의 휴 그랜트와 앤디 맥도웰이 사랑에 빠지는 영화다. 둘 다 미소가 아름답다. 로맨틱 코미디에 영국 악센트가 어울린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준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그 영국 악센트와 휴 그랜트에 이끌려 다음 작품으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골랐다. 미국 토박이 르네 젤위거가 천연덕스럽게 영국 악센트로 웃겨주는 작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만과 편견’의 현대판 해석이랄 수 있다. 남자 주인공도 TV판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인 콜린 퍼스에다 극중 이름도 마크 다시다. 휴 그랜트는 전편에 비해 많이 느끼해져 나왔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네 번의~’와 또 다른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두 영화 모두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한 공포영화 ‘위험한 관계(Fatal Attraction)’을 언급한다는 사실. ‘브리짓’에서는 TV로 방영되는 장면까지 보여준다. 그만큼 그 영화가 서구의 성생활 – 특히 바람피우는 것에 – 에 미친 영향이 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두 영화가 어쩌면 같은 가상의 세계에서 펼쳐진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스타일과 흐름이 비슷하다.

다음으로 고른 작품은 바다 건너 미국으로 와서 ‘High Fidelity’. 우리나라에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라는 어이 없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주1) 주인공은 존 쿠작. 어릴 적 평범한 외모에서 눈부시게 쿨한 외모로 자라 메이저급 배우가 된 케이스다. 헤어진 여인과의 티격태격 스토리도 재밌지만 음반가게 사장이라는 설정 때문에 그곳에서의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이 잔재미를 더해준다. 이 작품에서 잭 블랙이 극 말미에 마빈 게이의 ‘Let’s get it on’을 멋지게 부르면서 그야말로 잭팟을 터트린다.

역시 또 남자주인공에 이끌려 선택한 작품은 시간을 거슬러 1989년 만들어진 ‘Say Anything’. 성장기의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이야기지만 매우 섬세하다. ‘싱글스’나 ‘올모스트 페이모스’로 잘 알려진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작품과 ‘High Fidelity’ 사이에 또 하나의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두 영화 모두 릴리 타일러가 출연한다는 사실. 중급의 외모지만 매력적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도 생각이 난다. 아~ 물론 존 쿠작 영화의 감초이자 그의 누나인 조안 쿠작도 두 작품 모두에서 나온다.

딴 이야기 : 이틀 전에 동네 앞에 새로 생긴 중고 DVD 판매 가게에서 케빈 클라인 주연의 In & Out 이 눈에 띄어 골랐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오늘 문득 생각나 다시 가보니 오 세상에~ 그 사이 누가 채갔다. 빌어먹을… ‘로맨틱 코미디의 날’의 오점이 되어버렸다.

(주1) 왜 이 어이없는 제목이 붙여졌는가 하면 그 전에 빌 머레이 주연의 ‘Lost in Transition’이 ‘사랑도 번역이 되나요?’라는 어이없는 제목이 붙여졌는데 또 그것을 본떠서 더 어이없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도대체가 생각이 있는 것인지…

14 thoughts on “로맨틱 코미디의 날

  1. beagle2

    평일에 휴가를 내어 로맨틱 코미디에 파묻혀 지내셨다니!! 꿀같은 하루를 보내셨군요.

    High Fidelity 에서 잭 블랙이 벨 엔 세바스찬을 듣던 동료점원을 구박하는 모습을 보고 벨 엔 세바스찬을 무척 좋아하는 저는 상심에 빠지기도 했었던… 저 어리버리하고 펑퍼짐한 브리짓 존스는 정말 사랑스러웠었죠.

    저 영화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즐겼던 몇년 전이 그립네요, 아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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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저도 가끔 벨앤세바스찬의 노래를 들었지만 어딘가 맥빠진 스미스 노래같은 느낌이랄까… 극중 잭 블랙처럼 구박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강한 호감은 아닙니다. 🙂 홍대앞에 예전에 벨앤세바스찬이란 이름의 빠가 있었는데 문닫았겠죠? 그나저나 지금은 저 영화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없는 처지이신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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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류동협

    하루에 네편이나 보셨다니 행복한 하루를 보내신거 같아요. 앞의 세편은 텔레비전에서 해줄 때마다 보는 영화죠. 마지막 작품은 아직 볼 기회가 없는데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저 작품 가운데 특별한 사건도 없고 밋밋해 보이는 High Fidelity를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합니다. 거기 나오는 음악도 참 좋고 잔잔한 사랑에 울컥하게 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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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탑파이브 시리즈, 음악 테이프 만들기(저도 예전에 꽤나 만들었습니다만), 헤어진 여인들 추억하기.. 등등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넘쳐나죠. 여하튼 새이애니띵 꼭 찾아보세요. 또 다른 감동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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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Jayhawk

    모두 보았고, 저 중에서 스티븐 프리어즈의 하이 피델리티를 제일 좋아합니다. 스티븐 프리어즈의 것들은 다 좋아합니다.

    She didn’t make me miserable, or anxious, or ill at ease. You know, it sounds boring, but it wasn’t. It wasn’t spectacular either. It was just good. But really good.

    이 대사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게 많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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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그러고보니 하이피델리티가 스티븐 프리어스의 작품이었군요. 저도 그의 작품을 대부분 좋아합니다. 잔재주 안부리고 깔끔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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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쿨짹

    쎄이 애니씽은 90년대 초반부터 봐야지 봐야지 했지만 결국엔 못봤어요.

    제가 이중 젤 좋아하는 영화는 포 웨딩 앤 어 퓨너럴… 미스터 빈이 주례서는 장면은.. 정말 ㅋ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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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그럼 벌써 몇 년째 안보고 계신겁니까? 거의 15년 –; 미스터 빈.. ㅋㅋㅋ 묘한 발음차이로 그렇게 웃긴 상황을 연출하다니 대단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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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써머즈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가 먼저 개봉한 영화 아닌가요? 그 후에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가 나왔고요.

    저도 하이 피델리티 좋아합니다. 잭 블랙의 오버 연기와 팀 로빈스의 어처구니 없는 역할 (^^)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더군요;

    저도 잭 블랙이 부르는 ‘레츠 게리롱’을 들으며 ‘와- 잘 부른다’ 싶었는데, 이미 자기 밴드로 TV 쇼를 하고 있더군요. 그러더니 바로 앨범도 내고… 그러다가 ‘스쿨 오브 락’에서 진가를 발휘했죠. ㄷㄷㄷ 여자들이 좋아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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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외국에서야 하이피델리티가 더 빠르지만 제 기억으로는 국내 소개는 로스티인트랜지션이 빨랐습니다. 하이피델리티는 국내에 한참 뒤에야 소개된 것으로 기억을… 어쨌거나 제목으로만 따지만 분명 형제죠. 못난이 ‘사랑도~’ 형제. 🙂 로스트인트랜지션은 개인적으로 그리 뛰어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악이 멋있었죠. 감독의 음악취향도 당시 저의 취향과 굉장히 유사해서 신기해했다는… 잭 블랙은 역시 스쿨오락이 짱이었다는..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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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oog

      app 님 말씀을 들으니 써머즈님 말씀이 옳더군요. 암것도 모르는 제가 우겨서 죄송합니다. m(_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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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써머즈

      죄송하긴요. foog님의 주옥같은 글에 오류가 방치되는 걸 볼 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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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app

    국내에서도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가 먼저 아니었나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는 비디오가게에서 빌려 보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국내 개봉이 계속 늦춰져 기다리다 못해 divx로 받아봤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그러다 국내 개봉이 결정되었을때 자연스레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를 떠올렸더랬지요. 전후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네이버 무비를 검색해보니 사랑도 리필이 되나요,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 사랑도 소모가 되나요, 등 다양한 아류 네이밍들이 등장하는군요. 아, 그리고 댓글에서 언급하셨던 벨엔세바스찬이라는 바는 제가 일하던 곳이었답니다. 무려 핫뮤직에서 ‘마크 코즐렉이 한국에 오기로 결정하던 때부터 꼭 오고 싶었다(푸핫)’고 소개 된 바였지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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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app님 말씀을 들으니 제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군요. T_T 그나저나 그놈의 ‘사랑도~’ 시리즈는 많기도 하군요. 암튼 세상이 좁아요. app님이 또 거기서 일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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