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크라시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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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ttp://www.postcarbon.org/a-personal-appreciation-of-m-king-hubbert/, Fair use, Link

매리언 킹 허버트는 당대를 대표하는 지구과학자였지만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던 문제의 인물이었다. [중략] 1930년대에는 뉴욕 시의 컬럼비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라는 운동을 주도했다. 대공황이라는 사태에 대한 책임을 정치가와 경제학자에게 묻는 테크노크라시는 민주주의를 속임수라고 공격하며, 과학자와 기술자가 정부로부터 권력을 인수받아 경제에 합리성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략] 테크노크라시는 가격 체계를 없애고 성장 없는 사회를 꿈꾸면서 현명한 테크노크라트들이 이끄는 행정부로 대체하려 했다. 허버트는 화폐 체계가 아닌 “물리적 관계, 열역학”에 기초한 사회구조를 조성하려 했다. 그는 경제학자들만 알아먹는 ‘상형문자’로 곡해된 ‘금전’ 구조로는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2030 에너지전쟁, 대니얼 예긴 지음, 이경남 옮김, 사피엔스21, 2016년, pp 290~291]

우리에게는 허버트의 곡선으로 유명한 과학자 매리언 킹 허버트(Marion King Hubbert, 1903년 10월 5일 ~ 1989년 10월 11일)가 과학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다. 우선 테크노크라시라는 용어에 대해 알아보자면 영어사전에서는 이 용어를 “① 과학·기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사회를 이끄는 시스템, ② 전문가들로 꾸려진 정부, 특히 기술 전문가들에 의한 사회 운영”(메리엄 웹스터 영영사전)이라고 정의한다. 이 신조어는 1919년 미국의 윌리엄 헨리 스미스(William Henry Smyth)라는 엔지니어가 ‘기술: 산업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이란 글에 선보이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정치체제를 우중(愚衆)이 다스리는 민주주의가 아닌 철인(哲人)이 다스리는 체제여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플라톤이 주장하였고 그 뒤에 비슷한 주장은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상당부분 현실정치에서 꾸준히 관철되어왔기에 – 본인은 다른 우중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왕족이나 귀족이 다스리는 정치체제 – 그 엘리트가 단지 과학자로 대체되는 것이기에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주장이긴 하다. 다만, 내가 흥미로운 지점은 허버트는 화폐 체계를 “물리적 관계, 열역학”에 기초한 체계로 전환하려 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주장을 살펴보진 않았지만, 얼핏 금융자본에 의해 형성된 화폐를 부정하려 했던 비트코인 초기의 이념을 연상케 해서 흥미롭다.

요즘 읽는 책 중 ‘돈을 찍어내는 제왕, 연준’이 있다. 이 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벤 버냉키가 의장으로 있던 시기 이후 시행한 양적완화와 이로 인한 부작용을 다루고 있다. 작가인 크리스토퍼 레너드의 주요 비판지점은 민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연준의 의사결정이 소수의 – 특히 경제학자로서의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결정됐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비판은 시간적으로 넓게 확장하면 허버트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이 경제학자에게 분노감을 표시했던 대공황이나 많은 경제위기의 순간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허버트는 경제학자를 과학자로 대체한 테크노크라시로 정의를 실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쨌든 사실 경제학자들 역시 스스로를 일종의 “과학자”라는 사실을 어필하려 했었다. 경제학의 태동 이후 그들은 과학의 엄밀성을 경제에 적용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왔고, 그들의 이론에 수학을 적용하려 시도했고, 그들의 학문을 ‘사회과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경제학자의 지위를 과학자가 찬탈하든지 경제학자가 과학자의 왕관을 찬탈하든지간에 일정정도 현대사회는 테크노크라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급기야 인공지능과 블록체인과 같은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경제정책에 반영된다면 그야말로 보다 진전된 테크노크라시가 될 개연성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의 의사결정은 보다 합리적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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