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페데리코 펠리니

올해의 발견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특정한 방식으로 측정하기 시작한 이래, 특히 지구의 공전 1회를 1년이라는 용어로 칭한 후부터 인간들은 그 주기의 끝 무렵에 묘한 상념에 빠져들곤 한다. ‘올 한해를 잘 마무리하자’는 다짐을 한달지, 아쉬웠던 부분을 후회한달지, 즐거웠던 추억을 되새김한달지… 이 글도 그러한 “인간적인” 습성의 일환으로 올 한해 어리석은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간 각종 좋은 것들에 대한 회고형식의 글이랄 수 있다. 각각의 것들은 굳이 올해 처음 선보인 것들은 아니다. 무지한 내가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다가 올해 발견하였고 그에 감화를 받은 것들이다.


엔론스캔들 : 세상에서 제일 잘난 놈들의 몰락

이 책의 원전 ‘Enron: The Smartest Guys in the Room’은 포츈紙의 기자인 Bethany McLean와 Peter Elkind의 공저로 2003년 발간되었고 번역서로는 2010년에 발간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신촌의 한 헌책방에서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엔론이 망한 이유에 대한 알찬 정보들이다. 知人은 작가들의 서술이 약간 지루한 측면이 있어 보일 정도로 사건이 아닌 정보 위주란 표현을 하던데, 이에 동의하고 그 점 또한 이 책의 미덕이라 생각한다.

엔론은 “에너지기업”이란 외피를 둘러쓰고 규제완화와 금융세계화에 편승하여 사세를 확장하다가 고꾸라진 기업이다. 이들의 興亡은 미국 자본주의가 반복하고 있는 실수가 어쩌면 일시적 버그가 아닌 태생적 한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엔론이 시도한 각종 신종 파생상품 거래, 개발도상국에서의 민영화, 회계처리 방식 변경과 규제완화를 위한 로비, 캘리포니아 정전사태의 정황, 경영진들의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 등 현대 자본주의를 종단면으로 잘라 보여주는 듯한 책이다.

영화
8 1/2

이탈리아의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1963년 만든 작품이다. 많은 이탈리아 감독이 그렇듯 펠리니도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담은 리얼리즘 영화를 제작하곤 했는데, 이 영화는 이채롭게 감독의 직업과 삶에 대한 자전적 요소가 담긴 몽환적인 분위기의 작품이다.

펠리니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영화감독 구이도는 아내와의 갈등, 애인과의 무미건조함, 영화제작의 난항 등 이러저러 중년으로서의, 남편으로서의, 감독으로서의 위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이 모든 에피소드들은 시간순서와 관계없이 뒤섞여 꿈처럼 엮어 진행된다.

영화는 모순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구이도의 모습에 별로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다만 그의 그러한 어리석음이 어린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져온 인습, 기억, 경험이라는 정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할 뿐이다. 물론 기억은 때로 왜곡되게 반영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이자 ‘삶에 관한 영화’다. ‘한 개인의 삶의 거울’로써의 영화가 여러 변수에 따라 어떻게 삶을 다시 규정하고 왜곡하는지 –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 보여주지만, 그게 또 삶에 녹아들어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음악
The Great Beautician in the Sky by Magazine

Magazine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들의 前身은 The Buzzcocks라는 펑크밴드로 봐야 할 것 같다. 음악적 키를 쥐고 있는 Howard Devoto가 이 밴드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위 포스트-펑크로 분류되지만 사실 좀 더 다채롭고 특이한 음악영역을 개척했다.

전신인 The Buzzcocks가 Sex Pistols나 The Clash와 함께 펑크의 개념을 규정하는 직선적인 음악을 구사했다면, 이들은 여러 음악장르를 수용하여 다양한 악기를 도입한, 매우 연극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내놓았고, 이 곡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곡이 수록된 Real Life란 음반은 1978년 출시되었고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앨범의 대표곡은 밴드의 유일한 히트곡이랄 수 있는 Shot By Both Sides다. 이 곡은 The Buzzcocks 시절을 연상시키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멜로디의 펑크락 넘버다.

반면, The Great Beautician은 전통적인 락밴드의 악기편성에서 벗어난 다양한 악기편성과 몽환적인 분위기의 가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상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 뮤지컬이나 서커스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멜로디가 일품인 곡이다.

웹사이트
venezuelanalysis.com

이 사이트는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뉴스와 분석을 전달하는, 그 나라의 변혁운동에 호의적인 입장을 가진 개인들이 운영하고 있는 사이트다. 사이트 소개에 의하면 다른 나라의 학자, 저널리스트, 지식인, 정치인, 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글을 제공하는 이들은 베네수엘라, 미국, 또는 그 외 지역의 다양한 저술가들로 스스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외국의 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유는, 역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매스미디어가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왜곡하여 전달하고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다.

그러한 관계로 이들이 전하는 소식은 자연히 베네수엘라 정부나 차베스에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개별사안에 대해서는 – 예를 들어 게이퍼레이드 소식을 전할 때처럼 – 현 체제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는 객관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 사이트의 가장 큰 미덕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反자본주의 실험’의 진행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막연히 이념서적의 추상적 언어나 과거 소비에트 블록의 실험 정도로만 짐작하고 있는 체제변혁의 사례를 생생히 전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팟캐스트
타박타박 세계사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팟캐스트다. 일요일 오전 MBC FM에서 전파를 타는 프로그램을 팟캐스트로 제공하고 있는 것인데, 남경태 씨의 구수하고 활달한 진행과 패널들의 심도 깊은 역사지식, 그리고 시의성 있는 다양한 이슈가 잘 조화를 이루는 프로그램이다.

이 팟캐스트를 소개하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빅뉴스라는 우익매체가 이 팟캐스트에 이념적 잣대를 갖다 댔는데, 청취자의 한 명으로서 이 사실을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러면 안 되는가’라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이런 팟캐스트가 흥했으면 할 뿐이다.

전체적으로 서너 개의 꼭지로 진행되는데, 주제는 다양하다. 올림픽의 역사, 음식의 역사, 그림의 역사 등등 역사적 배경을 제공하는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해석은 반드시 이념적이지는 않지만 그러한 해석이 필요할 경우 주저하지는 않는다.

친구가 내게 이 팟캐스트를 소개해준 이유가 ‘찾은 노래 숨은 역사’란 꼭지를 좋아해서일 것 같아서라는데, 역시 이 꼭지가 가장 맘에 든다. ‘와이낫’이라는 밴드의 리더 전상규 씨가 진행하는 꼭지인데, 락음악에 담겨져 있는 역사적 배경을 감칠 맛나게 전하고 있다.

잡담 20011년 9월 22일

# 구글리더와 한RSS를 기준으로 하면 한 3천여 명이 구독하고 뉴스레터와 페이스북 구독자 등을 감안하면 몇 백 명 정도 더 구독자가 있는 블로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좋은 자산이다. 무식한 소리만 늘어놓긴 하지만 그래도 여러 명이 귀를 기울여준다는 것 자체는 뿌듯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런 수많은 귀를 의식해 사실관계에 있어 자기검열을 하고 책을 읽어 사고의 지평을 넓히려 나름 노력한다는 점에서 블로그는 일종의 게으름에 대한 채찍질이 되기도 한다.

# 얼마 전에 처음으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과 1/2’을 보았다. 새로운 영화를 준비하는 영화감독의 변덕스럽고 유치한 행동과 마음, 유조선이라도 너끈히 산으로 올려버릴 것 같은 영화제작과정에서의 수많은 난관과 불협화음, 애인과 아내의 긴장감 속에서 그것을 영화의 스토리로 삼아버리는 과정에 대한 메타적 시각, 시대상을 적절히 반영하는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들. 난해한 작품전개니 뭐니 하는 선입견을 떠나 무척 재미있게 본 작품이다. 영화 속 감독의 나이와 비슷한 나이가 되니 더욱 절실히~

# 눈치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블로그에 글을 쓸 때에 지키는 철칙이 있다. “하나의 글 내에서 각각의 문단은 똑같은 분량으로 맞추도록 최선을 다한다.” 일단 시각적으로도 보기에 좋다. 그 다음으로 더 중요한 동기이지만 이렇게 글을 틀에 맞추려다 보면 쓸데없는 표현을 삭제하거나 압축하는 요령이 생긴다. 대여섯 줄의 문단에서 표현하지 못할 논리는 거의 없다. 나머지는 대개 중언부언하는 말들일 뿐이다. 블로깅을 안 하는 분은 트위터에서 연습하면 된다. 미래의 대화는 140자 안에서 끝날 것이다.~

# 블로그에 들어오는 리퍼러들을 보면 요즘은 ‘나는 꼼수다’를 찾으려다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다. 이 변방의 블로그에까지 그렇게 많은 트래픽을 유발시킬 정도면 그만큼 이 프로그램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쨌든 그 검색어로 들어오시는 분들은 조금 당황할 것이다. 그들이 마주할 글들은 인천공항 민영화와 관련하여 나꼼수의 잘못된 사실관계를 지적하는 글들이니 말이다. 열에 하나라도 그러한 글들도 유의미하다고 인정해주는 분이 있다면 다행스런 일이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입체도형이다.

# 유럽의 위기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고 우리 경제까지 위협하고 있다. 각국의 재정위기는 자본주의 재정원리의 고유한 모순에 속하기는 하지만, 근래에 들어 특히 심해진 것은 역시 미국 등 서구의 부동산 및 금융 시장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가 생각지도 않은 방향과 규모로 전염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단기간에 해소될 마땅한 재료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는 점. 대완화의 시기, 대호황의 시기, 대불황의 시기 등 大자가 붙은 시기가 또 도래한다면 그것은 대청산의 시기일 것이다.

로마, 무방비 도시

로베르토로셀리니의 1945년 작품인 이 영화는 마치 에릭홉스봄의 20세기 역사를 다룬 명저 ‘극단의 시대’를 영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파시즘과 나찌즘이 극에 달하던 시기 로마에서 저항운동을 펼치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그린 이 영화는 형식적인 측면에서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탈리아식의 사회주의 네오리얼리즘의 큰 축을 이룬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주의 : 이하 스포일러 있음>

극의 줄거리는 크게 반독 항쟁을 벌이고 있는 공산주의자 만프레디, 저항활동을 후원하는 돈피에트로 신부, 그리고 만프레디를 사랑하는 배우 마리나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보수적 카톨릭 사이의 갈등은 서구세계에서 보편적인 현상이었지만 둘 모두 천년왕국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집단윤리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친화성도 무시할 수 없으며 평사제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호의감도 충분한 개연성을 가질 것이다. 흥미롭게도 다음의 경구를 보면 혁명가와 사제의 공통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1928년에 그의 아내가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결코 그녀와 살지 않았다. 여자를 멀리하는 것은 혁명가의 철칙이다.” – 칼파나 두트

마치 사제서품을 눈앞에 둔 성직자의 각오를 연상케 하는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주장에서 언급되는 혁명가의 연애관은 만프레디와 마리나의 연인관계는 만프레디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한다. 투사도 인간일진데 사랑이라는 감정에 휩쓸릴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혁명과 욕정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화해할 수 없었나보다.

페데리코 펠리니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이 영화는 이후 “전화의 저편”, “독일 영년”과 함께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3대 전쟁 영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