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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사고

당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원래 주장했던 모든 원칙들을 비방하고 배척했는데, 바로 그런 이름을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행했다. [중략] 당은 또 중요 행정기관마저 뻔뻔스럽게 사실과 정반대인 뜻을 지닌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었다. 평화부는 전쟁을, 진리부는 거짓말을, 애정부는 고문을, 풍요부는 굶주림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중략] 신중한 ‘이중사고’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이런 모순들을 조화시킴으로써만 영원히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1984,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민음사, 2005년, p300]

모순을 조화시키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조지 오웰의 뛰어난 통찰력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중사고(Doublethink)’는 ‘중립’이나 ‘위선’과도 다른 부분이다. 과거의 역사를 지우고 당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역사를 쓰는, 즉 거짓말을 담당하는 부서를 진리부(Minitrue)라 갈등 없이 부를 수 있는 사고, 그것이 ‘이중사고’다. 오웰이 묘사한 오세아니아의 집권당 영사(英社, Ingsoc)는 “자유는 예속”이라는 슬로건으로 이러한 이중사고를 극대화한다.

현대정치에도 이러한 이중사고가 존재할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평화유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전쟁, 자연보전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자연파괴, 진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수구적 행위 등의 부조리는 오웰 생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상당부분 위선적인 것이지만 정말로 정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여기며 정의를 말살하는 이중사고의 정치세력도 엄존한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 진보를 추구하는 이들의 진로를 차단해버리기도 한다.

이중사고의 위험성이 바로 그런 점이 아닐까 싶다. 위선은 적발되면 폭로되고 본질과 다름을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이중사고는 본질적 의미를 훼손하여 퇴로를 막아버린다.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로써의 유용성을 위선보다 더 심대하게 파괴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수구적으로 돌린다. 이스라엘의 평화를 명분으로 한 팔레스타인 학살을 보고 “왜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하려 했는지 알겠다”는 진보주의자의 푸념이 이러한 퇴보 과정의 한 사례다. 이중사고는 위선보다 더 위험하다.

‘1984’가 말하는 전쟁의 본질

전쟁 행위의 본질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대중을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게 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그들을 지혜롭게 하는 데 사용되는 물품들을 박살내거나 하늘로 날려버리거나 바다 속 깊이 빠뜨리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가 실제로 파괴되지 않는다고 해도 무기 공장은 소비 물자 생산에 사용될 노동력을 소모시키는 역할을 한다.[1984, 조지 오웰 씀, 정회성 옮김, 민음사, 2005년, p268]

조지 오웰의 작품 ‘1984’에서의 집권세력인 오세아니아 정부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은 에마뉘엘 골드스타인1이 자신의 저서에서 서술한 전쟁의 본질이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전쟁이 내포한 본질은 오히려 후자라는 사고의 역발상이 흥미롭다.

전쟁은 고대로부터 다른 이의 경제적 자산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고, 오늘날에는 일국의 군수산업이 여타 국가의 전쟁을 통해 융성하고 해당 노동자나 지역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 전체적인 범위로 보면 골드스타인의 말이 옳을 것이다. 궁극에는 무의미하게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처음에 서로의 아이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끔찍한 살육을 자행하고 있지만 본질은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진정 그들을 위해서라면 복수를 위해 백린탄을 터트려 양민을 학살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 특히 이스라엘은 – 광기어린 공포로 노동력을 소모하고 있을 뿐이다.

예전에 ‘군사 케인즈 주의’의 허상에 대해서도 쓴 적 있지만 군사행동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정신적으로 성숙치 못한 행동일 뿐이다. 집권세력의 권력 온존을 위해 끊임없이 조장되는 전쟁 위기론에 국민은 애국주의에 고취되어 현실의 고통을 잊거나 정당화한다. 그런 의식에 성숙함은 없다.

가리타니 고진은 ‘전쟁의 영구 포기’를 선언한 일본 헌법 9조의 평화주의 조항을 통해 일본이 진정한 어른이 됐다고 주장하였다. 점령군에 의해 강제된 것이고 모순되게도 자위대라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순은 아베라는 미숙아가 헌법을 부정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노동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 전 세계가 전쟁을 영구적으로 포기하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양(量)은 질(質)을 바꾸는 방향으로만 변화하는 것일까?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1984, 조지 오웰, 정희성 옮김, 민음사, 2003년, p100]

소설 ‘1984년’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쓰가 당(黨)의 눈길을 피해 몰래 쓰고 있는 일기에 적은 말이다.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이 가게에 나온 냄비를 사기 위해서는 피터지게 싸우면서 정작 체제 전복을 위해선 함성을 지르지 않는 사실에 대해 든 생각을 적은 것이다.

오직 하나의 캐치가 있는데 그것은 캐치22이고, 이것은 실재하고 임박한 위험을 눈앞에 두었을 때의 자신의 안전에 대한 염려는 합리적 사고의 과정이라는 것을 구체화한 것이다. Orr는 미쳤고 비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요청하자마자 그는 더 이상 미치지 않은 것이고 더 많은 미션만큼 비행해야 한다.[출처]

윈스턴의 저 독백을 읽고 생각난 다른 소설 조셉 헬러의 ‘캐치22’의 일부다. 캐치22라는 이 부조리한 조항은 소설 내내 저자가 구사하는 유머의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부조리는 마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의 ‘양질 전화의 법칙’을 무용하게 만드는 상황 같다.

‘양(量)이 계속 변화하면 질(質)까지도 바뀐다’는 것이 양질 전화의 법칙의 원리다. 물이 섭씨 100도 이상으로 끓게 되면 기화되는 현상이 대표적인 그 법칙의 사례다. 하지만 캐치22 상황에서는 액체가 기화되는 일은 없다. 양의 변화 자체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양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의식도 그러하다. 문제는 그것이 질을 변화시키는 순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은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요새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역방향도 꽤 있는 것 같다.

과거는 현재가 규정한다

바로 얼마 전 2월에 풍요부는 1984년 중에는 초콜릿 배급량을 줄이지 않겠다고 약속(공식 용어로는 이를 ‘절대 서약’이라고 한다.) 했었다. 그러나 윈스턴이 알고 있듯 실제로는 초콜릿 배급량이 이번 주말부터 30그램에서 20그램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처음에 약속했던 내용을 4월 언제쯤 배급량이 감소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바꿔놓기만 하면 되었다.[1984,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민음사, pp58~59]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조지 오웰이 스탈린이 통치하고 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풍자하여 쓴 SF소설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쓰는 진리부(Ministry of Truth)에 근무하며 이렇듯 역사에 대한 오류들을 바로(?) 잡는다. 이 경우처럼 그는 정부가 어떤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 이전의 약속을 고쳐놓는다. 이런 묘사는 실지로 스탈린이 통치 기간에 저질렀던 – 심지어 사진 속의 인물을 지워가면서까지 – 역사 왜곡을 비판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이 극적이고 잔인한 사례지만 이렇게 과거를 고쳐서 미래를 지배하려 했던 정부는 꽤 많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NLL대화록을 둘러싼 우리의 정치권 논쟁도 비슷한 사례다. 노무현 前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어떤 대화를 했는가 하는 것이 대화록만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문제로 보였는데, 그 뒤 수많은 배우가 등장하면서 판을 흔들고, 대화록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슈로딩거의 대화록’이 되어 현재를 뒤흔드는 과거가 되었다.

다행히 우리의 현실은 1984년에서의 현실처럼 윈스턴의 간단한 업무처리를 통해 과거가 바뀌는 정도로 폐쇄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과정이 덜 폐쇄적이 되었다는 것이 과거를 흔들어대는 행태를 쳐다보는 우리의 시선을 덜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 “현폐(現弊)”가 “적폐(積弊)” 탓을 하는 부조리한 과정을 육안으로 확인하며 – 사실은 통념과 다르다며 끊임없이 과거를 흔들어대는 수구매체에 시달리면서 – 우리의 인식은 한층 혼란스러워진다.

과거는 현재가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