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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가야할 그 너머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지금 경제산업성도 기업에 ROE를 8%이상 올리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이런 정책을 진심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경제산업성이 부호 투자가의 집사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제로금리일 때 ROE만 높다는 것은 원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뭔가 다른 것, 예를 들어 임금을 내리거나 여러 가지를 하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습니다. 전체 경제성장 중 일부분만이 이익인데 제로성장일 때 이익을 8% 늘리려면 인건비 등을 삭감해야 합니다.[자본주의의 종말 그 너머의 세계,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미즈노 가즈오 지음, 김정연 옮김, Take One, 2017년, p221]

제목은 참 묵시록적인데 정작 내용은 소박한 것이 일본 경제학 서적의 특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평소에 했는데, 이 책은 그런 내 편견에 증거를 한 조각 더 보태주는 책이다. 경제관료, 금융기업의 이코노미스트 등의 경험을 쌓은 후 경제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두 저자가 내놓은 “그 너머의 세계”는 무척 소박하기 때문이다.1 요컨대 “제로성장”일지라도 “잃어버린 20년” 운운하지 말고 현재에 만족하며 살자는 것이 대안이다. 또는 성장하는 사회가 아닌 성숙한 사회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근거로 사카키바라 교수는 일본의 높은 삼림화율, 높은 평균수명, 낮은 범죄율 등의 높은 질적 가치를 든다. 자족적인 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일본 정도의 나라의 경제학자가 할법한 소리이긴 하다.

인용문은 두 저자의 대담 중 미즈노 교수가 한 이야기다. 그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은 격차를 확대시킨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중심과 주변을 형성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제국의 식민지 수탈을 의미함은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시대의 그것 역시 수탈할 곳을 찾아 헤매다 결국 더 이상 신대륙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내부를 주변화 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인데, 일본의 경우 1990년 20%였던 비정규직 비율이 2014년 현재 37.9%까지 상승했다. 그리고 인용문에서와 같이 국가가 나서서 수익률 제고를 주장하면 그 수단은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즈노 교수의 주장이다.

아베가 평소에 노동자의 임금을 더 올려줘야 한다고 주장하곤 하지만, 정작 재정적 안정보다는 오히려 저렇게 인건비 하락으로 귀결될 성장신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두 저자의 생각이다. 아마도 아베의 로드맵은 정체되어 있는 일본경제는 기업이라는 프론티어가 8% ROE로 박차고 나가고 이 열매가 트리클다운으로 이어져 나머지 경제도 살아난다는 정도가 되었을 것일 텐데 저자들은 오히려 그런 성장신화가 양극화를 부추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본과 자산은 기업과 재력가들의 갈수록 수중에 집중되고 소득이 부의 원천인 노동자는 계속 주변화되고 있는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이 가야할 그 너머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자기자본수익률이 가지는 한계와 그 극복방안에 관하여

1917년 제네럴모터스가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듀퐁이 회사의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때,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새로운 단계로 상승했다. [중략] 듀퐁은 엔지니어에서 재무전문가로 변신한 유망한 직원인 도날드슨 브라운(Donaldson Brown)을 보내 디트로이트를 정리하게 한다. 브라운은 단순한 사실 하나를 언급한다. : 자기자본수익률(ROE, Return on equity)은 세 부분의 등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매출에 대한 이익률에 자산대비 매출비율을 곱하고, 자본대비 자산비율을 곱해서 산출된 것이다. [중략] 그는 만약 판매자들이 매출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주력하고, 관리자는 그들의 물리적 시설에서 매출을 쥐어짜서 나오는 매출에 보상을 받고, 재무 관리자는 그들이 필요한 자본의 양을 최소화시키는데 집중한다면, ROE는 자연스레 나올 것이라는 것을 이론화했다.[End the Religion of ROE]

ROE를 어떤 방식으로 계산하든지 간에 오늘날 기업의 의사결정에서 가장 흔하게 적용하고 있는 지표가 되어버렸다(오늘날에는 주로 투입과 산출에 대한 시간적 가치를 고려한 내부수익률[IRR, Internal Rate of Return]으로 계산한다). 그런데 이 글의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의사결정은 두 가지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오직 주주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사업의 사회에 대한 영향을 무시한다는 점, 둘째, 사회복지에 중요한 인적자원을 자본에 대한 효율의 극대화 차원에서 바라본다는 점 등이다.

ROE의 이러한 한계는 주주자본주의가 비판받는 지점과 유사하다. 즉, 주주의 투입인 자본(Equity)에 대한 이익(Return)만을 중요시하는 계산법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인용문에서 예로 든 인적자원, 즉 노동자나 소비자 등)에 대한 고려가 없기에 사회에 외부불경제(external diseconomy)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수정노선을 추구하는 이는 주주자본주의를 이해관계자자본주의로 대체하자고 주장한다. 인용문은 회사의 의사결정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공식을 바꾸자는 제안에 가깝다.

지난번 경제학자 스티글리츠가 GDP가 유효한 지표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경기가 나빠져서 전업주부가 파출부 일을 하면 그의 행복지수는 줄어들 것임에도 GDP가 올라가는 모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고민은 인적자원의 극대화와 사회복지의 역관계와 유사한 고민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근본문제는 우리가 고려하여야 할 다른 요소들을 어떻게 계량화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고, 지금도 사회효용성 분석에 적용하고 있지만 정답은 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 지점에서 정치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이윤보다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구호는 ‘월스트리트’ 시위는 물론 수많은 反신자유주의 운동에서 등장하는 구호인데, 이를 ROE에 도입하여 노동자들의 복지를 감안하면 될 것이다. 그 비중을 얼마나 어떻게 계량할 것인가 하는 부분은 계급간의 세력관계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계량분석 밖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서 그것은 계량화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진실로 인민 대다수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전문가 집단 등에 의해서 말이다.

p.s. 그런데 위 구호는 사실 ‘소수를 위한 이윤보다 다수를 위한 이윤이 우선이다’가 더 현실적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