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를 파는 여자

한동안 글이 너무 딱딱해서 예전에 끼적거린 글을 퍼 나릅니다. 글에 98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니 11년 전에 쓴 글이로군요.(세월 잘 간다~)

성재는 탁자위에 놓인 치킨버거를 한입 베어 물고는 콜라를 한 모금 빨았다. 그러면서도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표지엔 월간문학 7월호라고 쓰여 있었다. 화창한 일요일 점심시간이라서 주위탁자엔 학생인 듯한 손님들이 많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적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패스트푸드 점의 깔끔한 풍경을 연출하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바깥을 바라보자 전면유리창 너머로 맞은편 백화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창한 파란 하늘을 배경이 화려한 백화점의 외양을 부추기고 있었다. 전면 벽의 커다란 광고판에는 넓은 차양모자에 파란색 주름치마차림의 한 소녀가 금방이라도 돌아설 듯이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뒤돌아 서있었다. 치마 아래로 보이는 늘씬한 다리와 하얗고 긴 목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98년 여름과 어울리는 시원한 모습이었다.

성재는 느지막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서점을 들러 이책 저책을 뒤적거리다 월간문학을 구입한 후 끼니를 때우기 위해 이 패스트푸드 점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월간문학에는 그의 새 단편이 실려 있었다. “미소를 파는 여자”라는 제목의 짧은 단편이다. 성재는 반년 전 바로 이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후로 두세 번 이 책에 글을 내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쓴 글은 그의 경험담을 반쯤 섞은 자서전적인 글이었다. 성재는 작가들이 삶을 팔아먹고 사는 파렴치 한 존재라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황급히 자신처럼 상상력이 부족한 녀석들이나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중얼거리며 나머지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들에게는 면죄부를 발행해주었다.

글을 읽어보니 그가 쓴 문구 하나 하나마다 또다시 1년 전 그날이 떠올려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오래전부터 이미 감정이 식었어요.>

<오빤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난 그냥 나의 길을 가고 싶을 뿐이에요.>

성재는 아픔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자신이나 미소를 팔아 명성을 얻으려 했던 그녀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의 그녀를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만히 입을 벌려 ‘혜원아’하고 불러보았다.

그때 문을 열고 한 소녀가 들어왔다. 줄무늬 티셔츠에 베이지색 멜빵바지 차림의 경쾌한 스타일의 아가씨였다. 가게 주위를 둘러보다 성재를 발견하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냐. 나도 금방 왔는걸.”

성재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탁자위엔 반쯤 남은 치킨버거와 콜라컵, 그리고 월간문학이 놓여져 있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선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들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둘은 어색한 침묵에 쌓여 있었다. 성재가 먼저 입을 뗐다.

“어제 전화로 한 말 진심은 아니겠지?”

“….”

소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성재도 역시 입을 다물어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둘을 감싸고돌았다. 1분 후 이번엔 소녀가 입을 뗐다.

“진심이에요.”

또다시 침묵…

“네가 그런 일 하는 것 나는 개의치 않아. 너의 미소가 내 것만은 아니니까.”

“그런 게 아녜요.”

“그럼 무엇 때문이야?”

성재의 음성이 높아졌다. 건너편의 소녀들은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여전히 재잘거리고 있었다. 또다시 침묵…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오래전부터 이미 감정이 식었어요.”

성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빤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난 그냥 나의 길을 가고 싶을 뿐이에요.”

성재는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패스트푸드점이 얼마나 부적절한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이는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소녀였다.

“먼저 갈게요.”

“혜원아.”

성재가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건너편 테이블의 소녀들도 듣지 못할 만큼 조그마한 부름이었다. 몸을 잠깐 일으켜 세웠으나 소녀가 문을 나서자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성재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건너편의 소녀들의 흔적도 사라지고 가게안도 많이 한산해졌다. 성재는 앞에 놓인 치킨버거를 한입 베어 먹었다. 콜라 잔의 컵을 떼어버리고 식은 콜라를 들이켰다. 눈을 들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백화점 광고판의 소녀는 돌아서서 정면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유쾌하게 만들 만한 시원한 미소였다. 그녀의 미소는 성재만을 위한 미소가 아닌 만인을 위한 미소 – 또는 상품구매자를 위한 – 였다.

한동안 대형광고판을 바라보던 성재는 이내 체념의 웃음을 짓고는 자신의 소설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한동안 대형광고판을 바라보던 성재는 이내 체념의 웃음을 짓고는 자신의 소설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6 thoughts on “미소를 파는 여자

  1. Odlinuf

    정말 부적절한 장소군요. 개인적으로 사람 많은 곳에서 이별 이야기 주고 받는 거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쪽팔리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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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종횡무진

    혹 이 글은 픽션을 가장한 과거의 경험담이 아닐까 하는 연관성 없는 추측을 해 봤습니다^^ 진짜 픽션 맞죠?
    글을 보면서 막 이미지가 떠올라서 들이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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