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는 아직도 시민권이 없다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솔직히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분노와 투쟁의지보다는 무력감이다. 아주 옛날 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이래 수많은 이들이 산업현장에서, 그리고 스스로 몸을 살라 사라져 갔지만 시간은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여전히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목숨을 끊어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고 정해진 씨는 한국전력공사 인천사업본부로부터 수주 받아 배전 업무를 하는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였다. 그가 요구한 사항은 어처구니없게도 △주 44시간 노동 △토요 격주 휴무 보장 등의 근로조건 개선 내용이 들어가 있는 단체협약 체결이었다. 그런데 협력업체들로부터 단협 체결권을 위임받은 대성건설 유해성 사장은 기본적으로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주의자였다. 그러니 노동자는 40년 전에 외치던 구호를 다시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태일 시절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일까?

(역설적이지만) 변화는 있다. 전태일은 청계천 ‘하꼬방’에서 일하던 노동자라면 정해진 씨는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정해진 씨는 속된 말로 전태일 시절에는 없던 ‘비정규직’ 노동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즉 정해진 씨는 꼬박 꼬박 한국전력공사를 위해 일하고 있으면서도 한전의 노동자로 취급받지 못하는 아웃소싱 업체에서 항시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노동자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쩌면 법적지위로 보자면 전태일 열사보다 더 비참한 지경이 된 것이다. 한전을 위해 일하면서도 한전 노동자라 불리지 않고 그마저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날품팔이 신세가 바로 정해진 씨가 처해 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44시간 노동이라는 정말 상식적인 요구에 목말라 할 정도로 상황은 비참했던 것이다. 민주노조가 생긴 이래 가까스로 조심스럽게 가꾸어오던 ‘노동자의 시민권’이 비참하게 내동댕이쳐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한전 측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공사가 바로 이 정부가 만들어준 비정규직 법안의 방패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 예전에는 노동자들이 들이밀 목표라도 있었다. ‘A가 나를 고용하여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못하면 나는 A에게 항의한다’라는 단순논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복잡해진 고용구조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관련법규로 인해 노동자는 멀쩡히 눈앞에 보이는 A가 아닌 또 다른 신기루를 향해 들이받아야 한다. 그 신기루가 바로 시대착오적인 협력업체 사장님들이시다.

오늘자 동아일보 사설 <‘법대로 세상’을 위한 불법 파업 배상 판결> 에서는 “직권 중재를 무시하고 불법 파업”을 했던 철도노조에 대한 51억 원 배상 판결을 법치주의의 기본을 지킨 판결이라고 칭송했다. “직권 중재”라는 것에 대한 계급 차별적 성격은 둘째로 치고라도 노동이 뭇매를 맞아야 기사에 올리는 저 메이저 언론의 행태가 가증스럽다. 그들은 100일을 훌쩍 넘기고 있는 이랜드/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도 거의 같은 기간 동안 파업하고 있는 바로 이들 한전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려온 적이 없다. 정해진 씨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들 노동자들이 업무방해죄로 대규모 배상판결이라도 받아야 사설에 실릴 것이다.

21세기 남한 땅에서 노동자는 아직도 시민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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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1028150054

2 thoughts on “노동자는 아직도 시민권이 없다

  1. 카트라이더

    말씀하신대로 노동자에게는 시민권이 없습니다.
    전태일 청년의 죽음 이후 많은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조금씩 찾아왔던 권리들이, 상식적인 수준에 이르기도 전에 다시 빼앗기기를 벌써 10년입니다.
    며칠전 붕어빵 노점상이 죽고, 또 전기공 노동자가 죽었네요..
    죽음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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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궁극적으로는 정치세력화겠죠. 그 꿈이 요즘은 흔들흔들하고 있지만요. 저 멀리 남미에서는 착실히 하는 것 같은데 불가능한 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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