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은 58년 후반기에 락희 연지 공장 옆에 부지를 마련하고 공장 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독일인 헨케를 판매이익의 2%를 준다는 조건으로 지사장의 자리에 앉혔다. [중략] 59년 11월, 최초로 생산된 국산 1호 라디오는 전기용 단파 5구 1밴드 형이었다. [중략] 외제의 산뜻한 외관과 좋은 성능에 입맛을 들인 고객들은 금성 기술진의 감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제품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당시엔 배터리로 들을 수 있는 성능 좋은 외제 라디오가 피엑스에서 마구 쏟아져 나와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그 후 금성은 선풍기와 전화기 등을 내놨지만 별 재미를 못 보다가 61년 5.16이 일어나면서 하늘의 별을 딴다. <특정 외래품 판매 금지법>이 제정되면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변화로 금성은, 죽어가던 나무에 새 잎이 돋고 꽃이 피어나듯, 승승장구하게 된다.[재벌들의 전자전쟁, 오효진 저, 나남, 1984년, pp18~19]
엘지 일가에게 3공세력은 진짜 구세주였겠네요.
좋은 이야기 잘 봤습니다.
“재벌 대기업들은 시장 경쟁으로 설장했다.”라는 신화를 깨부수는군요;
뭐….이런 역사는 옴레기를 출시한 SS가 도저히 아잉X과 경쟁할 수준이 안된다 판단되자 전파인증을 늦춰 규제해주며 되풀이 되지 않았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