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땡의 모험

이승환 동무가 요즘 직장을 구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야한 글은 안 올리고 뜬금없이 ‘좌빨 블로거가 추천하는 도서’라는 블로그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글을 올려놓으면서, 나를 좌빨 블로거라고 딱지를 붙인 후 책을 추천하라고 을러댄다. 이전에도 이미 한번 소위 양서(良書)를 추천한바 있는데 사실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나 같은 것이 책을 읽어봐야 세상 책의 1조분의 1도 안 읽었을 텐데 불특정다수에게 “니네 이 책 알아?”라고 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뭐 이승환 동무가 오랜 방황 끝에 취직도 한 것 같고 이제 자본주의의 마름으로 충실히 살아간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에 대한 작은 선물로 그의 부탁 – 강권 -을 들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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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me from Breaking Free” by Scanned from a copy of the book.. Licensed under Wikipedia.

내가 추천하는 도서는 꿈과 모험이 가득한 만화 ‘땡땡의 모험(영어 제목 : The Adventures of Tintin, 불어 제목 : Les Aventures de Tintin)’이다. 실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를 꼽으라면 이 만화 이외에 다른 만화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독서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만화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 만화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뚜렷치 않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유행하던 이른바 소년잡지에 단편적으로 소개되던 에피소드에서부터 땡땡을 처음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 국내에 출간된 하드커버도 구입하고 외국 사이트에서 영어판도 구입하면서 조금씩 컬렉션을 늘려갔고 총 24개에 달하는 에피소드 중 거의 전부를 구비하게 되었다.

‘땡땡의 모험’은 Herge(에르제)로 알려진 벨기에 작가 Georges Remi(1907-1983)가 창조한 작품이다. 그는 보이스카웃 신문이나 카톨릭 신문 등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가, 1929년 처음 카톨릭 신문  Le Petit Vingtieme 에 땡땡의 캐릭터로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에피소드는 ‘땡땡과 소비에트’로 그 후 첫 단행본으로 출시된다. 이후 사실상의 마지막 작품이랄 수 있는 – 1986년의 ‘땡땡과 알파아트’는 미완성 – 1976년의 ‘땡땡과 피카로스’까지 총 23편의 에피소드를 창작하여 땡땡을 유럽 최고의 인기 캐릭터로 성장시켰다.

1. Tintin in the Land of the Soviets (1929-1930)
2. Tintin in the Congo (1930-1931)
3. Tintin in America (1931-1932)
4. Cigars of the Pharaoh (1932-1934)
5. The Blue Lotus (1934-1935)
6. The Broken Ear (1935-1937)
7. The Black Island (1937-1938)
8. King Ottokar’s Sceptre (1938-1939)
9. The Crab with the Golden Claws (1940-1941)
10. The Shooting Star (1941-1942)
11. The Secret of the Unicorn (1942-1943)
12. Red Rackham’s Treasure (1943-1944)
13. The Seven Crystal Balls (1943-1948)
14. Prisoners of the Sun (1946-1949)
15. Land of Black Gold (1948-1950)
16. Destination Moon (1950-1953)
17. Explorers on the Moon (1950-1954)
18. The Calculus Affair (1954-1956)
19. The Red Sea Sharks (1958)
20. Tintin in Tibet (1960)
21. The Castafiore Emerald (1963)
22. Flight 714 (1968)
23. Tintin and the Picaros (1976)
24. Tintin and Alph-Art (1986, 2004)

나는 무엇 때문에 땡땡에 매료되었나? 우선 땡땡 시리즈는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닌 진짜배기로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의 모험’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20세기를 제대로 관통하고 있는 이 만화는 소년기자 땡땡과 그의 애견 밀루 Milou(영어 이름으로는 스노위 Snowy)를 등장시켜, 이미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은 자유로운 여행이 여의치 않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서의 모험을 선사하였다. 이러한 모험만화의 패턴은 하나의 전범이 되어 이 후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1

이것이 땡땡이 지닌 매력의 모든 것이라면 굳이 땡땡을 ‘가장’ 좋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 작품 말고도 ‘꿈과 희망’을 준 작품은 꽤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엄청난 매력은 반세기 동안 불과 이십여 개의 에피소드만을 만들었던 에르제의 지독하리만치 집요한 장인정신이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그려졌던 작품은 서서히 칼라로 바뀌었고 이전 흑백 작품들 역시 칼라로 재작업 하여 출간되었는데2 각 에피소드에서 그러한 작가의 그림체나 스타일이 발전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 매력적이다. 잘 그려진 우키요예를 연상시키는 색감과 선(線)의 풍요로운 조화, 풍경의 세밀함3은 장면 하나 하나를 감상할 수 있는4 재미를 안겨준다.5

여기까지는 사실 굳이 땡땡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아동만화의 걸작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또 하나의 작품 ‘아스테릭스의 모험’ 같은 – 매력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선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바로 작가 에르제의 사상적 발전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카톨릭 신문에서 일했던 유럽의 작가는 사실 사상적으로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극우라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고 그는 백인우월주의에 유럽우월주의적인 보수우익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씩 변해갔고 이것이 각각의 작품에 알게 모르게 반영되어 간다는 점이 이 에피소드의 엄청난 매력이다.6

그의 첫 작품 ‘땡땡과 소비에트’는 철저한 반공(反共)만화다. 땡땡의 눈에 – 에르제의 눈에 – 소련은 도적들이 지배하는 나라다. 그리고 땡땡은 이 도적들을 농락한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다. 에르제는 후에 이러한 그의 맹목적인 반공주의를 반성한다. 그래서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작품을 흑백 버전으로 남겨두었다. 다음 작품 ‘콩고에서의 땡땡’도 사실 만만치 않았다. 콩고는 그 당시 벨기에의 식민지였다. 땡땡은 이 작품에서 제국주의적 사고를 하면서 동물들을 학살하는 등의 비상식적 –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원주민들로부터 영웅대접을 받는다. 요컨대 땡땡은 전형적인 유럽 백인 소년들을 위한 모험만화였다. 이렇게 계속 갔으면 땡땡은 걸작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에피소드 ‘미국에 간 땡땡’에서는 다소 발전이 있었다. 유럽인이 보기에 미국의 ‘자본주의자’들은 소련의 ‘공산주의자’만큼은 아니지만 여하튼 역겨운 돈벌레였다. 에르제는 이 작품에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다룬다. 약간은 공평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상전환은 ‘블루로터스’였다. 당초 이 작품은 일본인이 선한 세력, 중국인이 무지몽매한 미개인으로 다뤄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즈음 친구가 된 한 중국인 유학생 창총젠을 만나면서 작품의 내용이, 그리고 에르제의 사고가 획기적으로 변하게 된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창총젠은 아시아의 현실을 에르제에게 알려주었고 에르제는 여태까지의 유럽중심주의 편견이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블루로터스’의 기획을 통째로 바꾸었고, 작품은 의로운 중국소년 ‘창’과 땡땡이 친구가 되어 함께 모험하게 되는 줄거리를 갖게 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야욕을 지닌 나라였고 땡땡은 그 야욕을 분쇄한다. 이전의 ‘콩고에 간 땡땡’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라 할만하다.7 이후 ‘오토카 왕의 봉’ 등에서는 파시즘을 경계하는 소재를 다루기도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모험만화도 계속 이어진다.

그의 사상적 변화의 최고봉은 1976년 발표된 ‘땡땡과 피카로스’다. 이 작품은 분명히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성공시킨 쿠바 혁명으로부터 소재를 빌려왔다. 땡땡은 이 작품에서 우익독재에 고통 받고 있는 한 가상의 남미국가에서 혁명군을 도와 혁명을 승리로 이끈다. 이 과정에서 땡땡은 끊임없이 비폭력주의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소비에트에 가서 그들을 농락했던 1929년의 땡땡과는 근본이 다른 땡땡이었다. 이 작품은 에르제가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우길만한 – 그렇게 우길 친구도 없겠지만 – 증거는 아니지만, 적어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옳은 것은 옳다고 인정할 줄 아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땡땡을 접하게 된 경로가 다양하고 접했던 에피소드가 앞뒤로 들쭉날쭉 인지라 그의 작품세계를 통시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 그에 대한 거부감도 없잖아 있었으나 그의 작품 대부분을 감상하고 관련 영상이나 연구서를 훑어본 후 어느 샌가 그가 가지는, 또한 그가 살았던 20세기 유럽이 가졌던 무게감이 상당히 묵직하게 다가오게 되었다. 너무나 완벽주의적인 작가정신 때문에 고뇌했고,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어야 했고, 파시즘 치하의 유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에르제는 – 그리고 땡땡은 – 만화 나부랭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 물론 다른 만화도 마찬가지다 – 문화유산이라 불릴만하다.

지루하게 잡설을 늘어놨는데 긴 말 필요 없다. 재미있으니 사보시라.

참고할만한 곳들
위키피디어 ‘땡땡의 모험’ 설명
위키피디어 ‘에르제’ 설명
tintinologist.org

p.s. 아 이승환 동무가 좌빨 블로거 세 명에게 이 짐을 넘기라고 지령을 내렸는데 사실 이런 토스는 행운의 편지같아 내키지가 않는다. 하지만 나만 행운의 편지를 쓰기는 억울하니 류동협, , 재준씨한테 숙제를 넘긴다. 순순히 응할 것 같지는 않다.

  1. 한 예로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당시 많은 소년들이 그랬듯이 이 만화에 매료되어 자신이 창조한 최고의 캐릭터 인디아나 존스가 땡땡을 흉내 낸 것이라고 고백하였고, 지금 현재도 땡땡의 실사화를 위해 작업하고 있다.
  2. 유일하게 첫 에피소드 ‘땡땡과 소비에트’가 칼라 작품으로 재작업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3. 에르제는 사실성을 위해 엄청난 자료를 수집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4. 예를 들어 중국의 항일투쟁을 다룬 초기걸작 중 하나인 ‘블루로터스’에서는 중국인 거리 묘사를 위해 항일투쟁의 의미가 담긴 한문을 거리 담벼락 곳곳에 배치해놓는다. 그 만화를 볼 이들의 0.1%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5. 그런데 사실 이 집요함으로 말미암아 작가 스스로는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으며 이것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기도 했다고 그의 연구자들은 이야기한다.
  6. 그를 존경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따라오지 못하는 매력
  7. 이후 창은 ‘티벳으로 간 땡땡’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그가 티벳에서 조난당하고 땡땡이 그를 구하는 내용이다. 실재했던 창은 그 후 중국으로 가고 서로간의 연락이 끊기게 되는데 에르제는 오랫동안 그를 찾아 헤맨다. 이후 노년이 된 이들이 어렵사리 재회하게 되는데 그 당시 벨기에에서는 생방송으로 중계할 만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24 thoughts on “땡땡의 모험

  1. 요요

    친구가 콩고에 간 땡땡에 대한 포스팅을 한 적이 있는데 보고 완전 뒤집어졌었어요–;
    http://wihowife.egloos.com/3282455
    으앜 무서운 프랑스놈들

    에르제의 땡땡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것들이 몇십년 뒤엔 참 몰상식한 짓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 재밌네요(개인적으로는 성형수술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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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아~ 좋은 글 소개 감사합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무서운 벨기에놈들”이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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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oog

      벨기에가 불어권이어서 불어로 출간되었고 그래서 종종 땡땡을 프랑스 만화로 착각하시기도 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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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inuit

    와.. 저도 땡땡 엄청 좋아합니다.
    24권 다 봤습니다.
    말씀처럼 치기어린 초기 작품이 휴머니즘이 배어나오는 이야기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면 별게 아닌듯하지만, 당시에는 단언하기 힘든 미래상을 그린 점은 작가정신의 정수라고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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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반갑습니다. 또 한명의 팬을 만났네요. 8D 말씀하신 미래상을 보여준 진수가 ‘달에간 땡땡’편이었죠. 50년대 초반에 만든 작품답지 않게 상당한 디테일이 돋보였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Reply
  5. 류동협

    그림체가 마음에 들어서 가끔 봤는데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심오한 작품이었군요. 나중에 꼭 구해서 천천히 곱씹으며 봐야겠네요.

    글을 읽다가 마지막에 제 이름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저 이런 숙제는 젬병인데… 제가 누구한테 책추천할 수준은 못되지만 시간을 내서 책장이라도 좀 뒤져봐야겠네요. 우리 이러다 줄줄이 엮어서 어디로 끌러가는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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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죄송합니다. 부담스러운 숙제를 내드려서… ^^; 그나저나 ‘땡땡의 모험’을 추천했다고 어디 끌려갈 정도면 정말 막가는 나라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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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j준

    엄청 오랜만에 다시 보는 땡땡이네요.

    그나저나…무슨 마음으로 제게 저런 숙제를…
    선생님들은 저를 ‘괄호밖’으로 불렀습니다.(응?)

    책 추천이라…아으~ 북두신권을 맞은 악당들의 머리마냥 일그러진 제 머리가 보이십니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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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silent man

    작가 자신이 성장과 변화가 고스란히 담겼다니 하나의 역사라 할 수도 있겠네요.

    다만…한글은…없겠지요.
    -_-;

    Reply
    1. foog

      무슨 말씀을! 이미 전권이 한글판으로 나와있습니다. 책판매하는 사이트에서 ‘땡땡의 모험’으로 검색해보세요. 🙂

      Reply
  9. 이승환

    님하는 취향이 참 다양하군요. 사람 이름이 땡땡이라니, 처음 보고 개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은 불만 누적의 표출이라는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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