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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紀行文 – 가이드북, 소설, 영화 등에 관하여

두 달 조금 안 남은 이스탄불 여행을 위해 틈나는 대로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다. 일단은 이스탄불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책과 영화 등을 통해 이 도시를 입체적으로 보려 노력중이다. 여행 가이드북으로는 ‘이스탄불 홀리데이’라는 책을 샀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만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책이기 때문에 내 여정에 맞고 책 부피도 아담하기 때문이었다. 현지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분이 쓴 책이기 때문에 직접 발품을 팔아 쓴 흔적이 많이 엿보인다. 정가는 15,000원이었지만 알라딘에서 1만 원 정도의 가격에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여행기는 회사의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빌렸다. 그 중에서는 진순신이라는 분이 쓴 ‘인류문명의 박물관 이스탄불 기행’이 알차서 나머지는 반납하고 이 책만 읽고 있다. 터키 출신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에세이는 계속 읽는 중이었고 문체가 무척 좋았기에 그의 소설을 한권 골라 읽고 있다. 그의 소설 중에 ‘순수박물관’이라는 소설이 꽤 알려졌고 이스탄불 신시가지에 그 소설의 캐릭터가 실제 인물인양 행적이나 기념품들을 모아둔 같은 이름의 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혹했지만 꽤 많은 분량과 로맨스 소설이라는 장르는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고른 책은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는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소설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의 세밀화가를 둘러싼 비화를 역사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썼다는 소개글에 맘이 동한 것이다. 현재까지의 느낌은 ‘장미의 이름’과 비슷한 느낌이다. 술술 읽히고 있고 마음속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이스탄불 거리를 떠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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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key-1290” by archer10 (Dennis) – http://www.flickr.com/photos/archer10/2215822645/.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루멜리 히사르 전경

이스탄불을 소재로 한 서구 영화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에르제의 ‘땡땡의 모험’을 실사 판으로 각색해서 만든 ‘Tintin and the Golden Fleece’는 예전에 한번 본적이 있지만 이스탄불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 번 보았다. 땡땡 일행이 하독 선장의 친구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낡은 배를 인수하러 이스탄불에 갔다가 음모에 말려든다는 내용이다. 이스탄불에 대해서는 갈라타 다리 근처로 여겨지는 해안가와 땡땡 일행이 위험에 빠지는 루멜리 히사르만 등장할 뿐 나머지는 그리스 쪽에서 촬영됐다.

유명한 대륙 횡단 열차 ‘오리엔트 특급’을 공간으로 그린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도 보았다. 이 영화 역시 이스탄불의 시르케지 역에서 기차가 출발하는 것일 뿐 주요 무대는 역시 기차 안이라 이스탄불에 대한 갈증이 그리 많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아가사 크리스티는 이 소설을 이스탄불에 있는 호텔 주메이라에서 썼다고 한다. 소설을 쓴 방은 기념관으로 남겨두었다니 그걸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더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다. 이 호텔에서 며칠 묵을 생각도 하고 있다. 007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가 이스탄불을 무대로 했다니 조만간 찾아봐야겠다.

이스탄불 紀行文 – 아직 가지도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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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antinople 1453” by Bertrandon de la Broquière in Voyages d’Outremer – www.bnf.fr.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스탄불에 가기로 결정했다. 知人이 이스탄불에 발령이 났는데 아내에게 겨울에 놀러오라고 제안했다. 아내가 먼저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고 나도 망설이다 그때에 맞춰 가기로 결정했다. 오래된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는 이스탄불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언젠가 한번은 가보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겨우 일주일 동안.

사실 이스탄불, 그리고 터키의 역사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많지 않다. 동로마 제국, 모스크, 오스만 튀르크 제국, 성상파괴운동 등등. 파편적이고 단편적이다. 짧은 일주일 동안의 여행으로 이 성기게 엮여져 있는 그 광대한 역사의 조각의 한 구석이라도 더 채울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지금부터라도 준비를 해둬야 겉핥기 여행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서관에서 이스탄불 관련 책을 빌리는 것이었다. 유재원이라는 분이 쓴 터키 관련 기행문과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쓴 이스탄불에서의 추억에 관한 그의 에세이를 빌렸다. 1970년대부터 터키를 오간 유재원 씨의 해박한 지식 덕택에 대충 가볼만한 곳의 사전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파묵의 글은 이 정보에 색칠을 해주는 조미료가 되고 있다.

티케팅은 완료했고 숙소는 현재 무난하게 호텔로 예약할지 아니면 이색적으로 에어비앤비를 이용할지에 대해서 고민 중이다. 에어비앤비를 잘 고르면 특이한 경험을 할 것 같기도 한데 재수 없으면 돈값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한 여행자는 에어비앤비에서 고른 숙소가 사실은 지하였고 열쇠가 작동하지 않아 고생했다는 경험담을 올려놓기도 했다.

일정은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서 정리해보기로 했다. 방문지나 먹거리 등 현지에서 빼먹지 않고 해볼 거리를 to-do 앱으로 체크해나갈 요량으로 여러 앱을 써보았다. 하지만 의도에 부합하지 않거나 에러가 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포기하고 결국 고른 앱은 toodledo. 웹에서도 쓸 수 있고 다양한 기능이 있어 현재까지는 만족. 하지만 디자인은 너무 구리다.

어리바리 멍때리고 있다가 갈 시기가 닥쳐서야 서둘러 가서 겉만 훑고 오는 여행이 되지 않도록 하려고 이렇게 서둘러 기행문을 – 시작도 안한 여행의 기행문 – 미리 적으며 마음의 다짐을 하고 있다. 파묵의 글에서 안 사실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땡땡의 모험’ 실사영화가 이스탄불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한다. 우선 그 영화를 통해 사전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틴틴 : 유니콘호의 비밀’ 리뷰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피터 잭슨이라는 두 걸출한 이야기꾼이 에르제 원작의 ‘땡땡의 모험’을 영화화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 반 우려 반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두 거장의 그 동안의 영화 만드는 솜씨로 보면 ‘땡땡의 모험’을 영화화하는데 있어 가장 적임자이긴 하지만(특히 피터 잭슨), 유럽대륙 내에서야 – 특히 불어권 – 국민적 캐릭터에 가까울 정도로 숭앙받는 존재인, 이 유럽적인 캐릭터가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되면 어떠한 캐릭터로 바뀔 것인가에 대한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감상한 결과, 처음의 예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모션캡처를 활용한 현란한 그래픽, 3D를 통해 극대화한 모험의 세계, 땡땡 시리즈의 재밌는 에피소드를 조합한 무리 없는 이야기 진행, 거기에 나름의 에피소드를 새로이 넣어 엮어낸 솜씨(예로 하독 선장과 사카린의 크레인 싸움) 등은 ‘과연 스필버그구나’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의 미덕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한정된 시간 안에 땡땡을 관객에게 처음 소개하는 과정에서의 몇몇 무리수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사실 땡땡이 과연 주연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비중이 약했다는 점이다. 몇몇 감상에서는 ‘이 영화가 스노위의 모험이냐?’ 할 정도로 땡땡 보다는 그의 애견 스노위의 역할이 두드러져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극의 내러티브에 있어서도 – 이건 에피소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 결국 하독 선장의 가족사가 두드러졌고, 자연히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하독 선장과 사카린의 크레인 싸움이 되어버렸다. 땡땡은 조력자의 위치에 머문 셈이다.


영화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스노위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스필버그가 ‘유니콘의 비밀’과 ‘레드 라캄의 보물’을 원작으로 고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필버그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부터 추구해오던 것은 보물을 찾아나서는 모험이라는 소재였다. 위 두 에피소드는 땡땡의 다른 어떤 에피소드보다 이런 스필버그의 구미에 잘 맞는 에피소드다. 거기에다 ‘해적’까지 등장하니 더할 나위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식민지 중국에서의 땡땡의 항일투쟁을 소재로 한 ‘블루로터스’를 고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스필버그와 땡땡의 만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스필버그의 최대 히트작 중 하나인 ‘인디아나 존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소개 팸플릿에서는 조지 루카스의 입을 빌어 인디아나 존스의 오리지널 모델을 땡땡으로 삼았다는 인용구가 나온다. 우리 매체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땡땡과 인디와의 관계’라는 외신을 보면 약간 이야기가 다르다. 즉, 애초 스필버그는 땡땡의 존재를 몰랐지만 뒤늦게 유사성을 알게 되어 영화화를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The connection between Tintin and Indy: When Spielberg was reading French reviews of Raiders, he saw that a lot of them kept mentioning something called Tintin and the parallels between the two. Spielberg who had never read the comics, immediately sought out Remi’s work and after reading through, immediately wanted to adapt Tintin to the big screen. Tintin, he asserted has been “30 years in development.”
땡땡과 인디와의 관계 : 스필버그가 레이더스의 프랑스 쪽 리뷰를 읽었을 때, 그들 중 상당수가 땡땡이라 부르는 어떤 것을 언급하고 둘 간의 유사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보았다. 스필버그는 그 코믹북을 읽은 적이 전혀 없었기에, 즉시 레미의 작품들을 구해보았고, 그것을 읽은 후에 땡땡을 즉시 빅스크린에 적용하고 싶어졌다. 그가 확신하길 땡땡은 “30년간 개발 중이었던 것이다.”[RAIDERS OF THE LOST ARK Los Angeles Screening Recap With Steven Spielberg and Harrison Ford; Updates on INDY 5 and More]

스필버그가 ‘땡땡을 알고 인디를 만들었는가 아니면 인디를 만들고 땡땡을 발견했는가?’라는 호사가적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애초에 스필버그가 땡땡에게서 원한 것은 ‘어린 인디’였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땡땡은 ‘블루로터스’나 ‘땡땡과 피카로스’에서처럼 정치적이어서도 안 되고, ‘아메리카에서의 땡땡’처럼 느와르 적이어서도 안 되고, 더욱이 ‘콩고에서의 땡땡’처럼 인종주의적이어서도 안 되는 인물이어야 했다. 남은 선택은 해적의 보물을 찾아 나선 ‘어린 인디’였다.

요컨대 이번 작품이 땡땡을 잘 아는 유럽인들에게는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으로 흥행요소가 되었겠지만, 땡땡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할리우드에 처음 입성한 유럽 출신 배우가 인디아나 존스를 흉내 낸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점이 스물 세편에 달하는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그의 캐릭터에 익숙지 않은 대다수에게 어필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으로, 할리우드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땡땡을 불어권의 캐릭터가 아닌 영국 캐릭터로 만든 불가피한 타협으로 이어진 셈이다.

p.s. Tintin을 어떻게 부를 것이냐 하는 문제도 땡땡의 팬들에게 곧잘 화제가 되곤 하는데, 현지에서는 ‘땅땅’에 가깝게 발음한다. 영어로는 이번처럼 당연히 ‘틴틴’이라고 하고, 우리나라 팬들 사이에서는 ‘땡땡’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창작의 고통’에 대한 단상

개인적으로 한때 소설이랍시고 끼적거리기도 하고 이 블로그에 이런 저런 글을 쓰는 것을 창작이라고 쳐준다면야, 나도 일종의 창작활동을 하는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글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재능이 없기 때문이지만, 그 이유 말고도 또 하나 하찮은 이유를 하나 대자면 창작의 고통에 대한 공포감도 있었을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즉흥곡을 척척 연주해대던 모짜르트같은 희대의 천재가 아닌 이상(그러한 에피소드도 후대에 의해 과장되었을 개연성이 좀 있다고 여겨지지만), 대개의 예술가들은 하늘 아래 없던 그 무언가를 끄집어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노력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견디기 어려울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예술적 성공은 금전적 보상을 안겨준다. 그러나 이건 또한 굶주린 유령이다. 코가 버튼 모양이었던 소년 기자 땡땡에 관한 만화로 부를 쌓은 벨기에 예술가 조르쥬 레미(Georges Remi)는 1951년 같은 이름으로 주간지에 두 개의 땡땡 란을 창작하는 일의 “진을 빼는 스케줄”을 자세히 설명한 편지를 한 장 썼다. “내 말을 믿게. 예술가 자신 말고는 누구도 그림 이야기를 위해 소요되는 수많은 작업, 리서치, 독창성 등을 상상할 수 없다네.” 에르제(Hergé)란 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레미의 말이다. “인쇄기가 입을 크게 벌리고 인쇄할 종이들을 갈망하면서 저쪽에 앉아 있지.”[Tintin steps off the page]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땡땡의 모험”의 작가 에르제에 관한 일화다. 사실 그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기했던 완벽주의와 이로 인해 받았던 압박감은, 그의 팬들에게는 꽤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의 만화는 한 컷 한 컷이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엄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세밀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에르제는 스스로를 이런 집요함에 몰아넣은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런 고집스러운 집요함이 없었더라면 땡땡의 모험은 단지 1930년대 소년잡지에 연재되었던 반공(反共)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작품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는 세밀함에 대한 고집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제의식에 대한 고집도 남달라 결국 스스로의 역사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땡땡을 단순한 아동만화 캐릭터 이상의 것으로 승화시킨다.

땡땡이 단순한 소년만화로 취급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사유다. 초기의 엉성한 주제의식과 어두운 가족사가 내포된 캐릭터 설정 등이 작품의 한계였다면, 에르제 스스로의 엄청난 노력의 결과인 후기의 작품들은 단순한 모험만화가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을 반영하는 걸작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그에게는 고통이었지만 말이다.

다시 창작의 고통에 대해 말해보자. 블로깅도 이런저런 자잘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글줄기도 잡아야 하고 관련근거도 찾아봐야 하고 문체도 신경 써야 한다. 그런 번거로운 일을 왜 하냐하고 생각해보면 결국 그런 창작의 고통에 수반되는 창작의 기쁨과 자기성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에르제가 누린 창작의 기쁨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땡땡의 모험

이승환 동무가 요즘 직장을 구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야한 글은 안 올리고 뜬금없이 ‘좌빨 블로거가 추천하는 도서’라는 블로그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글을 올려놓으면서, 나를 좌빨 블로거라고 딱지를 붙인 후 책을 추천하라고 을러댄다. 이전에도 이미 한번 소위 양서(良書)를 추천한바 있는데 사실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나 같은 것이 책을 읽어봐야 세상 책의 1조분의 1도 안 읽었을 텐데 불특정다수에게 “니네 이 책 알아?”라고 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뭐 이승환 동무가 오랜 방황 끝에 취직도 한 것 같고 이제 자본주의의 마름으로 충실히 살아간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에 대한 작은 선물로 그의 부탁 – 강권 -을 들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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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me from Breaking Free” by Scanned from a copy of the book.. Licensed under Wikipedia.

내가 추천하는 도서는 꿈과 모험이 가득한 만화 ‘땡땡의 모험(영어 제목 : The Adventures of Tintin, 불어 제목 : Les Aventures de Tintin)’이다. 실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를 꼽으라면 이 만화 이외에 다른 만화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독서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만화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 만화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뚜렷치 않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유행하던 이른바 소년잡지에 단편적으로 소개되던 에피소드에서부터 땡땡을 처음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 국내에 출간된 하드커버도 구입하고 외국 사이트에서 영어판도 구입하면서 조금씩 컬렉션을 늘려갔고 총 24개에 달하는 에피소드 중 거의 전부를 구비하게 되었다.

‘땡땡의 모험’은 Herge(에르제)로 알려진 벨기에 작가 Georges Remi(1907-1983)가 창조한 작품이다. 그는 보이스카웃 신문이나 카톨릭 신문 등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가, 1929년 처음 카톨릭 신문  Le Petit Vingtieme 에 땡땡의 캐릭터로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에피소드는 ‘땡땡과 소비에트’로 그 후 첫 단행본으로 출시된다. 이후 사실상의 마지막 작품이랄 수 있는 – 1986년의 ‘땡땡과 알파아트’는 미완성 – 1976년의 ‘땡땡과 피카로스’까지 총 23편의 에피소드를 창작하여 땡땡을 유럽 최고의 인기 캐릭터로 성장시켰다.

1. Tintin in the Land of the Soviets (1929-1930)
2. Tintin in the Congo (1930-1931)
3. Tintin in America (1931-1932)
4. Cigars of the Pharaoh (1932-1934)
5. The Blue Lotus (1934-1935)
6. The Broken Ear (1935-1937)
7. The Black Island (1937-1938)
8. King Ottokar’s Sceptre (1938-1939)
9. The Crab with the Golden Claws (1940-1941)
10. The Shooting Star (1941-1942)
11. The Secret of the Unicorn (1942-1943)
12. Red Rackham’s Treasure (1943-1944)
13. The Seven Crystal Balls (1943-1948)
14. Prisoners of the Sun (1946-1949)
15. Land of Black Gold (1948-1950)
16. Destination Moon (1950-1953)
17. Explorers on the Moon (1950-1954)
18. The Calculus Affair (1954-1956)
19. The Red Sea Sharks (1958)
20. Tintin in Tibet (1960)
21. The Castafiore Emerald (1963)
22. Flight 714 (1968)
23. Tintin and the Picaros (1976)
24. Tintin and Alph-Art (1986, 2004)

나는 무엇 때문에 땡땡에 매료되었나? 우선 땡땡 시리즈는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닌 진짜배기로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의 모험’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20세기를 제대로 관통하고 있는 이 만화는 소년기자 땡땡과 그의 애견 밀루 Milou(영어 이름으로는 스노위 Snowy)를 등장시켜, 이미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은 자유로운 여행이 여의치 않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서의 모험을 선사하였다. 이러한 모험만화의 패턴은 하나의 전범이 되어 이 후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1

이것이 땡땡이 지닌 매력의 모든 것이라면 굳이 땡땡을 ‘가장’ 좋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 작품 말고도 ‘꿈과 희망’을 준 작품은 꽤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엄청난 매력은 반세기 동안 불과 이십여 개의 에피소드만을 만들었던 에르제의 지독하리만치 집요한 장인정신이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그려졌던 작품은 서서히 칼라로 바뀌었고 이전 흑백 작품들 역시 칼라로 재작업 하여 출간되었는데2 각 에피소드에서 그러한 작가의 그림체나 스타일이 발전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 매력적이다. 잘 그려진 우키요예를 연상시키는 색감과 선(線)의 풍요로운 조화, 풍경의 세밀함3은 장면 하나 하나를 감상할 수 있는4 재미를 안겨준다.5

여기까지는 사실 굳이 땡땡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아동만화의 걸작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또 하나의 작품 ‘아스테릭스의 모험’ 같은 – 매력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선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바로 작가 에르제의 사상적 발전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카톨릭 신문에서 일했던 유럽의 작가는 사실 사상적으로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극우라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고 그는 백인우월주의에 유럽우월주의적인 보수우익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씩 변해갔고 이것이 각각의 작품에 알게 모르게 반영되어 간다는 점이 이 에피소드의 엄청난 매력이다.6

그의 첫 작품 ‘땡땡과 소비에트’는 철저한 반공(反共)만화다. 땡땡의 눈에 – 에르제의 눈에 – 소련은 도적들이 지배하는 나라다. 그리고 땡땡은 이 도적들을 농락한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다. 에르제는 후에 이러한 그의 맹목적인 반공주의를 반성한다. 그래서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작품을 흑백 버전으로 남겨두었다. 다음 작품 ‘콩고에서의 땡땡’도 사실 만만치 않았다. 콩고는 그 당시 벨기에의 식민지였다. 땡땡은 이 작품에서 제국주의적 사고를 하면서 동물들을 학살하는 등의 비상식적 –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원주민들로부터 영웅대접을 받는다. 요컨대 땡땡은 전형적인 유럽 백인 소년들을 위한 모험만화였다. 이렇게 계속 갔으면 땡땡은 걸작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에피소드 ‘미국에 간 땡땡’에서는 다소 발전이 있었다. 유럽인이 보기에 미국의 ‘자본주의자’들은 소련의 ‘공산주의자’만큼은 아니지만 여하튼 역겨운 돈벌레였다. 에르제는 이 작품에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다룬다. 약간은 공평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상전환은 ‘블루로터스’였다. 당초 이 작품은 일본인이 선한 세력, 중국인이 무지몽매한 미개인으로 다뤄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즈음 친구가 된 한 중국인 유학생 창총젠을 만나면서 작품의 내용이, 그리고 에르제의 사고가 획기적으로 변하게 된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창총젠은 아시아의 현실을 에르제에게 알려주었고 에르제는 여태까지의 유럽중심주의 편견이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블루로터스’의 기획을 통째로 바꾸었고, 작품은 의로운 중국소년 ‘창’과 땡땡이 친구가 되어 함께 모험하게 되는 줄거리를 갖게 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야욕을 지닌 나라였고 땡땡은 그 야욕을 분쇄한다. 이전의 ‘콩고에 간 땡땡’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라 할만하다.7 이후 ‘오토카 왕의 봉’ 등에서는 파시즘을 경계하는 소재를 다루기도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모험만화도 계속 이어진다.

그의 사상적 변화의 최고봉은 1976년 발표된 ‘땡땡과 피카로스’다. 이 작품은 분명히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성공시킨 쿠바 혁명으로부터 소재를 빌려왔다. 땡땡은 이 작품에서 우익독재에 고통 받고 있는 한 가상의 남미국가에서 혁명군을 도와 혁명을 승리로 이끈다. 이 과정에서 땡땡은 끊임없이 비폭력주의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소비에트에 가서 그들을 농락했던 1929년의 땡땡과는 근본이 다른 땡땡이었다. 이 작품은 에르제가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우길만한 – 그렇게 우길 친구도 없겠지만 – 증거는 아니지만, 적어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옳은 것은 옳다고 인정할 줄 아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땡땡을 접하게 된 경로가 다양하고 접했던 에피소드가 앞뒤로 들쭉날쭉 인지라 그의 작품세계를 통시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 그에 대한 거부감도 없잖아 있었으나 그의 작품 대부분을 감상하고 관련 영상이나 연구서를 훑어본 후 어느 샌가 그가 가지는, 또한 그가 살았던 20세기 유럽이 가졌던 무게감이 상당히 묵직하게 다가오게 되었다. 너무나 완벽주의적인 작가정신 때문에 고뇌했고,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어야 했고, 파시즘 치하의 유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에르제는 – 그리고 땡땡은 – 만화 나부랭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 물론 다른 만화도 마찬가지다 – 문화유산이라 불릴만하다.

지루하게 잡설을 늘어놨는데 긴 말 필요 없다. 재미있으니 사보시라.

참고할만한 곳들
위키피디어 ‘땡땡의 모험’ 설명
위키피디어 ‘에르제’ 설명
tintinologist.org

p.s. 아 이승환 동무가 좌빨 블로거 세 명에게 이 짐을 넘기라고 지령을 내렸는데 사실 이런 토스는 행운의 편지같아 내키지가 않는다. 하지만 나만 행운의 편지를 쓰기는 억울하니 류동협, , 재준씨한테 숙제를 넘긴다. 순순히 응할 것 같지는 않다.

채승병님 글에 대한 댓글

채승병님이 고맙게도 지난 번 끼적거린 내 글트랙백 보내주신 글에 대해 댓글을 쓰다가 너무 길어져 여기 올려두도록 한다. 너무 좋은 글이니 꼭 가서 읽으시도록~ (채승병님 글읽기)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외람되지만

“어설프게 읊어대고 으스대던 시장과 정부의 문제점들이 실은 그들이 이미 치열하게 고민하며 펼쳐낸 것임을 발견했을 때의 화끈거림이 아직도 생각난다.”

에서 뭐 얼굴이 화끈거릴 것까지야 있을까 싶기도 하네요. 어차피 학술논문도 아니고 블로그인바에야 자신의 생각을 정밀소묘하기보다는 캐리커쳐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작용해가며 선조들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블로깅아니겠습니까? ^^;

여하튼 제가 이야기했던 바에 대해서는 큰 첨삭이 없으시니 따로 드릴 말씀은 없지만 굳이 제 글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적어도 해당 글에서는 “시장이냐 정부냐”라는 질문을 던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오히려 정부가 시장의 동조자 내지는 방관자?) 그보다는 전후 어떤 식으로든지 “진화”해온 시장이, 과연 언급하신 고전적 물리학에서의 어떠한 이상적인 모형처럼 자연법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티글리츠가 ‘결국 시장은 복구되어야 한다’기에 더더욱 그런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래서 sonnet님께 그 부분을 넌지시 여쭈었더니 ‘두통감기에 뇌수술’한다는 핀잔만 들었습니다.^^(뭐 보론을 하신다니 기대해보도록 하고요)

또 하나 이 글을 읽으면서 불현듯 느낀 점이 있는데요. 대개 그 시대의 경제학자들은 좌우를 떠나서 역시 자기네들이 살고 있는 공간의 시장만을 바라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이에크의 ‘결과론적 옹호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만약 그 당시 시장이 성공적이었다면 그것은 제1세계의 시장의 성공이었을 따름이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경제학자들은 그러한 시장만을 분석하였을 것이고요. 인도의 발달한 직물산업을 폭력으로 좌절시킨 영국의 무력사용은 그 분들에게 영국 면화산업의 발전요인의 고려사항이었을까요?

문득 에르제(Herge)라는 만화가가 생각나네요. 벨기에 만화가인 이 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땡땡의 모험’이라는 불어권, 아니 유럽 최고의 인기 만화를 그려낸 작가입니다.(이 만화를 스필버그와 피터 잭슨이 실사영화로 만들 거라는군요. 기대만빵!) 왜 이 분이 생각났는가하면 이 분은 나름 흑역사를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죠.

이분의 첫 작품들은 1930년대 초반 그린 ‘땡땡 소련에 가다’와 ‘콩고에서의 땡땡’입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은 벨기에의 우익 소년잡지에 그림을 담당한 백인 에르제가 지니고 있던 이념적, 종교적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에르제는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심지어 ‘땡땡 소련에 가다’는 흑백 버전을 칼라 버전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조차 거부하죠. 그분의 최후 작품은 쿠바혁명에 감화받아 남미 게릴라의 활약상을 담은 ‘땡땡과 피카르소’입니다.

다른 데로 많이 샜네요. 🙂

요는 이렇습니다. 많은 이도 그렇거니와 저도 사물을 바라볼 때에 수많은 편견에 사로잡히곤 한다는 것을 수시로 깨닫곤 합니다. 그래서 저와는 조금은 다른 시각을 지니고 계신 것으로 간주되는 sonnet님을 가끔 들이받기도 하고 또 이렇게 채승병님의 주옥같은 글에 많은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모든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 콩고인을 하인처럼 여긴 한때의 자신을 극복한 에르제처럼 – 언젠가는 더 넓은 시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 석학들의 주장에서도 그들만의 편견을 느낀 것도 사실이기에, 그래서 솔직히 솔직담백하게 세계관을 바꾼 에르제가 더 멋져보여 예로 들었습니다. 글이 삼천포로 갔네요. 🙂 (글에 대한 독후감에서 boys be ambitious 분위기로~)

여하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이래서 블로깅하는 보람이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