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스릴러 몇 편

beagle2님이 미스터리-스릴러에 늘 굶주리고 있다하시니 또 나름 스릴러 좀 챙겨 보는 이로서 모른 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몇 작품을 추천하고자 한다. 그 댓글에서도 썼다시피 개인적으로 최고로 뽑는 스릴러는 케빈코스트너가 주연한 No Way Out 이다.(제일 맘에 안 드는 것은 주인공이다) 치정살인, 정치 스캔들, 냉전의 음습함이 완벽하게 결합된 데다가 특히나 폐쇄된 펜타곤에서의 극적긴장감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엄청난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그런데 사실 다른 좋은 작품을 보면 그 작품이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여하튼 무더운 여름날 잠시 더위를 잊고 싶은 분들께 다음 작품들을 권한다.(순서는 무순)

Anatomy of Murder(1959)

영화는, 아름답지만 다소 자유분방한 한 군인의 아내가 술집주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분노한 그의 남편이 술집주인을 살해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지방검사였다가 퇴직 당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낚시와 재즈음악으로 소일하는 약간은 괴팍한 변호사 폴비글러(제임스스튜어트)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폴은 그날의 정황을 남편의 정신착란에 의한 일종의 정당방위로 몰고 가려 하고 검사측은 이에 대응하여 남편이 정신적으로 멀쩡했음을 입증하려 한다. 특히 검사측은 아내의 자유분방함을 들어 그녀가 강간당한 사실이 일종의 방종의 업보인 것으로 몰아가려 한다. 법정에서의 팽팽한 긴장감이 주는 묘미가 대단한 작품.

Spoorloos(The Vanishing)(1988)

렉스호프만과 그의 여자친구 사스키아는 네델란드에서 프랑스로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도중에 기름이 떨어져 서로 다투기도 했으나 이내 화해하고 즐거운 여행의 기대감에 부풀게 된다. 하지만 휴게소에서 맥주를 사러간 사스키아가 자취를 감추면서 즐거움은 악몽으로 바뀐다. 사스키아가 납치되었다고 믿는 렉스는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납치범이라고 주장하는 이와 만나게 된다.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결말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 작품.

The Wicker Man(1973)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스코틀랜드 경시청의 Howie 경사는 어느 날 스코틀랜드 북쪽에 위치한 Summerisle 이라는 섬에 Rowan Morrison이라는 여자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익명의 편지를 받고 홀로 비행기를 타고 그 섬에 당도한다. 괴이하게도 섬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고 증언한다.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라는 여인조차도 그녀를 모른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Howie 경사는 수사를 진행하면서 Rowan 이 실존하였던 소녀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기독교와 이교도의 충돌, 외딴 섬의 놀라운 풍속 등이 스릴러와 결합된 독특한 작품.

The Long Goodbye(1973)

유명한 래이몬드챈들러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로버트알트만이 만든 영화. 놀랄만한 반전을 기대할 것은 없으나 70년대 스릴러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한껏 배어나오는 작품. 주인공 필립말로우는 루팡3세를 연상시키는 외모를 하고서는 영화 내내 담배를 물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친구인 테리레녹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가 테리가 아내 살해범이라 믿는 경찰에게 끌려가 고초를 치룬 뒤 테리의 행적을 쫓아간다. 그 와중에 가출한 작가 로저웨이드를 찾아달라는 그의 아내의 부탁으로 그를 찾아주기도 했고 난데없이 갱들이 그의 집으로 쳐들어와 테리가 가져간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받기도 한다. 포스트느와르 분위기 물씬 풍기는 이 작품은 The Big Sleep의 Humphrey Bogart 를 70년대에 재현하는데 멋지게 성공하였다.

The Thomas Crown Affair(1968)

Thomas Crown(Steve McQueen) 은 치밀한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부리며 은행을 털지만 그것은 돈이 탐나서가 아니다. 금융전문가이자 이미 충분히 거부인 그는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그 쾌감을 위해서다. 이어 보험조사원 – 마스터키튼의 바로 그 직업 – Vicky Anderson (Faye Dunaway) 이 등장한다. 그녀는 돈을 털린 은행의 전직직원들의 사진 들 중에서 직감적으로 Thomas Crown 은 용의자로 지목하고 그에게 접근한다(감으로 수사를 하다니!). 이때부터 연애감정과 직업정신의 줄타기가 시작되고 영화는 막판의 반전을 위해 열심히 뛰어간다. 이 작품은 통상의 스릴러적인 긴장감보다는 왠지 모를 고독감을 느끼게 한다.

House Of Games(1987)

데이빗 마멧의 칼날 같은 시나리오와 연출, 그리고 저글링을 선보이는 서커스 단원들인 것처럼 척척 들어맞는 연기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저명한 심리학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Driven의 작가인 마가렛은 어느 날 자신의 환자에게 노름빚 탕감을 도와주겠다고 큰소리친다. 그리고는 ‘노름방(The House Of Game)’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사기꾼 집단의 속임수에 넘어갈 뻔했지만 예리한 판단력으로 위기를 넘겼고 그들과 친구가 되기까지 했다. 마가렛은 이들을 통해 지루한 일상에서의 해방감을 맛보게 되지만 곧이어 끔찍한 사건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리학의 권위자인 주인공과 거리의 사기꾼이 벌이는 심리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지가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Green For Danger (1946)

Alfred Hitchcock 의 걸작 The Lady Vanishes 의 원작자인 Sidney Gilliat 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이 영화는 스릴러가 갖추어야 할 고전적이고 아름다운 형식미가 잘 갖추어진 수작 스릴러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멋진 플롯과 관객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중에도깔리는 교묘한복선, 등장인물들 간의 날카로운 대립관계를 세련되게 표현해주는 입체적인 캐릭터 설정 등이 돋보인다. 특히 Cockrill 형사는 추리 영화에서는 흔치 않게 안티히어로 풍의 캐릭터로 극의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모던한 산업디자인 풍의 깔끔한 포스터가 무척 맘에 든다.

Syriana(2005)

전직 CIA 요원이었던 Robert Baer 의 논픽션 저서를 기초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석유재벌과 정부기관과의 유착관계 등을 그리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스릴러다. 개혁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 초국적자본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한 산유국의 첫째 왕자 나시르의 행보, 그러한 나시르를 암살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후에 그를 살리려 노력하는 CIA 요원 Bob Barnes (George Clooney), 대형정유사인 코멕스와 킬런의 합병을 위해 직장상사를 파는 것도 서슴지 않는 변호사 Bennett Holiday, 두 회사의 합병으로 직장을 잃고는 과격 정치단체에 가담하게 되는 파키스탄 소년들, 조그만 에너지회사의 직원에서 일약 나시르의 경제고문으로 격상한 Bryan Woodman (Matt Damon) 등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국제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병렬적으로 진행되면서 어느 순간 수렴되는 구조를 띄고 있어 정신 차리고 보지 않으면 스토리를 놓치고 마는 작품이다.

Kiss Me Deadly(1955)

장뤽 고다르나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누벨바그 감독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바 있는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1955년작. 느와르 필름의 최전성기에 만들어진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미스테리한 미녀의 죽음, 구사일생한 터프가이 탐정,그 터프가이를 배신하는 또다른 미스테리의 여인,그리고 그의 섹시한 여비서 등 거칠고 을씨년스러운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하였다는 크리스티나라는 여인을 태워준 탐정 마이크 해머는 그녀를 뒤따르던 악당들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난후 ‘나를 기억해 달라’는 크리스티나의 마지막 말을 힌트삼아 사건을 역추적 한다. 이 와중에 정체모를 악당들은 그를 을러대고 주위 사람들은 하나둘씩 죽어간다.

The Conversation(1974)

Francis Ford Coppola 가 대부1편을 완성하고 대부2편을 만들기 전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Blow Up 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로 만든 스릴러다. 형식상으로 스릴러의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 영화는 일종의 심리드라마이다. 도청을 밥벌이로 하는 한 중년사내 Harry Caul (진해크만)는 어느 거대기업으로부터 도청 의뢰를 받는다. 그러나 이 의뢰가 기업이 저지를 범죄와 연관이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 해리는 도청내용을 의뢰자에게 건네지 않는다. 이후 도청내용을 넘겨받으려는 기업 실무자 Martin Stett(해리슨포드)과 해리 간의 갈등이 폭력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결국 예상치 못한 반전의 지적쾌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스릴러로써의 미덕을 갖추고 있지만 그 지적쾌감이 통상적인 스릴러의 구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보다 한 차원 높은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훔쳐보기의 은밀한 매력에 대한 잔혹한 대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

12 Angry Men

누가 보아도 사건의 전말이 빤한 살인사건의 재판에 참여하게 된 12명의 배심원들. 재판소 밖은 끈적끈적한 습기로 가득 차있고 배심원들은 망설임 없이 아버지를 살인하였다는 혐의를 뒤집어 쓴 한 소년 용의자의 유죄판결을 내리려 한다. 그러나 한 신중한 배심원이 다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후 벌어지는 교묘한 논리싸움과 편견에 대한 저항은 숨 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내 이 영화가 상영시간 내내 조그마한 배심원 대기실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한다. 법정극의 달인 시드니 루멧과 냉철한 연기의 달인 헨리 폰다가 만나 다시 볼 수 없는 명작을 엮어냈다.

9 thoughts on “볼만한 스릴러 몇 편

  1. beagle2

    제가 본 건 시리아나 밖에 없네요. OTL…

    리스트 고맙습니다. 이 영화들 찾아 보는 걸 올 여름의 낙으로 삼아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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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기왕이면 제가 봤던 중 감명깊었던 것들을 추천하고파서 사실 잘 안 알려진 고전 위주로 골라봤습니다. 아무래도 스릴러는 예전 것이 제맛이죠. 좀 찾기 어렵더라도 찾아 감상하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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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정환

    Spoorloos하고 The Thomas Crown Affair, House Of Games 등이 특히 재밌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의 12 Angry Men도 흥미롭고요. 작정하고 다 찾아봐야겠습니다. 고마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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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The Thomas Crown Affair는 피어스브론스난 주연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죠. 네델란드 영화인 Spooloos도 미국에서 오리지널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던 작품인데 정작 미국 리메이크판은 혹평을 받았답니다. 같은 감독이어도 시스템에 따라 작품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나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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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호도마루

    12명의 성난 사람들. 정말 잼있었어요. 전에는 TV나 케이블TV서 가끔 해주기도 하던데,
    요새는 보기 힘드네요… 글 읽다보니 다시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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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저도 요즘 여유가 없는지라 영화를 자주 못봅니다만 이 글을 쓰면서도 한편 한편 다시 보고 싶더군요. 특히 12명의 성난 사람들… 이요. 시드니루멧의 팬이기도 하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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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beagle2

    12 Angry Men 여차저차 구해서 봤습니다. 정말 굉장하더군요!!!

    저는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따져보며 차근차근 지평을 확장해가는 정통적 방식의 추리물을 좋아하는지라 퍼즐 맞추기식 전개도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최근 영화들의 “이건 다 환상” 내지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결말을 오히려 진부하다고 느끼죠.) 사회적 함의랄까요? 그런 것도 좋았고 배우들의 열연, 감독의 연출 모두 훌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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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맘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이거 압권인데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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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Pingback: apparently | fo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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