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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호 교수의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를 읽고

남한의 “진보”세력에게 박정희의 경제신화는 일종의 계륵이다. 남한은 전 세계 개발도상국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 또는 대만과 함께 – 20세기 전간기의 참화를 딛고 기적처럼 경제성장에 성공한 나라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그 고도성장은 박정희의 집권 기간부터 시작된 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즉, 박정희는 경제개발계획 수립, 수출지향형 공업화, 재벌체제 확립 등 경제전반에 대한 강력한 국가통제를 통해 경제성장을 주도하여 온 것으로 알려졌고, 이것을 근거로 보수 세력은 그를 소위 “근대화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했고 진보 세력도 그 정도의 사실은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그래도 민주주의는 진보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도로 항변하곤 했었다.

개인적으로는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를 쓴 박근호 교수를 “진보” 또는 “보수” 중 어느 것으로 칭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책을 읽고 나서의 느낌은 치밀하고 집요하게 객관적인 경제학자라는 느낌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느 블로거가 쓴 묵시론 적인 경제전망을 담은 책과 어느 경제지 기자가 쓴 저축은행의 흥망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이들 책 내용의 불성실함으로 인해 박 교수의 성실함이 더욱 돋보였다. 이미 1993년에 『한국의 경제발전과 베트남전쟁』이란 책을 출판하면서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이 남한 경제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 필자는 2007년 비밀문서에서 해체된 대통령기록물, 美국무성의 한국관련 문서 등을 연구하여 논리를 보강하는 등 치밀한 검증을 거친 결과물이 이 책이다.

1960년대 내내 한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미국의 안전보장전략 아래 놓여 있었다. 다만 한국이 ‘미국의 불안정한 의붓자식’이었던 관계는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기브앤테이크’ 관계로 이행했다. 따라서 한미관계의 분기점은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이었고, 이를 경계로 미국의 한국정책은 명백히 전환되었다. 미국에게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한국을 공산권진영에 대한 경제적 우위의 증거로 삼으려는 ‘한국모델’ 전략이 행해졌다. 이를 위해 미국이 만든 경제시스템 속에서 개발모델이 된 한국은 우대조치를 받았고,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다. 요컨대 미국이 ‘한국모델’ 정책을 공들여 추진한 결과, 1965년부터 한국의 고도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박근호 지음, 김성칠 옮김, 회화나무, 2017년, p364]

해당 인용문이 책의 전반적인 요지를 담은 문구라 생각되어 인용했다. 박 교수는 박정희가 그 어떤 나라의 위정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려 했던 이유를 “한국의 경제성장, 한미관계의 강화, 한국군의 전투력 향상, 그리고 플러스알파”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박의 철저한 계산에 따라 진행된 베트남파병은 이후 박정희의 1965년의 방미로 이어지고 존슨 정부는 남한을 일본과는 다른 공산권에 대한 “자립형 완충지대”이자 “민주주의의 쇼윈도”로 키울 마음을 먹는다. 이를 위한 미국의 지원은 다양한 물질적 지원 이외에도 한국산 제품의 수입확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설립을 위한 학술적 지원, 미국기업의 한국 직접투자를 위한 노력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박정희의 미국을 향한 집요한 구애가 성공했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아버지”라 부른다면 달리 반박할 말은 없다. 다만 박 교수가 분석한바, 박 정권이 미국의 요구에 따라 수립한 경제개발계획이 실제 집행에서는 많은 오류가 있었고,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가 전자산업 육성으로 방향을 제시한 후1, 미국기업의 제조업기지화를 위한 투자가 있은 다음에야 경제가 궤도에 올랐다는 사실은 박정희 체제가 미국이라는 외생적 변수 없이는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그를 “OOO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몰염치한 짓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 기득권층은 미국의 위력을 실감하고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불경스러운 행동임을 깨달았고2 이런 행태가 오늘날에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대미굴종, 많은 노동자의 희생, 정경유착 및 재벌체제 공고화, 수출지향형 경제성장, 한미일 군사/경제 동맹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가지씩 곱씹어보면 아직도 이러한 모순들이 그대로 온존하고 있음을 최근의 많은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새로 들어선 정부가 이러한 모순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고 들면 개떼처럼 달려들어 짖어대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보면 그 썩은 뿌리가 이 나라에 얼마나 깊숙이 박혀 있는 지를 서늘하게 느낄 수 있다. 어쨌든 박근호 교수의 책은 이런 썩은 뿌리의 토대인 “박정희 경제신화”의 허구성을 깨닫게 하는 입문서로서의 자격이 충분한 책이다. 이 연구가 초석이 되어 이 나라의 대안 경제를 꿈꾸고 실천할 그 날이 어서 오길 바란다.

박정희 정부가 받아온 돈은 누구의 돈인가?

일본 수상으로서 아베 수상은 위안부로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치유할 수 없는 육체적 및 정신적 피해를 입어 고통 받는 모든 여성들에 대한 진지한 사죄와 유감을 다시 한 번 표했다. 한편으로 일본은 위안부 이슈 등을 포함하여 일본과 남한 간의 자산이나 청구권과 관련한 이슈들은 1965년 한일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에서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견지했다.[Announcement by Foreign Ministers of Japan and South Korea on the Issue of “Comfort Women”]

아베가 박근혜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말한 내용이라고 한다. 요컨대 아베는 일본 수상으로서 “일본군이 관여한(with an involvement of the Japanese military authorities)” 성노예 제도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is painfully aware of responsibilities)”지만 이번에 주는 10억 엔은 기부금이지 배상금이 아니고 그런 배상은 이미 1965년에 완료했다는 주장을 또다시 반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간의 청구권이 이미 1965년에 완료됐다는 일본의 주장은 타당한 주장인가?

올해 88살의 이근목 할아버지. 22살이던 1943년 일본 미쯔비시 조선소에 끌려가 해방될 때까지 돌덩이를 날랐습니다. 임금을 절반 밖에 받지 못했지만 조선소도, 일본 정부도 보상해주지 않았습니다. 지난 1965년 한일협정을 맺어 강제점령에 대한 보상금을 우리 정부에 지급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 등 강제징용 피해자 100명은 보상금으로 설립됐던 포스코, 당시 포항제철을 상대로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습니다.[“강제징용 배상, 도의적 책임”]

하지만 할아버지는 패소했다. 법원은 “포스코 때문에 강제징용자들이 보상금을 못 받았다고 보긴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일본정부의 입장과 명백하게 배치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 법원은 2013년 7월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이 35년간의 일제강점기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한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렇다면 우리 행정부의 수장은 아베의 말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인용한 글에선 그 반응은 적지 않았다.

드디어 1969년 12월 韓日간에 종합제철에 관한 기본협약이 체결되어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韓日 국교정상화 때 양국간에 합의된 청구권 및 對韓차관 공여액은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3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으로서 무상 및 유상자금 각 3억 달러에 대해서는 항일독립유공자보상, 對日민간청구권보상, 평화선철폐에 따른 어민보상 등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다. 朴대통령은 국민적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을 각오하면서 낭비보다는 건설이라는 견지에서 종합제철건설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pp138~139]

한편, 박정희 정부의 경제관료였던 김정렴 씨는 이근목 씨가 포스코에 위자료 지급 소송을 낸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정부가 받은 돈에 대해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음을 증언했다. 그런데 박정희 씨는 그 돈을 종합제철건설에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 스텝이 꼬이는 구간이다. 당시 관료가 그런 뉘앙스로 증언했고 협정문에도 일본의 주장이 타당해보일 수도 있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법원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현 대통령의 생각이 궁금하다.

제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빨갱이” 사냥의 희생양이 될뻔했던 어떤 정치인

1963년

이 무렵 군정연장 원대복귀 민정참여의 거듭된 번의 속에 곤욕을 치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우여곡절 끝에 63년 8월 31일 민주공화당의 총재와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대통령 선거가 벌어지게 됐다. [중략] 윤보선은 황태성 사건까지 끌어들여 연일 박후보의 사상관계를 융단폭격했고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박정희 후보는 “저들이 나를 빨갱이로 몰려 한다”고 비명을 질렀다. [중략] 63년 10월 10일 대선을 닷새 앞둔 시점에서 민정당 유세반의 김사만이 경북 영주에서 느닷없이 “부산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고 후려쳤다. [중략] 사흘간의 개표 끝의 최종결과는 박정희 4백70만표, 윤보선 4백54만표로 불과 16만표의 차이였다.[박정희, 윤보선에 16만표 차이로 승리, 박상길 전 청와대 대변인, 한국 현대사 119 대사건, 월간조선 엮음, 1993년, pp168~169]

2015년

동아일보 종편 채널A가 민언련을 ‘종북세력’으로 묘사했다가 정정보도는 물론 손해배상도 물게 됐다. 민언련이 제기한 소송에서 항소심 재판부가 원심을 깨고 원고 측 손을 들어준 것이다. [중략]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은 2013년 5월 종북좌익척결단 조용환 대표를 출연시켜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종북세력 5인방’을 주제로 토론하면서 민언련에 대해 “강정구와 송두율을 비판하는 언론을 비판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언론을 공격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선동한다”며 “우리나라 안보를 해치는 일련의 선동을 줄기차게 해왔기 때문에 종북세력의 선동 세력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조용환 대표는 “(민언련이) 북한 노동당 통전부 225국의 컨트롤을 받는다”는 등 근거 없는 주장을 이어갔다. [채널A, 민언련에 ‘종북’ 딱지붙였다가 손해배상 1000만원]

포항제철 건립에 대해 다시 한번

역사적 기록을 보면 자본의 이동성 capital mobility 이 부유한 국가들과 가난한 국가들의 수렴을 촉진하는 주요 요인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이건 한국이건 타이완이건 그리고 더 최근 들어서는 중국을 막론하고 최근 몇 년 동안 선진국 코앞까지 쫓아온 아시아 국가들 중 그 어느 곳도 대규모 외국인 투자로 수혜를 입지는 않았다. 본래 이들 국가는 모두 물적자본과 그리고 더 중요한 인적자본의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스스로 조달했는데, 최근 나온 연구들은 특히 인적자본이 이들 국가의 장기성장에서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식민지 통치 시대건 오늘날의 아프리카에서건 다른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이유로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들은 미래의 발전 가능성이 크지 않은 분야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고, 만성적으로 정치적 불안에 시달렸다는 사실이다.[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글항아리, 2014년, p90]

피케티의 이 책은 역사적으로 자본의 수익률(r)이 노동의 수익률(g)보다 크다는 “근본적인 불평등”에 다룬 책이다. 인용한 구절은 이러한 경향이 국제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부유한 국가에서 ‘자본의 한계생산성 marginal productivity of capital’이 낮아지면서 자본의 흐름은 가난한 국가로 흐르게 마련인데, 이럼으로써 이들 국가들 사이에 불평등이 감소할 것이라는 고전파 경제학 이론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자체적으로 자본을 조달한 국가들이 더 고도로 성장했다는 것이 피케티의 관찰이다.

이러한 관찰은 한 예로 든 우리나라의 경우를 놓고 볼 때 그리 틀린 관찰은 아니다. 한국은 강제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제 강점기부터 사실상 자력으로 인적자본을 늘려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일정 부분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과거 및 현재의 선진국들의 물질/비물질적인 도움이 있었지만 – 그리고 이것이 정치적인 편향에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지만 – 교육을 책임진 가정의 헌신은 거의 유례없을 정도로 혹독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불어 피케티는 인적자본을 더 강조하기는 했지만 물적자본 역시 자체적으로 해결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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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yangIronworks” by 저작자 김소민의 허가를 받고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함 – 저작자 김소민의 허가를 받고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함. Via Wikimedia Commons.

포스코 광양제철소

이미 이 블로그에서 몇 번 다뤘던 포항제철 건립의 비화가 대표적 사례다. 박정희 정권은 국제금융기구들로부터 무모한 계획이라고 비판받았던 제철소 건립을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여 건설한 – 사실상의 내자조달 – 사례는 남한의 ‘국가주도형 자본주의 모델’에서 매우 중요한 국면이다. 또한 박 정권은 당시 절대적인 자본부족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독일에는 간호사와 광부를, 베트남에는 군인을 보내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외자를 조달한다. 사실상 이런 자금이 그런 조달 배경 덕분에 자본수익이라는 반대급부의 꼬리표가 달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포항제철이 ‘자본의 한계생산성’으로 인해 새로운 고율의 자본수익을 쫓던 투자자들의 자본에 의해 건설되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역사에 가정은 금물이지만 아마도 포항제철의 모습, 나아가 남한 전체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지금 봐도 무모하기 그지없는 두 박씨의 원대한 계획은 “공상과학”이라 치부되어 사업계획이 수정되었을 것이고 투자에 쓰일 잉여는 배당에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두 박씨는 사실상의 주주인 일제의 피해당사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마패’까지 등장하는 개발독재로 포항제철의 투자효율을 극대화하였다.

고전파 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하기 매우 난해한 사건이었다.

“박정희 체제”는 언제나 극복될 것인가?

일부 학자들은 또한 일본의 “생산자 경제”와 서양의 “소비자 경제”를 대조하면서 레스터 서로가 말한 일본 주식회사 고유의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규칙들을 성공 요인으로 제시했다. 서로의 칭송은 대부분 과장되었지만 도쿄의 강력한 개입주의가 거시 정책을 차별화한 핵심 요소였다는 지적은 정확했다. 일본 정부는 수출에 도움이 되도록 환율을 조작하고 특정 부문의 생산을 지원하고 인도함으로써 공급 측면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했다.[강대국의 경제학, 글렌 허버스/팀 케인 지음, 김태훈 옮김, 민음사, 2014년, pp206~207]

보수주의적 경제학자인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조국인,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어떻게 계속 강대국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풀어내고 있다. 방법론적으로는 로마, 오스만트루크, 스페인, 일본 등과 같은 이전의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톺아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중 일본은 근대에 들어 메이지유신 등을 통해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사례로 인용하고 있다.

인용하는 부문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의 경제는 “동아시아의 기적”을 특징짓는 고유의 발전모델을 채택하였다. “자유 시장” 혹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채택하였다고는 하여도 그 안에는 다분히 관에 의한 경제관리, 요소투입을 통한 생산효율 극대화, 수출주도형 경제 등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이런 모델은 일본의 잔혹한 점령이 원한으로 남아 있는 남한 땅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그 체제를 개인적으로는 “박정희 체제”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이 체제는 상대적으로 대의민주주의가 발달한 일본에서의 그것과는 달리 통치자가 직접 나서서 노동자들에게 임금인상 요구를 억제하라고 말하는 등, 보다 가부장적인 국가자본주의의 모습을 띄었다. 어떤 면에서는 체제경쟁세력인 스탈린주의적 북한 체제와 흡사한 면마저 있었지만 그런 점에서 더욱 둘은 앙숙으로 지냈다.

박정희 체제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한의 경제체제에 온존하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순환출자로 연명하는 “재벌”, 경제수치에 있어서 수출의 과도한 비중, 그런 상황에서 악화되고 있는 내수를 떠받치고 있는 부채 경제 등. 이런 상황에서 최경환 경제팀은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고 임금소득을 올려 내수를 살리자고 잠깐 립서비스를 하더니 이내 부동산 규제를 확 풀어버렸다.

박정희 체제를 극복하는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박정희의 노동관

인류가 향유(享有)하고 있는 고도의 물질 문명(物質文明)과 정신 문화(精神文化)는 그 모두가 사실상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며, 근로자의 노동력이야말로 국가 사회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하고도 존귀(尊貴)한 원동력(原動力)이라 할 것이다. – 66.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1

흥미롭게도 박정희 前 대통령의 이 발언만을 놓고 보면 그가 노동가치론자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일찍이 윌리엄 페티, 존 로크 등의 사상가들이 주창하였고 고전경제학의 거두 아담 스미스가 이론적으로 정립하였으며 칼 맑스에 의해 “반역의 경제학”의 재료로 쓰였던 노동가치론이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사장님의 치사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롭다.

노동을 천(賤)하게 여기고, 근로자의 존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가 건전한 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인 것이다. 특히 조국 근대화의 드높은 기치(旗幟) 아래 한마음으로 뭉쳐서 모든 국민이 생산과 건설과 수출에 총진군(總進軍)해야 할 이 마당에 우리 근로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사명은 실로 막중(莫重)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66.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대통령의 앞서의 발언은 노동가치론의 이론적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바로 이 주장을 위한 말머리로 꺼낸 것 같다. 즉 “노동을 천하게 여기고 노동자의 존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적 풍토를 나무라기 위해서 모든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노동력의 산물임을 강조한 것이다. 노동이 없었으면 그 모든 것이 없었을 것이기에 “근로자”를 “공돌이”라 비웃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만이 “생산과 건설과 수출에 총진군”할 수 있다.

만일 노임을 노동 생산성을 훨씬 넘게 비싸게 올린다고 생각해보자. [중략] 상품의 가격이 따라서 올라가게 될 것이고, 상품 가격이 오르면 수출 증대가 어려워 질 것이다. [중략]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실업자(失業者)가 늘어나고, [중략] 결국 얼마 안 가서 자연적으로 근로자 여러분의 생활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 70.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어감이 조금 이상하다.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는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고 “근로자의 존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는 건전한 발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근로자의 임금은 노동생산성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임금이 오르면 결국 근로자의 생활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고 한다. 익숙한 수출주도형 “先성장 後분배” 논리이자 “트리클다운 효과” 논리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서구(西歐)의 여러 나라에서는 노사(勞使)의 협조 문제가 제기되었고, 오늘날 발전 도상에 있는 신생 국가(新生國家)들은 성장과 균형된 배분(配分)이라는 문제가 때로는 서로 상충(相衝)되는 현실 문제로서 대립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 67.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주창되는 “先성장 後분배” 의 논리다. “먼저 파이를 키워야 나눠먹을 것이 있다”는 “트리클다운 효과”의 논리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노선은 명확하게 저임금을 기조로 하는 수출주도를 통한 경제 발전을 최우선시하는 노선이었다. 상품경쟁력이 없는 제3세계의 흔한 노선이었고 박정희 역시 이 노선을 채택했다.

二차 대전 후 독일의 노동자들은 독일의 경제가 다시 부흥(復興)될 때까지 노동 쟁의(勞動爭議)를 하지 않겠다 하는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독일은 지난 二O여 년 동안에 그야말로 전세계에서 기적이다, 경이적(驚異的)이다 하는 이런 소리를 들을 만큼 놀랄 만한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 국가도 그만큼 발전하고, 기업주도 그만큼 발전하고, 모든 사람들이 직업을 얻고, 노동자들이 여러 가지 처우(處遇)와 사회 보장(社會保障)을 받게 된 것이다. – 69.1.10 기자 회견에서

1964년 박정희는 서독을 방문했다. 그는 이 방문에서 서독의 여러 모습, 특히 노사관계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하다. 어록집 여러 군데에서 이 발언과 같이 서독의 노사관계와 남한의 그것을 비교하는 발언이 꽤 있다. 결국 그는 서독식 사회적 합의주의를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독과 달리 남한의 사회적 합의주의에는 결여된 것이 있었다. 노동자의 발언권.

전후 독일에 있어서 어떤 회사가 종업원에게 노임을 올릴 것을 제의하자, 공장의 노동자들은 공장이 더 건전하고 충실하게 될 때까지 보류해 달라고 결의했다는 갸륵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이러한 미담은 한국의 현실에서도 수없이 꽃을 피워야 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 65.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삼성전자의 탄생배경과 그 절묘한 타이밍

“한국 재벌의 공통점은 소비재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중화학 공업에 어떻게 적응해 나가느냐가 큰 과제이다. 전자 공업은 앞으로의 성장 분야다. 지금 미국이 최첨단을 가고 있지만 삼성도 여기에 나서고 싶다.”[재벌들의 전자전쟁, 오효진, 나남, 1984, p20에서 재인용]

1968년 여름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이 일본의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요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삼성전자와 애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그리 감회가 깊지 않을지 몰라도, 한국경제가 아직도 여명기에 불과했던 당시에 이 인터뷰를 접한 사람들이라면 ‘미국과 겨루겠다니 무모하군.’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신문의 독자는 일본인들이었을 테니 더욱이 이 회장의 포부가 같잖았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 회장의 발언에는 한 가지 사실과 약간 다른 발언이 있다. 바로 “한국 재벌의 공통점은 소비재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발언이다. 물론 그 당시 대부분의 재벌이 소비재 산업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소비재 산업과 대비되는 투자재 산업을 추구하는 재벌도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직 내구소비재 산업의 비중이 컸지만 어쨌든 전자회사를 10년째 운영하고 있던 골드스타(오늘날의 LG전자)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락희(樂喜)”라는 사명을 쓰고 있던 LG의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이병철 회장과 초등학교 동창이자 사돈 간이었다. 구회장은 1950년대에 플라스틱 공장을 차려 많은 돈을 벌었다. 이런 창업배경이 있기에 삼성보다 먼저 전자공업에 진출하였고, 국산품 애용 운동 등과 맞물려 사업이 번창하였다. 그런 분야에 삼성이 뛰어든 것이니 금성 측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고, 이후부터 여태까지 두 회사는 숙명의 라이벌로 남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병철 회장이 전자공업으로의 진출을 선언하는 시점이다.

삼성 그룹은 이 회장의 선언이 있은 뒤 1년 만에 일본 삼양전기(三洋電氣)와 합작사업으로 인가신청서를 경제기획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그 6일 뒤인 69년 6월 19일, 정부는 그 동안 마련해온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확정해서 발표한다. 이 기본계획의 골자는 ①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시책을 도모하고 ② 직접 또는 합작 투자를 유치하며 ③ 외자도입을 지원하고 ④ 76년에는 총 수출목표 30억 달러 가운데 전자제품 수출을 4억 달러로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앞의 책, p20]

일본에서 이 회장이 삼성의 전자공업에로의 진출을 선언하자마자, 한국 정부가 “외자도입 지원” 등의 특혜조치가 담긴 계획을 발표하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어쨌든 이후에도 이 회장의 언론 플레이는 계속 되는데 6월 26일 중앙일보에 <전자공업의 오늘과 내일>이란 글을 낸다. 이 글에서 이 회장은 “수출목표에 대응한 전자제품의 내수수준 향상을 위해서 정부와 업자는 통합된 노력을 계속 집중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정부가 특정한 산업의 육성계획을 발표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당시 국가가 가진 권력은 – 남북한 공히 – 대단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통치하는 국가는 “대한민국 주식회사”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이 국가의 영도 하에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요소투입 주도성장 모델을 채택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산업육성계획은 예산지원 및 외자도입 등의 특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옆자리에 배석하고 있던 김학렬 부총리에게 “부총리, 해낼 수 있소?”하고 물었다. 김 부총리는 “예, 상공부 안대로 조치하겠습니다.”라고 명쾌한 답을 했다. 박 대통령은 “그럼, 상공부 안대로 추진하시오.”라고 결정을 내렸다. 전자공업 육성방안은(1969~1976) 8년 간에 걸치는 장기계획인데, 여기에 소요되는 8년간의 사업추진 자금(140억 원, 즉 약 5,000만 달러)이 일시에 확보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국고 사정은 미약해서, 예산 얻기란 아주 힘든 일이었다. [중략] 그러나 대통령 재가만 얻으면,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의 예산이 확보되는 것이다.[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오원철 지음, 동서문화사, 2006, p21]

“대통령 재가만 얻으면,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의 예산이 확보되는” 고도로 집중화된 의사결정 시스템은 상당히 모험주의적인 시스템임이 분명하다. 어쨌든 오늘날에는 그런 모델이 그나마 유효했던 것으로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어떻게 삼성이란 회사가 절묘하게 그런 시스템이 내린 결정과 때를 같이 하여 사업방향을 정했는가 하는 점이다. 정보의 공유와 요즘 같지 않았을 때인데 말이다.

삼성은 1970년 1월 20일 전자회사를 설립한다.1 당시 락희 계열의 한 신문은 “삼성/삼양 간의 합작을 인가한다면 매판 자본을 키워 주자는 말”이라고 비판한다. 재벌의 대변지에서 “매판자본”이란 말을 접하니 신선하지만, 정황으로 보건데 삼성의 전자공업 진출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리고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이 회장의 바람대로 “정부와 업자의 통합된 노력이 집중”되어 전자공업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궁금한 점은 과연 정권과 삼성 간에 얼마만큼의 사전교감이 있었나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