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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체제”는 언제나 극복될 것인가?

일부 학자들은 또한 일본의 “생산자 경제”와 서양의 “소비자 경제”를 대조하면서 레스터 서로가 말한 일본 주식회사 고유의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규칙들을 성공 요인으로 제시했다. 서로의 칭송은 대부분 과장되었지만 도쿄의 강력한 개입주의가 거시 정책을 차별화한 핵심 요소였다는 지적은 정확했다. 일본 정부는 수출에 도움이 되도록 환율을 조작하고 특정 부문의 생산을 지원하고 인도함으로써 공급 측면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했다.[강대국의 경제학, 글렌 허버스/팀 케인 지음, 김태훈 옮김, 민음사, 2014년, pp206~207]

보수주의적 경제학자인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조국인,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어떻게 계속 강대국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풀어내고 있다. 방법론적으로는 로마, 오스만트루크, 스페인, 일본 등과 같은 이전의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톺아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중 일본은 근대에 들어 메이지유신 등을 통해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사례로 인용하고 있다.

인용하는 부문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의 경제는 “동아시아의 기적”을 특징짓는 고유의 발전모델을 채택하였다. “자유 시장” 혹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채택하였다고는 하여도 그 안에는 다분히 관에 의한 경제관리, 요소투입을 통한 생산효율 극대화, 수출주도형 경제 등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이런 모델은 일본의 잔혹한 점령이 원한으로 남아 있는 남한 땅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그 체제를 개인적으로는 “박정희 체제”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이 체제는 상대적으로 대의민주주의가 발달한 일본에서의 그것과는 달리 통치자가 직접 나서서 노동자들에게 임금인상 요구를 억제하라고 말하는 등, 보다 가부장적인 국가자본주의의 모습을 띄었다. 어떤 면에서는 체제경쟁세력인 스탈린주의적 북한 체제와 흡사한 면마저 있었지만 그런 점에서 더욱 둘은 앙숙으로 지냈다.

박정희 체제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한의 경제체제에 온존하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순환출자로 연명하는 “재벌”, 경제수치에 있어서 수출의 과도한 비중, 그런 상황에서 악화되고 있는 내수를 떠받치고 있는 부채 경제 등. 이런 상황에서 최경환 경제팀은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고 임금소득을 올려 내수를 살리자고 잠깐 립서비스를 하더니 이내 부동산 규제를 확 풀어버렸다.

박정희 체제를 극복하는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박정희의 노동관

인류가 향유(享有)하고 있는 고도의 물질 문명(物質文明)과 정신 문화(精神文化)는 그 모두가 사실상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며, 근로자의 노동력이야말로 국가 사회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하고도 존귀(尊貴)한 원동력(原動力)이라 할 것이다. – 66.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1

흥미롭게도 박정희 前 대통령의 이 발언만을 놓고 보면 그가 노동가치론자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일찍이 윌리엄 페티, 존 로크 등의 사상가들이 주창하였고 고전경제학의 거두 아담 스미스가 이론적으로 정립하였으며 칼 맑스에 의해 “반역의 경제학”의 재료로 쓰였던 노동가치론이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사장님의 치사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롭다.

노동을 천(賤)하게 여기고, 근로자의 존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가 건전한 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인 것이다. 특히 조국 근대화의 드높은 기치(旗幟) 아래 한마음으로 뭉쳐서 모든 국민이 생산과 건설과 수출에 총진군(總進軍)해야 할 이 마당에 우리 근로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사명은 실로 막중(莫重)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66.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대통령의 앞서의 발언은 노동가치론의 이론적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바로 이 주장을 위한 말머리로 꺼낸 것 같다. 즉 “노동을 천하게 여기고 노동자의 존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적 풍토를 나무라기 위해서 모든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노동력의 산물임을 강조한 것이다. 노동이 없었으면 그 모든 것이 없었을 것이기에 “근로자”를 “공돌이”라 비웃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만이 “생산과 건설과 수출에 총진군”할 수 있다.

만일 노임을 노동 생산성을 훨씬 넘게 비싸게 올린다고 생각해보자. [중략] 상품의 가격이 따라서 올라가게 될 것이고, 상품 가격이 오르면 수출 증대가 어려워 질 것이다. [중략]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실업자(失業者)가 늘어나고, [중략] 결국 얼마 안 가서 자연적으로 근로자 여러분의 생활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 70.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어감이 조금 이상하다.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는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고 “근로자의 존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는 건전한 발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근로자의 임금은 노동생산성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임금이 오르면 결국 근로자의 생활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고 한다. 익숙한 수출주도형 “先성장 後분배” 논리이자 “트리클다운 효과” 논리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서구(西歐)의 여러 나라에서는 노사(勞使)의 협조 문제가 제기되었고, 오늘날 발전 도상에 있는 신생 국가(新生國家)들은 성장과 균형된 배분(配分)이라는 문제가 때로는 서로 상충(相衝)되는 현실 문제로서 대립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 67.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주창되는 “先성장 後분배” 의 논리다. “먼저 파이를 키워야 나눠먹을 것이 있다”는 “트리클다운 효과”의 논리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노선은 명확하게 저임금을 기조로 하는 수출주도를 통한 경제 발전을 최우선시하는 노선이었다. 상품경쟁력이 없는 제3세계의 흔한 노선이었고 박정희 역시 이 노선을 채택했다.

二차 대전 후 독일의 노동자들은 독일의 경제가 다시 부흥(復興)될 때까지 노동 쟁의(勞動爭議)를 하지 않겠다 하는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독일은 지난 二O여 년 동안에 그야말로 전세계에서 기적이다, 경이적(驚異的)이다 하는 이런 소리를 들을 만큼 놀랄 만한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 국가도 그만큼 발전하고, 기업주도 그만큼 발전하고, 모든 사람들이 직업을 얻고, 노동자들이 여러 가지 처우(處遇)와 사회 보장(社會保障)을 받게 된 것이다. – 69.1.10 기자 회견에서

1964년 박정희는 서독을 방문했다. 그는 이 방문에서 서독의 여러 모습, 특히 노사관계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하다. 어록집 여러 군데에서 이 발언과 같이 서독의 노사관계와 남한의 그것을 비교하는 발언이 꽤 있다. 결국 그는 서독식 사회적 합의주의를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독과 달리 남한의 사회적 합의주의에는 결여된 것이 있었다. 노동자의 발언권.

전후 독일에 있어서 어떤 회사가 종업원에게 노임을 올릴 것을 제의하자, 공장의 노동자들은 공장이 더 건전하고 충실하게 될 때까지 보류해 달라고 결의했다는 갸륵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이러한 미담은 한국의 현실에서도 수없이 꽃을 피워야 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 65.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삼성전자의 탄생배경과 그 절묘한 타이밍

“한국 재벌의 공통점은 소비재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중화학 공업에 어떻게 적응해 나가느냐가 큰 과제이다. 전자 공업은 앞으로의 성장 분야다. 지금 미국이 최첨단을 가고 있지만 삼성도 여기에 나서고 싶다.”[재벌들의 전자전쟁, 오효진, 나남, 1984, p20에서 재인용]

1968년 여름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이 일본의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요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삼성전자와 애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그리 감회가 깊지 않을지 몰라도, 한국경제가 아직도 여명기에 불과했던 당시에 이 인터뷰를 접한 사람들이라면 ‘미국과 겨루겠다니 무모하군.’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신문의 독자는 일본인들이었을 테니 더욱이 이 회장의 포부가 같잖았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 회장의 발언에는 한 가지 사실과 약간 다른 발언이 있다. 바로 “한국 재벌의 공통점은 소비재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발언이다. 물론 그 당시 대부분의 재벌이 소비재 산업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소비재 산업과 대비되는 투자재 산업을 추구하는 재벌도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직 내구소비재 산업의 비중이 컸지만 어쨌든 전자회사를 10년째 운영하고 있던 골드스타(오늘날의 LG전자)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락희(樂喜)”라는 사명을 쓰고 있던 LG의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이병철 회장과 초등학교 동창이자 사돈 간이었다. 구회장은 1950년대에 플라스틱 공장을 차려 많은 돈을 벌었다. 이런 창업배경이 있기에 삼성보다 먼저 전자공업에 진출하였고, 국산품 애용 운동 등과 맞물려 사업이 번창하였다. 그런 분야에 삼성이 뛰어든 것이니 금성 측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고, 이후부터 여태까지 두 회사는 숙명의 라이벌로 남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병철 회장이 전자공업으로의 진출을 선언하는 시점이다.

삼성 그룹은 이 회장의 선언이 있은 뒤 1년 만에 일본 삼양전기(三洋電氣)와 합작사업으로 인가신청서를 경제기획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그 6일 뒤인 69년 6월 19일, 정부는 그 동안 마련해온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확정해서 발표한다. 이 기본계획의 골자는 ①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시책을 도모하고 ② 직접 또는 합작 투자를 유치하며 ③ 외자도입을 지원하고 ④ 76년에는 총 수출목표 30억 달러 가운데 전자제품 수출을 4억 달러로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앞의 책, p20]

일본에서 이 회장이 삼성의 전자공업에로의 진출을 선언하자마자, 한국 정부가 “외자도입 지원” 등의 특혜조치가 담긴 계획을 발표하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어쨌든 이후에도 이 회장의 언론 플레이는 계속 되는데 6월 26일 중앙일보에 <전자공업의 오늘과 내일>이란 글을 낸다. 이 글에서 이 회장은 “수출목표에 대응한 전자제품의 내수수준 향상을 위해서 정부와 업자는 통합된 노력을 계속 집중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정부가 특정한 산업의 육성계획을 발표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당시 국가가 가진 권력은 – 남북한 공히 – 대단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통치하는 국가는 “대한민국 주식회사”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이 국가의 영도 하에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요소투입 주도성장 모델을 채택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산업육성계획은 예산지원 및 외자도입 등의 특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옆자리에 배석하고 있던 김학렬 부총리에게 “부총리, 해낼 수 있소?”하고 물었다. 김 부총리는 “예, 상공부 안대로 조치하겠습니다.”라고 명쾌한 답을 했다. 박 대통령은 “그럼, 상공부 안대로 추진하시오.”라고 결정을 내렸다. 전자공업 육성방안은(1969~1976) 8년 간에 걸치는 장기계획인데, 여기에 소요되는 8년간의 사업추진 자금(140억 원, 즉 약 5,000만 달러)이 일시에 확보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국고 사정은 미약해서, 예산 얻기란 아주 힘든 일이었다. [중략] 그러나 대통령 재가만 얻으면,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의 예산이 확보되는 것이다.[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오원철 지음, 동서문화사, 2006, p21]

“대통령 재가만 얻으면,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의 예산이 확보되는” 고도로 집중화된 의사결정 시스템은 상당히 모험주의적인 시스템임이 분명하다. 어쨌든 오늘날에는 그런 모델이 그나마 유효했던 것으로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어떻게 삼성이란 회사가 절묘하게 그런 시스템이 내린 결정과 때를 같이 하여 사업방향을 정했는가 하는 점이다. 정보의 공유와 요즘 같지 않았을 때인데 말이다.

삼성은 1970년 1월 20일 전자회사를 설립한다.1 당시 락희 계열의 한 신문은 “삼성/삼양 간의 합작을 인가한다면 매판 자본을 키워 주자는 말”이라고 비판한다. 재벌의 대변지에서 “매판자본”이란 말을 접하니 신선하지만, 정황으로 보건데 삼성의 전자공업 진출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리고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이 회장의 바람대로 “정부와 업자의 통합된 노력이 집중”되어 전자공업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궁금한 점은 과연 정권과 삼성 간에 얼마만큼의 사전교감이 있었나 하는 점이다.

한 지식인이 고안해낸 “한국적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비극적 결과

임방현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면서 한국 정부의 정책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다. 임방현은 1974년(1973년의 오기인 듯하다 – 편집자)에 출간된 <근대화와 지식인>이라는 저서에서 지식인이 담당해야 할 책임을 열거하면서 동시에 박정희 정권이 지식인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유신체제가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비판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중략] 그는 “산업화된 국가에서 추구하는 민주주의 논의의 핵심은 복지와 분배다. (…) 하지만 우리가 채택해야 할 민주주의는 소비가 아니라 효율, 분산이 아니라 조화다”라고 주장하였다.[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 나종남 옮김, 책과 함께, 2012, p304]

박정희 정권 하에서 권력과 지식인 간의 협력 및 긴장관계에 대해 서술하는 장면 중 일부다. 미국의 주류학계는 이 당시 남한에 이른바 근대화론을 이식하려 노력했는데, 이 이론의 고갱이는 “모든 사회를 근대사회와 전통사회로 구분한 후, 저개발 국가의 경우 전통적인 관행과 규범이 근대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합리적인 철학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 사회의 접촉을 통해 사회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이자 학자였던 임방현은 기자들을 뽑아 연구를 지원하는 니만 펠로십을 통해 하버드에서 공부하면서 위와 같은 생각을 발전시켰다. 즉, 서구사회의 근대화론은 받아들이되 어디까지나 현존 권력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독특하게 변형된 근대화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독재를 비판하는 쪽이나 옹호하는 쪽 모두 근대화론을 비판의 논거로 삼았다는 점이다. 물론 더 왼쪽으로 가면 다른 논리가 나오지만 말이다.

여하간 임방현은 당시 유신체제를 정당화할 논리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던 박 정권의 맘에 쏙 드는 개념, 즉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제공하였는데 근대화론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교묘히 비틀었기에 지식인 주류 사이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전파력을 지녔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이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임은 그 후 박 정권에서 특별보좌관으로 채택된 후, 공보수석비서관, 민정당 국회의원 등을 거친다.

그의 주장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산업화된 국가에서 추구하는 민주주의 논의의 핵심은 복지와 분배다.”라는 명제는 그가 이미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책무를 잘 간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용한 책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임방현이 지식인의 국정에의 참여를 고민하게 된 계기가 저명한 학자이자 스스로 국정에도 깊이 관여한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의 책을 읽고부터였다고 하는데, 앞서의 생각 역시 그의 생각에 따른 게 아닌가 싶다.

즉, 뮈르달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스웨덴 등 북구의 국가개입주의적 사회민주주의의 형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임방현은 이러한 그에게서 ‘지식인은 국가에 협력해야 한다’는 논리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역시 결정적인 부분에서 뮈르달의 생각을 비트는데 “소비가 아닌 효율, 분산이 아닌 조화”가 그 부분이다. 스웨덴식 분배는 남한에겐 사치란 소리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인용한 책의 논지가 미국이 제3세계에 자신의 체제를 이식하려 시도한 중 유일한 성공사례가 남한이라는 것이지만, 그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여전히 “복지와 분배”가 사치스러운 주문으로 남아있는 사회로 고착화되어 있다. “한국적 민주주의”가 형성한, 재벌위주/수출위주의 경제체제인 “박정희 체제”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딸이 나서서 그 체제를 바꿔보겠다고 하여 집권했지만 그 시야는 아직까진 뿌옇다.

지식인이 교묘히 비틀어놓은 근대화론이 의외로 이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인지도 모른다.

박정희의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에 관한 보론

특히 한국은 수출 증가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이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서 국내적으로 많은 반대가 예상되는 조치들을 취해야 했다. 미국은 우선 원화의 가치절하를 주장했다. 원화의 가치가 절하될 경우 한국 상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조언을 받아들여 원화의 가치를 1달러당 130원에서 256원으로 절하하는 환율 조정을 단행하자, 곧바로 격렬한 저항과 반대가 일어났다. [중략] 한 신문은 원화의 가치절하가 “가격 악순환의 소용돌이”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며, 일부 국회의원은 정부의 결정을 “완벽한 실수”라고 비난하면서 이 조치로 인해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략] 주한 미국 대사관은 “실제로 원화의 가치절하가 단행되면 전반적으로 국내 물가가 상승할 것이다. (…) 단기적으로 볼 때, 한국 정부는 미국이 추가로 지급할 식량 지원이 원화의 가치 절하가 실행되는 시점에 맞춰 진행될 것이라고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중략] 한국 정부의 환율 인상 조치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화의 가치절하만으로 저절로 수출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략]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 총독부가 실시하였던 정책과 미국의 경제 전문가가 권유하는 정책을 혼합하여 독특한 수출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일제 총독부가 추진하던 것과 유사하게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일부 특정 기업에게 세금 감면, 철도 수송 비용 감면, 은행 대출이자율 특혜 등의 혜택을 부여했던 것인데, 이 중에서도 은행 대출 이자율 감면 혜택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자율 감면 혜택을 받았던 기업 중에는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과 현대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기업들은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는 대가로 공화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 나종남 옮김, 책과함께, 2012년, pp245~247]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인용한 이 책의 독특한 지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일관된 기조는 대한민국이, 미국이 다른 나라에서 공산세력의 위협을 막고 자신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식하려 했던 많은 시도들 중 가장 성공적인 나라였다는 주장이고, 이를 위해 이승만 이후부터 1987년까지의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의 상호역학관계를 다루고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대한 전문가인 저자는 스스로도 자신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과 해석에 대해 “우파와 좌파 모두 불만을 표시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우파는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좌파는 미국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싫어할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책 내용은 그의 염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톤을 유지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거의 좌파적 시각의 글이라 여겨질 정도로 평가가 혹독하다. 미국의 원조를 경제개발에 힘쓰기 보다는 자신의 권력 강화에 몽땅 쏟아 부은 냉혹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대체재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독재를 용인하지만 지식인, 군인들에게 미국식 자유주의의 우월성을 전파하여 독재종식에 기여했다는 서술은 좌파의 구미에 맞지 않는 묘사다. 박정희로 가서는 그의 독재자로서의 모습과 열정적인 경제 지도자로서의 모습이 중첩적으로 서술된다. 그리고 인용문에도 그러한 이중적인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용문에 나온 원화의 가치절하 조치는 1964년의 조치다. 1961년의 쿠데타를 통해 출범한 신생정부는 잘 알다시피 미국의 정권에 대한 승인과 원조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정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적 원조뿐만 아니라 정치적, 정책적 지원에도 크게 기대고 있었다. 이러한 사유로 박정희는 집권 즉시 미국이 원하던 일본과의 재수교, 월남파병, 환율조정 등을 차근차근 실천해 나간다. 이 중 원화의 가치절하는 상기의 사유로 박 정권이 전면적으로 단행한 조치다. 지금 와서 보면 가치절하 이외에 다른 대안이 많지 않았기에 그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묘사된 정황만 보더라도 그 진행은 일방적이고 민중 수탈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번 글에서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가 박정희의 경제개발을 “인플레를 유발할 뿐 아니라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이라고 묘사했던 바, 위와 같은 조치는 그러한 경제개발의 일환이다. 즉,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인플레이션을 방기하는 차원을 넘어 조장한 것이다. 이승만이 원화 가치를 낮추라는 미국의 조언을 무시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는 수입품 가격을 앙등시키고 수출업자와 채무자에게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더 나아가 수출기업에게는 금리를 깎아주는 등의 특혜를 주었으니 삼성과 현대와 같은 기업으로서는 이중, 삼중의 특혜를 누린 셈이다.1 그리고 우리경제는 수출주도 경제 또는 “박정희 체제”를 공고화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인플레적인 경제개발” 정책

셋째로 인플레적인 경제개발이었다는 점이다. 인플레적인 경제개발이라 함은 경제개발이 인플레를 유발할 뿐 아니라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이라는 것이다. 돈을 찍어 내자를 공급함으로써 투자는 인플레를 유발하였다. 한편 인플레가 되면 채권자와 예금자는 손실을 보고 채무자와 대출받은 자는 득을 보게 되어 은행돈으로 공장을 세운 대기업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작용을 한 것이다. 그래서 경제개발과정에서 줄곧 높은 인플레가 지속되었는데 이것은 서민가계는 압박하고 기업은 혜택을 주는 작용을 한 것이다.[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박승, 한국일보사, 2010년, p135]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박승 씨의 회고록 중 일부다. 인용한 부분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개발정책의 특징을 정리한 내용 중 일부다. 박승 씨는 크게 네 가지 특징을 들었는데, 첫째, 개방체제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였다는 점, 둘째, 정부 주도적 성장이라는 점, 셋째, 인플레적인 경재개발이라는 점, 넷째, 불균형적인 성장이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요약한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은 첫째 정책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자유주의”적 경제개발 노선과는 많이 동떨어진 노선이다. 즉, 정부 주도 하에 산업별 혹은 지역별로 불균형적인 – 또는 불평등한 – 자원분배를 통해 경제성장을 유도하였는데, 이를 다시 고의적인 인플레를 통해 결과물도 재분배한 것이다.

오늘날 기업의 부채비율은 매우 낮다. 일례로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 중 164개사의 2012년 상반기 실적자료를 보면, 이들 기업의 부채비율은 135.05%였다. IMF외환위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업의 부채비율은 이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고, 그러한 부채비율은 기업에 대한 이른바 “특혜금융”을 통해 자금이 대출되고 유지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특혜금융은 한국, 대만,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모델”의 특징인, 국가의 금융적 통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과 대만은 국가가 은행을 직접 소유함으로써 그 통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채권자는 손해를 보는데, 채권자인 은행이 곧 국가이므로 이에 대한 거부감은 거시적 측면에서 완화될 것이었다.

물론 이런 고의적인 인플레이션을 통한 경제통제 내지는 경제조작은 아주 오래된 풍습이다. “인플레이션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권력층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인류의 역사는 또한 인플레이션의 역사이기도 했다. 역사상의 권력들은 수시로 자신이 진 빚을 탕감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방임 내지는 유발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무정부 상태를 통제하고 상호신용을 강화시키는 강한 수단 중 하나가 금본위제인 셈이다. 이마저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 오늘날은 허술한 달러본위제가 이어지고 있지만, 어찌 됐든 신생 남한의 군사정권은 과거의 역사를 교훈삼아, 개방경제를 취하면서도 인플레이션 유발을 통해 불균등한 자원배분을 유도한 것이다.

그 결과, 1960년대 한국 경제는 외자와 은행대출을 얻기만 하면 큰 이익이 되는 것이란 풍토가 만연했다. 은행대출에 관한 부정사건이 줄을 잇고, 대기업은 과다부채와 과잉투자로 인해 부실화로 이어졌다. 60년대 말 정부는 상황을 개선시키려 했으나 효과가 미약했다. 박정희는 1972년 8.3사채동결조치로 다시 기업의 부채를 탕감시켜줬다.

귤이 바다를 건너와 탱자가 된 또 하나의 사례, “경제민주화”

경제민주화는 의사결정의 권력을 기업의 주주에서 보다 공공의 지분소유자인, 노동자, 소비자, 공급자, 근린주구, 더 많은 이들 등 보다 큰 그룹으로의 이동을 제안하는 사회경제학적 철학이다.
Economic democracy is a socioeconomic philosophy that proposes to shift decision-making power from corporate shareholders to a larger group of public stakeholders that includes workers, customers, suppliers, neighbors and the broader public.[wikipedia.org]

경 제민주화는 경제조직의 단위들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또는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될 때 실현된다. – 최우선적인 이해관계가 단기적인 재정이득인 원격 주주들보다는,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조직과 공동체에 대한 진정 장기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에 의해서 소유되고 통제되는 것을 말한다.
Economic democracy exists when the units of economic organisations are owned and controlled by the people who work in them, and/or by those who use their services – people who have a genuine long-term interest in the organisations and the communities in which they operate rather than remote shareholders whose overriding interest is short-term financial gain.[equalitytrust.org.uk]

‘경제민주화’란 무엇인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개념의 정의는 명확하다. 바로 경제에 있어 의사결정의 주체를 소수의 손에서 다수의 손으로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가 재벌총수의 전횡, 단기적 이해의 주주자본주의를 포함한다면, 후자는 소비조합, 노동자의 경영참여, 이해자 자본주의, 기타 보다 급진적인 경제단위의 민주적 통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박근혜 씨가 처음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를 꺼냈을 때에는 우선 위와 같은 이 개념의 고갱이에 대해 고민하였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다. 본질이 “박정희 체제”의 적자인 그로서는 그와 같은 급진적인 사고를 차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경제관료 출신 김종인 씨의 영입이다.

김종인 씨는 전두환 前 대통령이 개헌을 할 적에 소위 “경제민주화 조항”이라 불리는 헌법 제119조 2항을 집어넣자고 건의하여 관철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그 주장이 진실인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그 조항이 이 경제적으로 극우적인 나라에서 “경제민주화 조항”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명성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 제119조의2.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원문 보기]

이 조항을 보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하는 주체가 “국가”다. 비록 그 규제와 조정의 목적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오랜 기간 국가주의의 통제에 의해 경제시스템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온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 주체를 국가로만 국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백번 양보하여도 “경제민주화”가 포괄하는 주체와는 동떨어져 있다.

한편, 왜 박근혜 씨가 이번 선거에서 이 개념을 선점하려 하였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실제로 경제체질의 개선에 관심을 가졌을 개연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밖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정책의 좌클릭을 통한 중도층의 흡수와 ‘근대화 세력 對 민주화 세력’이라는 구도를 깨뜨릴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란 분석을 해볼 수 있다.

그러한 포지셔닝이 현재까지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씨가 결국 경제민주화 정책이라고 내놓은 것들이 기존의 재벌개혁 공약에서도 한참 미진한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 오히려 주주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정도의 “경제민주화”와 전혀 상관없는 정책이지만 민주당은 이런 보수성에 동질화되어버려 이슈파이팅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어느 샌가 한국화(韓國化)되어버린 “경제민주화”는 박근혜 씨의 아버지 박정희가 주창한 “한국식 민주주의”를 연상시킨다. 박정희는 “서구 선진국과 우리는 역사적 배경과 토양이 다르므로 정치도 달라야 한다”며 한국의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없는 “한국식 민주주의”인 유신(維新)체제였다.

박근혜 씨의 “경제민주화”도 국제사회에서 통용이 될 수 없는 “한국식 경제민주화”다. 재벌의 소유구조 왜곡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태원 SK “회장”은 티끌만한 지분으로 공금을 가로챘고, 기업은 신종자본증권으로 – 역시 한국화된 – 회사의 자본상황을 윤색하려 하고 있다. 박근혜 식 “경제민주화”는 이 혼탁한 바다에 소금 한줌 뿌리는 짓이다.

한편 “노동자 대통령”을 표방하며 출마한 김소연 씨는 “재벌 재산을 몰수하여 사회화하고, 모든 주요 산업을 사회화하여 노동자와 민중이 통제”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몰수의 정당성, 현실성에 대해선 의문이 가지만, 적어도 “노동자와 민중의 통제”는 경제민주화 본래의 의미에 충실하다. 너무 거칠어 거부감이 들지 몰라도 사전적(!) 정의에는 충실하다.

‘자본주의가 소유권이 엄존하고 그걸 보호해주어야 유지되는 체제인데 그걸 부정하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 어느 현명한 철학자의 다음과 같은 생각을 들어보자. 우리가 주체적으로 당연하다 생각하는 생각들은 남의 생각이고 시대적 맥락을 가진 생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란 생각은 절대진리인가?

(러셀이 책을 저술할 당시인 1940년대 초반인 현대에는 많은 국가들이) 정치 권력의 세습이론을 거부하였음에도 이것이 민주 국가의 경제 제도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 우리는 여전히 부모의 재산을 자식들이 상속받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즉, 정치 권력의 세습은 거부하면서도 경제적 권력의 세습은 수용하는 것이다. 정치적 왕조는 사라졌으나 경제적 왕조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금 두 형태의 권력이 다르게 취급되는 행태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러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이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 사람이 삶을 통해 축적한 부를 다른 사람에게 상속할 수 있다는 견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여겨지는지를 고려해본다면, 로버트 필머 경과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왕권의 세습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로크의 혁신적 견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마도 (부의 세습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의 생각이) 미래에는 필머의 이론만큼이나 공상적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러셀의 서양철학사(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中, 재산의 상속에 대한 러셀의 견해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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