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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식인이 고안해낸 “한국적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비극적 결과

임방현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면서 한국 정부의 정책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다. 임방현은 1974년(1973년의 오기인 듯하다 – 편집자)에 출간된 <근대화와 지식인>이라는 저서에서 지식인이 담당해야 할 책임을 열거하면서 동시에 박정희 정권이 지식인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유신체제가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비판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중략] 그는 “산업화된 국가에서 추구하는 민주주의 논의의 핵심은 복지와 분배다. (…) 하지만 우리가 채택해야 할 민주주의는 소비가 아니라 효율, 분산이 아니라 조화다”라고 주장하였다.[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 나종남 옮김, 책과 함께, 2012, p304]

박정희 정권 하에서 권력과 지식인 간의 협력 및 긴장관계에 대해 서술하는 장면 중 일부다. 미국의 주류학계는 이 당시 남한에 이른바 근대화론을 이식하려 노력했는데, 이 이론의 고갱이는 “모든 사회를 근대사회와 전통사회로 구분한 후, 저개발 국가의 경우 전통적인 관행과 규범이 근대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합리적인 철학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 사회의 접촉을 통해 사회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이자 학자였던 임방현은 기자들을 뽑아 연구를 지원하는 니만 펠로십을 통해 하버드에서 공부하면서 위와 같은 생각을 발전시켰다. 즉, 서구사회의 근대화론은 받아들이되 어디까지나 현존 권력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독특하게 변형된 근대화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독재를 비판하는 쪽이나 옹호하는 쪽 모두 근대화론을 비판의 논거로 삼았다는 점이다. 물론 더 왼쪽으로 가면 다른 논리가 나오지만 말이다.

여하간 임방현은 당시 유신체제를 정당화할 논리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던 박 정권의 맘에 쏙 드는 개념, 즉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제공하였는데 근대화론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교묘히 비틀었기에 지식인 주류 사이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전파력을 지녔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이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임은 그 후 박 정권에서 특별보좌관으로 채택된 후, 공보수석비서관, 민정당 국회의원 등을 거친다.

그의 주장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산업화된 국가에서 추구하는 민주주의 논의의 핵심은 복지와 분배다.”라는 명제는 그가 이미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책무를 잘 간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용한 책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임방현이 지식인의 국정에의 참여를 고민하게 된 계기가 저명한 학자이자 스스로 국정에도 깊이 관여한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의 책을 읽고부터였다고 하는데, 앞서의 생각 역시 그의 생각에 따른 게 아닌가 싶다.

즉, 뮈르달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스웨덴 등 북구의 국가개입주의적 사회민주주의의 형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임방현은 이러한 그에게서 ‘지식인은 국가에 협력해야 한다’는 논리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역시 결정적인 부분에서 뮈르달의 생각을 비트는데 “소비가 아닌 효율, 분산이 아닌 조화”가 그 부분이다. 스웨덴식 분배는 남한에겐 사치란 소리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인용한 책의 논지가 미국이 제3세계에 자신의 체제를 이식하려 시도한 중 유일한 성공사례가 남한이라는 것이지만, 그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여전히 “복지와 분배”가 사치스러운 주문으로 남아있는 사회로 고착화되어 있다. “한국적 민주주의”가 형성한, 재벌위주/수출위주의 경제체제인 “박정희 체제”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딸이 나서서 그 체제를 바꿔보겠다고 하여 집권했지만 그 시야는 아직까진 뿌옇다.

지식인이 교묘히 비틀어놓은 근대화론이 의외로 이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인지도 모른다.

박정희의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에 관한 보론

특히 한국은 수출 증가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이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서 국내적으로 많은 반대가 예상되는 조치들을 취해야 했다. 미국은 우선 원화의 가치절하를 주장했다. 원화의 가치가 절하될 경우 한국 상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조언을 받아들여 원화의 가치를 1달러당 130원에서 256원으로 절하하는 환율 조정을 단행하자, 곧바로 격렬한 저항과 반대가 일어났다. [중략] 한 신문은 원화의 가치절하가 “가격 악순환의 소용돌이”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며, 일부 국회의원은 정부의 결정을 “완벽한 실수”라고 비난하면서 이 조치로 인해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략] 주한 미국 대사관은 “실제로 원화의 가치절하가 단행되면 전반적으로 국내 물가가 상승할 것이다. (…) 단기적으로 볼 때, 한국 정부는 미국이 추가로 지급할 식량 지원이 원화의 가치 절하가 실행되는 시점에 맞춰 진행될 것이라고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중략] 한국 정부의 환율 인상 조치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화의 가치절하만으로 저절로 수출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략]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 총독부가 실시하였던 정책과 미국의 경제 전문가가 권유하는 정책을 혼합하여 독특한 수출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일제 총독부가 추진하던 것과 유사하게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일부 특정 기업에게 세금 감면, 철도 수송 비용 감면, 은행 대출이자율 특혜 등의 혜택을 부여했던 것인데, 이 중에서도 은행 대출 이자율 감면 혜택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자율 감면 혜택을 받았던 기업 중에는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과 현대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기업들은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는 대가로 공화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 나종남 옮김, 책과함께, 2012년, pp245~247]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인용한 이 책의 독특한 지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일관된 기조는 대한민국이, 미국이 다른 나라에서 공산세력의 위협을 막고 자신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식하려 했던 많은 시도들 중 가장 성공적인 나라였다는 주장이고, 이를 위해 이승만 이후부터 1987년까지의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의 상호역학관계를 다루고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대한 전문가인 저자는 스스로도 자신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과 해석에 대해 “우파와 좌파 모두 불만을 표시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우파는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좌파는 미국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싫어할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책 내용은 그의 염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톤을 유지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거의 좌파적 시각의 글이라 여겨질 정도로 평가가 혹독하다. 미국의 원조를 경제개발에 힘쓰기 보다는 자신의 권력 강화에 몽땅 쏟아 부은 냉혹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대체재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독재를 용인하지만 지식인, 군인들에게 미국식 자유주의의 우월성을 전파하여 독재종식에 기여했다는 서술은 좌파의 구미에 맞지 않는 묘사다. 박정희로 가서는 그의 독재자로서의 모습과 열정적인 경제 지도자로서의 모습이 중첩적으로 서술된다. 그리고 인용문에도 그러한 이중적인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용문에 나온 원화의 가치절하 조치는 1964년의 조치다. 1961년의 쿠데타를 통해 출범한 신생정부는 잘 알다시피 미국의 정권에 대한 승인과 원조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정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적 원조뿐만 아니라 정치적, 정책적 지원에도 크게 기대고 있었다. 이러한 사유로 박정희는 집권 즉시 미국이 원하던 일본과의 재수교, 월남파병, 환율조정 등을 차근차근 실천해 나간다. 이 중 원화의 가치절하는 상기의 사유로 박 정권이 전면적으로 단행한 조치다. 지금 와서 보면 가치절하 이외에 다른 대안이 많지 않았기에 그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묘사된 정황만 보더라도 그 진행은 일방적이고 민중 수탈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번 글에서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가 박정희의 경제개발을 “인플레를 유발할 뿐 아니라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이라고 묘사했던 바, 위와 같은 조치는 그러한 경제개발의 일환이다. 즉,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인플레이션을 방기하는 차원을 넘어 조장한 것이다. 이승만이 원화 가치를 낮추라는 미국의 조언을 무시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는 수입품 가격을 앙등시키고 수출업자와 채무자에게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더 나아가 수출기업에게는 금리를 깎아주는 등의 특혜를 주었으니 삼성과 현대와 같은 기업으로서는 이중, 삼중의 특혜를 누린 셈이다.1 그리고 우리경제는 수출주도 경제 또는 “박정희 체제”를 공고화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인플레적인 경제개발” 정책

셋째로 인플레적인 경제개발이었다는 점이다. 인플레적인 경제개발이라 함은 경제개발이 인플레를 유발할 뿐 아니라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이라는 것이다. 돈을 찍어 내자를 공급함으로써 투자는 인플레를 유발하였다. 한편 인플레가 되면 채권자와 예금자는 손실을 보고 채무자와 대출받은 자는 득을 보게 되어 은행돈으로 공장을 세운 대기업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작용을 한 것이다. 그래서 경제개발과정에서 줄곧 높은 인플레가 지속되었는데 이것은 서민가계는 압박하고 기업은 혜택을 주는 작용을 한 것이다.[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박승, 한국일보사, 2010년, p135]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박승 씨의 회고록 중 일부다. 인용한 부분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개발정책의 특징을 정리한 내용 중 일부다. 박승 씨는 크게 네 가지 특징을 들었는데, 첫째, 개방체제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였다는 점, 둘째, 정부 주도적 성장이라는 점, 셋째, 인플레적인 경재개발이라는 점, 넷째, 불균형적인 성장이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요약한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은 첫째 정책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자유주의”적 경제개발 노선과는 많이 동떨어진 노선이다. 즉, 정부 주도 하에 산업별 혹은 지역별로 불균형적인 – 또는 불평등한 – 자원분배를 통해 경제성장을 유도하였는데, 이를 다시 고의적인 인플레를 통해 결과물도 재분배한 것이다.

오늘날 기업의 부채비율은 매우 낮다. 일례로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 중 164개사의 2012년 상반기 실적자료를 보면, 이들 기업의 부채비율은 135.05%였다. IMF외환위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업의 부채비율은 이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고, 그러한 부채비율은 기업에 대한 이른바 “특혜금융”을 통해 자금이 대출되고 유지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특혜금융은 한국, 대만,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모델”의 특징인, 국가의 금융적 통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과 대만은 국가가 은행을 직접 소유함으로써 그 통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채권자는 손해를 보는데, 채권자인 은행이 곧 국가이므로 이에 대한 거부감은 거시적 측면에서 완화될 것이었다.

물론 이런 고의적인 인플레이션을 통한 경제통제 내지는 경제조작은 아주 오래된 풍습이다. “인플레이션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권력층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인류의 역사는 또한 인플레이션의 역사이기도 했다. 역사상의 권력들은 수시로 자신이 진 빚을 탕감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방임 내지는 유발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무정부 상태를 통제하고 상호신용을 강화시키는 강한 수단 중 하나가 금본위제인 셈이다. 이마저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 오늘날은 허술한 달러본위제가 이어지고 있지만, 어찌 됐든 신생 남한의 군사정권은 과거의 역사를 교훈삼아, 개방경제를 취하면서도 인플레이션 유발을 통해 불균등한 자원배분을 유도한 것이다.

그 결과, 1960년대 한국 경제는 외자와 은행대출을 얻기만 하면 큰 이익이 되는 것이란 풍토가 만연했다. 은행대출에 관한 부정사건이 줄을 잇고, 대기업은 과다부채와 과잉투자로 인해 부실화로 이어졌다. 60년대 말 정부는 상황을 개선시키려 했으나 효과가 미약했다. 박정희는 1972년 8.3사채동결조치로 다시 기업의 부채를 탕감시켜줬다.

귤이 바다를 건너와 탱자가 된 또 하나의 사례, “경제민주화”

경제민주화는 의사결정의 권력을 기업의 주주에서 보다 공공의 지분소유자인, 노동자, 소비자, 공급자, 근린주구, 더 많은 이들 등 보다 큰 그룹으로의 이동을 제안하는 사회경제학적 철학이다.
Economic democracy is a socioeconomic philosophy that proposes to shift decision-making power from corporate shareholders to a larger group of public stakeholders that includes workers, customers, suppliers, neighbors and the broader public.[wikipedia.org]

경 제민주화는 경제조직의 단위들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또는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될 때 실현된다. – 최우선적인 이해관계가 단기적인 재정이득인 원격 주주들보다는,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조직과 공동체에 대한 진정 장기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에 의해서 소유되고 통제되는 것을 말한다.
Economic democracy exists when the units of economic organisations are owned and controlled by the people who work in them, and/or by those who use their services – people who have a genuine long-term interest in the organisations and the communities in which they operate rather than remote shareholders whose overriding interest is short-term financial gain.[equalitytrust.org.uk]

‘경제민주화’란 무엇인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개념의 정의는 명확하다. 바로 경제에 있어 의사결정의 주체를 소수의 손에서 다수의 손으로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가 재벌총수의 전횡, 단기적 이해의 주주자본주의를 포함한다면, 후자는 소비조합, 노동자의 경영참여, 이해자 자본주의, 기타 보다 급진적인 경제단위의 민주적 통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박근혜 씨가 처음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를 꺼냈을 때에는 우선 위와 같은 이 개념의 고갱이에 대해 고민하였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다. 본질이 “박정희 체제”의 적자인 그로서는 그와 같은 급진적인 사고를 차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경제관료 출신 김종인 씨의 영입이다.

김종인 씨는 전두환 前 대통령이 개헌을 할 적에 소위 “경제민주화 조항”이라 불리는 헌법 제119조 2항을 집어넣자고 건의하여 관철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그 주장이 진실인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그 조항이 이 경제적으로 극우적인 나라에서 “경제민주화 조항”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명성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 제119조의2.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원문 보기]

이 조항을 보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하는 주체가 “국가”다. 비록 그 규제와 조정의 목적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오랜 기간 국가주의의 통제에 의해 경제시스템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온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 주체를 국가로만 국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백번 양보하여도 “경제민주화”가 포괄하는 주체와는 동떨어져 있다.

한편, 왜 박근혜 씨가 이번 선거에서 이 개념을 선점하려 하였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실제로 경제체질의 개선에 관심을 가졌을 개연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밖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정책의 좌클릭을 통한 중도층의 흡수와 ‘근대화 세력 對 민주화 세력’이라는 구도를 깨뜨릴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란 분석을 해볼 수 있다.

그러한 포지셔닝이 현재까지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씨가 결국 경제민주화 정책이라고 내놓은 것들이 기존의 재벌개혁 공약에서도 한참 미진한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 오히려 주주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정도의 “경제민주화”와 전혀 상관없는 정책이지만 민주당은 이런 보수성에 동질화되어버려 이슈파이팅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어느 샌가 한국화(韓國化)되어버린 “경제민주화”는 박근혜 씨의 아버지 박정희가 주창한 “한국식 민주주의”를 연상시킨다. 박정희는 “서구 선진국과 우리는 역사적 배경과 토양이 다르므로 정치도 달라야 한다”며 한국의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없는 “한국식 민주주의”인 유신(維新)체제였다.

박근혜 씨의 “경제민주화”도 국제사회에서 통용이 될 수 없는 “한국식 경제민주화”다. 재벌의 소유구조 왜곡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태원 SK “회장”은 티끌만한 지분으로 공금을 가로챘고, 기업은 신종자본증권으로 – 역시 한국화된 – 회사의 자본상황을 윤색하려 하고 있다. 박근혜 식 “경제민주화”는 이 혼탁한 바다에 소금 한줌 뿌리는 짓이다.

한편 “노동자 대통령”을 표방하며 출마한 김소연 씨는 “재벌 재산을 몰수하여 사회화하고, 모든 주요 산업을 사회화하여 노동자와 민중이 통제”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몰수의 정당성, 현실성에 대해선 의문이 가지만, 적어도 “노동자와 민중의 통제”는 경제민주화 본래의 의미에 충실하다. 너무 거칠어 거부감이 들지 몰라도 사전적(!) 정의에는 충실하다.

‘자본주의가 소유권이 엄존하고 그걸 보호해주어야 유지되는 체제인데 그걸 부정하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 어느 현명한 철학자의 다음과 같은 생각을 들어보자. 우리가 주체적으로 당연하다 생각하는 생각들은 남의 생각이고 시대적 맥락을 가진 생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란 생각은 절대진리인가?

(러셀이 책을 저술할 당시인 1940년대 초반인 현대에는 많은 국가들이) 정치 권력의 세습이론을 거부하였음에도 이것이 민주 국가의 경제 제도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 우리는 여전히 부모의 재산을 자식들이 상속받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즉, 정치 권력의 세습은 거부하면서도 경제적 권력의 세습은 수용하는 것이다. 정치적 왕조는 사라졌으나 경제적 왕조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금 두 형태의 권력이 다르게 취급되는 행태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러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이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 사람이 삶을 통해 축적한 부를 다른 사람에게 상속할 수 있다는 견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여겨지는지를 고려해본다면, 로버트 필머 경과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왕권의 세습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로크의 혁신적 견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마도 (부의 세습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의 생각이) 미래에는 필머의 이론만큼이나 공상적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러셀의 서양철학사(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中, 재산의 상속에 대한 러셀의 견해에서 재인용]

읽어볼만한 또 다른 관련 글 “경제민주화라는 유령”(이정환닷컴)
An Alternative Model: Economic Democracy

용서받지 못한 자의 변명으로써의 예술의 효용성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 주연의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라는 영화가 있다. 부도노동자인 테리 멀로이(Terry Malloy; 말론 브랜도)가 항구의 부패한 노조의 끄나풀로 일하다가 양심과 사랑을 위해 불의에 맞선다는 내용으로, 강렬한 스토리텔링,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충격적인 사회적 메시지 등에 힘입어 미국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에 늘 꼽히는 작품이다.

한편 이 영화의 좀 더 깊은 속내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감독과 제작년도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이 영화를 감독한 이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에덴의 동쪽’ 등 작품성과 상업성 양쪽에서 최고의 영예를 얻은 엘리아 카잔(Elia Kazan)이다. 제작년도는 1954년이다. 감독과 제작년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감독이 그 이전인 1952년에 겪은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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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a Kazan” by Unknown – http://mythicalmonkey.blogspot.com.au/p/katie-bar-door-award-nominees-and.html.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엘리아 카잔

1952년 엘리아 카잔은 당시 미국사회를 광풍으로 몰아넣은 매카시즘의 진원지인 하원비미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HUAC)에 증인으로 참석해야 했다. 이 자리에서 카잔은 자신이 16년 전에 공산당 당원이었음을 밝힌다. 당시 동료들의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처음에는 거부하다, 결국 Group Theater의 멤버였던 공산주의자 여덟 명의 이름을 댄다.

이 일로 인해 카잔은 밀고자로 낙인찍힌다. 아마도 카잔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워터프론트’는 2년 후에 제작된다. 한편 흥미롭게도 영화의 아이디어는 원래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것이었지만 아서는 카잔의 배신을 비난하며 대본 집필을 거부하고, 그 작업은 카잔과 함께 HUAC에 협조했던 버드 슐버그(Budd Schulberg)가 맡게 되었다.

영화 줄거리를 보자. 항구의 부패한 노조는 그들의 방해자를 살인도 불사하며 제거한다. 멋모르고 동참했던 테리는 차차 사건의 실상을 알고 갈등한다. 노조가 간부였던 친형마저 죽이자 마침내 청문회에 나가 진실을 증언한다. 이로 인해 밀고자로 욕을 먹지만 노조 위원장 자니 프렌들리(Johnny Friendly)와 담판을 지으며 영웅으로 거듭난다. 뭔가 이야기가 겹치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명백히 카잔 자신의 심정을 테리에게 투영한 것이다. 자니는 어쩌면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아서를 설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카잔은 자서전 ‘인생(A Life)’에서 ‘워터프론트’가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석권한 날 “복수의 달콤한 맛을 봤고, 나를 비판하는 놈들이 처박혀서 엿을 먹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큰 소리로 외쳐대는 기분”이었다고 썼다. 통쾌한 복수극인 셈이다.

이 때문에 영화가 비판받기도 했다. 몇몇 평론가들은 결국 좌익을 범죄자로 치부하는 반공영화였다고 비판하거나, 영화를 자기 변호수단으로 쓴 사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평론가 수잔 손택(Susan Sontag)이라면 카잔을 옹호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예술작품은 그것이 예술작품인 한 어떤 것도 옹호하지 않는다. 위대한 예술가는 숭고한 중립성을 획득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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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Waterfront poster” by http://www.movieposterdb.com/poster/84aa1bc0. Licensed under Wikipedia.

이 반공영화스러운 포스터를 보라~

평론가도 아니고 영화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가 무엇이건 간에 감상자에게 전해지는 그 쾌감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예술작품이 반인륜적일 경우에도 보존할 가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묘한 문제는 그것이 가지는 영향력이 현실세계에 막강할 경우에 발생할 것이다.

한편, 여기 다른 영화가 있다. ‘굿나잇 앤 굿럭(Good Night, and Good Luck)’. 2005년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가 감독한 이 영화는 카잔과 아서가 반목했던, 조지프 맥카시(Joseph McCarthy) 의원이 활개 쳤던 당시를 그리고 있다. 맥카시즘의 공포 분위기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시절, 용기 있게 맞선 CBS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R. Murrow)에 관한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에드워드는 동료 프레드 프렌들리(Fred Friendly; 조지 클루니)와 함께 ‘사람 대 사람’이라는 쇼를 통해 맥카시즘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들이 옹호했던 것은 공산주의나 “사상의 자유”라기보다는, 한 개인을 단죄할 때에는 정해진 절차와 증거에 근거해야 한다는 인권적 차원에서의 저항이었다. 우리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발상이다.

에드워드 머로우의 실제 방송 장면

이 영화를 ‘워터프론트’와 함께 놓고 보면 흥미롭다. ‘워터프론트’의 영웅은 테리 – 청문회에서 용감히 공산주의자를 고발한 카잔 – 이고, ‘굿나잇 앤 굿럭’에서는 공산주의자 사냥에 나선 맥카시에 대항한 에드워드다. ‘워터프론트’에서의 악의 세력은 카잔을 밀고자라 비난한 항구의 노동자들인데, 에드워드는 거꾸로 그들이 정당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워터프론트’를 네거티브 필름처럼 색깔을 바꾸어 볼 때 두 영화는 잘 포개진다. 악당 자니가 맥카시, 테리가 맥카시에 저항한 에드워드일 경우 두 영화의 영웅주의는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둘 간의 가치를 전복한 것이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있어서, 적어도 현재까지의 역사의 평가에 따르면 조지 클루니 보다는 엘리아 카잔이라는 점에서 큰 이의는 없을 것이다.

‘워터프론트’에서의 악인들은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현실에서의 악인들은 – 몇몇은 간첩행위로 고발당했음에도 – 그렇지도 않았는데 정당한 절차 없이 단죄 받았던 것이 차이다. 불의(不義)에 맞서는 행위가 용기 있는 행위임은 두 말할 나위 없지만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청문회에 가서 공산주의자라 고발하는 행위가 불의에 맞선 행위라 칭해지긴 곤란한 일이다.

앞서 말한 ‘현실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문제’에 대해 말해보자. 이 이슈는 세기말까지 헐리우드를 짓누르는 민감한 주제였고 어쩌면 여전히 그렇다. 체제순응적인 아카데미조차 한참을 머뭇거리다 1999년에야 엘리야 카잔에게 평생공로상을 준 것이 그 반증일 것이다. 당시 배우들의 반응도 다른 공로상과는 달리 엇갈렸다. 어떤 이는 기립박수를, 어떤 이는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엘리아 카잔의 아카데미상 수상 장면

당시 워렌 비티와 메릴 스트립 등은 기립박수로 환영했지만, 에드 해리스와 닉 놀테 등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그 후 서로의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더 중요한 점은 조지 클루니 등이 여전히 당시를 소재로 영화로 만들만큼 미국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 그리고 반대 측에서는 부지런히 당시 고발당한 이의 간첩행위를 들추어내고 있고.

우리 역사에도 엘리아 카잔과 비슷한 행동을 한 이가 있다. 남로당 당원으로 몸담았다가 동료를 고발하고, 결국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그다. 박정희가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엘리아 카잔이 미국사회에 미친 영향보다 훨씬 크고, 스토리는 ‘워터프론트’보다 훨씬 방대하다. 그 여파는 이번 대선까지 미치고 있다. 거기에다 그 스토리에는 비극적이게도 ‘워터프론트’와 같은 예술도 없다.

예술을 자기변명의 도구로 쓴 엘리아 카잔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누구 덕에 잘 살게 되었을까?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은 흔히 “누구 덕에 이렇게 잘 살게 된 줄 아느냐?”라는 호통을 치며 박정희의 “영도력”을 내세우곤 한다. 그 “영도력”은 가난한 신생국이 주기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대의민주제를 곧바로 수용하기 보다는, 독재나 변칙적인 대의민주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곧잘 사용하는 표현이다.

현시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가 그 “영도력”을 통해 경제개발에 성공한 소수의 나라 중 하나기에, 우익들은 스스로를 “민주화 세력”에 대비되는 “근대화 세력”이라 포장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런데 한 주체가 근대화되고자 한다면 필요한 요소가 단순히 “영도력”만은 아니고, 생산을 할 뭔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주류 경제학에서 드는 3대 생산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자본이었다. 자금조달난을 겪던 군사정부는 화폐개혁을 통해 內資를 끌어내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외자유치 전략이었지만 이 역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 어렵사리 외자유치에 성공한 사례를 살펴보자.

박정희 정부는 미국 등 외국에서 경제개발에 필요한 돈을 빌리려 애를 썼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끈질긴 노력 끝에 1961년 서독으로부터 1억5,000만 마르크(약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약속받는 데 성공했다. [중략] “서독은 지급보증을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최빈국 한국에 보증을 서줄 수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때 군사정부는 서독이 필요로 하는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는 묘안을 찾아내면서 이들의 3년간의 노동력과 노임을 담보로 서독은행에서 지급보증을 받아냄으로써 드디어 1962년 10월 서독으로부터 최초로 차관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백영훈,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 김흥기, 1999, pp 72~73, 장미영/최명원, 2006, p244, 재경회/예우회 엮음, 한국조세연구원 기획, 한국의 재정 60년 건전재정의 길, 매일경제신문사, 2011년, p86에서 재인용]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우리 군의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가 먼저 미국정부에 제의하여 이루어졌다. 5.16 쿠데타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지지와 지원을 필요로했던 박정희는 1961년 11월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였고, 방미일정중에 케네디 행정부와의 비공개회의를 통해 최초로 파병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종필 공화당의장도 1962년 2월 베트남을 방문하여 파병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중략] 박정희 정부에게 있어서 베트남파병은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대신, 경제적 대가를 챙기는 일종의 거래와도 같은 것이었다. 베트남 참전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전쟁특수를 누렸고 수출을 늘렸는가 하면, 미국의 차관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파병 뒤에는 언제나 미국이 있었다’미국 결정’ 마감, 국민의사 물어야]

드디어 1969년 12월 韓日간에 종합제철에 관한 기본협약이 체결되어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韓日 국교정상화 때 양국간에 합의된 청구권 및 對韓차관 공여액은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3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으로서 무상 및 유상자금 각 3억 달러에 대해서는 항일독립유공자보상, 對日민간청구권보상, 평화선철폐에 따른 어민보상 등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다. 朴대통령은 국민적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을 각오하면서 낭비보다는 건설이라는 견지에서 종합제철건설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pp138~139]

이 사례들은 각각이 당시 경제개발의 주요국면에서 매우 요긴하게 자금을 조달한 사례랄 수 있다. 이들 자금을 종자돈으로 해서 남한은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는 공업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생산요소 중 노동력을 수출하거나 착취하는 박정희의 “영도력”이다.

이런 “영도력”이 물론 박정희만의 독특한 “영도력”은 아니다.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노동력 수출을 통해 자본을 조달해왔고 여전히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노동자, 군인,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민간피해자들 역시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 희생을 제공했고, 또 이를 통해 이른바 “조국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즉, 처음 사례는 상업차관의 지급보증을 노동력으로 제공했다는 점에서 우리 노동자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거래였다. 두 번째 사례는 인과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기엔 문제가 있지만 파병이 전쟁특수의 상당한 개연성을 제공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마지막 사례 역시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이는 공개된 정부자료에 의해서도 증명됐다.

“영도력”과 노동 중에 어느 요소가 경제발전의 공과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느냐를 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박정희의 영도력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역사적 가정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다만 국민들이 제공한 노동에 – 심지어 강탈당한 對日 청구자금 – 대해서도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유무상 자금 5억 달러는 1966년부터 10년간 연차적으로 전액 차질없이 도입됐다. 청구권 자금은 포항종합제철공장 건설에 23.9%, 기타 원자재도입에 26.5%가 각각 투입됐다. 또 소양강다목적댐 건설에 4.4%,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1.4%(689만 달러)가 투입되는 등 광공업을 비롯한 기간산업 시설건설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중략] 1973년까지 8년간 모두 31만 2,000명의 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했다. 이 기간 동안 월남파병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 외화는 1966~1970년 5년간 총 6억2,501만 달러에 달했다. [재경회/예우회 엮음, 한국조세연구원 기획, 한국의 재정 60년 건전재정의 길, 매일경제신문사, 2011년, p88]

“누구 덕에 이렇게 잘 살게 된 줄 아느냐?”고 누가 물으면 “국민”이라고 대답하면 된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박정희 체제”의 종식

재벌의 모순은 급속한 경제개발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50년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남한은 한정된 자원에서 어려운 선택을 했던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풍요를 일구어냈다. 정부는 특정 기업들을 선정하여 업계를 주도해나가도록 했고, 승자가 되게끔 판정했으며, 그들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때까지 경쟁으로부터 보호했다.
[중략]
오늘날,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 남한의 1,800개 상장기업 중 1,600개 정도가 55개 대기업 집단에 속해 있다. 그리고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08년에서 2011년까지 상위 10개의 재벌의 매출이 이 나라의 GDP의 70%를 차지한다.
[중략]
현대 그룹의 건설부문 CEO였던 이명박 대통령은 2007년 대선 전에 “비즈니스 프렌들리” 공약을 내세웠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대기업이 정부의 허가 없이 토지를 매입할 수 있게 했고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투자제한을 철폐했다. 그가 집권한 4년 동안, 상위 10개 대기업의 매출은 연평균 13% 증가했는데, 전임자 노무현 대통령 때에는 연 3%였다.[South Korea Pushes to Curb Conglomerates]

한정된 자원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박정희나 그의 후임자들이 택한 전략은 월스트리트저널의 이 기사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정권이 선택한 기업들을 보호하는 전략이었다. 일종의 유치산업(幼稚産業)을 보호하는 전략이었거니와, 더불어 유치기업까지 보호한 셈이다. 정부의 비호 아래서 재벌들은 순환출자 등을 통해 소수의 지분으로 많은 계열사를 거느리며 국내 상장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거의 모든 업종에 그들의 영업망을 걸쳐놓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왜곡된 경제 시스템을 창출한 독재자의 딸이 이제 그러한 시스템을 개혁하겠다며 “경제민주화”라는 이슈를 선점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형식적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그 정책공약은 미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던 바로 그 정당의 후보로서 재벌개혁을 선거의 이슈로 내놓았다는 점에서 경제에 대한 관념이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스탠스로 옮겨졌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문재인 씨와 안철수 씨가 더 강경한 노선으로 옮겨진 것인가에 대해선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문재인 씨의 대기업 관련 공약은 ‘중소기업 적합업종 보호법’ 제정, 공정한 거래질서 확립,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 공시제도, 순환출자 금지 등이 있지만 보다 구조적인 공약은 내놓지 않았다. 안철수 씨의 공약은 아직 특별한 것이 없다. 요컨대 그들의 생각도 급진적이지는 않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건전한 시장경제”정도다.

급진적이지 않으면 왜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것은 재벌 개혁이 대선후보들의 가장 핵심적인 공약인 “일자리 창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WSJ의 보도에 따르면 상장기업과 GDP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들 기업이 전체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에 불과하다. 대기업 고용이 장래에 급격하게 늘어날 개연성이 적은 지금, 중소기업 업종 보호와 같은 소극적인 정책은 일자리 창출, 이를 통한 내수 활성화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재벌 체제하에서 경쟁력을 키워온 전자, 자동차, 철강과 같은 업종이 전후방 연계효과로 고용을 창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동차에서 보듯이 그 고용은 파견직, 비정규직과 같은 질 낮은 일자리로 채우고 있다. 저임금 노동력 사용으로 인한 비용절감분은 주주에게 돌아간다. 골목상권의 진입은 또한 자영업자의 한계이익을 감소시켜 고용을 비례적으로 감소시킨다. 이러한 순환구조 속에서 소득 및 자산의 양극화가 극대화되고 있다.

이헌재 씨는 그의 저서 “위기를 쏘다”에서 박정희 이후 모든 정부는 경제적으로 “박정희 체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발언한다. 이후 “민주정부”가 민주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와 사회분야에 국한된 것이고, ‘재벌 특혜, 수출 중심’의 “박정희 체제”는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일 것이고 나도 이에 동의한다.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도로 민주정부”를 원하는 여론도 우려스럽다. 정말 그 정도면 족한가? 재벌이 건재한 “민주화된 건전한 시장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