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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노동의 유연화’ 대상이 될 경영 컨설팅 업계

요즘 프로젝트 규모가 작고 예산도 작은 기업들을 위해 간단한 해결책이 생겼다. 바로 경영대학원(MBA)생을 임시 고용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중략]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생 3 명이 창업하고 투자자 마크 쿠반이 투자한 ‘아우어리너드’는 2,700 명 이상의 일류 경영대학원 출신 MBA 컨설턴트를 확보했고, 지난 9월에 서비스를 선보인 이후 약 150 건의 프로젝트를 중개했다. [중략] ‘빅 3’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 배인앤컴퍼니, BCG는 견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여전히 많은 경영대학원생들이 선호하는 직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규모 프로젝트를 위해 MBA 프리랜서를 찾는 다국적 대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앞으로 상황이 변화할 수도 있다. [중략] 사모펀드인 ‘SFW캐피털파트너스’는 작년 가을 또 다른 MBA 중개업체인 ‘스킬브리지’를 통해 자사가 투자 기회를 평가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창출할 수 있는 적임자를 찾았다. 펜실베니아대의 와튼 경영대학원 재학생이 완료한 이 프로젝트는 약 30 시간이 걸렸고 비용은 5,000 달러 정도가 소요됐다.[전통적 컨설팅 모델 막 내리나, MBA 출신 임시 고용 증가 추세]

WSJ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소개한다. 전통적으로 최고급의 컨설팅 서비스로 간주되었고 그에 상응하게 높은 수수료를 받아 경영대학원 졸업생이 선호하는 직종이었던 경영 컨설팅 서비스 업계에 새로운 트렌드가 조성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요약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랜 전통과 권위를 지니고 있던 맥킨지 등의 경영컨설팅사가 여전히 건재하지만, 그들의 높은 수임료가 부담이 되거나 또는 컨설팅 범위가 그리 크지 않은 기업들이 이른바 중개업체를 통한 프리랜서의 활용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즈니스 세계에서의 최상층 노동 단위에서조차 이른바 ‘노동의 유연화’나 ‘다품종 소량생산’ 등으로 대표되는 탈(脫)포디즘적 경향이 강화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각해보건데 이러한 경향은 크게 두 가지 구조적인 배경을 통해 강화될 것으로 짐작된다. 첫째, 젊은 MBA졸업생에게는 이전과 같은 쉬운 구직의 기회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덜 숙련된 노동이지만 보다 싼 비용으로 프리랜서 활동을 하는 것을 수용한다. 둘째, 대개의 유연적 노동이 그러하듯 기술발전이 중개비용을 감소시켜 시장성이 높아진다.

과문하여 아직 우리나라에서 저러한 경영 컨설팅 업체가 등장하였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앞서 말한 첫 번째 조건이 이미 사회적으로 성숙했다는 것은 개인적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변호사, 회계사 등 고도 성장기에 각광받아 왔던 “고급 컨설팅 업종”의 수임료는 상당히 낮아지고 있다. 명함에 핸드폰 번호를 적지 않던 변호사의 명함에 핸드폰 번호가 적힌 지는 이미 꽤 오래 됐다. 새로 배출되는 변호사, 회계사, MBA 졸업생들은 간신히 취직을 하더라도 상후하박(上厚下薄)의 조직에 머물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어제 쓴 글에서 강남의 학부모들이 SKY 진학을 ‘사람구실하며 살기 위한 출발점’으로 여길 것이라 했는데 그 합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제 전통적인 쁘띠부르주아 계급으로 여겨지던 직종에서조차 그들의 자존심과는 무관하게 노동의 유연화와 더 낮은 임금을 강요받는 사회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경영 컨설팅 업체가 대기업 제조공장에서의 “경직적인” 노동인력의 “비효율성”을 비판하여 요구하였을 “유연화”를 통한 탈(脫)포디즘적 전략은, 이제 스스로의 작업장에게도 적용되는 현실이 된 셈이다.

노동자는 아직도 시민권이 없다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솔직히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분노와 투쟁의지보다는 무력감이다. 아주 옛날 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이래 수많은 이들이 산업현장에서, 그리고 스스로 몸을 살라 사라져 갔지만 시간은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여전히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목숨을 끊어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고 정해진 씨는 한국전력공사 인천사업본부로부터 수주 받아 배전 업무를 하는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였다. 그가 요구한 사항은 어처구니없게도 △주 44시간 노동 △토요 격주 휴무 보장 등의 근로조건 개선 내용이 들어가 있는 단체협약 체결이었다. 그런데 협력업체들로부터 단협 체결권을 위임받은 대성건설 유해성 사장은 기본적으로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주의자였다. 그러니 노동자는 40년 전에 외치던 구호를 다시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태일 시절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일까?

(역설적이지만) 변화는 있다. 전태일은 청계천 ‘하꼬방’에서 일하던 노동자라면 정해진 씨는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정해진 씨는 속된 말로 전태일 시절에는 없던 ‘비정규직’ 노동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즉 정해진 씨는 꼬박 꼬박 한국전력공사를 위해 일하고 있으면서도 한전의 노동자로 취급받지 못하는 아웃소싱 업체에서 항시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노동자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쩌면 법적지위로 보자면 전태일 열사보다 더 비참한 지경이 된 것이다. 한전을 위해 일하면서도 한전 노동자라 불리지 않고 그마저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날품팔이 신세가 바로 정해진 씨가 처해 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44시간 노동이라는 정말 상식적인 요구에 목말라 할 정도로 상황은 비참했던 것이다. 민주노조가 생긴 이래 가까스로 조심스럽게 가꾸어오던 ‘노동자의 시민권’이 비참하게 내동댕이쳐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한전 측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공사가 바로 이 정부가 만들어준 비정규직 법안의 방패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 예전에는 노동자들이 들이밀 목표라도 있었다. ‘A가 나를 고용하여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못하면 나는 A에게 항의한다’라는 단순논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복잡해진 고용구조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관련법규로 인해 노동자는 멀쩡히 눈앞에 보이는 A가 아닌 또 다른 신기루를 향해 들이받아야 한다. 그 신기루가 바로 시대착오적인 협력업체 사장님들이시다.

오늘자 동아일보 사설 <‘법대로 세상’을 위한 불법 파업 배상 판결> 에서는 “직권 중재를 무시하고 불법 파업”을 했던 철도노조에 대한 51억 원 배상 판결을 법치주의의 기본을 지킨 판결이라고 칭송했다. “직권 중재”라는 것에 대한 계급 차별적 성격은 둘째로 치고라도 노동이 뭇매를 맞아야 기사에 올리는 저 메이저 언론의 행태가 가증스럽다. 그들은 100일을 훌쩍 넘기고 있는 이랜드/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도 거의 같은 기간 동안 파업하고 있는 바로 이들 한전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려온 적이 없다. 정해진 씨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들 노동자들이 업무방해죄로 대규모 배상판결이라도 받아야 사설에 실릴 것이다.

21세기 남한 땅에서 노동자는 아직도 시민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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