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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고 있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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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22>를 재밌게 읽고 있는데 작품을 처음 대한 것은 영화다. 이제 와서 원작을 읽어보니 원작보다 훨씬 단순한 내러티브였지만 – 그럼에도 여전히 복잡한 -특유의 모순어법 유머는 여전하다. 1970년 작품이니 동 시대 M.A.S.H.와 함께 이른바 반전 영화 장르로 분류되지만 개인적으로는 M.A.S.H.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 다음으로는 영어, 즉 원어소설로 읽게 되었다. 새로 산 스마트폰에 텍스트 파일을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깐 뒤, 인터넷 공유사이트에서 얻은 텍스트파일을 출퇴근길에 읽는 재미가 솔솔 하였다. 하지만 지금 한글로 읽어도 어려운 글을 영어로 읽으려니 머리가 지끈거려 결국 번역본을 구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조종사로 복무했던 조셉 헬러의 반자전적인 소설이다. 지독한 냉소로 참전군인들과 전쟁의 광기를 비웃고 있지만, 단순한 반전(反戰)이라는 주제를 뛰어넘은 인간들의 세상 자체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라는 이벤트 때문에 한 자리에 모인 이 인간들은 – 미치광이, 편집증 환자, 인디언, 탐욕스러운 의사, 영문도 모르고 소령이 된 소심증 환자 등등 – 저마다의 희한한 삶을 살아왔고 전쟁이 끝나면 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그러한 삶을 계속 살아갈 인간군상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런 기기묘묘한 삶의 엑기스를 뽑아내 그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추출제일 뿐이다.

소설의 최대의 매력은 시종일관 그치지 않는 모순어법이다. 잘 알려진바 대로 <캐치22>라는 제목 자체가 이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그 모순어법의 대표적 사례다. 소설의 주인공 요사리안은 자신이 미쳤다며 의사인 다니카에게 전투기 출격임무에서 빼달라고 하소연하지만 다니카의 말인즉슨, 미친 군인은 임무에서 빼주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 군인이 자신에게 그걸 요청해야 하고 그 요청을 하는 순간 그 군인이 미쳤다고 보기 어렵다는 상황을 설명해주는데 그 규정이 바로 소설에서 말하는 <캐치22>다. 마치 헤어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놓여있는 개미의 처지와 같다. 소설은 시종일관 등장인물을 이러한 상황에 배치시킨다.

인간은 누구나 <캐치22>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모순된 상황에 처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요즘, 그나마 가장 그러한 상황을 뚫고 전진했던 한 인물의 전기를 함께 읽고 있는데, 아이작 도이처가 쓴 <트로츠키>다. 그에 관한 가장 빼어난 전기로 알려진 이 책은 유려한 문체, 치밀한 상황 압축, 철저한 고증,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명료한 이해력이 잘 어우러져 지루함이 없이 술술 읽히는 책이다. 이 책은 또한 통상적인 전기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주인공에 대한 미화(美化)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트로츠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곳곳에 배어 나옴은 어쩔 수가 없지만 그러한 순간에도 객관성을 잃지 않는다.

작가의 그런 객관적 시각을 통해 알 수 있는 트로츠키의 모습은 자본주의 극복을 꿈꾸면서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를 바라는 러시아 인텔리겐차 정치집단의 상황, 즉 꿈꾸는 세상을 위해 악몽이 더욱 커지길 바랄 수밖에 없는 모순된 상황만큼이나 모순적인 모습이다. 부유한 유태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소부르주아적 사고에 젖어 소년기를 보내지만 나로드니키로 전향한 이후 맑스주의자, 멘세비키, 마침내 레닌의 정치적 동지로 이어지는 그 삶은 정반합의 변증법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극적이기 때문이다. 글 자체도 좋지만 등장인물 자체가 너무 매력적인 캐릭터인 셈이다.

모순된 세상에서 모순된 인간으로 살아간 트로츠키의 처세술은 뛰어난 지식 습득능력과 진화능력이었다. 머리에 별로 든게 없어도 엄청난 언변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던 트로츠키는 그 논쟁을 하면서 어느새 상대의 핵심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드래곤볼에 이런 괴물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퇴행적인 나로드니키에서 빠른 시간 내에 혁명의 주도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동지들로부터는 변절자로 낙인찍히겠지만 결국은 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궤도를 신축적으로 수정하였다는 점에서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사리안은 전투기 출격임무에서 빠지고 싶어 아등바등하지만 뫼비우스 띠 위에 놓인 개미처럼 불평을 털어놓으면서도 그 길을 계속 걸어 다닐 뿐이다. 아직 내가 읽은 부분까지 에서는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외부로 시각을 돌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 반면 트로츠키는 약삭빠르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과감히 깨부수어 나가곤 했다. 심지어는 가장 신랄한 언어로 모욕하고 조소를 퍼부었던 – 그의 독설은 그 진영에서조차 심하다 할 정도였다 한다 – 적진에 뛰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향점이 불투명한 이와 명쾌한 이의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당신은 어떤 인간형인가?

잡담

– RSS를 다시 전체공개로 돌려놨다. 내 블로그는 희한하게 하루 방문자수보다 RSS구독자 수가 많다. RSS는 대략 1600명 정도 되는데 방문자는 1000명 정도? 어떤 뜻일까? ‘구독할만한 가치가 있는 블로그야’? 아니면 ‘굳이 방문해가며 읽을만한 글은 아니야’? 🙂 어쨌든 흔치 않은 경우일 것 같은데 RSS를 부분공개로 돌리니 방문자는 한 10% 정도 느는 것 같다. 여하튼 호기심은 급격히 감퇴해 그냥 전체공개로 회귀.

– 회사의 노트북에서 익스플로러를 열면 먹통이 된다. 이제 익스플로러를 쓰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 것인지?

– ‘호밀밭의 파수꾼’ 독서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데 Holden이 그가 좋아하던 옛 은사에게 성희롱 당하는 장면으로 다가가고 있다. 예전에 이 부분을 읽었을 때 Holden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불쾌한 기억을 지니고 있기에 이 부분을 건너뛸지 말지 고민을 하고 있다.

토양이님 덕분에 몇 년 동안 찾아 헤매던 책을 구하게 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가 쓴 범죄소설 분석서라는 독특한 영역인데 ‘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delighted murder)’이라는 책이다. 내가 이 책을 못 찾은 이유는 저자를 또 다른 트로츠키주의자인 ‘미쉘 뢰비’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토양이님 감사합니다.

– 아내가 ‘심야식당’이라는 만화를 두 권 사왔는데 밤 12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여는 어느 식당의 풍경을 담백하게 그려낸 만화다. 주인장이 하는 짓이나 외모가 꼭 배철수를 닮았다. 소위 ‘음식 만화’ 장르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 Thomas Harris의 ‘양들의 침묵’을 책으로 읽었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 영화보다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장면, 특히 Hannibal Lecter 역을 맡은 Anthony Hopkins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그만큼 그가 없는 ‘양들의 침묵’은 생각하기 어려우리라. 덕분에 이 소설의 전작인 – 영화제작으로는 나중에 만들어졌지만 – Red Dragon을 영화로 감상하고 지금은 소설로 읽고 있는 중이다. Thomas Harris 이 양반 은둔자적 스타일이나 여러모로 참 독특한 사람 같다.

미네르바 현상

미네르바 현상.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것은 일종의 가면놀이다. 부르스 웨인이 가면을 쓰고 배트맨이라는 수퍼히어로가 되는 이유는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목적도 있겠지만(?) 가면 쓰고 정체를 감추면 부르스 웨인이라는 자연인으로는 할 수 없는 사회적 일탈을 즐길 수 있다는 매력도 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이를테면 다음 아고라의 배트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계인사라는 설도 있고, 심지어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이라는 설도 있지만 여하간에 그 자신이 평소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는 그렇게 과격한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기에 ‘미네르바’라는 필명을 벗 삼아 가면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인터넷에서 아예 실명을 걸고 실생활과 온라인을 일치시켜 활동하는 이들도 있지만 또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이와 같은 이중적 캐릭터로 – 반드시 행동이 이중적이지는 않더라도 – 활동하고 있다. 굳이 인터넷 시대에만 해당되지 않는 것이 많은 유명인 들은 – 특히 반사회적 활동을 하던 –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수단으로 필명을 활용하였다. 레닌이니 트로츠키니 하는 이름들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필명이었고, 우리사회에서도 어두운 시절 사회과학 도서를 필명으로 썼고,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다산 스위프트 역시 당시 권력층의 화폐 장난질을 비판하는 글은 필명으로 써야만 했다.

배트맨이 꼭 영웅으로 대접받은 것도 아니다. 많은 이들은 – 특히 권력층 – 이 안티히어로적 행태에 불만을 느꼈고 비겁하다는 비난도 했다. 미네르바도 우리나라의 만화 같은 권력층으로부터 동일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실명 걸고 주식사면 오른다고 유언비어 유포하는 이장로 님은 멀쩡하지만 필명 걸고 주식 폭락한다고 유언비어 유포한 미네르바는 체포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안티히어로의 필연적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또 그런 순교자적 이미지에 매달린다. 어느 주장이 옳은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척점의 캐릭터가 상징하고 있는 현실이 드라마틱하기에 더욱 주목을 받게 되는 상황이다.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는 이가 성공하면 디벨로퍼고 실패하면 양아치라는 말이 있다. 안티히어로도 비슷한 길을 걸을 것이다. 그의 예측이 성공하면 혁명가이고 실패하면 역적이 될 것이다. 나는 그의 예측이 맞기를 기대하지도 않지만 그가 역적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없다. 다만 우리나라가 너무 많은 미네르바가 설치는 고담시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