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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사태 관련 트윗 모음

# 사실 미국에서 자라 교육받으며 미국식 경영마인드를 골수까지 장착한 Bom Kim(a.k.a 김범석) 씨는 지금 상황이 매우 기이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비즈니스는 정확히 아마존이나 우버의 그것과 같은데 왜 한국인은 미국인과 달리 불매를 외치고 있을까 하고 말이다.

# 그만큼 사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는 기술, 유통, 금융이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의 – 야니스 바루파키스라는 학자는 “기술봉건주의“라 명명한 – 시대를 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여태의 노동-자본 관계를 붕괴시킨 새로운 착취의 – 고도의 기술적 착취 – 시대로 접어든 정황이 있다.

# 팬더믹 상황에서 기술봉건주의의 영주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각국 정부는 그들의 노동착취를 통제하기는커녕 소득세조차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는 시도가 G7에서의 최저 글로벌 법인세율. 그야말로 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인터내셔널이라도 조직해야 할 판.

# 어쩌면 이것이 여태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각자도생과 약육강식을 당연시하는 자본의 “공정함”. 법과 제도가 – 친자본이거나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 허락하면 어떠한 비인간적 착취도 당연하다는, “능력주의”로 인종 차별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포퓰리즘과 결합하면 거칠 것이 없는 이들

# 주52시간 근무제? 노동자를 노동자라 칭하지 않으면 된다.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우선 법을 솜사탕법으로 무력화시키고 찝찝하면 법적 책임을 질 자리에서 물러나면 된다. 노동착취의 방법? AI와 빅데이터를 통해서 노동자를 마이크로 단위로 닦달하면 된다. 영업적자? 크게 키워 엑시트하면 된다.

# 엑시트에 대해 : 舊자본과 新자본의 차이는 구자본은 영업흑자를 만든 후 사세를 키워나가는 방식을 주로 택했다면, 신자본은 일단 사세를 키워 플랫폼을 독점한 후 돈을 벌겠다는 식. 이게 가능한 건 그 기간을 버티게 해줄 자금투입이 가능한 금융시장 구조.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인 시대인 것이다.

# 뉴욕증시 상장 당시 앵커는 ‘흑자전환’ 시기에 대해 물었으나 김 의장은 “장기투자자들과 함께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 국내 이커머스 시장 점유율 2위생산자 쥐어짜기와 노동착취로 유지되는 만큼 이용자 이탈은 장기적으로 호구 짓을 해줄 투자자를 끌어모으는데 가장 큰 장애물. 불매가 답

“時間의 主人”은 누구인가?

그보다도 더 큰 이익은 노동자 자신의 시간과 고용주의 시간 사이에 드디어 명백한 구별이 생겼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이제 자기가 판매하는 시간이 언제 끝나고 언제부터 자기 자신의 시간이 시작되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을 미리부터 정확히 알고 있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시간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미리 배정할 수 있게 된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59년 10월 31일, p52) 그것(공장법)은 노동자들을 자기 자신의 時間의 主人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그들을 정치적 권력의 궁극적 장악으로 향하게끔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그들에게 부여하였다.(같은 보고서 p47)[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384]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정해놓고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時間의 主人”이라 칭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공장감독관으로서는 – 특히 노동자에게 온정적이었을 공장감독관이라면 더욱 – 자못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에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영국 사회는 19세기 중반 당시 가장 선진화되었던 자본주의 시스템이었으니 이미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과 갈등이 표출되었고 결국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치열한 내전(內戰)의 결과로 노동자는 ’10시간 노동법’이나 ‘아동노동 금지’라는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時間의 主人”으로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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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ino Antero Bergius – <a rel=”nofollow” class=”external free” href=”http://www.uta.fi/koskivoimaa/tyo/1900-18/index.htm”>http://www.uta.fi/koskivoimaa/tyo/1900-18/index.htm</a>, Public Domain, Link

앞서 말했듯이 노동시간의 규제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개혁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부수적 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자본가는 이전의 가내 수공업 중심의 상품생산 시스템을 대규모로 지어진 건물 내에서의 기술집약적인 프로세스로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 발달로 대규모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1 노동자는 그들의 정치적 의지를 표현할 조직화가 용이해졌고2,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노동력은 사회적 평균의 균질화로 이어져 단일한 노동시간 제한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내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기술발전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들 이롭게 만들었던 셈이다.

요기요 AI는 먼저 들어온 주문을 제쳐두고 뒤에 들어온 주문을 우선 배달하라고 명령했다. 첫 번째 주문을 한 손님은 화가 날 터이지만, 욕은 라이더가 들어야 한다. 돌발 상황도 벌어졌다. 12층에 올라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계단으로 뛰어간 라이더, [중략] 주소를 잘못 적은 손님 때문에 20분 동안 헤맨 라이더, 조리가 늦어져 식당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라이더까지. AI는 이런 변수를 계산하지 않는다. [중략] 누군가는 우리를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라 부르지만 족쇄와 ‘캐삭’ 사이를 아슬아슬 달리는 평범한 노동자일 뿐이다. 디지털일터에 AI라는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됐다. AI에 대한 규제와 통제 없이 플랫폼노동 대책도 없다.[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다]

이제 기술발전이 자본가에게만 유리한 시스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오늘날의 플랫폼 경제가 처음에 “공유경제(共有經濟)”라는 기만적인 이름표를 달고 사회 모두에게 이로운 시스템인 것처럼 행세했으나 이내 플랫폼이 자본에 의해 점령될 경우 “공유경제”는 그 즉시 “플랫폼은 사유(私有)지만, 사회적 비용은 공유(共有)”인 시스템으로 고착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칼 맑스가 서술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인 것처럼 보였고 아직도 플랫폼의 점령자들은 그러하다 주장하고 있는 우리의 “자유로운 생산자”도 사실은 자신이 AI라는 신개념 콘베이어벨트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19세기 노동자보다 더 퇴행적인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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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to by CEphoto, Uwe Aranas or alternatively © CEphoto, Uwe Aranas, CC BY-SA 4.0, Link

이제 그들은 더 이상 “時間의 主人”이 아니다. AI는 그들의 편의대로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임의로 늘려버린다. AI는 배달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사정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 정부는 집권 초기 주52시간 근무제라는 엉성하지만, 그럼에도 살인적인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해 다소 개혁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였지만, 플랫폼 경제의 자본은 다시 노동자에게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생산자)” 혹은 “개인사업자”라는 직함을 씌워주고서는 노동시간 제한의 “족쇄”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해방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 AI라는 족쇄를 씌워서 그들이 “時間의 主人”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21세기의 정부와 공장감독관은 새로운 노동법을 만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본을 감독해야 한다. 자본가의 행태와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이차산업 중심의 대규모 공장을 짓던 자본과 그곳에서 근무하던 노동자에게 적용되던 법과 제도는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 어떤 자본은 플랫폼을 선점하자마자 지분을 일본의 사모펀드에게 넘겨 엄청난 투자금을 받아 그걸로 플랫폼을 독점하였고, 미국 주식시장에 회사를 상장시킨 후 창업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피해 모든 공식직함을 던져버렸다. 그런데 때마침 그 플랫폼의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화재의 진화는 한국 사회가 부담하였으며 그 보험료는 한국 보험사에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늘 그랬듯이 자본은 “時間과 空間의 主人”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

자본가는 노동일을 될수록 연장해서 가능하다면 1노동일을 2노동일로 만들려고 할 때, 그는 구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판매된 이 상품의 특수한 성질은 구매자에 의한 이 상품의 소비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노동일을 일정한 표준적인 길이로 제한하려고 할 때 그는 판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이율배반이 일어나고 있다. 즉, 쌍방이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에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296]

자본론에서 처음으로 “투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이다. 결기가 차고 넘치는 “불온서적”치고는 꽤 늦게 투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느낌이다. 여기서 투쟁이라는 표현은 바로 냉철한 상품교환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하는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을 의미한다.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갈등은 통상 거래가격에 대한 갈등일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보통의 거래는 상품의 양도 시점과 가격의 지불 시점을 일치시킨다. 그런데 어떤 상품은 – 대표적으로 노동력 – 이 양자 간의 시점이 일치하지 않아1 갈등을 초래한다. 또는 시점이 일치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과대추정 혹은 과소추정되어 갈등을 일으킨다. 역사적으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판매자인 노동자계급에 의해 그 가격이 과소추정되었다는 주장에 따라 노동시간의 단축 등의 투쟁을 촉발하였던 것이다.

결국, 노동자계급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력을 시장에서 제값을 받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이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과 유급휴가의 확보라는 결실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역사적 재평가에 급제동을 걸고 있는 조류가 새로 등장하고 있으니, 그것은 플랫폼 경제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해체다. 이 조류는 자유로운 노동력의 소유자인 노동자를 플랫폼에 예속시켜 마치 봉건시대의 농노처럼 플랫폼의 농노로 후퇴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 맑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의 주장이다.2 노동시간은 노동자 각각의 특성에 따른 저마다의 노동시간이 아닌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서만이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3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균일한 노동력의 보유자인 조직 노동의 투쟁을 통해서 보다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자본이 택한 전략은 이 노동자성의 해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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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www.flickr.com/people/37818606@N00″>Franklin Heijnen</a> –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www.flickr.com/photos/franklinheijnen/29759890963/”>DSCF2049.jpg</a>, CC BY-SA 2.0, Link

이미 서구국가에서의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이전과 같은 노동조직은 약화되어왔다. 그런 한편으로 우버와 같은 플랫폼 경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제거시켰다. 즉, 노동력의 구매자인 자본가는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에게 ‘너는 더 이상 나에게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운행 서비스와 같은 용역을 파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운행 서비스라는 사용가치를 창조해내는 노동력이라는 교환가치를 보유한 노동자로부터 기적처럼 노동자성을 삭제함으로써 노동자를 개인사업자(혹은 자신의 자동차를 생산수단으로 하는 자본가)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에 각국 사법체계가 어느 정도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성과도 얻어내고 있으나 아직도 자본은 아직 조직적 행동 역량이 떨어지는 배달 노동자와 같은 이들에게 노동시간이 아닌 업무성과라는 기만적인 노동관행을4 강요함으로써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을 피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 지부장에 따르면 쿠팡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배송현황 애플리케이션은 휴게시간에도 접속할 수 있어 정규직 전환을 위해 쉬는 시간에도 배송을 계속하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한다.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상대평가를 하는 터라 노동자끼리 배송물량 경쟁을 부추긴다. 또 최근 사측이 인센티브 정책을 변경하면서 그 기준을 알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일하는 일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정규직도, 계약직도] 쿠팡 노동자 2명 또 쓰러졌다, 매일노동뉴스, 2021년 3월 9일]

쿠팡이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대다수를 일용직으로 채용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쿠펀치라는 어플을 통해 매일 일용직을 ‘선별’ 채용하는 것이다. 쿠팡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상시직을 제안하고 있다고 했지만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을 제안한다. 3개월·9개월·12개월 쪼개기 계약을 하고, 이렇게 2년을 다 채운 노동자 중에서 극히 일부만 ‘선별적으로’ 무기계약직을 시켜 준다.[쿠팡의 쪼개기 계약, 노조탄압 수단되나, 매일노동뉴스, 2021년 6월 10일]

사업자등록을 한 적도 없고 사업한다고 표방하지도 않았지만 배민·쿠팡·네이버 같은 플랫폼사업자가 미리 세금을 떼고 인적용역 사업자로 보고해 졸지에 ‘사업자’가 된 그들은 자신이 왜 사업자인지, 수입 대비 소득률은 왜 전문직보다 높은지 의아해한다. 플랫폼경제가 커지고 플랫폼노동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무시로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만 정부와 국회는 문제의식도 고민도 없다.[고삐 필요한 ‘플랫폼경제’, 경향신문, 2021년 6월 10일]

이 기사들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기술문명이 이루어낸 새로운 업적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노동자성 제거, 극한경쟁을 통한 24시간이라는 제한된 노동시간 내에서의 노동력 쥐어짜기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조직화되고 집단화된 노동이 ‘9시 출근 5시 퇴근’이라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 얻어낸 노동시간의 집단적 통제를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인센티브 (혹은 패널티) 제공이라는 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의 자발적(?) 노동을 추출해내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기술 봉건주의”가 다소 과한 표현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봉건제의 농노가 토지에 예속되어 있던 것처럼 오늘날의 플랫폼 노동자는 애플리케이션에 예속되어 있는 노예일지도 모른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했던 자본주의의 거래방식이 새로운 질적 국면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대를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지금 투쟁을 촉발할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이제 투쟁은 노동일에 대한 투쟁과 함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앱 뒤에 노동자 있어요

혁신은 상층부에서의 고숙련의 소수 일자리들이 상대적으로 저숙련인 일자리들을 감시하는 전통적인 노동의 피라미드 구조를 교체하지 않는다. 대신 기술이 바꾸는 것은 자동화를 통해 대부분의 반복적인 작업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새롭고 보다 복잡한 작업을 계속하여 채워 넣음으로써 피라미드의 구성이다. [중략] 이러한 경향은 특별히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이 실존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구체적인 서비스를 팔기 위한 (양방향 시장의) 플랫폼을 제공하는 긱이코노미(gig economy)에서 명백하다. 우버의 차량호출과 배달 앱이 아무리 세련됐을지라도 이 회사는 차량 운전자와 배달 노동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The Revenge of the Precariat]

어쨌든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해지고 있다. 전 세계적인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말미암아 집밖에 섣불리 나가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이동의 제약을 우리는 배민과 같은 첨단 배달앱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한 편리해지고 있는 세계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이러한 편리성의 뒤편에는 바로 인용문에서 언급하는 저숙련 노동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우린 자주 잊곤 한다. 앱 이용 과정에서 그들을 마주치는 순간은 배달음식을 전해 받는 바로 그 짧은 순간에 국한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라는 유명한 유머 게시물도 있었지만, 이 경우를 그 표현에 빗대어 보자면 “앱 뒤에 노동자 있어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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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www.flickr.com/people/25232127@N00″>d. FUKA</a> from Yokohama, Japan –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www.flickr.com/photos/25232127@N00/2307460971/”>Cleaner [Suzhou Station / Suzhou</a>], CC BY-SA 2.0, 링크

우버와 에어비앤비와 같은 “공유경제” 모델이 등장할 때만 해도 혁신이 노동의 피라미드 구성을 바꿀 것이라는 꽤 낭만적인 전망도 있었다. 노동과 자본을 공유하면서 세상은 좀 더 친환경적이 되고 계급의 피라미드 구성도 완화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예전에 JP모건 체이스가 분석한바 에어비앤비와 같은 자본 플랫폼의 참여자는 플랫폼 참여를 통해 실질적인 소득증가로 이어진 반면, 우버와 같은 노동 플랫폼의 참여자에게는 플랫폼 참여는 소득증가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대체소득의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었다. 즉, 노동 플랫폼에서 노동의 전통적인 피라미드 구성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직노동이 비조직노동,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는 상황만 초래했다.

긱이코노미의 비조직노동은 점차 노동자성을 인정받으며 지위를 개선해가고 있지만, 아직도 상당수 노동자는 전통적 노조나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화려한 조명을 받는 “혁신” 주도자들의 천문학적 부의 창출에 푼돈을 받아가며 기여하고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전통적인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산업예비군들이 또 긱이코노미에 참여하게 되면 기존 노동자들의 지위는 더 열악해질지도 모른다. 우아한형제들은 최근 배달 노동을 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광고를 냈는데, 실제로는 경쟁 증가로 인해 소득이 감소하는 추세여서 노동자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노동의 피라미드는 상층부에 세련된 소프트웨어, 하층부에 불안정 비조직노동이 자리잡는 형태로 고착화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공유경제(sharing economy)”에 대한 JP모건 체이스의 세밀한 분석

이 보고서는 2012년과 2015년 동안의 무기명화된 샘플로 온라인 플랫폼 경제에 참여한 26만 명 이상의 재무상황에 대해 전례 없이 자세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들은 이 3년 이상의 기간 동안 30개의 개별 플랫폼들 중에 최소한 한 개 이상의 플랫폼에서 소득을 얻었다.[Paychecks, Paydays, and the Online Platform Economy, JPMorgan Chase & Co. Institute, 2016년 2월, p20]

JP모건 체이스에서 내놓은 이 보고서는 본인들의 주장대로 전례 없는 여러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이 비즈니스가 싹틀 즈음에 “공유경제(sharing economy)”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렸다가 요즘은 “노동경제(gig economy)”라고 자주 명명되는 해당 분야에 대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도 가장 집약된 수준으로 분석된 보고서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또한 이 비즈니스를 “온라인 플랫폼 경제(online platform economy)”라고 부르고 있는데, 해당 비즈니스의 특징을 고스란히 잘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명명이라 여겨진다.

2015년 9월에, 성인의 1%가 온라인 플랫폼 경제로부터 활발하게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이는 3년간의 기간 동안 월간 참여율로 10배가 증가된 비율이다. 누적적으로는 성인의 4%가 이 플랫폼 경제로부터 소득을 올렸는데, 이 누적참여율은 3년간의 기간 동안 47배 증가한 수치다.[같은 보고서, p21]

해당 보고서가 분석하였듯이 플랫폼을 통해 소득을 얻는 이들의 규모는 아직 전체적으로는 미미하기는 하지만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이러한 빠른 성장은 온라인 플랫폼의 투자 증가, 노동의 파편화 경향, 서구 노동자들의 빈곤화 증가세 등과 맞물려 진행되어 왔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여겨지는데, 주되게는 노동과 수요를 이어주는 온라인 플랫폼의 유용성은 이미 어느 정도 구식의 수단 – 벼룩시장, 대리기사용 PDA 등 – 으로도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보고서는 온라인 플랫폼 참여자의 자세한 현황 이외에도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담고 있는데, 바로 과연 온라인 플랫폼이 참여자들의 실질적인 소득 증가로 이어지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분석이다. 이 분석을 위해 보고서는 플랫폼을 ‘노동 플랫폼’과 ‘자본 플랫폼’으로 나누어 각각의 소득변화를 관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서 노동 플랫폼은 Uber, TaskRabbit 등 주로 노동을 제공하여 소득을 올리는 플랫폼이고 자본 플랫폼은 Airbnb, eBay 등 자산의 매각이나 임대를 통해 소득을 올리는 플랫폼이다.

우리는 현재까지 노동 플랫폼과 자본 플랫폼이 소득의 변동성(volatility)에 기여하는 정도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전체적으로 플랫폼 소득이 있었던 달들의 노동 플랫폼 소득은 대부분 非플랫폼 소득의 14%의 부족분을 메우는 소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 플랫폼 소득이 있었던 달들의 소득은 소득의 추가적인 15%에 기여하는 것으로, 총소득을 3,638달러(플랫폼 소득이 없었던 달들의)에서 3,639달러(플랫폼 소득이 있었던 달들의)로 1% 미만의 증가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 플랫폼 경제 참여자들 경우에는 전통적인 소득에 대한 대체라기보다는 추가 소득의 성격이 있었다. 非플랫폼 소득은 플랫폼 소득이 있었던 달들에 비해 1% 미만으로 적었고, 자본 플랫폼 소득은 추가적인 7%의 소득에 기여하여 총소득이 4,747달러로 非플랫폼 소득(4,454달러)보다 대략 7% 상향되었다.[같은 보고서, p26]

매우 시사적인 분석결과다. 자본 플랫폼의 참여자는 온라인 플랫폼의 참여를 통해 실질적인 소득증가로 이어진 반면, 노동 플랫폼의 참여자에게는 플랫폼 소득증가의 수단 라기보다는 대체소득의 수단으로 쓰인 것이다. 이는 노동 플랫폼 참여자가 정기적인 노동이 아닌 부정기적인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고, 온라인 플랫폼을 그런 부정기 노동 참여의 또 다른 방편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에서마저 자산소득과 노동소득에 있어 현실에서의 불균형 경향이 재연되고 있을 개연성을 의미한다.

Uber나 Airbnb는 “공유경제”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긴 했지만 그리 획기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단지 기존의 소규모 비즈니스에 온라인 플랫폼이 결합되어 – 주로 투자자 입장에서 –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노동 플랫폼은 기존의 노동력 파견업체가 추구하던 수익 모델이 보다 기술적으로 교묘하게 – 예를 들어 날씨에 따라 노동시간이 달라지는 스타벅스처럼 – 적용되어 부정기 노동의 파편화, 또는 脫노동자화1를 더욱 가속화시킬 개연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실질소득의 증가는 없는 채로.

기술발전과 업태혁신에 따른 노동유연성 강화

예를 들어 Uber, Lyft, TaskRabbit 은 그들의 사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을 고용인이라 여기지 않는다. 회사는 그들이 연주회들을 파는 eBay처럼 단순한 무대들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서비스 공급자들이 독립적인 계약자로 일하기를 바라고, 그러한 만큼 노동자들은 건강보험, 소셜시큐리티나 실업수당을 위한 급여공제와 같은 고용인으로서의 혜택의 자격이 안 된다.[In the Sharing Economy, Workers Find Both Freedom and Uncertainty]

우버와 같은 “공유경제” 비즈니스 모델은 행정기관이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과 택시업자의 모델이 상충한다고 이야기할 때면 늘 자신들은 “택시업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들 생각에 그들은 이베이와 같은 플랫폼일 뿐이다. 특정 업무에 대해 다수의 일꾼들이 입찰하는 형식으로 거래가 성사되는 태스크래빗 역시 스스로를 인력업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플랫폼일 뿐이다. 이러한 비즈니스 형태는 매우 자연스러운 노동유연성 강화를 초래한다.

물론 이런 업체들이 마냥 그들의 자유를 즐기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인용한 기사를 보면 이들은 서비스 공급자의 임금 가이드라인이랄지 보험 등을 제공하여 노동의 질을 높이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결국 비용증가로 이어져 틈새상품 특유의 경쟁력을 상실케 만들 것이다. 또한 그런 회사의 조치는 회사 일방의 수혜 차원의 조치이지 노사협약과 같은 구속성 있는 가이드라인이라 보기 어렵다. 서비스 공급자는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일 뿐이다.

어쨌든 이러한 특정 서비스 내에서의 관리 기능과 운영 기능의 분리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더욱 정교하게 발전할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슬로우뉴스의 강정수 씨의 말마따나 우버나 태스크래빗이 주장하는 “공유경제” 비즈니스 모델은 “마케팅 용어”일뿐, 본질은 기존의 서비스 업체에 대한 플랫폼 제공을 대규모로 함으로써 얻어지는 규모의 경제를 향유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한 예로 태스크래빗은 기존의 인력파견업체와 이베이를 결합한 “공유경제” 모델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사법부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와 같은 특수고용 형태의 종사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의 부당함은 이 글의 요지가 아니니까 차후에 논하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재능교육이 현재와 같은 특수고용 태스크래빗과 같은 플랫폼을 구축하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과 같은 골치 아픈 송사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고용인들은 재능교육이 깔아놓은 무대에서 입찰에 참여하는 래빗일 뿐이니까.

한 지방 레스토랑 사장은 [중략] 노동 비용이 매일의 매출의 21%를 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 합계의 반절 정도는 고객응대업무 담당에게 쓰이고 있고, 반절은 후방에 쓰이고 있다. 매 30분마다 사장과 매니저들은 최신 합계를 담은 엑셀 스프레드시트를 검토한다. “오후 3시에 임금 비율이 21%를 넘을 수는 없어요. 또는 (하루가 끝날 무렵) 21% 밑으로 떨어질 것 같지도 않고요.” 사장은 할리록에게 말했다. “그 시점에서 매니저들은 몇몇 친구들에게 집에 가라고 요청할 것을 알아요.”[The Flextime Blues]

프리랜서에게만 노동유연성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는 기사다. 기사는 지방 레스토랑 사장 뿐 아니라 스타벅스와 같은 대기업에서도 정밀한 노동통제가 시행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마치 방송국 시청률이 미시 단위로 측정되어 성과가 드러나듯이 더 많은 서비스 업체의 성과가 정밀하게 측정되어 노동자의 처우가 연동될 수 있다. 또는 이들 서비스 래빗이 스타벅스가 구축한 플랫폼에서 당일의 서비스 제공계약에 입찰 버튼을 누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