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우리도 대안 없는 진보는 버리자

얼마 전에 유럽의회 선거가 있었다. 대다수 언론들은 이번 선거결과의 특징을 한마디로 ‘좌파의 몰락’으로 요약하고 있다. 사실 분명히 ‘사회’라는 단어가 당명에 들어간 당들은 국가에 상관없이 지지율과 이에 따른 의석을 잃었고 이 빈자리는 우익정당, 심지어 극우정당인 영국국민당(BNP)등이 차지했다는 점에서 그 분석은 유효하다.

당연히 국내 보수언론들은 이러한 선거결과를 반겼다. ‘유럽도 대안없는 좌파를 버렸다’ – 제목이 참 중의적인데 도대체 “도”를 왜 썼을지 곰곰히 생각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 고 제목을 뽑은 한국경제 기사가 그 한 예다. 이 기사가 분석한 유럽 좌파의 실패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이 같은 선거 결과는 올초부터 전 세계 각지에서 이어진 ‘실용 중시’ 선거 결과와 궤를 같이한다. [중략] 토머스 클라우 유럽개혁센터(CER) 연구원은 “좌파가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해 몰락했다”고 평가했다. ‘경제 안정’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결과라는 해석이다.[유럽도 대안없는 좌파를 버렸다]

전경련 기관지 한국경제가 유럽 좌파의 대안 제시 실패에 따른 몰락을 어느 분이 주술적으로 되풀이하는 ‘실용 중시’와 교묘히 연결 짓는 반면에, 트로츠키주의 웹사이트 World Socialist Web Site는 그 몰락의 원인을 다르게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사회민주정당들의 정치와 특성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오랜 기간 또 다른 부르주아 정당인 것처럼 행세해왔다. 지난 이십여 년 간 그들은 노조와의 긴밀한 연대 하에 보수정부가 시도했을 때는 광범위한 저항을 촉발했던 사회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The cause for this shift is to be found in the politics and character of the social democratic parties, which have for many years functioned like any other bourgeois party. In the past two decades, they have used their influence, in close alliance with the trade unions, to carry out the sort of social attacks that had provoked massive resistance when attempted by conservative governments.[The decline of social democracy]

결국 이름은 ‘사회당’, ‘사회민주당’, ‘좌파그룹’ 등 다양한 당명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국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오히려 “사회에 대한 공격(social attacks)”, 즉 공공성의 저해에서 우익정권과 차별성을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전통적인 연대의 대상인 기성 노조의 저항을 받지 않아 더 그 과정이 수월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결국 유권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만적인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행위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 현재의 표심이라는 분석이다.

한경의 분석이나 WSWS의 분석 모두 그들의 세계관에 따른 주관적 분석이 눈에 띈다. 한경 말대로 ‘실용의 중시’라면 영국 노동당의 ‘실용’을 능가할 정당이 많지 않을 것임에도 그들은 패배했다. ‘사회에 대한 공격’의 징벌적 성격이라면 우익정당, 특히 극우정당의 약진이 명쾌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결국 투표는 어떤 면에서는 집단지성의 수렴이라기보다는 ‘특정시기 집단정서’의 단순합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유럽은 그렇다 치고 한편 우리정치의 지형은 유럽과 비교하자면 그 틀에서 전체 정치권을 쑥 들어서 오른 쪽에 내동댕이친 상황이다. 가장 강력한 야당은 유럽의 우익정당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수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경제정책을 가진 정당이다. 집권여당은 정치적 관용을 허락하지 않는 정당이다. 이런 상황이니 노사모가 ‘범좌파’로 분류되고 있다.

그나마 유럽에서는 좌우의 구분이 형식상으로나마 경제정책으로 갈리고 유권자들도 이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는 반면, – 그런 면에서 훨씬 정치적 실험경험과 스펙트럼이 넓은 유럽에 대고 한경의 ‘대안 없는’ 운운은 건방진 소리다 – 우리는 정치적 의사결정이 정치적 변수에 지나치게 매몰되다보니 주요양당의 경제적 스펙트럼은 극도로 좁은 실정이다.

즉 정치권 내에서 한미FTA와 같은 이전 정권의 보수편향적인 경제정책은 새 정권에서 거의 손상 없이 계승된 반면, 언론, 남북관계, 교육, 정치권 비리 등 경제정책 핵심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는 치열한 갈등과 대치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다. 직접민주주의의 퇴조가 정치적인 ‘종의 다양성’을 해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전 정부의 경제정의 회복 없는 직접민주주의의 일시적 해방이 – 그마저도 노동계급에게는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 정치적 퇴행의 직접책임은 아닐지라도 그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엉터리 비정규직 보호법이 그들의 주장과 달리 비정규직 처우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이제 와서 한나라당의 법적용의 유예라는 초헌법적인 발상의 밑동을 제공한 것이 한 예다.

얼마 전까지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던 노회찬 씨가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정국을 맞이하여 유탄을 맞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접했다. 유시민 씨가 서거 정국의 수혜주로 떠오르면서 표심이 노회찬 씨를 급격히 이탈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자체장 선거에서조차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계급투표’라는 명분이 사치스러운 구호인 셈이다. 계급구도가 불분명해서라기보다는 때로 지나치게 ‘이타적인’ 정치적 의사결정 탓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곤 한다.

이제 우리도 유럽처럼 메아리 없는 ‘진보’는 좀 솎아낼 때도 되지 않았을까?

6 thoughts on “그래 우리도 대안 없는 진보는 버리자

  1. sonofspace

    대안없는 ‘진보’와 ‘대안없는’ 진보의 차이는 크네요 ㅎㅎ
    아직도 친노나 민주당이 진보 내지 좌파로 불리는 게 정말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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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 잘 사는 사람들은 조금은 ‘이타적으로’ 못 사는 사람들은 조금은 ‘이기적으로’ 뭐 그런 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면 좀 더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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