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사회민주주의

숫자의 착시현상

우리나라에서는 김혜수가 드라마에서 부르짖은 ‘엣지’라는 단어의 정체가 무엇이냐며 설왕설래한 바 있는데, 지금 외국의 경제학 관련 블로고스피어에서는 다른 ‘엣지’가 화제가 되고 있다. James Manzi라는 경제학자가 National Affaris란 보수우익 냄새 물씬 풍기는 제목의 사이트에 올린 ‘Keeping America’s Edge’가 바로 그 엣지다.

제목을 어설픈 실력으로 해석해보면 ‘미국의 경쟁력을 사수하자’쯤으로 읽힌다. 경쟁력은 바로 ‘자유시장 자본주의(free-market capitalism)’다. 필자는 미국의 경쟁력인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비되는 주체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로 상정하고 둘 간의 비교를 통해 전자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문제는 이 주장의 근거가 틀렸다는 것.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1980년부터 오늘 날까지, 미국의 전 세계 산출량의 지분은 일관되게 21%다. 반면 유럽의 지분은 1970년대 40% 약간 못 미치는 수치에서 오늘 날 25%까지 떨어지면서 지구적 경쟁에서 탈락할 지경에 있다. 혁신적인 자본주의 대신에 사회민주주의를 택했기 때문에 유럽은 (대부분) 중국, 인도, 그리고 나머지 개발도상국들에게 그들의 지분을 넘겨주고 있다.
From 1980 through today, America’s share of global output has been constant at about 21%. Europe’s share, meanwhile, has been collapsing in the face of global competition — going from a little less than 40% of global production in the 1970s to about 25% today. Opting for social democracy instead of innovative capitalism, Europe has ceded this share to China (predominantly), India, and the rest of the developing world.[원문보기]

이 서술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 문제다. 미국은 ‘혁신적이고 자유시장을 신봉하는 자본주의’를 채택하여 산출량이 끄떡없는데, 유럽은 사회민주주의로 경제를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글은 미국의 우익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The New Public의 Jonathan Chait이 이 글의 맹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Chait는 Manzi가 그의 글에서 서술한 유럽은 사회민주주의의 서유럽뿐만 아니라 동유럽,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으로 포괄하고 있고, GDP의 기준이 되는 1980년 이후 미국의 인구는 35% 상승한 반면 유럽과 러시아는 각각 7%, 0.7% 상승한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범위설정의 오류와 산출 원단위의 왜곡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Paul Krugman 역시 이 논쟁에 가세했는데,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만약 Manzi가 수행한바 유럽을 ‘광범위하게’ 적용한다 하더라도 실제 산출량은 40%에서 25%가 아닌 30%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결국 Manzi는 조사방법도 잘못 되었지만 그 숫자마저 잘못 산정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이 해프닝은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현대사회에서 ‘숫자의 마술’ 혹은 ‘숫자의 착시현상’이 주는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해프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숫자는 공평하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당장 이 논쟁에서도 숫자는 가장 정치적인 도구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인운하 사업성 분석, 주식의 기술적 차트, 세종시의 발전상, 원자력발전소의 수주금액 및 향후 기대수익 등은 하나같이 뛰어난 학식을 갖춘 전문가들에 의해 산출되어 그 기대효과가 마치 눈앞에라도 있는 것처럼 제시된다. 하지만 오늘 날 이 엄밀한 계량주의적 의사결정에 대한 맹신은 벽에 부닥치고 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숫자는 ‘사람하기 나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 경제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숫자나 그래프만한 것이 없다. 애매하고 흐릿한 상황도 숫자를 제시하고 이를 그래프로 표현해지만 군말이 없어진다. 사실은 Manzi의 경우처럼 몇 개의 숫자를 오려붙이고 산식을 꼬면, 또는 추세선을 더 넓은 범위로 확대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수(數)는 결국 사람이 셈하는 것이다.

그래 우리도 대안 없는 진보는 버리자

얼마 전에 유럽의회 선거가 있었다. 대다수 언론들은 이번 선거결과의 특징을 한마디로 ‘좌파의 몰락’으로 요약하고 있다. 사실 분명히 ‘사회’라는 단어가 당명에 들어간 당들은 국가에 상관없이 지지율과 이에 따른 의석을 잃었고 이 빈자리는 우익정당, 심지어 극우정당인 영국국민당(BNP)등이 차지했다는 점에서 그 분석은 유효하다.

당연히 국내 보수언론들은 이러한 선거결과를 반겼다. ‘유럽도 대안없는 좌파를 버렸다’ – 제목이 참 중의적인데 도대체 “도”를 왜 썼을지 곰곰히 생각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 고 제목을 뽑은 한국경제 기사가 그 한 예다. 이 기사가 분석한 유럽 좌파의 실패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이 같은 선거 결과는 올초부터 전 세계 각지에서 이어진 ‘실용 중시’ 선거 결과와 궤를 같이한다. [중략] 토머스 클라우 유럽개혁센터(CER) 연구원은 “좌파가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해 몰락했다”고 평가했다. ‘경제 안정’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결과라는 해석이다.[유럽도 대안없는 좌파를 버렸다]

전경련 기관지 한국경제가 유럽 좌파의 대안 제시 실패에 따른 몰락을 어느 분이 주술적으로 되풀이하는 ‘실용 중시’와 교묘히 연결 짓는 반면에, 트로츠키주의 웹사이트 World Socialist Web Site는 그 몰락의 원인을 다르게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사회민주정당들의 정치와 특성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오랜 기간 또 다른 부르주아 정당인 것처럼 행세해왔다. 지난 이십여 년 간 그들은 노조와의 긴밀한 연대 하에 보수정부가 시도했을 때는 광범위한 저항을 촉발했던 사회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The cause for this shift is to be found in the politics and character of the social democratic parties, which have for many years functioned like any other bourgeois party. In the past two decades, they have used their influence, in close alliance with the trade unions, to carry out the sort of social attacks that had provoked massive resistance when attempted by conservative governments.[The decline of social democracy]

결국 이름은 ‘사회당’, ‘사회민주당’, ‘좌파그룹’ 등 다양한 당명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국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오히려 “사회에 대한 공격(social attacks)”, 즉 공공성의 저해에서 우익정권과 차별성을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전통적인 연대의 대상인 기성 노조의 저항을 받지 않아 더 그 과정이 수월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결국 유권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만적인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행위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 현재의 표심이라는 분석이다.

한경의 분석이나 WSWS의 분석 모두 그들의 세계관에 따른 주관적 분석이 눈에 띈다. 한경 말대로 ‘실용의 중시’라면 영국 노동당의 ‘실용’을 능가할 정당이 많지 않을 것임에도 그들은 패배했다. ‘사회에 대한 공격’의 징벌적 성격이라면 우익정당, 특히 극우정당의 약진이 명쾌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결국 투표는 어떤 면에서는 집단지성의 수렴이라기보다는 ‘특정시기 집단정서’의 단순합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유럽은 그렇다 치고 한편 우리정치의 지형은 유럽과 비교하자면 그 틀에서 전체 정치권을 쑥 들어서 오른 쪽에 내동댕이친 상황이다. 가장 강력한 야당은 유럽의 우익정당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수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경제정책을 가진 정당이다. 집권여당은 정치적 관용을 허락하지 않는 정당이다. 이런 상황이니 노사모가 ‘범좌파’로 분류되고 있다.

그나마 유럽에서는 좌우의 구분이 형식상으로나마 경제정책으로 갈리고 유권자들도 이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는 반면, – 그런 면에서 훨씬 정치적 실험경험과 스펙트럼이 넓은 유럽에 대고 한경의 ‘대안 없는’ 운운은 건방진 소리다 – 우리는 정치적 의사결정이 정치적 변수에 지나치게 매몰되다보니 주요양당의 경제적 스펙트럼은 극도로 좁은 실정이다.

즉 정치권 내에서 한미FTA와 같은 이전 정권의 보수편향적인 경제정책은 새 정권에서 거의 손상 없이 계승된 반면, 언론, 남북관계, 교육, 정치권 비리 등 경제정책 핵심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는 치열한 갈등과 대치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다. 직접민주주의의 퇴조가 정치적인 ‘종의 다양성’을 해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전 정부의 경제정의 회복 없는 직접민주주의의 일시적 해방이 – 그마저도 노동계급에게는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 정치적 퇴행의 직접책임은 아닐지라도 그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엉터리 비정규직 보호법이 그들의 주장과 달리 비정규직 처우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이제 와서 한나라당의 법적용의 유예라는 초헌법적인 발상의 밑동을 제공한 것이 한 예다.

얼마 전까지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던 노회찬 씨가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정국을 맞이하여 유탄을 맞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접했다. 유시민 씨가 서거 정국의 수혜주로 떠오르면서 표심이 노회찬 씨를 급격히 이탈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자체장 선거에서조차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계급투표’라는 명분이 사치스러운 구호인 셈이다. 계급구도가 불분명해서라기보다는 때로 지나치게 ‘이타적인’ 정치적 의사결정 탓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곤 한다.

이제 우리도 유럽처럼 메아리 없는 ‘진보’는 좀 솎아낼 때도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