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공공성에 관하여

지난번 손석춘 씨와 문국현 후보와의 대담을 읽고 느낀 바를 적은 글을 올렸는데 이와 관련하여 2004년에 작성한 글을 올립니다. 약간 시의성이 떨어지고 그 대안 제시도 취약하지만 그 당시 한창 진행되고 있던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되기에 첨언 없이 올립니다.

■ 은행은 군대보다 더 무서운 무기?

“은행은 군대보다 더 무서운 무기다. 은행은 순수하게 우리 국민이 소유해야 한다.” 1832년 미합중국은행의 외국인 소유지분이 30%에 달하자 제7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국익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허가를 취소하면서 남긴 말이다. {생략}”


한겨레21 최근호(2003년12월25일 제490호)에서 외국자본에 팔려나가는 국내은행의 실태를 다룬 기사의 첫 문단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외국자본 비중이 현재 30%를 넘어섰다. 보다 정확하게는 2003년 9월말 국내 은행업에 진출한 외국자본의 지분율은 직접투자와 주식시장을 통한 간접투자를 포함하여 전체지분의 38.6%에 해당한다. 시중은행만을 놓고 보면 비중은 43.4%로 더욱 높아진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논리를 빌자면 우리는 바야흐로 군대보다 더한 무기를 외국인에게 넘겨주고 있는 기점에 위치해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다.

■ 국내은행의 해외매각, 부작용은 무엇인가?

한국은행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 ‘외국자본의 은행산업 진입영향 및 정책적 시사점(2003년 12월 19일)’에 따르면 국내에서 실제 외국자본의 경영지배를 받고 있는 은행인 ‘외국계 은행’으로 분류되는 은행은 제일, 외환, 한미 3개 은행이며 최대주주는 아니나 지분율 5% 이상의 외국인 대주주가 존재하고 외국인 등기이사도 활동하고 있는, 이른 바 ‘혼합계 은행’은 하나, 국민 2개 은행이다.

그렇다면 과연 외국자본의 은행업 진출은 무엇이 문제인가? 해묵은 민족자본 육성론자가 아닌 자유주의자들조차도 당장 눈앞에서 체감으로 분명히 느끼고 있는 가장 큰 해악은 우선 위기상황에서 공동보조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예로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은 LG카드 사태가 터진 직후 각각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LG카드 채권을 급히 회수해 발을 뺀 뒤 채권단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국내 시장의 교란은 자사의 동북아시아 한 지점의 위기일 뿐 사활을 걸 문제는 아니라는 판단일 것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그러한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행이 기업이기에 앞서 한 사회의 화폐시장과 신용의 완충장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의 행동에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지난 몇 년간의 외국계 은행의 행태를 보면 이러한 신용위기를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 듯한 심증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한국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외국자본은 국내진입 이후 기업대출, 회사채 및 주식 등 고위험자산을 줄이는 대신 가계대출 및 국공채 등 안전자산 운용을 적극 확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외국계은행의 기업대출의 감소비율과 가계대출의 증가비율은 각각 내국계 은행의 그것을 약 10%를 앞서가고 있어 인수 당시의 부실을 줄이기 위한 안정적 운용이 불가피함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보수적인 자산운용을 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지난 2-3년 간의 부동산 가격 폭등이 은행의 폭발적인 가계대출 증가에 있었다는 분석이 유력한 상황에서, 그리고 이러한 보수적인 대출행태가 설비투자의 위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외국계 은행의 행태를 곱게 봐주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해악은 무엇인가? 당장 눈앞에 나타나고는 있지 않지만 여하한의 외부변수에 따른 국내 금융위기 심화 개연성이다. 그 사례로 1990년대 일본경제의 악화가 미국의 부동산 시장에 영향을 미쳐 미국의 금융불안을 야기한 사례가 있고,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의 금융위기 발생시 프랑스계 2개 은행과 캐나다계 1개 은행이 철수선언을 하여 금융위기를 가중시킨 적이 있다. 이번 LG카드 사태에서 보여준 국내 외국계 은행의 ‘나몰라라’ 스타일은 이러한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님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외국자본은 충분히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도 남을’ 녀석들이라는 거다.

■ 대안은 무엇인가?

국내 금융업계의 이러한 우려에 대한 대안 하나는 은행매각시 국내자본이 참여할 수 있게끔 하자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펀드 규모 2조∼3조원 규모의 이헌재 펀드를 추진중이다. 내년에 정부 지분 매각을 통해 민영화되는 우리금융지주회사를 직접 인수한다는 게 당면 목표다. 그런데 그 성공여부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유력하다. 펀드 규모상 연기금의 참여가 필수적인데 우량 주식보다 상대적으로 위험이 높은 사모펀드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연기금이 나올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연금수령자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결국 자본여력으로 볼 때 산업자본이 가장 유력한 참여주체이므로 이들의 참여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은행법상 4%를 초과하는 은행주식 취득(의결권 행사 가능한도 기준)을 금지하고 있어 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이덕훈 우리은행장은 우리금융 민영화를 눈앞에 두고 산업자본의 참여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펴는 등 이해당사자들 중 상당수는 끊임없이 산업자본의 금융업 참여의 요구를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의 종금사 사태에서도 보듯이 ‘기업의 사금고화’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저항선을 형성하고 있다.

■ 결론에 대신하여

화폐와 시장이 존재한 이후로 은행은 이윤추구의 주체이기에 앞서 경제의 대동맥 역할을 수행하는 공기(公器)이다. 진보세력이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은행의 주인이 외국자본이냐 국내 산업자본이냐’ 하는 물음은 ‘토끼를 호랑이가 잡아먹는 게 낫냐 여우가 잡아먹는 게 낫냐’ 라는 질문처럼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은행민영화의 추세에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어느 한쪽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세기 관치금융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졌던 금융구조에 대해서 아직도 우리는 기존의 국영화 유지가 어느 정도는 여전히 유효한 소유방식이라는 주장을 거둬들이기는 쉽지 않다. 지난 정권의 국가주도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이 그 형식의 오류라기보다는 내용의 오류였다는 판단이 일정 정도 정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국가는 은행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한도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못이기는 척 공기를 팔아 해치우는 선험적 관성을 어느 정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헌재 펀드와 유사한 종류의 국공채 또는 국민주 펀드도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이다. 자산의 건전화를 위해, 정부의 건전화를 위해 부실은행의 매각이 불가피하다면 이를 은행 본래의 기능을 정당하게 유지할 수 있는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들이 참여하는 펀드가 인수케 함으로써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 그리고 남미의 금융위기가 도래한 이후 이들 나라의 금융은 외국자본의 수중에 넘어갔다. 외국자본의 자국 은행지분 점유율은 멕시코의 경우 83%, 체코의 경
우 90%에 육박한다. 우리나라를 그러한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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