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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patient)”은 삭제 가능할지 몰라도 채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중앙은행이 국채를 매입 outright purchase 하는 방식은 정책금리가 실효하한에 도달한 이후에도 장기금리가 하락하지 않을 경우 장기국채를 매입함으로써 돈을 풀어서 금리하락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쉽게 말해 중앙은행이 국채를 담보로 정부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법입니다. [중략] 금리가 올라 국채가격이 하락할 경우 그동안 국채를 매입했던 중앙은행이 평가손실 또는 매각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돈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임경 지음, 생각비행, 2015년, pp275~276]

중앙은행이 금융위기 이후 시행하고 있는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단 중 소위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에 대한 설명이다. 앞부분은 양적완화 조치를 취하는 이유와 방법, 뒷부분은 이에 대한 부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두 부분은 양적완화는 쉬운 말로 중앙은행이 해서는 안 될 ‘시장 리스크를 떠안고 하는 금리 장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장에 발전함에 따라 각국의 중앙은행이 행정부로부터 독립성을 (형식적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정부의 방만한 예산운용을 방지하고자 함도 있다. 하지만 국채 매입을 통한 양적완화는 금리하락을 유도하는 것 이외에도 정부의 예산운용 폭을 비정상적으로 늘려주는 작용도 한다. 그리고 이에 따른 시장 리스크는 중앙은행이 부담하게 된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금융위기 이후 Fed의 자산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전통적인 채권은 비중이 줄었고 양적완화를 거치며 재무상태를 악화시키는 자산이 크게 증가하였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자산은 양적완화와 오퍼레이션트위스트를 위한 장기국채와 부동산시장 유지를 위한 MBS다. MBS는 매입을 중지하겠다고 했으나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인 양적완화 조치로 말미암아 Fed는 금융위기 이후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은행으로 등극하였다.(아마 아직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이익은 시장 리스크를 부담한 대가이고 엄밀히 말해 그러한 예상치 못한 이익 역시 어떤 면에서는 불확실성의 증가라는 점에서 리스크에로의 노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지금 언제 부실화될지 모르는 채권들을 손에 들고 돈을 벌었다. 일반은행들도 비록 부실자산으로 염려되는 여신일지라도 작년 한해 이자율 상향조정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지적대로 연방은행이 해당 채권들을 팔려고 할 때 자본이득(capital gain)을 취하기는커녕 시장에서 소화가 될지도 모르는 채권이 상당수라는 것이 문제다.[2009년 가장 장사를 잘한 은행]

시장참여자들은 Fed가 성명서에서 ‘금리 인상에 인내심(patient)을 가질 수 있다’라는 문구를 뺏기 때문에 조만간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단어 하나 가지고 경제정책을 예단하는 이런 모습이 흥미롭긴 해도 개인적으로는 뭔가 그들만의 리그에서의 말장난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인내심은 없어졌겠지만 저리의 국채는 자산명세에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갈수록 계급별로 차별화될 금융자산에로의 접근성

은행(영란은행 : 역자주)의 자산 매입이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영국인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다. 경제성장은 더 낮았을 것이다. 실업은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더 많은 기업들이 망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사회의 다른 모든 그룹과 더불어 저축을 하는 사람과 연금을 타는 사람들에게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자산매입의 여하한의 효과 측정은 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은행의 자산매입은 거의 대부분 영국의 국채에 집중되었었고, 이로 인해 국채의 가격은 오르고 수익률은 떨어졌다. 그러나 이 때문에 회사채나 주식과 같은 다른 자산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결과적으로 은행의 자산 매입은 국채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자산가격의 상승을 초래했다. 사실 은행의 평가에 의하면 자산 매입이 국채 가격을 끌어올린 것만큼이나 주가를 끌어올렸다. [중략] 자산 가격이 올라감으로써 자산 매입은 연금 펀드 이외에도 소유하고 있는 가구의 금융 자산의 가치를 상승시켰지만, 이는 이들 자산의 40%를 소유하고 있는 상위 5% 가구에게로 보유고를 심하게 왜곡시켰다.[The distributional effects of asset purchases]

영국 의회의 재무위원회가 2012년 예산 리포트에서 통화정책의 재분배 기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해 영란은행 내부가 작성한 일종의 답변서 요약내용 중 일부다. 잘 요약되어 있다시피 “양적완화”와 이를 통한 자산 매입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회사채나 주식과 같은 금융 자산의 가격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이들 자산의 대부분은 부자들이 들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재분배 효과는 부자에게 유리하게, 그리고 대부분의 무산계급에게 불리하게 영향을 미쳤다.

서구사회에서 자산 불평등이 심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경제학자뿐 아니라 재닛 옐렌 Fed 의장이 지적할 정도로 보편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위 보고서는 비록 자산 매입의 보편적인 효과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중앙은행의 자산 매입이 이러한 경향에 기여하였음을 일정 정도 인정하는 내용이다. 금융위기와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는 동안 대다수의 시민들은 무리해서 매입한 부동산 자산의 폭락에 신음하고 금융 자산의 상승 기류에 편승하지 못함으로써 이중으로 고통 받게 된 셈이다.

물론 양적완화가 지속될 수 없을 것이기에 금융자산가들이 일방적으로 수혜를 받는 시기가 계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은 모든 자산이 증권화되고 세계화되는 와중에 계급별로 그 자산에 대한 접근성이 차별화되어가는 경제체제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자산가는 연기금뿐 아니라, 새로이 탄생하는 각종 투자펀드나 인기 있는 공모주에 그들의 재산을 투자한다. 그 와중에 서민들이 누릴 수 없는 세제혜택도 누린다. 이제 실제로 프라이빗뱅킹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인도경제의 관전 포인트 하나

그러나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경제권인 인도는 어느 나라보다 위험하다. 지난 2년 동안의 경제 관련 뉴스는 실망스러웠는데 성장률은 4~5%로 떨어졌다. 이는 2003~2008년의 호황기의 반절이다. 더 떨어질 수도 있다. 소비자 가격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10%로 고정되어 있다. [중략] 외국자본에 대한 인도의 의존도 역시 높은 상태며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경상수지 적자는 2012년 말 GDP의 7% 정도 까지 치솟았다. 금년엔 4~5%에 머물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말이다.[Why India is particularly vulnerable to the turbulence rattling emerging markets]

서양의 주요한 경제지에는 최근에 연일 인도 관련 소식이 주요기사로 올라오고 있다. 이들 언론은 대체적으로 이 나라의 경제 위기에 대한 단기적인 원인을 미국 경제지표의 호전, 이에 따른 美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기조 가능성, 그리고 연쇄적인 서구자본의 인도에서의 자금회수를 들고 있다. 이로 인해 인도 및 주변국들의 통화가 급락하는 등의 즉각적이고 심각한 부작용이 언론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유동성이 풍부한 통화로 신흥국에 투자하는 소위 “캐리트레이드”의 주된 통화는 한동안 일본의 엔貨였다. 미국이 신용위기에 직면하여 연준이 일본 당국의 해법과 비슷한 저금리 기조와 통화팽창으로 대응하자 美달러가 새로운 캐리트레이드의 통화가 되었다. 결국 신용위기의 발단이었던 풍부한 유동성에 따른 서브프라임모기지 대출 사태가 지구적인 범위에서 확대된 셈이고 인도가 그 주요 대상국이었다.

값싼 통화가 더 높은 수익률을 보장해주는 곳으로 흘러들어가는 투자는 기발하다고 할 것도 없는 투자기법인데 역사적으로 볼 때 주기적으로 그 위험이 파괴적인 규모로 반복되고 있음에도 또한 투자자는 주기적으로 그 위험을 간과하며 그 불구덩이에 뛰어든다. 특히 인도의 경우에는 2008년 이후 성장세가 정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위험이 더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빚의 상환재원이 빚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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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ealogic Project Finance Review(1H 2012)

이런 인도의 상황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위의 표는 최근 5년간 전 세계 민간투자사업(PPP, Public Private Partnership)의 지역별 추이다. PPP는 정부에서 필요한 인프라시설을 건설할 때 민간의 자금을 빌리는 방식으로 통상 경제성장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지만 재정이 부족할 때 쓰는 방식이다. 즉, PPP방식으로 투자를 하면 단기적으로는 단기적으로 재정도 건전해지고 경제성장률도 올라간다.

표를 보면 인도의 PPP 활용도는 워낙 압도적이어서 Dealogic이 아시아와 별개로 떼놓았을 정도다. 경제성장 여력이 있던 2008년까지 미미하던 인도의 PPP투자는 2011년에 이르러서는 압도적으로 증가한다. 역시 경제성장률을 위해 인프라 투자를 주도했던 중국이 재정을 활용한 것과 달리 인도는 민간자본을 이용했고, 이는 결국 미래의 빚으로 이연된다는 점에서 인도의 경제상황은 생각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일본 엔화 하락으로 돈 번 사람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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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Y Banknotes” by TokyoshipOwn wor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조지 소로스 하면 1992년 파운드를 방어하려는 영국중앙은행과 맞장을 뜬 “환투기꾼”이자,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사유하는 “철학자”라는 독특한 삶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인물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이 억만장자 철학자가 일본 엔의 하락세에 베팅하여 파운드 전쟁에서의 노획물에 버금가는 10억 달러의 이익을 거둔 사실을 – 물론 물가가치를 고려하면 그때의 혁혁한 전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 보도했다.

엔화의 하락에 베팅하는 것은 소심한 이가 할 짓이 못된다. 일본은 몇 년간 자신의 화폐를 절하하여 경제와 주식시장을 재점화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왔다. 그 기간 동안 엔화와 일본 국채에 대해 숏포지션을 취한 많은 이들이, 화폐와 채권이 오히려 상승함에 따라 두들겨 맞았다. 일본은 월스트리트에서는 “과부 제조기”로 알려지게 됐다.[중략]

소로스의 예전의 영국 파운드 하락에 대한 매도와 달리, 소로스와 다른 헤지펀드들의 최근의 움직임들은 일본이나 엔화를 불안정하게 만든 것 같지는 않은데, 이는 부분적으로 일본 엔화의 거래가 투자자들이 좌지우지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광범위한 시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일본의 부채는 국내 투자자들이 가지고 있고, 비관적인 투자자들의 그 나라에 대한 숏포지션이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다.

동시에, 소로스의 파운드에 대한 술수는 영국중앙은행의 정책들에 반하는 것이었던 반면, 지금의 헤지펀드들은 디플레이션을 극복하려는 일본중앙은행의 정책이 성공하길 기원하면서 거래를 했다.[U.S. Funds Score Big by Betting Against Yen]

그러니까 소로스를 비롯하여 이번에 큰돈을 번 투자자들은, 1992년의 전투에서와 같이 정부의 의지에 반하는 묘수를 부릴 필요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정부로부터 욕을 먹을 일도 없었다. 그들은 떨어지는 엔화의 급류에 몸을 맡기고 돈을 벌어들이는 재미를 만끽하기만 하면 됐다. 문제는 WSJ기사에서도 말하듯 내리막이 생기는 시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엉뚱한 때에 몸을 던졌다가는 과부만 제조되기 때문이다.

엔화 약세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을 아베 정권 등장과 “무제한적 양적완화레토릭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하지만 WSJ도 지적하듯 이전 정권도 그런 시도를 했지만 지금처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본 시티은행의 다카시마 수석 애널리스트는 IMF의 새로운 환평가 모델에 근거해 적정 환율이 1달러당 95엔이고 지금 그 시점으로 복귀하는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아베는 한 계기일 뿐이란 것이다.

다카시마는 그 예로 2001년에서 2006년에도 일본은행이 양적완화를 실시했지만 외환 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사례를 들고 있다. 당시 일본의 양적완화를 무력화시킨 것은 Fed의 금리인하와 이에 수반된 달러 약세였다. 흥미롭게도 지금의 Fed 수장인 벤 버냉키는 당시 일본이 과감한 통화정책을 통해 불황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논문을 썼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은 현재 호의적인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환율에 관해서 할 말이 많을 폴 크루그먼은 한발 더 앞서가 “환율전쟁”이라는 표현은 “순전히 오해(it’s all a misconception)”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 다른 저명한 경제학자 베리 아이켄그린의 주장을 빌어 1930년대의 상황조차 최악의 경우에라도 경쟁적인 환율 약세를 통해 “최초의 지점(where they started)”으로 회귀한 것이며, 이번의 “환율전쟁”이라 불리는 것도 결국에는 “순이익(a net plus)”으로 남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벤 버냉키나 폴 크루그먼이나 “환율전쟁은 근린궁핍화 정책이다”라는 전통적인 주장에서 동떨어져 있는데, 과연 그들의 예언이 어느 정도나 현실에서 실현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폴 크루그먼은 1930년대 당시 상황 악화의 원인을 금본위제 탈피에서 들고 있지만 어쨌든 당시의 상황을 “전쟁”으로 표현하는데 무리는 없고, 플라자합의도 넓게 봐서는 “환율전쟁”의 파편이 심각한 외상을 입힌 사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p.s. 현재의 “환율전쟁”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코노미스트의 긴 글이 있으니 흥미있으신 분은 읽어보시도록…(난 안 읽었다능)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 단상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아카데미에서 자리 잡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은 경제활동을 해왔다. 그 경제원리가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인간은 사회화되기 시작하면서 경제활동을 자연적으로 몸에 익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돌도끼와 같은 도구의 유용성을 물리학적으로 검증하기 전부터 돌도끼를 사용해왔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와중에 시도된 최초의 경제학적 시도는 어쩌면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일 것이다. 이들은 상업, 즉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부의 창출이 무역을 통해 실현된다고 보았다. 더불어 그들은 그 부의 최종결과물을 금으로 보았다. 왜냐면 금은 곧 돈이기 때문이다. 즉 중금주의(重金主義)로 이어지는 논리다. 아주 단순하다.

당시 사람들은 지폐는 돈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차용증서일 뿐이다. 지금도 통용되는 지폐를 보면 그것이 돈이라는 말은 없다. 그것은 ‘은행권’일뿐이다. 은행이 돈을 – 다시 말해 금을 – 맡겨놓은 이들에게 금을 맡았다고 확인해주는 ‘은행권’이다. 이것이 오늘날 부분지급준비제도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결국 이것이 금본위제의 초기형태가 된다. 부는 무역을 통해 창출되고, 금으로 표시되며, 은행권은 그것의 차용증서다.

닉슨이 1971년 8월 금태환 정지를 선언한 이래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는 자연스럽게(?) 달러본위제로 넘어왔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달러가 기축통화로써 유지되어왔던 배경은 막강한 군사력 등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상과 다른 대체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냉혹한 국제정치 질서가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전후의 통화질서를 마련한 브레튼우즈 체제가 기본적으로 모순된, 그러므로 단명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것은 시작부터 예언되어 왔었다. 그중 하나가 예일대학의 R.트리핀 교수가 제기한 트리핀의 딜레마다. 이 주장은 브레튼우즈 체제가 화폐수요를 달러 증발을 통해 만족시킬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증발은 달러의 신뢰도를 떨어트려 금태환성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국의 통화가 세계통화가 된다는 것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케인즈가 나서서 별도의 국제통화(bancor)를 발행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달러가 국제통화가 되었다. 그 이후 미국은 기축통화국으로서 우월적 지위를 누려왔다. 이들은 이른바 시뇨리지라 불리는 이익을 누렸는데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많은 통화를 발행해도 외환위기가 도래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돈이 모자라면 달러를 찍으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무한대로 달러를 찍어내어 시장에 유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금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달러라는 화폐의 존엄성은 지켜져야 했다. 강환 화폐여야만이 국제결제통화로써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연준의 통화증발은 국가부채와 재정적자로 이어지기에 재정건전성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2008년에 터진 전 세계 금융위기는 이러한 패러다임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GDP 대비 3% 수준에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합의되었던 미국의 재정적자는 10%를 육박할 정도로 치솟았다. 유동성 대량방출로 말미암아 연방준비제도의 대차대조표는 순식간에 두 배 이상으로 늘어 2조 달러에 육박한다.

금리수준은 전 세계가 너나 할 것 없이 제로 수준의 금리를 유지하였다가 최근에야 일부국가들이 야금야금 올리고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금리를 최저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실업률, 소비부진, 수출경쟁력 등 내외적으로 험난한 장벽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양적완화라 미화된 표현이 붙여진 통화증발이다.

1차 양적완화는 2008년 금융위기 발발 직후 총 1조7천억달러 규모로 단행되었다. 이 당시 많은 이들이 달러의 가치하락과 인플레이션 등을 우려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이치였다. 하지만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잠깐 폭등하던 원자재 가격도 얼마 안 있어 안정되었고, 달러 수요는 오히려 늘어 세계 각국이 달러와 스왑라인을 개설해야 할 정도였다.

왜 트리핀의 딜레마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금태환조차 되지 않는 은행권인데 말이다. 그것은 대안 없는 기축통화라는 달러의 지위를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빼앗아야 한다고 아무리 유럽과 중국이 떠들어봐야 혼란스러운 국제무역시장에서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1차 양적완화에도 별로 약발이 먹혀들지 않았다고 판단한 미연준은 이번 달에 2차 양적완화 계획을 발표하였다. 규모는 6천억 달러로 시장에서는 주가가 상승하는 등 어느 정도 반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예상대로 주요국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폴볼커나 일부 연방은행 이사 역시 양적완화가 기대하고 있는 효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어쨌거나 헬리콥터 벤(Helicopter Ben)은 지금 바닥을 실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뿌려야 인플레이션이 다시 가속화되는 임계점에 도달할 것인가?’, ‘트리핀의 딜레마가 과연 존재하는 딜레마이기는 하였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말이다. 더럽혀지고 있는 연준의 대차대조표만 외면한다면 이보다 속편한 대안도 없다.

실질 실업률이 17%에 달하고 모기지채권의 절대비중을 망한(!) 국영기업 프레디맥/패니메가 소화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 2차 양적완화가 장기금리를 30~50 베이시스 포인트 눌러 내리는 효과가 있다하니 미국은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금리인 셈이다. 마찰력을 최대한 없애야 돈이 회전한다고 최면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약 2차 양적완화에 따라 달러가 통제 가능한 수준까지 절하된다면 그것은 미국에게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또는 그럼에도 달러가 예상보다 더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별로 나쁜 상황이 아닐 것이다. 3차 양적완화의 토대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달러 스스로가 수퍼노트가 되어 여신기한이 무한인 채권을 계속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억압

경기침체가 끝났다느니 출구전략을 가동해야 하지 않겠냐느니 슬슬 배부른 소리들을 하고 있다. 사실관계를 따져보자면 현재의 다소 해동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경제는 실은 착시현상이다. 각국의 정부는 ‘최종대부자’와 ‘최종소비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원맨쇼를 펼쳐보이고 있고, GDP를 기반으로 측정하는 경제성장률은 그 경제활동의 질적 차이와 상관없이 우리의 긴장된 근육을 이완시키고 있다. 어느 블로그에서 현재의 상황을 – 닷컴버블에 빗대어 – 닷거브(dot gov)버블이라고들 한다던데 딱 들어맞는 말이다.

각국정부가 쓰고 있는 정책수단은 매우 단순하다. 우선 ‘최종대부자’로서 각 금융기관에게 초저금리의 자금을 빌려준다. 심지어 비소구(non-recourse), 즉 눈먼 대출조건의 금융조건으로도 빌려준다. 그리고 ‘최종소비자’로서 막대한 규모의 정부사업을 발주한다. 우리나라의 ‘4대강 정비사업’이 대표적이고, 미국은 철도 등 노후화된 인프라스트럭처를 이 기회에 재정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정부가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실물경제가 춤을 춰주길 기대하고 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거기에다 우리나라에는 극히 예외적으로 국지적인 부동산 가격 앙등까지 있다. 이는 부동산 자산 가격 하락으로 인한 소비위축을 두려워 한 정부의 ‘퍼주기’식 규제해체와 양적완화에 – ‘부동산 불패’라는 심리적 기대감이 맞물린 – 힘입은 바 큰데, 결국 제조업 등 실물부문이 아닌 헛것으로 경기부양에 대한 착시현상만 가져온 꼴이다. 결국 얼마 전 이성태 한국은행장이 금통위에서 금리인상에 대한 의중을 비쳤고, 윤증현은 이에 반발하였지만 이후 CD금리가 치솟는 등 시장은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이는 일단 정부의 DTI규제와 맞물려 부동산의 이상급등에 제동을 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부동산 가격이 몇 년 연속으로 폭락한 미국은 이제 자산 거품이 어느 정도 진정되어 적어도 소비부문의 불황이 바닥을 쳤을까? 월스트리트저널의 최근 기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Delayed Foreclosures Stalk Market’이란 기사는 “3백만에서 4백만에 이르는 유실 처분된 주택들이 향후 몇 년 동안 경매에 붙여질 것(three million to four million foreclosed homes will be put up for sale in the next few years)”으로 보인다고 예상하고 있다. 기사는 이것들이 또 한 번 부동산시장을 뒤흔들 수 있는 “그림자 재고(shadow inventory)”라 일컫고 있다. 미국의 부동산 지옥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전술한 부동산 가격 추이가 경제운용에 중요한 이유는 어찌되었든 그것이 주가 등과 함께 소비심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장춘몽일지 몰라도 사람들은 4억에 산 집이 5억, 6억씩 하게 되면 재산이 늘어났다고 생각되어 소비를 늘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부동산 자산이 전체 자산의 80%를 넘게 차지하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의 변동은 심지어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만큼 중대한 고려사항이다. 심지어 분양을 노려 아이를 허위로 입양하는 사기집단이 등장할 정도니 부동산 망국론이 허언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소비심리의 기본 축은 가처분소득이다. 이는 대부분 사회안전망, 고용안정, 근로소득을 통해 창출된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미국은 왜곡된 수치라는 주장임에도 실업률이 9%를 뚫고 올라섰다. 우리나라의 수치는 그보다 아래라고 주장되고 있지만, 어쨌든 고용은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다. 정부는 노동유연성의 제고만이 살길이라며 고용안정을 발 벗고 나서서 해치고 있고, 반발하는 노동자는 폭압적으로 탄압하고, 공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내려 사회전체의 임금수준을 하향평준화하려는 속셈을 내비치고 있다. 바닥을 기는 사회안전망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면 결국 가처분소득의 감소, 소비위축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노동억압은 한편으로 ‘소비억압’이라 부를 만하다. 건강한 노동자들은 노동을 통해 임금을 받고, 그 돈으로 소비를 할 터인데 이를 정부가 나서서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더불어 감세와 부동산 가격의 현상유지는 극소수 고소득층과 자산가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고 있고,(주1) 서민들은 이에 맞물린 현상인 전세가격 상승으로 향후 가처분소득이 더 줄어들 처지가 되었다. 소비자, 즉 노동자의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 경제는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이치다.

정부가 앞으로 쭉 ‘최종소비자’의 역할을 떠맡지 않을 셈이라면 말이다.

(주1) 엊그제 정운찬 청문회에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잘 설명해주었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정운찬씨에게 물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톱클래스의 경제학자이신 분은 경험연구를 게을리 하셔서 사실관계를 잘 모르시고 계셨다.(그런데 케인즈 주의자라 자처하신다)

Balance Sheet Recession

일본의 경험에 대한 주도적인 사가(史家)인 일본의 노무라 연구소의 리차드 쿠는 QE(양적완화)와 ZIRP(제로금리정책)가 단순한 이유 때문에 작동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기업들과 개인들이 그들의 대차대조표를 재정립하는 동안은 대출에 대한 요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돈을 안 빌리면, BOJ(Bank of Japan)이 공급하는 유동성은 그저 시스템 속에 주저앉아서 경제의 소득 흐름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의 저서 대차대조표 경기후퇴에서의 글이다.
Richard Koo of the Nomura Research Institute in Japan and a leading historian of the Japanese experience, believes that QE and ZIRP didn’t work for the simple reason that when companies and individuals are rebuilding their balance sheets, there is no demand for loans. “With no one borrowing money, the liquidity supplied by the BOJ will simply sit in the system and will not add to the economy’s income stream,” he writes in his book Balance Sheet Recession.[출처]

책 제목이 맘에 든다. 수요가 없는 상황에서의 밀어내기 유동성 공급은 시장에 잠겨있게 된다. 반면 기업이나 개인 모두 기존 대출의 건전성은 악화된다. 예를 들어 작년에 LTV(Loan to Value)가 60%였다고 지금도 60%일까? 물론 서류상으로는 그렇겠지만 체감 LTV는 달라진다. 즉 분모인 Value의 시장가치가 떨어지고 있으니 지금 당장 집을 팔지 않더라도 채무자나 채권자 모두가 느끼는 감은 틀리다. 기업이 발행한 ABCP역시 단기자금인 관계로 차환발행의 위험과 설사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조달비용이 늘 수밖에 없다. 기존대출은 악성이 되고 신규대출은 없는 병목현상은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