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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가 말하는 전쟁의 본질

전쟁 행위의 본질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대중을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게 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그들을 지혜롭게 하는 데 사용되는 물품들을 박살내거나 하늘로 날려버리거나 바다 속 깊이 빠뜨리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가 실제로 파괴되지 않는다고 해도 무기 공장은 소비 물자 생산에 사용될 노동력을 소모시키는 역할을 한다.[1984, 조지 오웰 씀, 정회성 옮김, 민음사, 2005년, p268]

조지 오웰의 작품 ‘1984’에서의 집권세력인 오세아니아 정부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은 에마뉘엘 골드스타인1이 자신의 저서에서 서술한 전쟁의 본질이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전쟁이 내포한 본질은 오히려 후자라는 사고의 역발상이 흥미롭다.

전쟁은 고대로부터 다른 이의 경제적 자산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고, 오늘날에는 일국의 군수산업이 여타 국가의 전쟁을 통해 융성하고 해당 노동자나 지역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 전체적인 범위로 보면 골드스타인의 말이 옳을 것이다. 궁극에는 무의미하게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처음에 서로의 아이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끔찍한 살육을 자행하고 있지만 본질은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진정 그들을 위해서라면 복수를 위해 백린탄을 터트려 양민을 학살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 특히 이스라엘은 – 광기어린 공포로 노동력을 소모하고 있을 뿐이다.

예전에 ‘군사 케인즈 주의’의 허상에 대해서도 쓴 적 있지만 군사행동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정신적으로 성숙치 못한 행동일 뿐이다. 집권세력의 권력 온존을 위해 끊임없이 조장되는 전쟁 위기론에 국민은 애국주의에 고취되어 현실의 고통을 잊거나 정당화한다. 그런 의식에 성숙함은 없다.

가리타니 고진은 ‘전쟁의 영구 포기’를 선언한 일본 헌법 9조의 평화주의 조항을 통해 일본이 진정한 어른이 됐다고 주장하였다. 점령군에 의해 강제된 것이고 모순되게도 자위대라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순은 아베라는 미숙아가 헌법을 부정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노동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 전 세계가 전쟁을 영구적으로 포기하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Lebanon(2009)

Buried 란 영화가 있다. 카메라는 지독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산채로 관속에 묻힌 한 사나이의 모습만을 앵글에 담고 있다. 주인공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한 미국회사의 직원으로 이라크에서 일하다가 이라크 저항세력에 납치당해 관속에 묻혔다는 설정이었다. 이 집요하리만치 극단적인 폐소공포증을 자극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굳이 관속이 아니더라도 탈출하지 못하는 어떠한 가혹한 현실에 놓인 우리. 그 원인은 자기 자신 때문일 수도, 가족 때문일 수도, 국가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어떠한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강제되고 그에 따라 개인이 행동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 “묻혀” 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 방위군은 레바논 남부를 침공한다. 영화는, 뿌리 깊은 중동 및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에서 배태된 이 전쟁에 배치된 이스라엘 탱크 병들의 시선을 담고 있다. 탱크 속에 들어앉아 보병들의 전투를 뒤에서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는 네 명의 군인들. Buried 의 주인공이 느끼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탱크라는 좁은 공간에서의 폐쇄적이고 답답한 분위기는 서로의 존재가 귀찮으리만큼 눅진하고 짜증스럽다. 카메라의 앵글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조준병 슈물릭이 바라보는 조그만 조준망원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시야는 무척 좁지만 그러한 때문에 관찰대상이 주는 인상은 더욱 강렬해진다. 죽어가는 당나귀의 눈물이 선명히 보일만큼 말이다.

출발 후 얼마 되지 않아 비행기 공습이 지나간 곳이므로 소풍이나 다름없으리라는 소대장의 말은 허풍이었음이 곧 드러난다. 저항세력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탱크는 시리아 군인으로부터 미사일 공격까지 받는다. 그럼에도 탱크병들은 오물과 담배꽁초가 뒤섞여 있는 탱크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시체의 보관소로, 시리아 군인의 감옥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결국 자신들의 위치가 시리아군의 수중에 놓여있음을 알고 한밤중에 탈출을 기도하면서 이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전쟁에서의 단순기능공들의 공포는 극에 달한다. 왜 그곳에 갔어야 하는지, 왜 민간인까지도 공격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  “탱크 속에 묻힌” 시스템의 희생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지막 장면의 넓은 해바라기 밭이 인상적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바람직한 외교정책

바이든이 연설을 하던 바로 그 시점에 오바마 행정부의 또 다른 멤버가 뉴욕의 UN에 인상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로즈 갓뮬러 Rose Gottemoeller 였다. 그녀는 잘 알려진 이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갓뮬러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 미국무부 부국장(assistant secretary)는 핵무기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이며 현재 러시와의 군축협상을 이끌고 있고 핵확산방지조약을 강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UN에서의 연설에서 갓뮬러는 NPT에 가입하기 위한 통상의 핵무기 보유국의 숫자를 언급하였다. “NPT에 대한 범세계적인 준수는 인도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파키스탄, 그리고 북한을 포함한다.” 그녀의 말이다.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점 한가지는 사실상 미국 외교정책의 주요한 터부를 하나 깼다는 점이다. 워싱턴은 이전에는 절대 이스라엘을 핵무기 보유국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다. 미행정부의 모든 이들은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핵병기고를 외면해왔다. 그것은 1960년대 말 처음 생산되었고 그 이후 현대화되고 확장되어왔다.[Obama’s New Middle East Diplomacy]

해리 트루먼이 행정부 주요장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건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마침내 예루살렘에 시오니즘 국가가 탄생한 이래, 미국은 이스라엘과 단순한 우방을 뛰어넘는, 소위 맹방(盟邦)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70년대 OPEC가 석유의 무기화를 통해 유가를 몇 배로 올리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을 협박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서구, 특히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아오던 국가였다.

하지만 이제 ‘후세인’이 미들네임인 한 흑인 대통령에 의해 그 맹목적인 애정이 서서히 식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분명 오바마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사회의 분위기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을 수는 없다. 지난번 그 역시도 이스라엘의 학살극에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인용문에서 보듯이 그의 외교정책은 이전의 금기를 깬 첫 사례로 남게 되었다. 바로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슈피겔의 나머지 기사를 읽어보면 변화는 다른 곳에서도 감지된다. 오바마는 아랍권 언론과 인터뷰를 했고, 중동 지도자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이 이스라엘의 극우 네타냐후 정권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미국인 역사학자마저 그의 정책을 “순진하고 위험(naive and potentially dangerous)”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만큼 미국의 대(對)이스라엘 정책은 미국의 외교정책 중에서도 가장 민감하고 골치 아픈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순진하고 위험한” 발상이었다면 애초 맹목적인 이스라엘 편들기는 “불순하고 더러운” 발상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의 보상차원에서 – 더 거슬러 올라가 유태 방랑민족의 한풀이 차원에서 – 유태국가를 설립하게 된 취지에는 정당성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오늘날 보는 것처럼, 원주민에 대한 잔인한 박해를 통해서만이 존립 가능한 ‘피해자의 가해자화(化)’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정당성은 빠른 속도로 마모될 수밖에 없다.

유일한 방법은 오바마 식으로 모든 국가들의 현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공명정대하게 잣대를 들이대는 것뿐이다. 이스라엘의 핵에 대한 편의적 무시는 곧 이란이 그들의 핵무장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되고, 이것이 국제 핵시장 형성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트루먼 시절의 한 장관이 시오니즘을 도대체 이해 못하겠다며 차라리 유태국가를 세우려면 브라질 어디쯤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기에 – 그리고 이제 옮기려면 너무 멀기에 – 그럴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제는 상호공존에 대한 상식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Walkabout

Walkabout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국 감독 니콜라스 로에그가 1971년 감독한 작품이다. walkabout은 ‘도보여행’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거니와, 이 영화에서는 호주의 원주민인 어보리진(Aborigine)이 성인식의 일종으로 오지에서 몇 달간 살아남아야 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 천진난만한 백인 오누이도 이러한 처절한 ‘도보여행’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정신 나간 그들의 아버지가 사막에 그들을 데려와서는 자신의 자살에 동참시키려는 것을 구사일생으로 피하게 된 것. 결국 아버지는 자살하고 오누이는 길을 헤매다 사막에 홀로 남아 바로 이 성인식을 치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소년을 만났다.

그 소년 덕택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나누고 심지어 은밀한 연정까지 느끼지만 서로간의 의사소통의 부재는 때로 오해로, 때로 고통으로 다가온다. 마침내 도시의 근처로 오게 된 이들의 의사소통 불능은 상태가 심해져 가고 원주민 소년의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시간이 흘러 문명세계로 돌아온 누이는 어느 새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가정을 꾸렸다. 남편이 돌아와 승진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 순간, 그녀는 원주민 소년, 동생, 그리고 자신이 나체로 연못에서 수영을 즐기던 그 행복했던 시간을 불현듯 떠올린다. 그 모든 야생의 경험은 문명세계에서의 순간의 일탈에 불과하다.

소통의 부재 정도가 무슨 죽음의 이유냐고 억지라고 생각된다면 영화가 아닌 지금 이 세상을 들여다보자. 한 원주민 소년의 죽음 정도는 태산의 흙 한 움큼 정도의 충격밖에 안된다. 권력을 위해 오만과 무자비를 ‘인내력의 한계’ 또는 ‘자위권 행사’라는 변명으로 감싸서 소통을 거부하는 어느 이웃이 다른 이웃을 향해 인종학살을 태연하게 자행하고 있다.

부시는 그들의 학살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 자기가 저지른 수준에 비해선 양호하기 때문일지도? – 오바마는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지독한 부조리는 나찌가 점령하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다.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는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러면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전쟁 노름(한겨레)
Walkabout 스틸컷

그루지야 사태는 네오콘의 무모한 도전?

이번에 벌어진 러시아와 그루지야 간의 참혹한 전쟁에서 미국은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라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미국이 그루지야를 부추겨 지역분쟁을 조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단 곤돌리자 라이스는 이러한 세간의 추측을 부정하고 있다. 오히려 미행정부의 한 소스는 그녀가 7월 그루지야의 사카쉬빌리 대통령에게 러시아를 자극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워싱턴DC의 아메리칸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 중인 알란 J 리히트만(Allan J. Lichtman)은 Common Dreams 에 기고한 글을 통해 현 상황을 지난 1956년의 헝가리 사태와 비유하면서(주1)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존 매케인을 그루지야 정부의 ‘선동자(Agent Provocateur)’로 지목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런 주장에 대한 근거로 매케인이 외교정책자문으로 두었던 랜디 슈네먼(Randy Scheunemann)의 존재를 들고 있다.(주2)

리히트만의 설명에 따르면 슈네먼은 그루지야 정부를 위해 일하던 로비스트였다. 또한 슈네먼은 지난 4월 17일 매케인과 그루지야의 대통령인 미하일 사카쉬빌리와의 전화통화를 주선하였다. 리히트만은 매케인이 왜 그루지야의 로비스트가 그의 캠프에 머물렀는지, 그리고 사카쉬빌리와의 통화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리히트만은 최근 러시아에 대한 매케인의 일련의 강경자세(주3) 와 그로 인한 부수적인 이익 – 우익들의 총집결, 그리고 이로 인한 표심 확보 – 등의 현재 상황에서 이미 그가 어떤 입장이었을 것인가에 대한 심증을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

한편 여러 매체에서 외신기자로 활동하였던 저널리스트 에릭 마르골리스(Eric Margolis)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사카쉬빌리의 남오세아티아 침공 계획의 뒤에는 워싱턴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대대 수준의 병력과 함께 배속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고문이 그루지야 군대를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The Georgian Army was trained and equipped by US and Israeli military advisors stationed with its troops down to battalion level)”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CIA와 모사드가 티빌리시에서 중요한 정부기관을 운영하였고 사카쉬빌리와 협조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주장들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즉 사카쉬빌리가 허파에 잔뜩 바람이 들어 남오세아티아를 공격하게 만든 이가 매케인이든 아니면 CIA, 또는 그 뒤에 있는 더 거대한 세력이든 간에 구소련 지역에서의 분쟁은 미국의 세계경찰로서의 위치를 새로이 부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고, 이로 인해 결국 다시 미국은 애국주의적 분위기의 고양, 군산복합체의 존재의의 강화, 결과적으로 공화당의 연승 등의 나머지 세계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상황이 재연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네오콘의 그루지야 배후설을 막연한 음모론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은 그러한 시도가 – 만약 사실이라면 – 이전의 이라크 침공이나 현재의 이란에 대한 도발과 달리 매우 위험한 도박이라는 사실이다. 러시아는 이라크처럼 공갈빵이 아니다. 여하한의 경우 ‘분명하고도 현존하는 위협’이다. 그들은 석유를 통해 부를 쌓아가고 있고 여전히 막대한 숫자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강국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관계가 결부된 사안에 대해서는 이번 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직접적인 행동에 거리낌 없이 나선다. 그런 면에서 미국 우익이 새로운 ‘가상의’ 적을 만들어 국면전환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명백한 오류다. 러시아는 미국에 대해 ‘실재의’ 적이 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주1) 최근에야 공개된 미행정부의 문서에 따르면 “CIA의 꼭두각시였던 래디오프리유럽은 헝가리의 저항세력이 미국정부가 채 준비도 하지 않고 있던 도움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할만한 근거를 제공하는 방송을 해댔다(Radio Free Europe, a puppet of the CIA, beamed broadcasts into Hungary which gave the revolutionaries reason to believe that they could expect aid from the United States – aid that the administration was unprepared to provide)”고 한다.

(주2) 매케인과 슈네먼의 관계, 그리고 매케인의 대외정책의 입장에 대한 조선일보의 분석

(주3) 매케인은 러시아를 또다시 막아야 할 ‘복수의 화신’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