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제도의 역설

근대 서양의 발전은 중세 유럽의 가난에서 시작되었다. 국내 시장이 협소한 유럽인은 어쩔 수 없이 먼 바다로 나아가야만 했고 모험을 통해 발전의 기회를 찾아야만 했다. 주식 제도 역시 위기의 분담에서 나왔고, 고위험과 고이윤의 경영을 위해 공동의 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외국인과의 거래에서 항상 이윤이 보장됐고 상인의 자금도 풍성하여 조정은 엄청난 부를 누렸다. 당시 서양인의 눈에 중국은 도자기와 비단의 나라이자 아름다운 수공예품과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전통 문화를 보유한 나라였다.[백은비사, 융이 지음, 류방승 옮김, 박한진 감수, 알에이치코리아, 2013, p148]

중국인 학자의 눈으로 본 근대의 세계 경제사다. 중국인의 눈으로 보다보니 비교적 덜 알려진 중국의 경제사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왜 중국으로 수많은 은(銀)이 유입되었는지, 중국은 왜 대항해 시대에 뒤쳐졌는지 등을 동시대 유럽의 상황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인용한 부분은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주식회사 제도가 왜 중국에서 자리 잡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 이유는 이미 부가 소수에 의해 충분히 축적되어 있었고 권력체제는 여전히 봉건왕조 치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중국은 당시 세계최고의 수준의 각종 진귀한 농산물과 공예품의 생산국 이였다. 서양인들은 이런 상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그들의 식민지에서 캔 금은을 들고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니 중국인 자금조달을 위해 주식제도와 같은 복잡한 기법을 도입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한편, 인용문처럼 협소한 대륙을 가진 유럽인은 소위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어 또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귀금속을 찾기 위해 모험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그 자금도 귀금속을 찾아낸다는 가정 하에 그것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하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일종의 벤처캐피탈 내지는 프로젝트파이낸스 기법을 도입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美대륙을 약탈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콜럼버스가 유럽의 왕가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사모(私募)펀드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면, 백여 년 뒤 네덜란드에서 설립된 동인도회사는 공모(公募)의 형태를 가진 회사였다. 세계 최초의 주식제도와 세계 최초의 국유기업으로 알려진 동인도회사는 준정부의 성격으로 무역 독점권을 보유하고,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고, 식민지를 통치하고, 용병을 조직하고, 화폐를 발행했다.

어쨌든 이러한 주식회사 제도는 자금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노동가치론의 견지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동력이 궁극적으로 1,2차 산업과 같은, 이른바 “생산노동”이라 할지라도 그 생산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자본의 원활한 투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전히 미국의 벤처기업이 전 세계를 주도하는 원인에는 미국의 발달한 직접조달 시장에 있는 것도 한 주요원인이다.

동인도회사는 식민 무역 이익을 담보로 일반 시민들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주식을 발행한 것이다. 누구라도 주식을 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순식간에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1609년 암스테르담에 설립되었다. [중략] 뜨거운 주식 구매 붐을 타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총 650만 네덜란드 휠던(gulden : 네덜란드의 화폐 단위. 길더 – 옮긴 이)의 자금을 모집했다. [중략] 이렇게 무수한 네덜란드 민중이 무의식적으로 잔혹한 식민 무역에 휩쓸리다 보니 동인도회사가 태평양 군도에서 자행하는 노예무역이나 토착민 강제 노동, 무력으로 인도네시아를 정복한 일 따위에 대해서는 크게 추궁하지 않았다.[같은 책, pp111~112]

한편, 위 사례는 주식회사라는 “금융의 민주화”가 한 사회의 도덕성을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콜럼버스의 항해가 콜럼버스 개인과 군주들의 악행에 그쳤다면, 동인도회사는 주식 제도라는 “민주화”된 제도를 통해 시민을 잔혹한 식민주의에 동참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심의 off-balance 化는 이제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다. 노동자가 주식을 사면 그 회사의 노동자 권익에는 둔감해지게 마련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자산소유의 민주주의”를 통한 체제 보수화는 주식제도, 민영화, 모기지 등을 통해 보편화됐고, 이 점이 “경제 민주화”의 역설이기도 하다. 즉, 다양한 자금조달을 통해 한 덩어리가 된 여러 계급은 해당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는 자본가 계급이 된 셈이다. 협동조합, 사회책임투자 펀드 등 다양한 대안이 모색되고 있는데 어떤 제도가 기존의 제도를 극복할지 궁금하다.

연관하여 읽을만한 글 차(茶), 아편, 달러 / 노동자의 돈이 노동자를 목조르는가

12 thoughts on “주식회사 제도의 역설

  1. Byoung Gi Lee

    협동조합 등은 보조적인 역활을 할 뿐 주식회사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트릴 근본적인 대안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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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ticky

      저도 협동조합 방식이 근본적인 대안은 아니란 생각입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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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Ki-myoung KimKang

    요 며칠 동안 계속 딱 요 시기 네덜란드의 정치논쟁사를 읽고 있었는데, 구 지배자들은 물러났고, 새로 나라는 세워야겠고, 네덜란드 권역 전체의 경제를 총괄하는 통합된 국가기구는 없고.. 이런 시기에 온갖 종류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실험들이 벌어지는 게 재밌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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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별마

    글 전체가 흥미롭지만 특히 마지막 두 단락은 더욱 흥미롭네요 예전에 제국주의의 요소로 민주화를 뽑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홈지기님의 성찰과 맞닿아 보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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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ticky

      “민주화”라는 것을 일종의 절대선의 지향점으로 삼기 시작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의 아이러니가 간혹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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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들깨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글에 따르면 서양도 아메리카에서 착취한 금은 등으로 인해서 중국만큼 물자가 풍부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화폐자본은 매우 풍부했던 것 같은데, 요거랑 자금부족으로 인해 주식회사 시스템이 만들어지게 됐다는게 잘 매치가 안됩니다. 즉, 중국보다 ‘부’가 부족했던게 유럽이었는데 그 ‘부’가 산물인지 자금인지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아서 명쾌하게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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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ticky

      물론 다른 문명권에 비해서는 자본이 풍부했겠지요. 반면에 다른 문명권보다 더 공격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고, 전쟁을 벌이고,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수입해 들어와야 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본을 계속 주입해줘야 하는 상황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도 대규모의 투자였겠죠. 군대까지 갖춘 그야말로 준국가 조직이 해외에 파견되어 그 곳의 자원, 노동, 무역 등을 관장하는 회사니까요. 네덜란드는 그러한 상황에서 주식회사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자본투입의 속도를 더 가속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 자금여력이 풍부한 대기업이 더 많은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유상증자를 하고,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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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anonymous

    페북에서 링크타고 들어와서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이긴 한데, 인과 관계와 결론에 대해 질문을 하나 남기고자 합니다.

    네델란드의 동인도 식민 무역이 ‘금융의 민주화’ 때문에 나타난 도덕성 마비의 사례라고 했는데, 이에 대한 인과 관계에 의문을 갖습니다.

    해외 무역을 하고자 했던 무역상들은 자금 조달을 위해 주식회사 제도를 이용한 것 뿐이고, 약탈적 무역은 자금 조달이 주식회사 방식으로 되든, 개인 자금을 이용하든 그와 상관없이 자행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 민중들은 얼마나 잔혹한 식민 무역이 이루어졌는지 잘 알지 못했을 것이고요.

    이러한 논리에 의해 노동자 계급이 주식을 샀다고 해서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악한’ 자본가 계급이 되었다는 것 역시 논리가 맞지 않다고 봅니다. 실제로 주식 몇 주가 있다고 해서 자본가 계급이 된 것도 아니고, 투자자는 기업의 성장 과실을 함께 할 수 있고, 기업은 성장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이해관계가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국민이 주식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고 있는 국민연금이 대신 투자하고 있고, 사학연금이, 퇴직연금이 모두 주식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자본가 계급은 아니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한가지, 노동자가 자기 회사 주식을 사면 그 회사의 노동자 권익에는 둔감해진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사례나 연구가 있나요? 노동자 권익이라는 것 역시 장기적 관점과 단기적 관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회사가 성장하면 할수록 노동자 권익이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고, 하나의 독자 의견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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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ticky

      글쎄요? 노동자가 “사악해진다”고 표현하진 않았는데요? 🙂 제 글을 어떤 제도를 윤리적으로 단죄하려는 의도보다는, “민주화”라는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의견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더 많은 이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일반의 정서에 비추어 “금융의 민주화”가 그에 역행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아이러니도 있다… 뭐 그런 취지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예전에 쓴 글인데 이 글도 한번 참고하시고요. “노동자의 돈이 노동자를 목조르는가” http://economicview.net/340/ 이 글이 좀 더 기존 제도를 도덕적으로 비판한 듯 하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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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이웃겨

    유럽이…내수규모가 부족해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는 무척이나 중화스러운 관점 빼고는 일리가 있네요.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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