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의 충격은, 요란스럽게 자본주의와 관계를 끊었던 유일한 나라인 소련이 대공황으로부터 안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컸다. 나머지 세계 또는 그중에서 적어도 자유주의적 서방 자본주의가 침체를 겪었던 반면, 소련은 새로운 5개년계획하에 초고속으로 대대적인 공업화에 몰두했다. [중략]
바로 이러한 성과들이 모든 이데올로기 성향의 외국인 관찰자들 – 1930~35년에 모스크바에 몰려온, 적은 수이지만 영향력 있는 사회경제적 관광객들을 비롯한 – 에게, 소련 경제의 두드러진 원시성과 비효율성이라든가 스탈린의 집단화와 대대적인 억압이 보여준 무자비함과 야만성보다 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중략]
러시아의 5개년계획을 본따 ‘계획’이라는 말이 정계에서 통용어가 되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벨기에와 노르웨이에서처럼 ‘계획’을 채택했다. 매우 저명하고 상당한 지위에 있는 영국의 문관이자 기성 권력층의 중심인물이었던 아서 솔터 경은 나라와 세계가 대공황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사회적 계획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회복(Recovery)’이라는 책을 썼다.
영국의 다른 중도파 문관들과 공무원들은 PEP(Political and Economic Planning, 정치-경제 계획)라고 불리는 초당파적 두뇌집단을 창설했고, 뒤에 수상이 될 해럴드 맥밀런(1894~1986)같은 젊은 보수당 정치가들은 ‘계획’의 대변인이 되었다. 1933년에 히틀러가 ‘5개년계획’을 도입했듯이 나치조차 그러한 사고를 도용했던 것이다.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20세기 역사, 이용우 옮김, 까치글방, pp 138~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