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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가 언론이 아닌 이유

이유는 다른 것이 없다. 올라오는 기사를 보면 언론이라고 하기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언론이라 하면 자기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같은 보수지여도 조선은 상대적으로 동아보다는 자기 목소리가 있다. 현 정부에 대해서도 – 물론 저간의 사정이 있는 것 같지만 – 조선은 일정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논조를 편다.(지들이 보수의 정수라는 자존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동아는 그러한 뚝심이 없다. 자존심도 없다. 그저 청와대 찌라시에 맛 들여서 살아가고 있는 듯 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다음의 두 기사다.

이 대통령 강한 불신표명에 공공기관장 ‘긴장'(조선일보)
李대통령 “조직혁신 자신없는 사람 떠나야”(동아일보)

34개 공공기관의 청와대 업무보고 소식을 전한 두 개의 기사를 비교해보자. “도덕적 약점없이 출범한 정권”의 수장이신 이 장로님께서 “조직에 대한 자신이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는 초법적인 협박성 발언으로 분위기를 급랭시켰다는데 같은 보수지가 같은 사안에 대해 전하는 내용이 사뭇 대조적이다.

적어도 조선은 장로님의 발언 이후 이어진 공공기관의 업무보고내용을 전달하여 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반면 동아의 기사를 보면 이건 기사가 아니다. 이렇게 따옴표가 난무하는 기사는 보다보다 처음 본다. 그냥 이 장로님의 발언전문을 인용하면서 사이사이에 추임새만 집어넣은 것이다. 이런 글이 기사면 내 글은 퓰리처상 감이다. 그래서 동아일보가 언론이 아닌 것이다.

조선일보, 거대 미디어 제국을 꿈꾸는가

방통위 ‘대기업·신문 방송진출 허용’ 수용키로”란 기사에 말보태기도 귀찮고 예전에 쓴 글이나 재탕한다. 2007년 11월 15일 작성한 글이다. 빌어먹을 놈들..

11월 15일자 조선일보를 보자.

2면에 보면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공중파 방송의 중간광고 허용에 관한 기사가 비중 있게 실려 있다. 방송위원회에서 열린 공청회를 비판하는 기사다. 이미 표결을 통해 결정된 사안을 가지고 공청회를 하는 방송위원회를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사 바로 아래 딸린 기사였다.

“美, 신문, 방송 교차소유 확대”라는 제목의 기사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에서 현재 미국에서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동일한 지역에서의 신문과 방송의 “교차 소유(cross-ownership)”를 허용할 예정이라는 내용이다. 그동안 법으로 교차 소유를 금지한 사유는 미디어 독점을 막기 위해서였다. 허용하고자 하는 이유는 “언론사들이 경비 절감 등을 통해 지역의 뉴스 콘텐츠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다.

조선일보는 다시 미디어 섹션에서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신문, 방송 겸영 통해 뉴스품질 높여야”라는 기사로 이 소식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기사에는 미국의 미디어 업계의 목소리를 전하면서 교차 소유를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국내 환경을 이에 비교하고 있는데 기사에 따르면 “신문사는 각종 규제법규에 의해 팔다리가 꽁꽁 묶인 상태”라고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두 유력 대선후보의 ‘교차소유’에 대한 입장이 긍정적임을 전하고 있다. 특히 이명박 후보는 “매체 간 교차소유는 기본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재밌는 사실은 FCC의 교차소유 허용은 아직 표결도 들어가지 않았고 해당 기사들은 오로지 FCC의 회장 케빈 마틴의 뉴욕타임스 기고문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틴 회장은 교차소유 안건이 다음달 18일 FCC에서 표결에 부쳐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고 FCC 위원들 중 공화당 추천인사가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말한 것뿐이다. 결국 그러한 내용을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보도하는 것은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요컨대 이러한 무리한 기사와 기사의 배치로 보건데 조선일보는 방송위의 중간광고 허용결정을 신문의 향후 위상 제고에 활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실 마틴 의장의 이러한 제안은 사실 광고수입의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문업계가 방송사 소유를 통해 수익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조선일보는 뉴스의 품질을 말하고 있으나 실은 그들이 비판하는 지상파의 중간광고 허용만큼이나 경제적 이익에 목말라 있을 뿐이다.

그동안 신문, 방송 겸영 사안은 한나라당이 이종매체간의 교차소유를 허용하는 신문법 개정 법안을 제출했는가 하면 조선일보가 신문법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보수세력과 신문사의 지속적이고 주요한 현안과제였다.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디딤판이 위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로 ‘선진국’ 미국의 언론환경의 변화다.

미국에서 신문, 방송의 교차소유가 허용될 경우 국내 언론환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테고 여하한의 경우 국내에서도 교차소유가 허용되면 공중파 방송국에 신문사가 대주주로 참여하여 거대한 미디어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다. 그리고 해당 기사들은 그러한 분위기를 유도하려는 일종의 낚시 기사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에서 신문이 방송을 소유하거나 또는 방송이 신문을 소유하는 것이 조선일보가 말 한대로 “뉴스품질”이 높아지는 좋기만 한 일일까?  신문의 경우를 보면 우리나라 시장은 소위 조중동 3개 사가 전체 시장의 70%를 점하고 있고, 방송의 경우 지상파 방송이 전국 가시청 가구 점유율이 50%를 훨씬 넘고 있다. 즉 우리나라의 언론환경은 어느 나라 못지않은 독과점 시장이다. 이런 상태에서 신문과 방송의 교차소유를 허용한다면 엄청난 미디어제국이 탄생하는 것이다.

어쨌든 현재까지도 미국을 비롯한 유럽각국은 언론독점의 심각한 폐해를 잘 알고 있기에 신문, 방송 겸영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FCC의 이번 규제완화 시도는 2003년에도 있었다. FCC는 지난 2003년에도 규제완화 법안을 내놓고 표결에서 이를 통과시킨 바 있다. 하지만 미국 항소법원이 이 법안에 대해 무효판결을 내림에 따라 FCC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만큼 언론에 대한 규제완화 사안은 첨예한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고 중대한 사안임을 알 수 있다.

지상파의 중간광고에는 시청자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신랄한 비난을 해대는 한편으로, 신문사의 방송사 소유와 경영에 대해서는 뉴스의 품질을 높이는 시도로 칭송하는 모습이 현재 우리 언론의 상황이다.

관련글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1/15/2007111500091.html
http://www.kpf.or.kr/public/public_paper_02_viewdetail.php?txtId=20030801C001003
http://www.kpf.or.kr/datas/pdsindex/simimg/200702061422468.pdf
http://www.ccdm.or.kr/board2/board_read.asp?bbsid=declar_01&b_num=31148&page=8

동아의 마지막 보루는 ‘브래들리 효과’?

오바마의 승리가 점점 가시화되니까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 특히 개인적으로 즐겨보는 동아일보의 이른바 ‘브래들리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거의 종교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수언론으로 지칭되는 조중동과 진보언론으로 지칭되는 한겨레/경향의 ‘브래들리 효과’에 대한 입장을 비교해보았다. 역시 확연히 차이가 난다. ‘브래들리 효과’를 주문처럼 외우는 것은 역시 동아다. 상황을 분석하기보다 주문을 외우는 동아 파이팅!

브래들리라는 이름을 가진 – 스펠링은 전혀 다르지만 🙂 – 밴드도 있다. 이들 노래를 들으면서 신문기사를 감상하시길.

오바마 승리 낙관 아직 이르다(동아, 2008년 10월 20일)
결론적으로 막판 변수와 브래들리효과(백인 유권자의 흑인 후보에 대한 이중적 투표 행태) 등을 고려할 때 오바마 후보의 승리를 낙관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USA 선택 2008]또 오바마가 웃었다(동아, 2008년 10월 17일)
하지만 ‘컴백 키드'(come back kid)로 불리는 부도옹(不倒翁) 매케인 후보가 사력을 다한 추격전을 펼칠 것으로 보이며, 역대 대선에는 없던 ‘브래들리 효과'(흑인 후보에 대한 백인들의 이중적 태도)를 비롯한 변수들이 남아 있어 승부가 끝났다고 단정하긴 어렵다는 의견도 많다.

벼랑끝 몰린 매케인 ‘이유 있었네’ (조선, 2008년 10월 17일)
하지만 그의 당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언하긴 이르다. 투표일까지 아직 3주가량 남은 데다 백인 유권자들이 흑인 후보를 지지하다가도 막상 투표장에선 백인 후보 쪽으로 마음을 바꾼다는 ‘브래들리 효과’가 막판 변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브래들리 유령’도 14%p 뒤집기는 힘들다(한겨레, 2008년 10월 16일)
여전히 변수다. 하지만 현 지지율 상황을 역전시킬 정도는 아닐 것이다. 특히 젊은층 유권자가 다수인 지역에서는 브래들리 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 실제로 오바마는 젊은층 사이 지지율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

오바마 진영 “백인 노동자를 설득하라”(중앙, 2008년 10월 15일)
유에스에이투데이와 갤럽이 10∼12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오바마는 지지율 51%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44%)를 7%포인트차로 앞섰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 ‘오바마를 지지한다’거나 ‘지지후보가 없다’고 답해놓고 투표소에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찍는 유권자들이 나올 가능성 (브래들리 효과)이 있어 오바마는 지지율 격차를 두 자리 숫자로 늘리기 전에는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막판 ‘브래들리 효과’ 두 캠프 모두 촉각(동아, 2008년 10월 14일)
시카고대의 마이클 도슨 교수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시장, 주지사, 상하원 의원 선거 등에서 브래들리 효과가 약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통령선거는 차원이 다르다”며 “백인의 흑인후보 지지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브래들리 효과’는 없다?…전문가들 “역효과도 있다”(경향, 2008년 10월 13일)
선거 여론조사 전문가인 마이클 트라곳 미시간대 교수는 “브래들리 효과는 시작부터 이름이 잘못 붙여진 것”이라고 말했다. 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당시 여론조사는 인종 변수를 포착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재자투표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해 투표 결과 예측에 실패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美대선 한달 앞으로]표밭전쟁 ‘4가지 지뢰’(동아, 2008년 10월 4일)
네 번째로 꼽았지만 ‘브래들리 효과’(여론조사에서 앞선 흑인 후보가 실제 개표에서는 패배하는 현상) 재현 여부는 앞의 모든 변수를 모두 삼킬 만한 메가톤급 태풍의 눈.

미(美) 대선 D-35 … 막판 4가지 변수는?(조선, 2008년 9월 30일)
이런 현상은 여론조사에서는 흑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한 후 투표장에서는 백인 후보를 선택하는 ‘브래들리효과(Bradley Effect)’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 편(?)의 당파성을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현재 거의 육박전으로 치닫고 있는 언론전쟁에 대해 다룬 글 중 가장 맘에 드는 글. 역시 pearl님~!

그런데 21세기 한국 언론 상황을 들여다 보면 마치 19세기 말 미국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미디어 간 전쟁이 너무나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고, 전선도 대 의 단순구도를 한층 벗어나 ‘조중동’ 대 ‘한겨레경향’, ‘올드미디어’ 대 ‘뉴미디어’, ‘신문’ 대 ‘방송’ 등 여러 구도로 형성됐다. 사설이나 칼럼과 구분이 안 되는 신문 1면, 입맛대로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고 연출 사진 논란에 상대방에 대한 낯뜨거운 비난까지, 지독한 전투 속에 현대 저널리즘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신뢰’라는 단어는 완전히 실종됐다.

똑같은 촛불집회 기사를 보도하면서 조중동은 전경차에 망치를 들고 있는 시위대의 사진을 내보내고 한겨레나 경향은 시위대에 소화기를 분사하는 전경의 사진을 내보낸다. 모두 시위에서 찍은 사진은 맞지만 다른쪽에 대해서는 일부러 눈을 감는다. 한쪽은 촛불 때문에 경제위기가 온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고 한쪽은 촛불을 계속 들어야 한다고 선동한다. 물론 사실 왜곡이나 주장의 당파성이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것은 조중동 쪽이지만 한겨레 경향도 그동안의 보도태도에 비해 훨씬 당파적이라는 비판이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는 판이다.[미디어 대전,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까, 2008.7.9, pearl]

형식이 내용을 배반하는 신문기사 하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들 중에는 특히나 다른 단어들보다 정치사회적 의미가 커서  사용하는데 주의를 요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단어들은 그것을 쓰는 사람들이 살아 움직였던, 또는 움직이고 있는 역사를 관통해오는 과정에서 가졌던 애초의 의미와 사회적 맥락, 그리고 여러 선입견들이 짧은 단어 하나에 녹아들어 있다.

예를 들자면 예전에 한번 언급하였던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이 있을 수 있고, ‘386’, ‘빨갱이’, ‘깜둥이’, ‘병신’ 등등은 그것과 유사한 표현과 사뭇 다른 정치사회적 함의를 담은, 사용에 매우 주의를 기해야 하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사용에 주의를 요하는 단어가 있는데 오늘 발견한 어느 신문기사에 이 표현이 여과 없이 드러난 것을 발견했다.

‘동성연애자’

이 단어는 우리사회에 아직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서슴없이 피력되던 시기에 쓰이던 표현이었다. ‘호모’보다는 덜 모욕적인 표현이긴 하나 성적취향을 표현함에 있어 ‘연애’라는 표현이 주는 미묘한 느낌에 부정적인 의미가 실려 최근 몇 년간 부정적인 표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게이’, ‘동성애자’, ‘레즈비언’ 등등의 표현으로 동성애자들을 호칭하고 있다.

아래 퍼온 신문기사는 동성애자의 성적취향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에 대한 오랜 논쟁의 와중에 선천성에 손을 들어주는, 어찌 보면 동성애자들이 맘에 들어할만한 기사다. 그런데 문제는 이 외신을 인용 보도한 기자의 표현이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금기시되고 있는 ‘동성연애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본문에 들어가면 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있다. 기자는 “연구결과 정상 남성들과 동성애여성들은” 이라고 써 결국 <이성애 남성=정상 남성, 동성애 남성=비(非)정상 남성>이라는 등식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스스로 내비췄다. 기사의 내용과 형식이 아주 극단적으로 배치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동성연애자 ‘ 뇌 구조 부터 다르다

【서울=메디컬투데이/뉴시스】
동성연애자가 되기 쉬운 사람은 이미 자궁속 태아기 부터 이 같은 소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17일 스웨덴 연구팀이 ‘미국립과학원보’에 발표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동성연애남성들과 여성들은 좌우측 뇌 크기가 절반씩 거의 같은 반면 동성연애여성들과 남성들은 우측 뇌가 좌측 뇌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다.

뇌영상촬영을 통해 진행된 이번 연구결과 동성애자들은 특히 뇌 속 ‘편도(amygdala)’라는 영역이 일반인들과 크게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결과 정상 남성들과 동성애여성들은 편도내 오른쪽 부위의 신경 연결이 왼쪽에 비해 더욱 많은 반면 여성들과 동성애남성들은 좌측 편도부위의 신경연결이 더욱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 같은 차이로 인해 태아기 부터 동성애자가 될 소인을 타고 나게 된다고 밝혔다.

원나래 기자 wing@mdtoday.co.kr
<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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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는 다음 포털서비스에서 퍼왔다. 이 기사를 제공한 메디컬투데이에 가보았다. 그랬더니 그 사이트에 있는 기사는 흥미롭게도 당초 기사의 ‘동성연애자’를 ‘동성애자’로, ‘정상 남성’을 ‘남성’으로 바꿔놓았다. 아마도 기자나 편집자가 다음 게시판에서의 빗발치는 비난을 본 모양이다.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언론은 어느 특정한 지적에 대해 그 지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원래 기사를 바꾸는 행위는 – 특히 웹사이트에 올려진 기사에 대하여 – 자초지종의 설명 없이 바꾸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과거 종이신문에서는 이미 발행한 신문에 실린 기사를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당연히 다음날 신문에라도 ‘고칩니다’다 하고 정정 기사를 내곤 했다.(주1)그렇다면 웹사이트에서도 정정기사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공지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메디컬투데이의 해당 기사는 그런 공지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주1) 물론 그 사회적 파장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정정기사는 아주 눈에 뜨이지 않는 조그만 구석에 싣곤 하지만

이래서 내가 박노자 씨를 좋아한다

이래서 내가 박노자 씨를 좋아한다. 평소 그의 점잖은 선비풍의 글을 읽다가 이렇게 단어는 얌전하게 쓰면서도 속 내용은 신랄한 비아냥거림을 접하게 되면 평소 얌전한 사람이 노래방에서 노래빨날리는 광경을 보는 듯한 신선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평소의 글투에도 약간 장난기가 섞여 있는 진중권 씨나 우석훈 씨의 글이나 말과는 또 다른 쾌감을 제공한다.

박노자 씨 말마따나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 노선의 관철은 역설적으로 정치적 레토릭의 급진화와 경제적 노선의 보수화의 교묘한 줄타기를 했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의해 가속화될 수 있었다. 막 독재의 틀을 벗어난 인민에게 몇몇 탈권위적 정치행태를 보여주면 경제적으로는 충실한 우파 노선을 걷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은 그들을 ‘좌파’라고 부르기 서슴지 않았다. 물론 그 정부들의 하부 추종자들 중에서는 ‘나름 좌파’도 섞여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박노자 씨도 그렇게 봤는지 모르지만 나도 솔직히 그들이 이전의 두 정부를 ‘좌파’정부로 몰아세운 것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뜻이 그렇다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들이 그런 정도의 머리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그 친구들 하는 행동을 보면 진정으로 그 시절을 ‘상종 못할 빨갱이 놈들의 세상’이었고 지금은 ‘사람 사는 정의로운 세상’으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이들이 자신들 스스로가 노무현 정부 시절 득달같이 비판하던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에 대한 의문제기를 이제 시민들이나 네티즌들이 주장하자 이들을 마치 ‘돌아온 반도(叛徒)’ 대하듯이 대하고 있는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좌파/우파 구분법이 진정성이 없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나폴레옹 귀양 갈 때와 파리 입성할 때의 헛소리가 이렇게 차이가 나겠는가 말이다. 머리가 어느 정도 있었다면 양쪽의 주장 간에 수위조절을 했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런 꼴을 보고 있자면 이 세상이 진짜 메트릭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제 정신도 아니고 정치이념의 ABC도 모르는 것들이 기자질을 하고 있고 하버드 수석 졸업했다고 뻥치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국회에 입성하겠는가 말이다. 하긴 학살자 부시가 세상의 지배자인 세상이니 그 정도는 약과인지도 모르겠다.(주1)

박노자 씨의 ‘조중동의 치명적 실수’ 읽기

 

(주1) 부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늘자 동아일보는 부시 측근의 부시 재임시절의 비리와 오판에 대한 폭로에 대해 “뒤늦은 정의감? 두둑한 인세?”라는 제목으로 그것들을 폄하하면서 관련사진에는 생뚱맞게 부시의 인간적인(?) 면모가 담긴 사진을 첨부하였다. 전형적인 용비어천가적인 기사였다.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까지 이렇게 사탕발림을 하는 신문이니 정말 할말 다했다

밋밋한 성폭행 기사 섹시하게 만드는 비법

사실 우리나라 언론이 좀 과도하게 심각한 면이 없잖아 있다. 특히 서구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방송이 그런 경향이 강한 것 같은데 서구의 뉴스는 쇼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우리네 뉴스도 이러한 경향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아직 조금 경직된 듯한 모습이 남아 있다. 얼마 전 어떤 여자 아나운서가 뉴스 끝나갈 즈음 피식 웃었다고(정황상 비난받을 정황인 것은 같았지만) 바로 잘려버린 해프닝은 뉴스, 즉 언론이 가지는 경직된 권위에 대한 사회의 암묵적인 동의 속에 벌어진 일이라 할 수 있다.

신문은…

요즘 뉴스를 안 봐서 알 수 없지만 신문은 특히나 지면에 활자를 통해서 소식을 전달하니 만큼 더 인간적인 면이 배제된 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러기에 실은 남들 보기에는 코미디인 내용도(어느 신문이라고 명시하지는 않겠다) 본인들은 매우 심각한 언어와 화법으로 전달한다.

각설하고…

신문도 방송도 사건의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고 기자 자신의, 또는 매체 특유의 목소리만 소신 있게 – 물론 왜곡하지 않고 – 담아낸다면 조금은 어깨에 힘 빼고 이야기해도 크게 문제없지 않나 싶다. 신문기사라고 한 두 마디 특유의 농담이나 풍자를 집어넣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농담하지 말아야 할 데서 농담하면 이건 문제다. 연합뉴스가 3월 26일 “부산서 10대 성폭행 사건 잇따라”라는 제목으로 최근 사회를 두려움에 빠트리고 있는 성범죄 사건들의 한 토막을 전하고 있다. 제목은 평범하다. 다만 기사내용이 좀 거시기하다.

“[상략]경찰 조사결과 황군 등은 반항하는 김양의 손을 붙잡고 “맞고 할래, 그냥 할래”라며 협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 사상경찰서도 이날 10대 여학생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한 뒤 성폭행한 혐의(특수강간)로 윤모(18)군 등 3명을 구속했다.[하략]”(출처)

내용이 선정적이다. 황군은 김양에게 저 말 말고도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쌍욕도 했을 것이고 온갖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은 기자에게 대충 그런 내용들을 함께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자는 유독 저 말을 기사에 집어넣은 이유는 뭘까. 아마도 기사가 너무 밋밋해서 그랬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기사 소재가 너무 평범했다. 아니 할 말로 십대들의 성폭행 사건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자행되고 있을 것이다. 사건전개도 뭔가 특이한 맛이 없다. 그저 그렇게 묻혀버릴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살려낸 것이 바로 저 멘트다.

“맞고 할래, 그냥 할래”

기사를 읽는 사람들은 ‘어릴 때 삥뜯는 애들이 이런 말 자주 했는데’ 하며 피식 웃을 것이다. 기사에 한번은 눈길을 던져줄 것이다. 김양이 황군한테 저 말 들었다고 무서워서 성폭행을 당해도 참았을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기사에 포인트는 준 셈이다. 고로 저 멘트는 바로 기자를 위한 황군의 립서비스였을 뿐이다.

그리고 연합뉴스의 기사를 받아 옮긴 중앙일보는 여기서 더 오버한다. 본래 기사의 제목을 바꾸진 않았지만 메인화면의 제목은 다음과 같이 바꿨다.

원 기사와 같은 취지로 사이트를 편집하는 이의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대목이다. 결국 나도 그 제목에 낚였다. 그리고 썩 유쾌하지는 않다. 여하튼 중앙일보의 제목 신공은 이전에도 한번 지적한바 있지만 그런 식은 내가 서두에 언급하였던 ‘어깨에 힘 빼고 뉴스 전하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저열한 방식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