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깃발법’은 어리석은 법인가?


이미지 출처

영국은 공학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과시했지만 자동차산업은 개발이 더딘 편이었다. 자동차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철도산업 관계자들이 의회를 압박하여 ‘붉은깃발법(Red Flag Act)’을 통과시킨 탓이었다. ‘붉은깃발법’에 의하면 ‘길 위의 기관차’ 자동차는 시내에서 시속 2마일(약 3.2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릴 수 없었다. 따라서 보행자가 시속 3마일(약 4.8킬로미터)으로 걸으면 자동차보다 빨리 갈 수 있었다. 시골에서는 시속 4마일(6.4킬로미터)까지 가속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더욱 안전을 기하기 위해 운전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동차가 가는 길 60야드(약 55미터) 앞에서 낮에는 붉은 깃발을, 밤에는 등불을 흔들어 차가 온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2030 에너지전쟁, 대니얼 예긴 지음, 이경남 옮김, 사피엔스21, 2016년, pp 815~816]

부적절한 규제가 어떻게 기술과 경제의 발전을 저해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이러한 억지스러운 법률을 통해 경제에 피해를 주는 대표적인 규제가 저 유명한 곡물법인데 이 붉은깃발법 또한 곡물법의 고향인 영국에서 시행되었다는 점이 재밌다. 어쨌든 당시의 입법자들은 인용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다시피 자동차를 ‘길 위의 기관차’라 인식하고 있었기에1 Locomotive Act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법들을 1861년부터 1878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입법화하였다. 영국은 그 후 1896년에 이르러서야 제한속도를 시속 14마일(23킬로미터)로 완화하였다.

그런데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당연히 어처구니없는 규제로 여겨지지만,2 한편으로 이 법의 탄생 배경을 꼭 당시의 철도자본의 입김으로만 볼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3 전에 읽은 서양인의 조선견문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노면전차가 운행을 시작한 20세기 초 승객들은 종종 전차의 속도를 감안하지 않고 무턱대고 차에서 뛰어내리다가 다치곤 했다한다. 그리고 전차에 치이는 사고가 나면 전차 자체에 대해 큰 분노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어쩌면 인간의 속도를 넘어서는 기계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전차나 자동차에 대한 일종의 러디즘(Luddism)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인은 자동차 사고가 나더라도 대개 차에 중요한 결함이 발견되지 않는 한 운전자 탓을 하지 자동차 탓을 하지 않는다. 자동차 사고로 지금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만 자동차가 가져다주는 편익이 그 비용을 초과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사상자의 발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또는 그렇게 교화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입법 러다이트들은 자동차라는 기계 자체가 문제라 생각하고 기계를 금지하지는 못하지만 작동 요령을 강력하게 규제한 것일지도 모른다.

Trolley Problem.svg
By Original: McGeddon Vector: Zapyon – This SVG diagram includes elements from this icon:, CC BY-SA 4.0, Link
이 유명한 그림에서 누가 ‘어느 차선으로 갈래’라고 묻고 당신이 ‘1명 쪽으로’라고 답하면 당신은 현대인이자 공리주의자다. 러다이트는 아마도 전차를 운행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시 영국 경제가 다른 나라를 앞지르고 있기에 곡물법이라는 보호무역주의와 붉은깃발법이라는 기존 자본의 이익 보호에 더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법이 먹혀들기 위해서는 일반인도 그 보수(保守) 심리를 공유하여야 원활한 규제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신문물에 대한 공포감은 어느 정도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정서가 현대인에게는 없을까? 우리 또한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이 상용화를 타진하는 지금 내외부자 모두 그것들이 가져올 피해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을 다시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계는 분명히 인간에게 피해를 줄 것이다. 인공지능은 일자리를 뺏을 것이고 자율주행 자동차는 사람을 칠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우리는 인간에게 당한 것보다 더 큰 분노를 느낄 것이다. 어느 순간 제2의 붉은깃발법의 제정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또는 그보다 더 과격한 러다이트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의 러디즘이나 붉은깃발법이 어리석다고 여기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급작스럽게 밀려드는 신문물에 대한 피치 못할 저항일수도 있었다. 우리도 지금 충분히 고민할 시간도 없이 인공지능 시대가 오고 있지 않은가?

  1. 당시에는 아직 증기차가 대세였기에
  2.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8년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한 현재의 은산 분리를 붉은깃발법에 빗대어 규제혁신을 주문하였다고 한다
  3. 유독 영국에서만 시속 5킬로미터 미만의 제한하는 과도한 법이 만들어졌다는 점을 일단 제쳐두고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