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코미디

The Big Short 感想文

전에 읽었던 마이클 루이스의 책을 스크린에 옮긴 동명의 작품 The Big Short를 어제 감상했다. 원작자가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금융폭탄” 중 하나인 MBS의 발명가 루이스 라니에리를 언급하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자칫 영화감상의 맥락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난해한 CDS니 CDO니 하는 복잡한 금융공학 발명품의 개념을 모델, 요리사 등 비전문가의 입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설명한달지 극중 배우들이 카메라를 보며 이야기한달지 하는, 굳이 구분하자면 스탠드업 코미디의 스타일을 빌려 매끄럽게 극을 진행시켜 나간다.

2005년 5월 19일 마이크 버리(Mike Burry)는 그의 첫 서브프라임 모기지 계약들을 성사시킨다. 그는 도이치뱅크로부터 6천만 달러의 신용부도스왑(이하 CDS)를 구입했는데,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채권에 각각 1천만 달러를 지불했다. [중략] 그는 모기지 풀 중 가장 부실한 것을 찾아다니며 수십 권의 투자설명서를 읽고 수백 권의 투자설명서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는 여전히 그때까지도 매우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그것들을 작성한 변호사들을 제외하고는 그것들을 읽은 유일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The Big Short, Michael Lewis, Norton, 2010, pp49~50]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마이크 버리는 영화에서 주택시장의 붕괴에 베팅한 소수 중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버리는 “음악이 흐르는 동안은 춤을 춰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외골수적인 기질을 타고난 펀드매니저였다. 그래서 그는 – 당연히 해야 할 일인 – 모기지 채권의 투자설명서를 샅샅이 읽고 시장이 붕괴될 것임을 직감한다. 스티브 카렐이 연기한 마크 바움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역시 면밀한 점검을 통해 춤을 추는 대신 음악이 꺼질 것이라는 것에 돈을 걸고, 시장의 붕괴를 기다린다.

영화는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뛰어난 안목으로 시장의 붕괴를 예측했는가 보다는 – 그런 부분을 다 설명하다보면 영화가 코미디가 아니라 지루한 다큐멘터리가 될 터이니 – 이들의 선지자적 태도와 이후의 시장의 어리석음이 어떻게 서로 긴장감을 유지해가며 갈등하게 되는지를 주로 조명한다. 부실이 증가함에도 그 자산과 연계된 CDO 채권의 값은 상승한달지, 신용평가사가 투자은행을 상대로 채권등급 장사를 한달지, 기자는 시장상황을 정확히 알리는 기사쓰기를 거부한달지 하는 등의 부조리가 선지자들을 괴롭히는 상황 말이다.

영화의 결말은 – 스포일러라 할 것도 없이 –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바 주인공들의 승리로 결말이 난다. 마이크 버리는 400%가 넘는 수익률을 시현하였고, 마크 바움은 개인적으로도 1억 달러를 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는 이들은 이들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비극적인 코미디다. 우리가 알다시피 월가나 금융당국 그 어느 곳에서도 시장의 붕괴에 대해 책임진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영화는 후일담으로 버리만 네 차례의 회계조사를 받는 등 당국의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승리자는 결국 부조리한 세상이었다.

여하튼 우리는 이제 어느 정도 평온해진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다. 시장도 안정을 찾은 듯 하고 Fed도 금리를 인상했다. 그렇다면 이제 경기는 늘 그랬듯이 경기변동설에 따라 다시 상승기로 접어드는 것일까? 하지만 최근 전 세계 주식시장은 동반 폭락하였고, 유가는 30달러 바닥을 뚫고 내려갔고, 중국시장에 대한 경고신호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마치 투자은행이 증권화와 부외금융을 통해 버블 붕괴를 이연시켰던 것처럼, Fed 등 중앙은행이 양적완화와 긴축재정을 통해 더 큰 버블의 붕괴를 이연시키고 있는 상황이 아닐까?

George Harrison과 Monty Python

George Harrison: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의 감상문을 적으면서 언급하지 않았던, 그러나 개인적으로 무척 놀랐던 에피소드 하나는 George와 Monty Python과의 관계다. Monty Python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소개했던, 특히 스팸 에피소드로 유명한 영국의 코미디 집단이다. 지극히 영국적인 냉소를 담고 있는 이 코미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그 집단의 걸출한 연기실력과 웃기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도 마다하지 않고 망가지겠다는 투철한 직업정신이다.

이 집단이 배출한 인물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이는 아무래도 Brazil 등을 감독한 Terry Gilliam 이다. George 의 다큐에서도 이 감독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그가 밝힌 사실 하나는 George가 Monty Python의 대단한 팬이었다는 점이다. 왠지 비틀즈의 심오한(?) 음악세계와 진지한 종교적 성찰이 Monty 사단의 제대로 엉망인 코미디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Monty 사단의 코미디가 가지고 있는 내공을 생각해보면 적당한 지점에서 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역시 Monty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흥미로운 접점이었다.

Terry의 인터뷰로 돌아오면 George는 단순한 Monty의 팬을 넘어 이들이 만들려고 했던 영화의 제작자로 직접 나서기도 했다고 한다. 그 작품은 이들이 극장 개봉용으로 만든 몇몇 작품 중 하나인 Life of Brian 이다. 신약성서와 예수의 삶을 Monty 식으로 패러디한 이 작품은 제작 당시 反기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투자자도 끊긴 상황이었는데 이때 George가 제작자로 나선 것이다. 그는 제작비를 대기 위해 집까지 담보로 잡았다고 하는데 Terry는 영화 한편 보겠다고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한 사람이라며 낄낄거렸다.

그런데 왜 George는 왜 이 논란이 많은 영화 Life of Brian의 제작자로 나섰을까? 영화 한편이 보고 싶어서? Monty의 팬이어서? 영화제작을 통해 돈을 벌려고? 당시 인도의 종교에 심취해있는 그인지라 기독교에 냉소적인 영화내용이 맘에 들어서? 어느 하나일수도 있고 이 모두일수도 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정황은 그가 난데없이(?) 영화제작자로 나선 것에 대해 뜬금없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또한 다큐에서 말하는 George의 이중적인(?) 캐릭터를 – 한없이 다사롭기도 하고 무례할 정도로 직설적이기도 한 – 감안해도 이해가 가는 행동이기도 하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비틀즈의 위대한 작품과 함께 또 하나의 선물을 받았다는 점이다. 감사합니다. 🙂

영화 일부 보기

거세당한 노동자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Soul is the rhythm of sex. and it’s the rhythm of the factory too. The working man’s rhythm. Sex and the factory.”

더블린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음악영화 The Commitments의 대사다. 공장노동자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에게 매니저 Jimmy가 소울 음악의 의미를 설명하는 장면인데, 노동, 섹스, 그리고 음악을 서로 연결시켜 이것들이 리듬이라는 공통요소로 묶인다는 논리가 인상적이다. 규칙적인 기계음을 반복하면서 노동이 이루어지는 공장이라면 이러한 주장이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이러한 시각을 확장해보자면 노동의 박탈은 하나의 거세라고도 할 수 있다. 노동하지 않는 노동자는 기계로부터 떨어져 나간 부속처럼 그 존재의의 자체를 부정 당하는 것이기에, 거세당한 생물과도 같아진다. 아니, 거대한 기계로부터 거세된 생물의 생식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을 잃은 남성 노동자는 일상의 삶에서도 남성적 힘을 잃은 性불능자로 낙인찍혀 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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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monty”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eBay.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The Full Monty“>Fair use via Wikipedia.

이러한 가정이 바로 영화 The Full Monty의 전제조건이다. 입지우위를 상실하고 쇠락해버린 철강공업도시 셰필드에서 노동자들에게 미래는 없다. 그래서 해고노동자 가즈와 데이브는 가즈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공장에서 좀도둑질이나 시도하는 등 부질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가즈는 아내에게 이혼을 당했고, 데이브는 아내와 정상적인 성생활을 풀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남성성의 상실.

탈출구 없는 그들의 삶에서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된다. 여성전용 남성 스트립쇼가 인기를 얻는 것을 본 가즈가 친구들에게 스트립쇼로 돈을 벌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런 엉뚱한 계획이 세워진 데에는 스트립쇼를 본 여성들이 자신들의 배우자를 멸시하는 광경을 지켜본 가즈의 울컥함도 한몫했다. 즉, 자본으로부터 거세당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남성성의 과시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그들이 성공리에 스트립쇼를 마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일상을 박탈당한 이가 삶의 끈을 부여잡을 수 있는 다른 무언가로 – 예술, 스포츠, 이 영화에서는 스트립쇼 –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설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슷한 설정으로 Brassed Off, Billy Eliot,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The Commitments가 떠오른다. 감동의 무게도 비슷하게 둔중하다.

코미디라는 장르가 당의정의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전제조건이나 전개과정이 실제 삶에서 벌어진다면 이건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다. 해고당한 일군의 노동자가 알랭드보통이 이야기한 “지위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이, 기껏 스트립쇼라는 사회적으로 백안시되는 노동행위였다는 사실은 희극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비극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쇼무대에서 주인공의 아내들이 남편들의 모습에 흥분하는 상황을 통해 지위에 대한 불안의 해소(흥행성공을 인한 물질적 보상)와 남성성의 회복이라는 극대화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제작진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거세된 노동자로서의 남성성은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쪽의 성공이었을 뿐이다.

21세기 자본주의. 이러한 거세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가즈와 데이브처럼 스트립쇼를 통해 뽕도 따고 임도 보는 운 좋은 노동자는 그리 많지 않다. 지금도 노동자 김진숙은 한진중공업의 대량해고에 맞서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이고,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에서는 수많은 해고노동자가 식량보조카드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거세된 자존심은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 썸머는 극중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말미에 가보면 알겠지만 또한 여름의 본래 뜻을 내포하여 인생의 다양한 단계를 은유하기도 한다. 수줍음 많이 타고 도전적이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조용한 성격의 남자 탐은 한 카드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한다. 건축가가 꿈이지만 맘속에서만 품고 있을 뿐이며, 사장의 새 비서로 온 썸머가 마음에 들지만 쉽게 다가서지도 못하는 그런 남자다. 그런 탐에게 접근한 것은 오히려 썸머 쪽이다. 영국의 락음악을 좋아하는 탐이 엘리베이터에서 Ths Smiths의 노래를 듣고 있는데, 헤드폰 사이로 흘러나온 멜로디에 썸머가 호감을 보인 것이다. 그 뒤 둘의 사이는 가라오케에서의 회식을 계기로 가까워져 연인도 아닌,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사이까지만 발전한다. 사랑에 대한 충고마저 한참 어린 여동생에게 듣곤 하는 탐은 그런 단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하지만 썸머는 어느 새 그의 곁을 떠나가 버린다.

소위 스크루볼 로맨틱코미디도 아니고 에피소드도 보는 이에 따라서는 밋밋하여 이걸 과연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영화다. 끝의 해피엔딩을 삭제해도 극의 전체적인 진행에 별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피엔딩 영화라 보기도 어렵다. 전적으로 독립영화적인 감성에만 기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메이저 코드도 따라가지 않으며, 마이너장르에 가까운 음악들의 코드가 주요 에피소드에 쓰인다는 점에서 그런 유의 문화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플러스 점수를,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거 뭥미’에 가까운 마이너스 점수를 받을 운명을 타고난 그런 영화다. 그렇지만 역시 사랑에 관한 분명한 사실, 그것은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한 Bittersweet Symphony이며, 사랑과 미움이 자웅동체라는 사실을 알 나이쯤의 사람이라면 십분까지는 아니더라도 6분내지 7분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에 사랑스러운 작품이기도 하다.

명동의 중앙시네마에서 현재 개봉중인데 들어오는 관객 수로 보건데 곧 막을 내리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멋진 사랑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들은 서두르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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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두번 등장하는 The Smiths의 앨범 Louder Than Bombs의 자켓이미지

Being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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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movie poster for Being There” by www.movieposter.com.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Being There“>Fair use via Wikipedia.

성폭행 피해자의 법정다툼을 다뤘다는 소재 측면에서 Anatomy Of A Murder 가 The Accused 의 원조 격인 작품이라면 이 영화 Being There 는 사회 부적응자의 세상 살아가기라는 유사점 때문에 Forrest Gump 의 원조 영화라 할만하다. 단 Forrest Gump 가 60년대 말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등 우파적 시각을 견지하며 개인적으로는 감상하기에 다소 불편했던 반면, Being There 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는 다소 비껴서있지만 주류사회의 위선을 비웃는다는 점에서 좀 더 사회비판적인 점이 맘에 들었고 또한 왠지 음모론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도 매력이었다. 즉, 약간은 지능이 모자란 사회 부적응자가 부조리한 세상을 조롱하는 블랙코미디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Being There 다.

워싱턴의 한 부잣집에서 정원사로 일하던 Chance 는 철들고 난후 한 번도 외출을 한적이 없고, 차도 타 본적이 없으며, 심지어 전화도 해본 적이 없어 세상사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인물이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정원과 그에게 유일한 오락거리인 텔레비전뿐이다. 그는 텔레비전의 과장된 드라마와 광고 등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주인이 죽자 무연고자인 그는 아무 유산도 받지 못한 채 그 집을 나와야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억만장자의 차에 부딪혀 그의 집에 기숙하는 신세가 된다. 투병중인 집주인 Benjamin Rand 와 그의 아내 Eve Rand 는 그의 이름을 Chance 가 “I am Chance, The Gardener”라고 이야기한 것을 “Chauncey Gardiner”로 착각한다.

그들은 그의 점잖은 풍모 때문에 그를 사업가로 착각하고 동시에 그의 솔직담백한 말투에 인간적인 호감을 느낀다. 한편 Benjamin 은 현직 대통령의 경제자문역이기도 한데 – 이 부분 조금은 음모적이기는 하다 – 대통령과의 만남에 동석한 Chance 는 조언을 요청받고 엉뚱하게 계절에 따른 정원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통령과 Benjamin 은 그 이야기를 경제변동에 대한 혜안으로 받아들이고 급기야 대통령은 그의 연설에서 Chance 의 이름을 언급한다. 단번에 유명인사가 된 Chance 는 TV에까지 출연하고 사람들은 그의 경력을 알아내려하지만 아무데서도 그의 경력을 알아낼 수 없다. 그 와중에 Ben 이 죽고 Eve 는 Chance 를 사랑하게 된다. Ben 의 장례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몇몇 사람이 등장하는데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들로(아마도 프리메이슨을 암시하는 듯 한데 이는 Ben 의 묘지가 1달러 지폐에 나와 있는 외눈박이 피라미드라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짐작되는 이들은 차기 대통령 감으로 Chance 를 지목하게 된다.

Peter Sellers 가 죽기 전 두 번째 작품으로 Peter Sellers가 개인적으로 영화화하고 싶어 하던 작품이라고 한다. 그를 다룬 전기영화에 따르면 평소 그는 다른 이의 캐릭터를 서슴없이 담아내는 그의 도화지와 같은 평범함을, 그리고 어쩌면 배우로서의 자신이 아닌 자신의 캐릭터를 좋아하는 관객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품의 Chance 역시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있는데(Being There)’ 사람들이 자신의 잣대로 그를 재단하고 평가해버린다. 그것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권력가들이 말이다. 아마도 Peter 는 자기 자신을 제멋대로 평가하고 즐거워하는 ‘우매한’ 관객들을 생각하며 이 작품에 호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엄청나게 정적인 연기임에도 여전히 Peter 는 재미있다. 그리고 Eve Rand를 연기한 초로의 Shirley MacLaine 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Chance 의 모습은 마치 르네마그리트의 그림의 신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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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의 날

오랜만에 평일에 휴가를 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영화 네 편을 봤다. 네 편 모두 로맨틱 코미디. 그야말로 ‘로맨틱 코미디의 날’이라 할 수 있다. 처음 고른 영화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실수로 ‘네 번의 장례식’이라고 쓸 뻔 했다. 공포영화냐?). 풋풋한 미모가 돋보였던 시절의 휴 그랜트와 앤디 맥도웰이 사랑에 빠지는 영화다. 둘 다 미소가 아름답다. 로맨틱 코미디에 영국 악센트가 어울린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준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그 영국 악센트와 휴 그랜트에 이끌려 다음 작품으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골랐다. 미국 토박이 르네 젤위거가 천연덕스럽게 영국 악센트로 웃겨주는 작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만과 편견’의 현대판 해석이랄 수 있다. 남자 주인공도 TV판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인 콜린 퍼스에다 극중 이름도 마크 다시다. 휴 그랜트는 전편에 비해 많이 느끼해져 나왔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네 번의~’와 또 다른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두 영화 모두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한 공포영화 ‘위험한 관계(Fatal Attraction)’을 언급한다는 사실. ‘브리짓’에서는 TV로 방영되는 장면까지 보여준다. 그만큼 그 영화가 서구의 성생활 – 특히 바람피우는 것에 – 에 미친 영향이 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두 영화가 어쩌면 같은 가상의 세계에서 펼쳐진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스타일과 흐름이 비슷하다.

다음으로 고른 작품은 바다 건너 미국으로 와서 ‘High Fidelity’. 우리나라에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라는 어이 없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주1) 주인공은 존 쿠작. 어릴 적 평범한 외모에서 눈부시게 쿨한 외모로 자라 메이저급 배우가 된 케이스다. 헤어진 여인과의 티격태격 스토리도 재밌지만 음반가게 사장이라는 설정 때문에 그곳에서의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이 잔재미를 더해준다. 이 작품에서 잭 블랙이 극 말미에 마빈 게이의 ‘Let’s get it on’을 멋지게 부르면서 그야말로 잭팟을 터트린다.

역시 또 남자주인공에 이끌려 선택한 작품은 시간을 거슬러 1989년 만들어진 ‘Say Anything’. 성장기의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이야기지만 매우 섬세하다. ‘싱글스’나 ‘올모스트 페이모스’로 잘 알려진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작품과 ‘High Fidelity’ 사이에 또 하나의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두 영화 모두 릴리 타일러가 출연한다는 사실. 중급의 외모지만 매력적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도 생각이 난다. 아~ 물론 존 쿠작 영화의 감초이자 그의 누나인 조안 쿠작도 두 작품 모두에서 나온다.

딴 이야기 : 이틀 전에 동네 앞에 새로 생긴 중고 DVD 판매 가게에서 케빈 클라인 주연의 In & Out 이 눈에 띄어 골랐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오늘 문득 생각나 다시 가보니 오 세상에~ 그 사이 누가 채갔다. 빌어먹을… ‘로맨틱 코미디의 날’의 오점이 되어버렸다.

(주1) 왜 이 어이없는 제목이 붙여졌는가 하면 그 전에 빌 머레이 주연의 ‘Lost in Transition’이 ‘사랑도 번역이 되나요?’라는 어이없는 제목이 붙여졌는데 또 그것을 본떠서 더 어이없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도대체가 생각이 있는 것인지…

The Mouse That Roared[1959]

‘포효하는 생쥐’

제목부터가 뭔가 흥미진진하다. 감히 사자도 아닌 생쥐가 무엇 때문에 어울리지도 않게 으르렁거렸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용은 이렇다.

유럽 본토에 위치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인 Grand Fenwick – 물론 가상의 나라. 국어는 영어다. – 은 포도주 ‘피노누와펜윅(Pinot Noir Fenwick)’이 유일한 수출품이다. 그런데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양조장에서 ‘피노누와엔윅(Pinot Noir Enwick)’이라는 짝퉁을 만들어 피노누와펜윅의 유럽시장을 잠식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Grand Fenwick 정부는 사태를 해결할 대안을 궁리한다. 수상 Count Mountjoy(Peter Sellers)는 황당하게도 미국침공을 제안한다. 미국에게 선전포고한 후 재빨리 항복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자는 생각. 여왕인 Duchess Gloriana(또 다시 Peter Sellers)은 망설이다가 결국 약간 어눌한 군사 지휘관 Tully Bascombe(또 다시 Peter Sellers)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뉴욕은 때 마침 폭탄공습 대피훈련 중인지라 사람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항복할 수도 없는 상태. 항복을 하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던 Tully 의 부대는 우연히 찾아간 한 연구소에서 핵폭탄보다 더욱 강력한 위력을 가진 Q-Bomb 을 다루고 있던 과학자와 그 딸을 만나고 그들과 폭탄, 그리고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육군 장군을 납치해서 본국으로 돌아와 버린다.

의도치 않게 전쟁에서 이겨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사건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영국, 소련 등 세계 각국이 핵억지력을 보유하게 된 Grand Fenwick 에게 추파를 던지고 미국은 서둘러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협상단을 파견한다. 결과는 코미디 장르인지라 해피엔드.

 Leonard Wibberly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냉전 시대의 핵공포증과 반전(反戰) 메시지를 코믹하게 풍자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Peter Sellers 는 ‘닥터스트레인지러브’에서처럼 1인3역을 맡아 그의 연기력을 마음껏 뽐낸다. 과학자의 딸로 나와 – 원작에는 이 캐릭터가 없다 함 – Tully 와 사랑에 빠진 여인 역은 ‘네 멋대로 해라’ 등에서 모던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Jean Seberg가 출연했다.

나름의 사회적 메시지를 이해하며 유머도 즐길 수 있는 깔끔한 소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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