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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자본주의”의 종식을 바라며

내가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를 정의하는 방식은 대단히 직설적이다. 그건 민간 업계가 대규모 위기를 통해 이윤을 직접적으로 창출하는 방식을 묘사한 것이다. 재난에서의 부당이득과 전쟁에서의 부당이득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지만, 9/11 사태 이후의 부시 정부 치하에서 정부가 결코 끝나지 않을 안보 위기를 선언하고 동시에 그것을 사유화하고 외주화하였을 때 더더욱 심화되었다. 이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사유화된] 침공과 점령뿐 아니라 국내에서의 사유화된 안보 상태도 포함한다. “충격 원칙(shock doctrine)”은 대규모 위기를 활용하여 체계적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엘리트를 부유하게 하고, 나머지 이들을 쳐내는 정책들을 밀어붙이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다. 위기의 와중에 사람들은 위기에서 –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 살아남기 위한 일상의 긴급 상황에 주력하고 권력자들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위기의 와중에 우리는 공에서 잠시 눈길을 떼곤 한다.[Coronavirus Is the Perfect Disaster for ‘Disaster Capitalism’]

나오미 클라인의 이 발언에서처럼 적어도 미국은 이라크 전쟁과 9/11 사태 이후 안보와 재난에 있어 “패러다임적 전환”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라크 전쟁은 전쟁을 전쟁 기능의 상당한 부분을 민영화한 전쟁이었고, 9/11 사태 이후 부시는 엄청난 예산을 국토안보부 예산으로 빼앗아가 공공서비스의 기능을 마비시켰고, 이 결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강타할 때에도 적절히 대처할 수가 없었다. 금융위기 당시에는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을 살리느라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고, 그 결과 아직까지 미국의 중앙은행은 정상적인 상태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호황기에는 부자를 위한 “정상적인” 자본주의가 작동하고 위기 시에는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 즉 “재난 자본주의”가 작동하여 어느 시기에도 돈을 버는 기제가 작동(사례 1, 사례 2)하고 있다.

이번에 한국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 첫 확진자가 발생한 미국은 현재 한국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상황이 악화되어 가고 있다. 이 저변에는 진영논리로 극단화된 정치 상황도 한 몫 하겠지만, 이건 한국도 만만치 않으므로 결국 그 극단화된 정치 상황에서조차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모자란 인간이 정권을 잡고 있는 현실과 앞서의 상황 등으로 철저히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추구하는 의료 인프라의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기산업, 군산복합체 등과 함께 미국 자본주의에서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분야 중 하나라 여겨지는 민영의료 체계는 이번에 다시 한 번 그 비효율성을 만방에 과시하고 있다.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 것은 여타 국가의 의료 공공서비스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니 함께 반성할 일이다.1

반면 ‘전국민건강보험제도’가 없는 미국은, 코로나19 팬데믹에 가장 취약한 시스템이라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400만원에 이르는 검사비용을 개인에게 부담시키며, 민영보험에 의탁한 병원들은 돈이 안 되면 검사와 치료 등 필수 의료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백만명이 감염될 수 있는 대재앙에 미국의 의료시스템은 속수무책이다. 민영화의 허점이 백일하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향후 근본적인 시스템 재편이 빅이슈로 떠올랐다. 결국 복지시스템을 비난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약 1500조원에 가까운 돈을 국민 개개인에게 현금수표로 지급 등을 하고, 전시군수물자법을 발동해 민간기업을 국가의 재난대응에 징발하겠다고 밝혔다.[코로나19,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체제 변화 촉발]

나오미 클라인은 이번 사태에 “그린뉴딜”과 같은 대안에 기대하는 눈치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그린뉴딜의 세세한 부분을 잘 알지 못하여 과연 그 방향이 옳은 지는 좀 더 고민해야할 것이지만, 적어도 이 “문명사적인 전환의 시기”에 세계는 사회활동을 단순히 재개(再開)하는 차원이 아니라 여태 내딛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로 발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뉴딜”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현재까지는 한국의 “K-방역”을 배우려는 미증유의 상황으로 강대국의 역량이 재편되어가는 양상이지만, 어쨌든 먼지가 가라앉은 다음에는 또다시 전통적인 열강의 헤게모니 다툼이 치열해질 것이다. 그때는 적어도 이성적인 몇몇 지도자가 힘을 발휘하여 “재난 자본주의” 작동 논리에 제동을 걸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코로나19 정국에 즈음한 쇠라의 그림에 대한 상념

인류는 엄중한 “팬데믹”의 시대에 접어들어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갖가지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각 나라 혹은 지자체의 수장(首長)들이 여태 하지 않았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상황도 그러한 유례없는 현상 중 하나인데, 바로 이들이 시민들에게 집에 머물러있으라고 달래거나, 윽박지르거나, 읍소하는 업무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 내가 우연히 접한 기사는 로리 라이트풋이라는 시카고 시장이 시 곳곳을 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는 예의 그 희한한 업무를 수행하는 상황을 묘사한 기사다.

어찌 보면 – 요즘 상황에 비추어볼 때 –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 기사에서 내 눈을 잡아끈 것이 있는데 바로 시장의 얼굴을 찍은 자료 사진이다. 시장으로서 흔치 않은 흑인 여성이라서 눈여겨 본 것은 아니고 배경으로 쓰인 그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가 그린 그의 필생의 역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다. 이 그림은 현재 시카고 미술원에 전시되어 있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시카고 시장이 시 곳곳을 돌아다니는 중이라는 상황 설정의 사진에 이 그림이 배경으로 찍히게 된 것이다.

A Sunday on La Grande Jatte, Georges Seurat, 1884.jpg
By 조르주 쇠라 – Art Institute of Chicago, 퍼블릭 도메인, 링크

개인적으로 이 사진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매체의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진이 현 상황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지는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응축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유원지와 같은 공공공간(公共空間)과 그곳에서의 휴식은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시민의 투쟁에 의해 쟁취한 것이고, 어찌 보면 쇠라의 그림은 바로 그러한 자유를 암암리에 묘사한 작품인데, 시장이 그 작품 앞에서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야외에서의 휴식, 혹은 이동의 자유를 공공(公共)의 이익을 위해 제한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여겨지기에 아이러니하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개인의 이동과 휴식의 자유는 소중하다. 그렇기에 유사 이래 이윤창출을 위해 쉼 없이 일해야 했던 노동계급은 끊임없이 그 자유를 쟁취하려 했고,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문명사회에 접어들어 휴식의 자유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공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20년 전 세계 상당수의 시민들은 광학현미경으로는 볼 수도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그 자유가 자율적/타율적으로 제한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료보건의 팬데믹에 대한 확실한 인프라의 구비 역시 여태의 자유를 보장하는 또 하나의 전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인프라 중 핵심은 의료 인프라겠으나, 또 하나 한국에서의 코로나19 통제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인프라가 디지털화된 개인정보 데이터 축적과 이 정보의 공유 시스템이다. 한국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은 달성했다는 유리한 여건 이외에도 사실상 전 국민을 코드화한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개인정보 빅데이터가 존재하고 국가가 그것을 통제하기에 역설적으로 도시폐쇄 없이 주민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 “프라이버시”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적 유럽인들의 심경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국가 혹은 여하한의 기관이 개인정보 빅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활용할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조직범죄나 다름없는 “n번방” 사건 역시 개인정보를 시골 면사무소 286 컴퓨터에서조차 검색할 수 있는 한국이기에 더 범행이 용이했을 것이라는 개연성도 그러한 불편한 상황의 한 사례다. 하지만 어떤 유튜버도 말하듯 어차피 개인정보 빅데이터는 이미 구글과 페이스북이 일개국가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1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통제 없는 개인의 완벽한 자유는 이제 애당초 성립 불가능한 꿈인지도 모른다.

우연치 않게 한국이 현재 코로나19 사태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각국은 이 사태가 진정된 이후 복기를 통해 앞으로의 사회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반성 없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도 있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올바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라면 ‘민주적 의사결정’, ‘투명성’, ‘적절하게 통제되는 정보의 활용’이라는 교훈을 얻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21세기 형 경찰국가’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미 어떤 나라는 그러한 황폐한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나라는 아직도 우월감에 빠져 다른 나라를 까기 바쁘고.

1965년 한일청구권조약에 대한 양국의 입장 차이 하나

어제 치러진 일본의 참의원 선거는 아베 정권의 “절반의 승리“로 끝났다. 적어도 그의 임기 동안 그가 그렇게나 바라마지 않던 평화헌법의 개정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남한이라는 새로운 주적(主敵)을 설정하는 무리수를 통해 소비세 인상 등의 악재를 뚫고 개헌이 가능한 의석을 확보하려던 아베의 꿈은 다행히 저지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의 남한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는 쉽사리 풀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처음 남한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하겠다는 의중을 내비칠 때 아베는 “지금까지의 우호관계에 반하는 한국측의 부정적인 움직임“이 수출 규제 조치의 원인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런 애매모호한 변명이 궁색하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에칭가스는 독가스나 화학무기 생산에 사용될 수 있는데, 행선지는 북한이다“라는 안보상의 이유라는 궤변을 들이대기 시작한다. 거기에 “사린가스“라는 일본인의 트라우마까지 써먹었다.

하지만 블룸버그의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누가 보기에도 아베의 야비한 수출 규제 조치의 원인은 “식민지 기간에 일본 기업이 저지른 강제노역에 대해 그들이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법원의 판결에 대한 앙갚음”이다. 아베 스스로도 선거 개표 방송 인터뷰에서 “한국이 청구권 협정 위반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가져오지 않으면 건설적인 논의가 안될 것”이라고 확인했다. 정치적 이유로 경제적 압박을 하고 있음을 실토한 것이다.

이번 아베의 도발은 근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1965년 당시의 일본 정부와 체결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칠게 보아 현재의 문재인 정부 포함 민주적 선출을 통해 집권한 정부는 당시의 조약을 일제의 불법적 지배로 인한 손해배상이 배제된 독재정부의 일방적 조약이라고 보는 반면, 아베 정권은 정권의 연속선 상에서 모든 보상 및 배상이 정리됐다고 보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조선일보

1991년 일본 참의원예산위원회에서의 야나이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의 입장 표명, 2005년 참여정부 시절 민관공동위원회의 의견, 2012년 김능환 전 대법관이 주도한 대법원 판결 등을 통해 확인한 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의견은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베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양국 정부의 의도를 해석해보자. 우선 일본 정부는 굳이 선한 의도로(!) 해석하자면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라는 입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너희가 보기에 불충분한 조약이었다 할지라도 수긍해야 한다’가 아베의 의도다. 한편 독재정권의 정통성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현 정부의 의도는 이를 “불쾌한 채무(Odious Debt)“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 조약을 정통성 없는 독재 정권이 졸속으로 맺은 밀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제3세계에서 한 정부의 정통성이 이전 정부의 그것과 다를 경우 “독재정부가 부패한 방법으로 빌린 ‘불쾌한 채무(Odious Debt)’를 갚지 않겠다고 디폴트 선언을 하기도 한다. 법리적으로 보나 애초 일본 정부의 의도로 보나 1965년 조약은 그러한 채권채무 관계보다 더 조악한 밀실 조약임이 분명하기에, 어쨌거나 진보적인 정부나 일제의 불법행위의 피해자가 보기에는 – 피해자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 부정한 채권 청구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아베 극우 정권에게 1965년 조약에 대한 남한 행정부의 입장과 사법부의 강제징용자에 대한 판결은 수용 불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하기에 어떤 식으로든지 압박은 계속될 것이다. 다만 글로벌 제조업 체인을 뒤흔드는 현재와 같은 경제 보복 조치는 너무나 무모하고 근시안적이기에 조만간 최소한 미세 조정이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지만 남한에 친(親)아베 정권이 들어서지 않는 한 정치적 긴장은 상당기간 온존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에 대한 해법은 무엇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협회 회장이 제시한 해법을 소개한다. 그는 한일청구권협정의 조항의 내용과 범위에 관한 “양국 정부의 일관성 없는 해석과 대응”을 지적하며 “협정 체결 과정에 관한 문서의 공개와 인식 공유“를 통해 해결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과정은 이 밀실 조약이 한일 양국의 미래를 발목 잡는 현 상황을 타개할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박아놓은 쐐기가 너무 어설프기에.

‘한 나라가 기초부품 등을 수출하면 ‘다른 나라가 중간재를 조립하거나 최종 제품을 생산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 이기 때문에 ‘국제적인 연쇄 생산 과정 중 장애가 발생할 경우 양국 사이 문제에 그치지 않고 경제 시스템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일본 경제산업성 2019년 통상백서]

“잠시 동안 계급투쟁을 잊어버리자” 나라 경제가 이런데….

“왜 빵의 부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다른 병사가 소리쳤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쮸드노프스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다음에는 멘셰비키적 방위주전론자로서 비테브스키 소비에트의 대표인 한 장교가 말했다. “누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정부가 아니라, 전쟁이다. 그리고 어떤 변혁보다도 우선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여기에서 야유와 빈정거리는 박수가 있었다. “볼셰비키 선동가들은 데마고그다!” 회의장은 웃음소리로 진동했다. “잠시 동안 계급투쟁을 잊어버리자”고 그는 말했으나 그의 말은 더 이상 계속 될 수 없었다.[세계를 뒤흔든 10일, 존 리드 저, 장영덕 역, 두레, 1993년, p63]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꺼내 읽은 책의 일부분을 인용해보았다. 미국 언론인 존 리드가 볼셰비키 혁명을 직접 체험하고 책으로 엮은 르포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니 만큼 현장에서의 생동감이 1세기가 지난 지금에 읽어도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다. 인용한 장면은 10월의 어느 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한 철야회의에서의 모습이다. 계급모순과 민족모순 중에서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라는 사회변혁의 오래된 이슈가 이 장면에서 또 한 번 연출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심사는 치열했습니다. 9시간을 넘겼습니다. “분식회계도 횡령도 아래에서 정상적으로 처리한 줄 알았다”는 게 김태한 대표의 입장, “분식회계도 증거인멸도 횡령도 김 대표의 지시를 받았다”는 게 김동중 삼바 전무의 입장이었습니다. 서로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런 날선 내부 다툼과 법적 공방 끝에 삼성 측은 호소에 나섰다고 합니다. 어쩌면 ‘일격’에 가까운 호소,

“일본 문제도 있고, 나라 경제가 이런데….”

영장심사 결과는 김 대표도 김 전무도 모두 기각.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삼바’ 영장심사에서 나온 말, “나라 경제가…”]

존 리드의 책을 읽고 나서 뜬금없이 낮에 읽은 이 기사가 떠올랐다. 정확히 삼성 측의 누가 저 말을 했는지는 보도에 나와 있지 않지만, 여하튼 참으로 어이없는 적반하장 발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삼성이 현재 일본의 무모한 정치적 도발의 책임을 져야 하는 당사자는 아니고, 일면 그 도발로 인한 피해자라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구속영장심사 자리에서 피의자가 할 소리는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할 말로 일본 문제와 이들 기업의 분식회계가 무슨 상관이나 있기는 한가?

어쨌든 존 리드의 책을 읽다가 삼바 기사가 떠오른 것은 내부의 갈등을 외부의 적을 팔아 회피하려는 작태가 유사 이래 정치집단 내, 계급적 갈등관계에 있던 집단 사이, 심지어는 범죄 집단과 이를 단죄하려는 시민사회 사이에서도 단골 메뉴로 꺼내들었던 핑계거리가 되곤 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연상 작용이 있었던 것 같다. 앞서의 장교는 어쨌든 선의에 의한 발언이라고 여겨지는 반면, 삼성 측의 주장은 본인들의 범죄를 나라가 처한 어려움을 틈타 빠져나가려는 야비함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나라 경제를 망쳐놓은 것은 본인들인데.

‘조찬 클럽’과 사회주의자 국회의원

요 며칠 사이 트위터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해프닝은 @AnonymousQ1776 라는 트위터 계정을 가진 이가 “여기 미국의 가장 인기많지만 무엇이든 아는 체 하는 빨갱이가 생각 없는 바보처럼 구는지 보라. 샌디 오카시오 코르테즈의 고등학교 시설 비디오다.(Here is America’s favorite commie know-it-all acting like the clueless nitwit she is……High School video of “Sandy” Ocasio-Cortez)라는 트윗과 함께 한 여성이 친구들과 춤을 추는 동영상을 올리면서 시작했다. 비디오 속의 주인공은 해당 계정이 “빨갱이”라고 칭한, 이번 선거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로 오카시오 코르테즈.

그가 비디오 속에서 생기발랄하게 추는 춤은 유명한 80년대 영화 ‘조찬 클럽(The Breakfast Club)’에서 극중 인물(배우 Ally Sheedy)이 추던 장면을 오마쥬한 춤이다. 80년대의 십대의 문화적 정서를 적절히 반영하여 시대가 흐를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The Breakfast Club에서도 이 장면은 출연 배우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추는 춤으로 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중요한 장면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지금은 계폭한 그 계정의 해당 트윗에 많은 이들의 반응은 “뭐 어쩌라고? 멋있기만 한데?”라며 의아해 했고, 영화와 코르테즈의 비디오를 교차 편집한 비디오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https://twitter.com/heykim/status/1081054336312983552

급기야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Molly Ringwald는 “바로 이거야. 알렉산드리아 당신도 클럽에 가입했어!(That’s it, Alexandria you’re in the club!)”라며 열렬히 환호하는 트윗을 올렸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비디오의 주인공인 알렉산드리아는 의회에서 자신의 의원실에 들어가기 전에 춤을 추는 장면을 트윗에 올리기도 했다. 애초에 어떤 의도였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마치 춤을 금지하는 영화 Footloose에서의 마을사람의 근엄함을 연상시키는 @AnonymousQ1776 의 트윗으로 시작된 작은 트위터 연대가 만들어낸 유쾌한 해프닝이었다. 글로벌화된 소셜미디어가 안겨주는 작은 기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https://twitter.com/AOC/status/1081234130841600000

[워싱턴포스트 컬럼]트럼프는 북한을 위협하는 대신 이것을 시도해야 한다

[원문보기]

John Delury는 서울에 있는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중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부교수다.

시리아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미사일 공격은 좌우 양측으로부터 환호를 불러일으켰고, 몇몇 열광자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군사적 해결”에 관한 논쟁을 촉발하게끔 했다. 한국에 대한 행정부의 대다수 레토릭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비교는 매우 위험한 오해다. 타격을 하면 북한이 반드시 더 강하게 보복할 것이다. “외과적” 공습으로 그들의 능력을 – 핵 또는 다른 것들 – “선제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군사적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무기 프로그램을 저지하려는 그 어떠한 무력의 사용도 전쟁을 촉발할 수 있고, 이 비용은 엄청날 것이다.

미국 우선의 시대이니 우리는 북한의 포나 단거리 미사일의 사정권에 놓인 서울에 사는 1천만 명에게 닥칠 죽음과 파괴를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 곳의 기지들에 있는 군인과 그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남한에 거주하는 약 14만 명의 미국 시민과 이웃 일본에 있는 추가적인 시민들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인가? 또는 남한의 미국과의 1,450억 달러의 상호무역을 포함한 다른 세계와 얽힌 1조 4천억 달러의 경제는 신경 쓰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북한의 미사일이 아시아에서 가장 복잡한 공항인 인천 국제공항이나 세계 6위 규모의 컨테이너 항구인 부산에 쏟아지는 것은 신경 쓰고 있는 것인가? 중국의 관문에 대화재가 발생하거나 일본이 휩쓸려 들었을 때 세계 경제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분명히 미국의 대중과 정당을 초월한 의회는 이러한 비용들이 감내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행정부에 존재하는 많은 분별력 있는 전략가와 정책결정자를 고려할 때 군사적 악담은 허세라 결론내리는 것이 이성적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것들은 현실적으로 임박한 질문, ‘직접 대화나 개입으로 나아갈 외교적 옵션을 선택하기보다 중국의 경제제재를 통한 경제적 압력에 직면해 그들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지만, 북한이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동을 함에 따라 경제제재와 압력에 돈을 투자했다. 불행하게도 북한은 이란과 같은 정상적인 무역국처럼 호주머니 사정이 막바지에 몰리지 않았다. 북한 사람들은 이미 국제 경제로부터 진작 고립되었고 국제사회와 절연되어 왔기 때문에 고립이 심화되어도 그들의 셈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정은에게 있어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그가 북한의 경제를 향상시킬 수 있는 야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고, 그의 내부 정책들은 이미 완만한 성장세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첫 번째 관심사항은 정권의 생존과 국가 안보이며, 그는 이를 위해 핵 억지력이 필수적이라고 간주하고 있다(슬프게도 합리적인 추론이다). 8년간의 경제제재와 압력은 – 김정일의 죽음 직전의 짧은 외교적 시기를 빼고는 – 평양이 핵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게 깨닫게 하거나 북한이 그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무기고를 확장하는 것을 방지케 하는데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 식의 접근 방법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말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고 싶다면, 그것은 대중을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이 김을 무릎 꿇리는 것을 헛되이 기다리며, 무모한 전쟁의 위협으로 시야를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보다 신중한 조치는 핵분열 물질 생산 사이클의 동결, 국제핵에너지기구 감독으로의 복귀, 그리고 핵 실험과 장거리 탄도 미사일(위성 발사를 포함한)에 관한 유예에 관해 협의하는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 대신에 미국은 최소한 남한과의 연합 군사 훈련의 연기와 같은 당면한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김은 어쩌면 그 훈련 규모의 축소와 같은 더 덜한 요구에도 응할지 모른다. 또는 그는 어쩌면 다른 종류의 거래에 – 예를 들어 1953년의 정전협상을 한국전쟁의 종식을 위한 여하한의 종류의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대화의 시작 – 응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옵션들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테이블에 다가서는 것이다. 2개월간의 대규모 훈련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이 그러한 일을 벌일 좋은 타임이다.

동결은 근원적인 역학을 바꾸고 각 당사자가 문제의 근본이라 여기는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장기적 전략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첫 걸음일 뿐이다. 우리는 김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대화를 시작할 때까지 그것을 얻기를 포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잡은 이후 그의 야망이 핵 억지력 이상으로 나아가 진정 경제개발로 가고자 한다는 강한 신호가 존재한다. 전쟁 위협이나 경제제재의 심화보다는 동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취하고 있는 경로로 – 권력에서 번영으로 – 김을 살짝 찔러 넣어주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방법일 것이다. 만약 김이 북한의 개발 독재자가 되고 싶다면 미국의 최선의 장기 전략은 그가 그렇게 되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그러한 과정의 첫 단계에서 핵 억지력을 포기할 것이라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게 궁극적으로 그가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현실적이고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는 채널을 다시 열고 긴장을 완화하고 북한의 능력이 현재 있는 곳에 머무르게 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으로 뛰어오르기 위한 시점이다. 그래서 미국은 서울의 새 정부 및 다른 이들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북한을 지역적 안정과 번영에 녹아들게 만들 장기 전략을 지원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김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예산을 절대 줄이지 않을 것이고, 경제제재는 북한 대중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압박은 그곳에서의 인권침해를 개선하는데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대중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하게 하여 나라를 차츰 차츰 개방하게 돕는 것이다.

단순히 경제적 고통을 가중시키고 군사적 공격을 위협하고 긴장을 높이게 되면, 미국은 북한 체제의 최악의 추세로 가도록 도울 뿐인 것이다. 김의 핵에 대한 야망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북한의 능력은 높아질 뿐이다. 코스를 반대로 바꿀 때다.

두 바나나 공화국 이야기

1983년에 국무원은 「도시 비농업 개체 공상업(工商業)의 몇 가지 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도시의 개체 공상업은 7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할 수 없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저술에 근거한 규정이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론을 설명하기 위해 8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가상의 공장을 예로 들었는데, 중국 당국은 이를 ‘노동착취’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중국 정부가 보기에 자영업이 7명 이상의 사람을 고용하면 사영기업이 되고, 사영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개혁과 개방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I, 조영남 지음, 민음사, 2016년, p228]

현실 사회주의 블록의 이념적 경직성 내지는 이념적 조악함을 설명하는데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인용해보았다. 언뜻 보아도 이는 자본론을 마치 종교경전 마냥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경직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큐란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여성의 몸을 위아래로 감싸고 순종을 강조하는 무슬림의 해석이나, 성경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극악하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도의 해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경전을 지킴으로써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는 기여한 바는 없으나 그 교리를 강요한 이의 권력이나 도덕적 순결성은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어쨌든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한 채 시장경제를 성공리에 – 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 도입하여, 오늘날 미국을 위협할 다음 국가로 평가받는 등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단순히 인용문에서처럼 「규정」이 교조적으로 끝까지 관철됐더라면 달성하지 못했을 위치라 할만하다. 중국이 경제에 있어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유연성을 가질 수 있도록 추동했던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정치체제는 유지하면서도 경제체제는 바꿀 수 있다는 – 1992년 10월 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라 할 수 있다.1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 계획경제”라는 도식을 포기한 것은 여러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계획경제/자원동원경제는 사실 戰後 경제개발을 가속화하여야 하는 대다수 국가들에서 체제와 관계없이 시도했던 개발전략이랄 수 있다. 혁명 후의 소비에트가 그랬고, 대공황을 겪은 미국이 그랬고, 10억 인구의 중국이 그랬고, 도시국가로서 살아남아야 할 싱가포르가 그랬고, 북괴와 체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남한이 그랬다. 국가 스스로가 하나의 거대기업으로 기능하는 것은 일종의 戰時경제체제랄 수 있고 체제경쟁에 직면한 많은 나라들은 어느 기간까지는 계획경제 요소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2


“제국주의 전쟁의 음모를 분쇄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아가자!”(출처)

하지만 경제가 전간기와 질적으로 다른 고도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상명하달식의 행정기능만으로 경제 시스템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됐다. 빅데이터 혹은 인공지능이 진정 시스템 전체의 원인과 결과를 예측하여 투입-산출을 조정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시장에서의 개별 경제단위가 경쟁하며 우열을 평가받고 진화-퇴보를 거듭하는 것 이외에는 딱히 더 좋은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국가는 경제발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역할에서 “정의로운 심판”의 역할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과 합당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 공유된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최근 트럼프의 행보는 역사의 퇴보를 초래할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느니, 그 재원을 멕시코로부터의 수입관세로 마련하겠다느니 하는 경제원론에도 안 맞는 소리를 해대는 것은 가장 천박한 수준의 “가부장적 아버지” 역할이다. 더욱 불행하게도 트럼프는 일당독재를 통해서가 아닌 대의적 민주제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라는 점이다. 즉, 그는 선거를 통해 일당독재 지도자보다 더 많은 정치적 자본을 얻게 됐지만,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집단적 논의를 통해 시행착오를 수정할 정치적 의지는 가지지도 가지려 하지도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면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현대사회에서 국가는 기간산업과 핵심 산업(예를 들면 금융업)은 공공적 기능이 관철되도록 “사령탑”적인3 통제를 강화하되 전 세계적 시장경제는 정의롭게 유지되도록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술이 잘못된 시장경제는 경제격차와 이념적 편견의 격차만 벌려놓아 보호주의, 인종주의, 독자주의 노선만을 강화시켰고, 그 가장 흉악한 결과가 트럼프의 당선이다. 그는 개별기업에 입지를 지정하고, 도드-프랭크법 규정을 무력화시키고, 이민을 통제한다. 7인 이하의 사영기업 허용이 희극이라면 이번 버전은 비극인가?

80년대 중국이 일당독재 바나나 공화국이었다면 현재의 미국은 민주적 바나나 공화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