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

“그것은 매우 단순한 일이오. 셀 수 없이 많은 상이하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사람들의 생계와 편의를 위해 필요한 많은 물건을 생산했을 때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스스로 공급하기 위해 개인들 사이에 끊임없는 교환이 필요하지요. 이런 교환이 거래를 만들고 그 매개체로서 화폐는 필수적이지요. 하지만 국가가 모든 상품의 유일한 생산자가 되자마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루어지는 개인들 사이의 교환이 필요 없어졌소. 모든 것은 한 곳에서 구할 수 있고, 그 밖에 다른 곳에서 조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국영 창고에서 직접 분배하는 제도가 상거래를 대신했고 이런 까닭에 화폐는 필요 없어진 것이오.”
“이러한 상품 분배는 어떤 방식으로 관리됩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이루어지지요.”리트 박사가 대답했다. “국가의 연간 생산 범위에서 개인의 몫에 해당하는 신용이 매해 초에 공공 장부 형태로 모든 시민에게 주어지고 있소. 그러면 그 사람에게 발급된 신용 카드(credit card)로 모든 동네에 있는 공공 창고에서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리고 무엇이든지 구입할 수 있지요. 당신도 곧 알게 될 이 제도는 개인과 소비자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사업상 거래의 필요성도 완전히 없애버렸소. 아마도 당신은 신용 카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을 거요.”[뒤를 돌아보면서:2000-1887, 에드워드 벨러미 Edward Bellamy 지음, 손세호 옮김, 지만지 고전천줄, 2008년, pp 93~94]

미국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였던 에드워드 벨러미가 1888년 내놓은 소설 ‘뒤를 돌아보면서:2000-1887(Looking Backward:2000-1887)’에서 주인공 줄리안 웨스트와 리트 박사가 주고받는 대화다. 보스턴에 살던 줄리안 웨스트는 1887년 5월 30일 잠들었다가 한 세기가 훌쩍 지난 2000년 9월 10일 깨어난 자본가 계급의 젊은이다. 그가 깨어난 2000년의 보스턴, 나아가 전 세계는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 있었고 소설은 이러한 세계에 대해 그를 돌봐주는 리트 박사가 설명해주는 형식을 띠고 있다.

위의 신용 카드에 대한 묘사를 보면 비록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신용 카드보다는 직불 카드의 개념에 가깝긴 하지만, 마치 신용 카드업계가 이 소설을 보고 상품화에 착안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논리가 치밀하다. 단, 차이는 벨러미 소설에서의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폐지로 말미암은 화폐의 완전한 대체물이고 현재 우리가 쓰는 신용 카드, 또는 직불 카드는 화폐 사용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보조물이라는 점에 있다.

8 thoughts on “신용카드

    1. foog

      천재죠? 저 공공 창고의 개념도 일종의 창고형 할인점이랄 수 있지 않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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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ogin

    읽은 책 중에 똑똑한 돈(Smart Money)이라는 아고라 경제방의 나선님,상승미소님이 쓰신 책이 있는데 그 책 뒷편에 foog님 블로그 소개가 있더군요.
    “세계 경제의 현상과분석에 철학적으로 접근하며, 여러 이론을 분석하여 설명해 주는 수준 높은 블로그입니다”라고 소개되어있네요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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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오호~ 근사하군요! 제 블로그가 활자화되다니… 🙂 그런데 그 두분 중 어느 분이 소개해주셨는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이 블로그는 ‘유머 블로그’인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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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Adrian Monk

    제대로 안 읽고 2000년 보스턴에서 쓴 소설이라는 걸로 이해하고 ‘음 신용카드 개념 정리가 잘 되어있는 글쓴이구나’ 생각하다가 댓글보고 화들짝 놀라면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이건 정말 놀랍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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