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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돌아보면서:2000-1887

엑슨 회장이었던 크리프튼 가빈 Clifton C. Garvin 이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한다.

“미국인에게는 우스운 면이 있다. 그들은 대규모, 규모의 경제성, 대량생산 등의 성과를 숭배하면서도, 크고 강력한 힘을 가진 것 자체는 싫어한다. 석유산업은 그들 눈에 가장 크고 힘이 센 산업으로 비춰지고 있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미국 법무부는 스탠다드오일 트러스트가 독점을 통해 표준화와 효율화를 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점이 더 큰 폐해를 가져온다고 판단하고 여러 회사로 조각내버렸으니 말이다. 또한 2차 대전이후 중동에서 석유가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석유 메이저들이 산유국과 이익분배에 대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미국 정부는 국익의 도모와 담합의 저지라는 모순된 정책을 시행할 정도로 독점과 담합에 대해 체질적으로 거부감을 보여 왔다.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독점을 거부한 반면, 에드워드 벨러미 Edward Bellamy 의 ‘뒤를 돌아보면서:2000-1887(Looking Backward:2000-1887)’이 그리고 있는 미래의 사회주의 세계는 흥미롭게도 바로 이 독점자본주의가 독점사회주의로 전화된 세계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레닌 Vladimir Il’ich Lenin 의 글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레닌이 독점자본주의를 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가 사멸해가는 과정에서의 마지막 형태라고 정의한 시대적 패러다임과 유사하다.

“이들 기업연합, 기업협동(pools), 기업합동(trusts) 등 그 명칭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들이 가격을 결정하고 연합체 자체가 거대하지는 경우가 아니면 모든 경쟁을 분쇄시켰소. 그런 다음에 거대해진 합동의 결과 투쟁이 뒤를 이었던 것이오. [중략] 그리고 새로운 체제가 구체제를 대신한 이래 세계의 부는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증대되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거요. [중략] 일군의 무책임한 주식회사와 기업연합에 의해 경영되던 것을 멈추고, 인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업연합에 위탁되어 공동 이익을 위한 공동소유로 운영되기에 이르렀지요.”[pp68~70]

2000년의 사회주의 미국의 시민인 리트 Leete 박사가 113년 동안의 긴 잠에서 깨어난 부르주아 출신의 줄리언 웨스트 Julian West 에게 설명한 체제전환의 짧은 역사다. 비록 세부묘사에 있어서는 무리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그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압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장면이다. 즉, 독점이 생산성을 증대시키고 인민은 그 독점업체를 공동소유의 기업으로 전환시킨다는 시나리오다.

물론 자본주의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볼 때 독점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독점은 건전한 중소기업의 육성을 저해하고 독점가격을 형성하여 시장의 왜곡을 불러오곤 했다. 또한 관료화 및 보수화, 심지어 범죄화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소설의 내용이 짧기에 이런 동전의 이면까지 다루기는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야 할 것 같다. 요컨대 자본주의 그 자체가 대량생산의 이점을 가장 잘 설명해온 체제이고 독점이 그 이점을 극대화해주는 측면이 있다는 정도만 언급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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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ing Backward” by Edward Bellamy (writer)
Houghton Mifflin (publisher) – Scan from the original boo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888년 초판이 발표된 이 소설은 시간을 뛰어넘은 한 남자가 겪는 사상적 혼란과 문명충격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공상과학 소설의 효시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동시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두터운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냐면 주요 독자층들은 산업국유화론자 클럽을 조직하고 인민당의 결성과 강령 채택에 적극 참여하여, 소설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실현하고자 할 정도였다. 미국의 대표적 사회주의 운동가 유진 뎁스 Eugene V. Debs 역시 이 소설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한다.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와 사회적 함의가 너무 크기에 다소 딱딱한 평이 되고 있는 감이 없지 않은데, 무엇보다 이 소설의 미덕은 공상과학소설이 지녀야할 참신함과 기발함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처음 이 책의 구입 동기는 소설에 그 당시 등장하지도 않은 신용카드(credit card)의 개념과 더불어 대형소매점의 개념이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이다. 과연 그 묘사는 현재의 신용카드나 대형소매점의 개념과 거의 일치할 만큼 생생했다.(물론 그것을 사용하는 경제체제는 다르다) 더불어 소설이 당연히 지녀야 할 극에 대한묘사도 짱짱하다.

물론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009년은 에드워드 벨러미가 예언했던, 또는 바랐던 것처럼 사회주의 세상은 아니다.(사회주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몇몇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세상은 여전히 그가 야만적이라고 비판하였던 계급사회이고 국가와 산업은 파편화(?!)되어 있다. 더군다나 금융자본주의의 내폭으로 말미암아 모순은 심화되고 있다. 2009년 혼란스러운 자본주의 세상에 2000년 사회주의 세상을 그린 미래소설을 읽는 상황을 작가가 목격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약간 궁금하다.

전화(telephone)

“이제 오늘의 설교를 듣는 것과 관련해, 만일 그러길 원한다면, 교회에 가도 되고 아니면 그냥 집에 있어도 되오.”
“내가 집에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까?”
“단지 우리와 함께 적당한 시간에 우리 집에 있는 음악실에 가서 편안한 의자를 고르면 되오. 아직도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의 설교는 공중 시설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음악 연주회를 듣는 것처럼 가입자들의 집과 전선으로 연결된, 음향 시설이 갖추어진 방으로 전달되지요. 만약 당신이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면 기꺼이 같이 가겠지만, 나는 당신이 어디에 가든 집에서보다 더 훌륭한 설교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소. 신문을 보니 오늘 아침에 바턴(Barton) 목사가 설교하기로 되어 있더군요. 그분은 전화(telephone)로만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의 수신자가 종종 15만 명에 이르기도 하오.”[뒤를 돌아보면서:2000-1887, 에드워드 벨러미 Edward Bellamy 지음, 손세호 옮김, 지만지 고전천줄, 2008년, p 182]

지난번에도 언급했다시피 이 소설은 1888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그런데 이글에 보면 “전화(telephone)”라 불리는 장치는 – 그 단어가 이제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지만 ‘소리(phone)를 원거리(tele)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 오늘 날 우리가 라디오(radio)라 부르는 그 장치의 원리와 거의 근사하게 맞아떨어진다. 또한 신문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소개한다는 발상도 오늘날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어떠한 메시지를 먼 곳으로 전송시킨다는 발상은 실제로는 1901년 마르코니가 무선진신을 이용하여 대서양 건너로 무선신호를 보내면서 실현되었고, 위와 같은 브로드캐스팅 개념으로 라디오가 상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이후부터였다.

신용카드

“그것은 매우 단순한 일이오. 셀 수 없이 많은 상이하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사람들의 생계와 편의를 위해 필요한 많은 물건을 생산했을 때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스스로 공급하기 위해 개인들 사이에 끊임없는 교환이 필요하지요. 이런 교환이 거래를 만들고 그 매개체로서 화폐는 필수적이지요. 하지만 국가가 모든 상품의 유일한 생산자가 되자마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루어지는 개인들 사이의 교환이 필요 없어졌소. 모든 것은 한 곳에서 구할 수 있고, 그 밖에 다른 곳에서 조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국영 창고에서 직접 분배하는 제도가 상거래를 대신했고 이런 까닭에 화폐는 필요 없어진 것이오.”
“이러한 상품 분배는 어떤 방식으로 관리됩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이루어지지요.”리트 박사가 대답했다. “국가의 연간 생산 범위에서 개인의 몫에 해당하는 신용이 매해 초에 공공 장부 형태로 모든 시민에게 주어지고 있소. 그러면 그 사람에게 발급된 신용 카드(credit card)로 모든 동네에 있는 공공 창고에서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리고 무엇이든지 구입할 수 있지요. 당신도 곧 알게 될 이 제도는 개인과 소비자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사업상 거래의 필요성도 완전히 없애버렸소. 아마도 당신은 신용 카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을 거요.”[뒤를 돌아보면서:2000-1887, 에드워드 벨러미 Edward Bellamy 지음, 손세호 옮김, 지만지 고전천줄, 2008년, pp 93~94]

미국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였던 에드워드 벨러미가 1888년 내놓은 소설 ‘뒤를 돌아보면서:2000-1887(Looking Backward:2000-1887)’에서 주인공 줄리안 웨스트와 리트 박사가 주고받는 대화다. 보스턴에 살던 줄리안 웨스트는 1887년 5월 30일 잠들었다가 한 세기가 훌쩍 지난 2000년 9월 10일 깨어난 자본가 계급의 젊은이다. 그가 깨어난 2000년의 보스턴, 나아가 전 세계는 공산주의 사회가 되어 있었고 소설은 이러한 세계에 대해 그를 돌봐주는 리트 박사가 설명해주는 형식을 띠고 있다.

위의 신용 카드에 대한 묘사를 보면 비록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신용 카드보다는 직불 카드의 개념에 가깝긴 하지만, 마치 신용 카드업계가 이 소설을 보고 상품화에 착안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논리가 치밀하다. 단, 차이는 벨러미 소설에서의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폐지로 말미암은 화폐의 완전한 대체물이고 현재 우리가 쓰는 신용 카드, 또는 직불 카드는 화폐 사용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보조물이라는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