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미술

올해의 전시회

Stanley Kubrick 展

현대카드가 작년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연 기획전으로 스탠리큐브릭의 주요 작품에 쓰였던 소품, 시나리오, 그의 개인사물 등을 빼곡하게 채워 넣은 전시회였다. 앞서 글에서도 썼듯이 올해 초반 극장에서 만난 그의 작품들의 여운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전시된 소품들과 사전 콘티 등을 보면 여느 감독들도 그러하겠지만, 특히나 편집증 환자라고 여겨질 정도로 작품의 완성도에 집요하게 집착한 감독인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실제 스페이스오디세이에 쓰였던 HAL9000 실물을 만날 수 있었던 보기 드문 기회.

변월룡 展

우선 이 위대한 화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 미술평론가이자 기획자인 문영대 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소비에트 시절의 타협하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예술가의 주요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용기와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이 전시회를 세 번 찾았을 만큼 감명 깊었던 전시회다. 나는 화가 중에서도 그림 그리는 솜씨가 남다른 더 잘난 화가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변월룡 씨가 바로 그런 분이다. 이런 그림 솜씨와 이데올로기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결합하여 최상의 결과를 낸 이가 바로 변월룡 씨다.

르느와르 展

올해 5월 도쿄에 갔을 때 들른 도쿄 국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회다. 르느와르라고 하면 어딘가 식상한 면도 있을 것 같은 인상주의 화가지만 전시회를 보면 그것은 우리가 그의 명성이나 이미지를 과소비했을 뿐 그의 작품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 전시회가 인상적이었던 이유 하나가 특히나 일본에서 열린 전시회라는 점이었기 때문인데, 토요일 그 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기이할 정도로 질서정연하고 조용했다는 점, 그리고 컬렉션의 알찬 내용이 국내의 유사 전시회에서 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집요했다는 점 등 때문이다. 그런 점은 참 부러웠다.

고양이를 안고 있는 쥴리

우타가와 히로시게 展

이 전시회는 도쿄 시내를 배회하다 산토리 미술관에서 이 전시회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고 들른 대박 전시회였다. 우키요에를 즐기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진본을 본적이 없는지라 이렇게 우키요에의 大家의 작품을 한데 몰아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명소에도백경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풍경화를 – 그럼으로써 일종의 관광지 팸플릿 역할을 했던 – 주로 그렸던 작가인지라 역시 컬렉션은 풍경화 위주다. 전시회에서는 이런 작품을 현재의 위치와 매칭해서 보여주며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는데, 다시 한 번 일본인의 집요함을 느낄 수 있었던 전시회였다.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전시회

노이에 갤러리(Neue Gallarie)의 클림트 展

뉴욕에 갔을 때 메트로폴리탄미술관, MOMA 등 주요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감상한 상설전시는 여태도 그렇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한꺼번에 몰아서 걸작을 감상한 시기였다. 하지만 특별히 이 갤러리의 클림트 작품을 언급하는 이유는 약간의 기획전 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클림트의 여성 전신을 그린 주요 작품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었던 흔치 않은 전시회였기 때문이다. 방을 죽 둘러싼 클림트의 여인들을 바라보며 그가 살았던 시대의 그 분위기가 내 머릿속에 샤워 물을 퍼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소비되는 느낌이 드는 화가지만 역시 천재임에 틀림없는 화가였다.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전시회

지난번 일본에 갔을 때 운 좋게도 볼 수 있었던 전시회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의 우키요에(浮世絵) 작품 전시회였다.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당초 이 전시회가 있는 것을 모른 채 도쿄에 가서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전시회 포스터를 보고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키요에에 대해 많은 지식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히로시게의 명성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전시장을 입장하였다.

한 집요한 콜렉터의 수고로 모여진 히로시게의 작품을 전시한 이 전시회에서, 나는 그간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히로시게의 주요 작품들을 거의 빠짐없이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히로시게는 우키요에 중에서도 특히 풍경을 소재로 한 목판화1로 유명하다. 이는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안겨주는 일종의 여행 팸플릿의 역할을 하는, 당시 표현으로 메이쇼에(名所絵) 장르라 할 수 있다.

De pruimenboomgaard te Kameido-Rijksmuseum RP-P-1956-743.jpeg
By Utagawa; Hiroshige (I) , Utagawa died 1858; Uoya Eikichi Hiroshige (I)http://www.rijksmuseum.nl/collectie/RP-P-1956-743 (handle),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3364940

히로시게가 살았던 19세기 쿄토(京都)와 에도(江戸) – 오늘날의 토쿄 – 사이의 연결 루트라 할 수 있는 도카이도(東海道)의 풍경을 담은 ‘도카이도53차(東海道五十三次)’나 에도의 풍경을 담은 ‘에도100경(名所江戸百景)’ 등이 특히 유명한 그의 작품이다. 전시회에서는 그의 작품을 유리 창 너머로 비스듬히 배열하고 그 옆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지역의 위치와 실제 사진을 같이 배치하여 관객이 그 풍취를 함께 느낄 수 있게 배려하였다.

작품의 특징은 풍경이 단아하고 등장인물이 해학적이라는 점이다. 서구미술의 원근법도 도입한 히로시게는 등장인물들이 겪는 다양한 사건들을 스냅 사진 찍듯 화폭에 담아 극적긴장감과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인상주의적(!)” 특징은 고흐가 그의 그림을 필사할 만큼 유럽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색감으로는 두드러지게 붉은 색을 애용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보다 청명한 느낌의 호쿠사이와 비교된다.

전시 장소인 산토리 미술관은 쇼핑센터 안에 위치했음에도 2층 규모의 큰 전시장을 확보해, 많은 관객들 사이에서도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는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의 이런 조건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당일 찾은 다른 미술관에서 겪은 고초를 생각할 때 더욱 두드러진 미덕이었다. 또 다른 유명 우키요에 작가였던 구니요시2구니사다의 전시회가 열린 그 비좁은 미술관에서 나는 작품 감상을 포기한 채 그야말로 휩쓸려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3

어쨌든 히로시게의 전시회를 방문한 날, 당초 염두에 두고 있던 두 다른 우키요에 작가의 전시회까지 함께 감상하면서 내 평생 가장 많은 우키요에 작품을 육안으로 감상한 날이 되었다. 비록 목판화여서 육필화(肉筆畵)에 버금가는 생생함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뛰어난 묘사력, 이국적인 소재, 그리고 그림에 담긴 적절한 해학은 21세기의 한국인에게도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매력요소였다.

고양이를 안고 있는 쥴리

이번에 도쿄에 가서 우연치 않게 감상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전시회가 르느와르(Pierre-Auguste Renoir) 전시회였다. 이미 너무 유명한 화가이기 때문에 오히려 시큰둥할 수도 있는 전시회일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을 한데 모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전시회 때문에 일부러 일본을 들를 정도로 광적인 팬은 아니지만, 기왕에 일본에 온 김에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기에 전시회가 열리는 국립신미술관(國立新美術館)이 문을 열기 30분 전에 미술관에 도착하여 티켓 구매를 위한 줄에 합류했다.

르느와르 그림의 일관된 주제는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 사회의 주류로 등장한 부르주아의 아름다운 삶이라 할 수 있고, 이런 삶을 표현하기 위해 또한 당시 미술의 주류로 떠오르기 시작한 인상파의 명랑한 색채를 차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인상파적 화풍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는 것이 전시회를 본 내 느낌이었다. 그의 그림 컬렉션을 하나의 영단어로 표현하자면 개인적으로는 “화려한”이란 의미의 영단어 중에서도 “flamboyant”를 선택하고 싶다. 그의 최고의 걸작 ‘Dance at Le Moulin de la Galette’를 전시회에서 보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그 단어였다.

Pierre-Auguste Renoir, Le Moulin de la Galette.jpg
By Pierre-Auguste Renoirhttp://allart.biz/photos/image/Pierre_Auguste_Renoir_2_Bal_du_moulin_de_la_Galette_Smaller_version.html (derivative work of musee-orsay.fr image?)
Notwithstanding the source description, this is the version at the Musée d’Orsay (in the smaller version the central figure leaning forward lacks an earring).,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712177

이 전시회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어쩌면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flamboyant 하지 않은 ‘Julie Manet with cat’이란 작품이었다. 그의 낙관과도 같은 현란한 빛은 이 작품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차분한 붓터치와 갈색톤으로 통일한 색의 사용이 두드러진 작품 속 인물은 슬픈 눈동자를 차분하게 내리 뜬 채 고양이를 안고 있다. 그려질 당시 아홉 살이었던 쥴리는 르느와르의 친구이자 동료화가인 Berthe Morisot와 Eugène Manet 부부의 딸이다. 쥴리는 불행하게도 십대에 양친을 잃어 고아가 되었다. 르느와르는 그녀의 애정어린 후견인이 되었다고 한다.

Auguste Renoir - Julie Manet - Google Art Project.jpg
By Pierre-Auguste RenoirKQGO9bsplWZeCg at Google Cultural Institute maximum zoom level,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880381

이런 슬픈 사연을 지닌 이 작품은 그런 후일담을 제쳐두고라도 작품 그 자체만으로도 르느와르의 다른 작품에서의 정서와는 확연히 다른 정서를 지니고 있었다. 르느와르의 아이들에 대한 애정, 후에 고아가 될 운명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소녀의 슬픈 눈빛,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고양이의 교태 등, 이 작품의 각각의 참여주체들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내 가슴에 느껴졌기에 나는 한동안 이 작품 앞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쥴리 역시 이런 작품의 깊이를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세상을 등질 때까지 이 작품을 다른 이에게 넘기지 않고 보관하였다 한다.

후일담 하나를 더 공유하자면 이렇게 르느와르의 애정을 듬뿍 누린 쥴리가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르느와르의 모순된 삶을 폭로한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양친을 잃었지만 동료 화가들의 모델 등의 활동을 풍족한 삶을 산 쥴리는 회고록에서 어울렸던 유명 화가들의 사생활을 회고하였는데, 알려진 바와 다르게 르느와르가 당시 프랑스 지식인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드레퓌스 사건에서 反유태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회고록에 적어놓았던 것이다. 르느와르 역시 자신의 앞에서 고양이를 안고 있던 어린 소녀가 후에 자신의 위선을 폭로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라바지오 전시회 관람후기

물론 다른 화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카라바지오(Michael Angelo Merigi da Caravaggio)에 대한 내 지식은 짧았다.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는 화가이자 렘브란트보다는 더 극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 정도가 그에 대한 내 지식의 전부다. 그래서 도쿄 우에노 공원 안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에 가려던 당초의 이유도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디자인했다는 미술관 건물 자체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Younger)의 ‘새덫이 있는 겨울풍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05s3200.jpg
By 663highland663highland, CC BY 2.5,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93660

어쨌든 비오는 금요일 아침인지라 미술관도 한가하겠거니 하고 개관시간인 10시에 조금 이른 9시 반에 터덜터덜 미술관에 도착했지만, 정작 건물 앞은 길게 줄을 서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단체관람을 온 듯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장년과 노년의 일반관람객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물론 카라바지오의 명성 자체가 충분한 집객력이 있을 수준이었지만, – 이후 다른 전시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 도쿄 시민들의 미술에 대한 열기는 상당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Pieter Brueghel the Younger - Winter landscape with a bird trap - Google Art Project.jpg
By Pieter Brueghel the Younger0gGy79IBFl5knA at Google Cultural Institute maximum zoom level,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984334

카라바지오는 빛의 화가였다. 전시회의 안내 글에도 자세히 나와 있었지만, 그는 작품 바깥의 어디에선가 비춰지는 강렬한 조명을 통해 작품 속 인물들의 캐릭터와 심리상태를 표현하는데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성경 속 예수의 일화를 화폭에 옮긴 ‘엠마우스의 저녁 식사’가 그러한 카라바지오의 화풍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랄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인물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상황이 극적인 빛의 분할을 통해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었다.

Caravaggio - Cena in Emmaus.jpg
By CaravaggioOwn work,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251374

그런데 사실 그의 매력은 성경의 일화를 담은 작품들보다 그가 살던 시대와 근린에서 부대껴 살던 서민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점쟁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인데 젊은 집시 여성인 점쟁이는 상대 남성의 – 모델은 카라바지오의 동료이기도 했던 Mario Minniti로 추정되는 – 손바닥을 보며 점을 치는 듯하지만, 그의 미모에 마음이 뺏겨 있는 듯 손은 보지 않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 Good Luck - Google Art Project.jpg
By Caravaggio5AHkWwltiohLvQ at Google Cultural Institute maximum zoom level,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977102

이 전시회에서는 주요 작품과 같은 주제의 다른 이의 작품도 소개하고 있는데, ‘점쟁이’ 역시 Vouet라는 다른 화가의 매력적인 작품도 함께 전시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점쟁이와 그녀의 매력에 넋이 나간 남자, 그리고 그 와중에 남자의 주머니를 터는 노파의 구도가 매우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젊은 점쟁이 여인도 이 남자가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지만, 노파는 이 어리석은 남자를 등 뒤에서 한껏 조롱하며 – 손 모양이 ㅎㅎ – 탐욕스러운 손을 그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있다.

Vouet, Simon - The Fortune Teller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던 작품은 ‘Ecce Homo’였다. 라틴어로 “이 남자를 보라”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한 재력가의 의뢰로 카라바지오가 성경의 일화를 그린 것이다. 하지만 의뢰자는 그의 작품이 맘에 들지 않아 다른 작가에게 같은 주제로 의뢰했고 이 전시회에서는 그 작품 역시 전시되었다. 어쨌든 나는 인물의 묘사가 주제와 상관없이 너무 뛰어난 솜씨로 묘사되어 있는 점이 맘에 들었다.

CaravaggioEcceHomo.jpg
By CaravaggioWeb Gallery of Art has given permission for use of images on Wikipedia,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75851

카라바지오 전시회를 보면서 – 이후 다른 전시를 보면서도 – 느낀 점은 전시회가 약 16,000원 정도 하는 티켓 가격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충실한 컬렉션과 기획을 통해 소비자에게 만족을 준다는 점이었다. 앞서 썼듯이 주요 작품을 위해서는 그와 비교할만한 다른 작품을 같이 보여주며 그림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국내의 일부 알맹이 없는 전시회가 비교가 되었다.

미인도

Hyewon-Miindo.jpg
By 혜원 신윤복 (申潤福: 1758-19세기 초반) – http://www.koreaedunet.com/technote/read.cgi?board=picture&y_number=5,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800359

며칠 전인 4월 20일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간송미술전을 열고 있다.. 이번 미술전의 백미는 역시 신윤복의 미인도다. 조명이 어두운 감이 있어 그 화려함을 감상하기엔 좀 미흡한 감이 있었지만 명불허전 미인도에서의 인물은 금세라도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옅게 웃음이라도 지어줄 것처럼 생생한, 그러나 새초롬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어떤 평론가의 해석에 따르면 그림 속 여인은 옷을 벗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것은 여인의 한복 고름이 풀어진 채로 밑을 향하고 있고, 여인은 고름에 달려 있는 노리개가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여인은 필시 막 옷고름을 푸는,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순간이었다는 것이 평론가의 분석이다.

이러한 해석이 아니더라도 미인도는 관능미가 압축된 작품이다. 일단 여인은 요즘 기준으로 보더라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미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직접 보았을 때 가장 관능미를 자극하는 부분은 의외로 버선을 신은 여인의 발 한쪽이다. 짐작컨대 화가는 일부러 한쪽 버선발만 삐쭉 드러냄으로써 은근한 관능미를 부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인의 발은 특히 동양에서 관능미를 느끼게 하는 신체 부위로 여겨졌다. 이런 문화가 중국에서는 전족(纏足)이라는 비극적인 풍습을 낳기도 하였지만, 신체 노출이 심하지 않은 동양의 복식 문화에서 발의 노출은 그만큼 남성의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체 부위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신윤복은 미인도에서 이런 문화와 관념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여담으로 이런 발의 관능미를 잘 활용한 영화가 최근에 본 ‘지온바야시(祗園囃子)’라는 일본영화였다. 내키지 않는 남성과 억지로 잠자리를 해야 하는 게이샤에 관한 일화를 담은 이 작품에서, 감독은 여주인공이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상황을 버선을 벗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개인적으로는 여인의 발과 버선이 의미하는 바를 잘 활용한 장면으로 여겨졌다.

정보의 전파에 있어 판화가의 역할

승리를 거둔 전투나 왕의 대관식, 혹은 축제의 현장이나 발레 공연, 군주가 주관한 공연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중요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판화를 사용한 것은 아닐까? [중략] 이제 그런 현장을 나가게 된 것은 화가가 아닌 판화가들이었다.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들은 오늘날의 사진가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가령 프랑스의 판화가인 자크 칼로Jacques Callot(1592~1635) 역시 브레다와 라로셸 진지에 가서 그곳의 주요 상황들을 사람들에게 판화로 알렸고, 박람회장의 풍경을 판화로 담아내는가 하면 전쟁의 공포와 집시들의 떠도는 삶도 판화로 새겼다.[책의 탄생, 뤼시앵 페브르/앙리 장 마르탱 지음, 강주헌/배영란 옮김, 돌배게, 2014년, pp185~186]

책의 탄생과 발전에 관한 역사를 서술한 이 책에서 판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그림이 가진 자의 것이라면 판화는 덜 가진 자의 것이었다. 그림은 한 폭밖에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왕과 귀족이 자신의 모습을 남기는 용도로나 쓰였지만, 판화는 여러 장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다량으로 생산되는 책의 삽화로 쓰이기도 했고 독립적인 판화가 그림보다 저렴한 값에 소장용으로 팔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The Hanging by Jacques Callot.jpg
The Hanging by Jacques Callot” by Jacques Callotartgallery.nsw.gov.au.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전쟁의 고통들 ; 작품 11. “교수형”

이렇듯 대량생산과 복제가능성은 소수만이 향유하던 재화와 서비스를 보다 많은 이들이 향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또한 책이나 판화 등 문화적 상품에 대한 시장이 보다 커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루벤스는 자신의 그림을 확산시킴으로써 인기가 높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판화작업실을 따로 두어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게 했다고 한다. 이렇듯 복제는 사실을 알리고, 명성을 가져다주고, 지식을 퍼트렸다.

오늘날의 풍경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크 칼로가 특정 상황을 알리기 위해 동판화에 그림을 새겨 찍어낸 후 사람들에게 그것을 퍼트렸던 그 상황에서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어느 날 저녁의 노을이 아름다우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순식간에 아름다운 노을사진이 퍼진다. 당시 사람들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속도로 정보를 전파하고 수용하는 세상이다. 때로는 너무 빠른 감도 없지 않다.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아내’ 感想文

요즘 아이패드로 이런저런 명화 컬렉션 앱으로 명화를 감상하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다. 그런 앱들 중 하나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을 담은 Louvre HD다. 그림들은 당연하게도 성화(聖畵)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그림들보다는 화가가 살던 당시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風俗畵)가 더 마음에 든다. 그런 풍속화도 당시 화가들의 주요고객이었던 귀족이나 부자들의 초상화가 많지만 때로는 거지나 저자거리의 상인 등 삶이 고달픈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다.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아내(출처)
 

그런 그림들 중 유난히 내 눈을 잡아끈 그림이 있어 소개한다. 캥탱 마시(Quentin Matsys 1466~1529)라는, 지금의 벨기에인 플랑드르의 화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아내’(1514년作)가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귀족이 아닌 고리대금업자라는 상인이라는 점이다. 당시 플랑드르는 유럽의 상업 중심지였고 고리대금업자라고 해서 꼭 부정적인 뉘앙스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를, 그것도 그가 일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 이채로웠다.

그림을 상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전체적인 그림을 보자. 신중하게 금화의 무게를 재고 있는 업자의 표정에는 장인정신을 느낄 정도의 숙연함이 있다. 옆의 부인도 무심한 듯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 생생하다. 힘줄까지 느껴지는 손들의 묘사력도 뛰어나다. 당시의 복식문화를 알 수 있는 의상, 여러 정물들의 터치도 마음에 든다. 전체적으로는 처음 봤을 때 연상되는 그림이 있었는데, 비슷한 지역에서 활동했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년경 ~ 1441)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식’(1434년作)이었다.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2인 초상화 (출처)
 

그림의 의미를 살펴보자. 후대의 ‘미술 역사가’들의 평은 이 그림이 풍자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론인 것 같다.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라고는 했지만 중세엔 아직 고리대금업자는 도덕적으로 떳떳한 직업은 아니었다. 당시교회는 이자수취를 금지하고 있었고, 주로 차별받는 유대인이 이런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의 아내가 성가족(聖家族)의 그림이 담긴 종교서적은 건성으로 넘기고 남편의 일에 신경을 쓰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도 그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모양새다.

한편,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전부 몇 명일까? 책 속의 마리아와 예수를 뺀다면 다섯 명이다. 그림의 오른쪽에 아내의 옆을 보면 창밖으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의 모습이 부부 앞에 놓인 볼록 거울 – 이 정물이 또한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을 연상시킨다 – 에 비춰지고 있다. 화가가 왜 이런 사람들을 슬쩍슬쩍 배치해두었는지, 그 상징적 의미가 무척 흥미롭다. 집밖의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거울에 비친 터번을 두른 이는 왜 거기에 있는 것일까?

일단 집밖의 두 사람에 대해서는 업자의 작업실이 저자거리에 있었으니 집밖에 사람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문제는 거울에 비친 사람이다. 어떤 역사가는 이 사람을 창문 밑에 숨은 도둑이라고 했다는데, 역사가고 뭐를 떠나 어떻게 이런 해석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누가 봐도 방의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 터번을 두른 사람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이 사람은 고리대금업자의 동업자이거나 그에게 돈을 빌리러 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산토스 마누엘 레돈도(Manuel Santos Redondo)라는 한 교수는 이 그림에 도덕적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는 것보다는, 마시가 당시 플랑드르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경제행위에 대한 묘사를 한 것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있다. 아내가 종교서적을 펴들고 있는 것도 그들의 상행위가 종교적으로 옳은 것인지를 참고하고 있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이 그림에 과도한 풍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현대사가의 편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로 이 그림이 그려진 25년 뒤, 마리우스 반 레이메르발(Marinus Van Reymerswaele)이라는 화가가 똑같은 이름과 비슷한 구도로 또 하나의 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라면 아내가 보고 있는 책이 종교서적이 아니라 회계장부란 점이다. 레돈도 교수는 이런 패턴의 그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저 막 루터 종교개혁이 막을 열던 시대상황의 경제행위에 대한 묘사일 뿐 다른 풍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미학적으로 마시의 그림에 한참 떨어진다 (출처)
 

어쨌든 레돈도 교수의 해석도 또 하나의 의견이다. 개인적으로는 호사가적 취미 때문에 풍자적 알레고리가 어느 정도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작품 그 자체만으로도 심미적 쾌감을 충분히 주는 걸작이라는 점에서 불만을 가질 수가 없다. 요컨대 마시의 그림에서 요모조모 뜯어보며 의미를 부여할만한 재밌는 소재는 많지만, 꼭 특정 역사가의 해석대로만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들여다보는 계기 정도로 삼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