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아내’ 感想文

요즘 아이패드로 이런저런 명화 컬렉션 앱으로 명화를 감상하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다. 그런 앱들 중 하나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을 담은 Louvre HD다. 그림들은 당연하게도 성화(聖畵)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그림들보다는 화가가 살던 당시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風俗畵)가 더 마음에 든다. 그런 풍속화도 당시 화가들의 주요고객이었던 귀족이나 부자들의 초상화가 많지만 때로는 거지나 저자거리의 상인 등 삶이 고달픈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다.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아내(출처)
 

그런 그림들 중 유난히 내 눈을 잡아끈 그림이 있어 소개한다. 캥탱 마시(Quentin Matsys 1466~1529)라는, 지금의 벨기에인 플랑드르의 화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아내’(1514년作)가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귀족이 아닌 고리대금업자라는 상인이라는 점이다. 당시 플랑드르는 유럽의 상업 중심지였고 고리대금업자라고 해서 꼭 부정적인 뉘앙스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를, 그것도 그가 일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 이채로웠다.

그림을 상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전체적인 그림을 보자. 신중하게 금화의 무게를 재고 있는 업자의 표정에는 장인정신을 느낄 정도의 숙연함이 있다. 옆의 부인도 무심한 듯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 생생하다. 힘줄까지 느껴지는 손들의 묘사력도 뛰어나다. 당시의 복식문화를 알 수 있는 의상, 여러 정물들의 터치도 마음에 든다. 전체적으로는 처음 봤을 때 연상되는 그림이 있었는데, 비슷한 지역에서 활동했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년경 ~ 1441)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식’(1434년作)이었다.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2인 초상화 (출처)
 

그림의 의미를 살펴보자. 후대의 ‘미술 역사가’들의 평은 이 그림이 풍자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론인 것 같다.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라고는 했지만 중세엔 아직 고리대금업자는 도덕적으로 떳떳한 직업은 아니었다. 당시교회는 이자수취를 금지하고 있었고, 주로 차별받는 유대인이 이런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의 아내가 성가족(聖家族)의 그림이 담긴 종교서적은 건성으로 넘기고 남편의 일에 신경을 쓰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도 그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모양새다.

한편,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전부 몇 명일까? 책 속의 마리아와 예수를 뺀다면 다섯 명이다. 그림의 오른쪽에 아내의 옆을 보면 창밖으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의 모습이 부부 앞에 놓인 볼록 거울 – 이 정물이 또한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을 연상시킨다 – 에 비춰지고 있다. 화가가 왜 이런 사람들을 슬쩍슬쩍 배치해두었는지, 그 상징적 의미가 무척 흥미롭다. 집밖의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거울에 비친 터번을 두른 이는 왜 거기에 있는 것일까?

일단 집밖의 두 사람에 대해서는 업자의 작업실이 저자거리에 있었으니 집밖에 사람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문제는 거울에 비친 사람이다. 어떤 역사가는 이 사람을 창문 밑에 숨은 도둑이라고 했다는데, 역사가고 뭐를 떠나 어떻게 이런 해석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누가 봐도 방의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 터번을 두른 사람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이 사람은 고리대금업자의 동업자이거나 그에게 돈을 빌리러 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산토스 마누엘 레돈도(Manuel Santos Redondo)라는 한 교수는 이 그림에 도덕적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는 것보다는, 마시가 당시 플랑드르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경제행위에 대한 묘사를 한 것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있다. 아내가 종교서적을 펴들고 있는 것도 그들의 상행위가 종교적으로 옳은 것인지를 참고하고 있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이 그림에 과도한 풍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현대사가의 편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로 이 그림이 그려진 25년 뒤, 마리우스 반 레이메르발(Marinus Van Reymerswaele)이라는 화가가 똑같은 이름과 비슷한 구도로 또 하나의 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라면 아내가 보고 있는 책이 종교서적이 아니라 회계장부란 점이다. 레돈도 교수는 이런 패턴의 그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저 막 루터 종교개혁이 막을 열던 시대상황의 경제행위에 대한 묘사일 뿐 다른 풍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미학적으로 마시의 그림에 한참 떨어진다 (출처)
 

어쨌든 레돈도 교수의 해석도 또 하나의 의견이다. 개인적으로는 호사가적 취미 때문에 풍자적 알레고리가 어느 정도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작품 그 자체만으로도 심미적 쾌감을 충분히 주는 걸작이라는 점에서 불만을 가질 수가 없다. 요컨대 마시의 그림에서 요모조모 뜯어보며 의미를 부여할만한 재밌는 소재는 많지만, 꼭 특정 역사가의 해석대로만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들여다보는 계기 정도로 삼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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