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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感想文

예술, 그 중에서도 미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어떤 재능이 미술을 미술답게 하고 우리에게 예술적 쾌감을 안겨주는가? 이러한 질문은, 예를 들면 마르셀 뒤쌍의 작품 ‘샘(Fountain)’을 대할 때 더욱 대답하기 난감해진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볼 때에는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이던 것이 ‘샘’과 같은 현대의 추상예술에 접어들면 흐릿해지는 것이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는 이런 현대미술의 모호함을 고발한 책이기도 하다.

한편 언젠가부터 이러한 제도권의 위선을 비웃으며 미술계의 ‘힙합전사’가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거친 거리의 청년들이 극장의 호화스러운 무대에서 우아한 춤을 추는 대신에 거리에서 골판지를 깔아놓고 힙합댄스(또는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것처럼, 일군의 예술가들은 거리의 벽이나 광고판에 불법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놓기 시작한다. 그런 예술가들 중에서 내가 알게 된 최초의 거리예술가는 아마도 장 미쉘 바스키아였던 것 같다.

바스키아의 현란한 색채감과 절제되지 않은 형태의 자유분방한 작품을 접한 제도권은 그에게 ‘검은 피카소’란 별명을 지어줬고, 이윤극대화를 위해 그의 재능을 빠른 속도로 확대재생산한다. 결국 그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작품‘공장’에서 자신의 재능을 착취당하며 괴로워하다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지만, 거리 예술가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간다. 그리고 한 프랑스인이 이러한 거리의 삶을 아무 생각 없이 필름에 담기 시작한다.

스스로가 거리 예술가인 뱅시(Banksy)가 감독했다는 다큐멘터리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Exit Through The Gift Shop)’(2010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티에리 구에타(Thierry Guetta)가 바로 그 사람이다. 영화는 어릴 적 경험한 엄마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모든 것을 비디오로 기록해야만 성이 풀리는 집착증을 가지게 된 티에리가 어떻게 거리 예술가의 모습을 찍게 되었고, 뱅시를 만나게 되었고, 뱅시의 권유에 따라 스스로 거리 예술가가 되어 “상업적으로” 성공하는지를 경쾌하지만 냉소적인 유머감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다큐에 따르면 원래 뱅시는 그가 기획한 미국에서의 전시회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고, 또 다시 거리예술이 제도권의 상업주의에 편입되는 과정을 보면서, 거리예술의 진정한 모습을 티에리의 기록물을 통해 알리기 위해 티에리에게 기록물을 편집해 작품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티에리의 재앙 수준의 작품에 넋을 잃은 뱅시가 작품의도를 완전히 바꾸고 티에리의 자료를 기초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면서 이 영화가 탄생하게 된다.

즉, 뱅시의 권유에 따라 티에리 스스로가 전시회를 기획하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이 과정이 제도권 미술계의 허영심에 찌든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을 간파한 뱅시가 작품을 거리예술에 대한 소개 다큐가 아닌 거리예술을 기록하고 다니던 티에리의 인생역전 드라마로 바꿔 버린다. 이를 통해 그는 다다이즘, 바스키아, 그리고 뱅시 그 자신 등, 미술계의 연속되는 사기극이 티에리에 이르러서도 반복재생되고 있음을 고발한다.

특히 티에리가 존경하는 뱅시의 권유에 따라 기획한 전시회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여 어이없는 대규모의 전시회로 만들고, 구인모집을 통해 작품을 제작할 기술자들을 모집하고 – 마치 다큐에 언급된 데미안 허스트처럼 – , 전시장을 기존의 팝아트를 포토샵으로 변형시킨 작품으로 메워가는 과정이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재생산 도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사기극의 극적효과는 더욱 두드러진다. 예술의 자판기 수준이랄까?

예술적 재능과 관련 없는 티에리의 성공에 대해 뱅시 등 거리예술가들은 씁쓸한 미소를 짓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티에리는 여전히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이룬 성공에 흡족해 한다. 작품구입자들은 티에리의 작품이 어떤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건 간에 다음 거래에서 만족할만한 투자수익을 거두기만 하면 되니까, 어쨌든 이 예술계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채권은 시장이 폭발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보관되거나 유통될 것이다.

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큐비즘, 기계, 건축, 공산당, 서민적 레크리에이션 등등. 우리에게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큐비즘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인 페르낭 레제(Jules Fernand Henre Léger)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나열해보았다.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 중 하나로는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립 퐁피두 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2008년 한국에서 열린 ‘퐁피두 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이 열릴 때에 국내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작품이 앞서 나열한 페르낭 레제의 그림에 관한 키워드가 포괄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Les Loisirs. Hommage à Louis David
huile sur toile de Fernand Léger – 1948-1949
Paris,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 Centre Georges Pompidou
© ADAGP Paris 2004
© CNAC / MNAM – distr : RMN / Jean-François Tomasian

1881년 생인 페르낭 레제는 건축을 공부하다 1910년경부터 큐비즘 운동에 참가, 피카소, 로베르 들로네 등과 함께 적극적인 추진자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위대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그는 기계문명, 건축, 추상회화의 접점을 모색하는 그림을 즐겨 그렸다. 1919년 그린 ‘도시’라는 작품을 보면 이러한 경향을 잘 목격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기계문명에 대해 낙관적이었고 이를 즐겨 표현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기계문명과 기술진보에 대해 낙관적이란 점에서 목가적인 反기계문명론자와는 다른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의 입장이 유별날 것은 없다.

그의 작품만의 특징을 하나 들자면 유난히 원통형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기계 플랜트에 들어가는 각종 배관을 염두에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그의 경향에 대해 한 평론가는 큐비즘이란 단어를 재밌게 비틀어 튜비즘(Tubism)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런 레제의 원통형에 대한 집착은 구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그가 그린 사람들은 원통형의 체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사람들은 뚱뚱해 보인다기보다는 튼튼해 보이는 골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유난히 뚱뚱한 사람을 즐겨 그렸던 콜롬비아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다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작품을 맥락 없이 전시장에서 만난다면 그저 평범한 남녀가 여가를 즐기는 모습쯤으로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술진보로 노동자들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담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작품이다. 예의 원통형 몸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천국” 미국에서 유입된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하고 하이킹을 즐기고 있는데, 기술진보로 직장에서 잘리는 대신 여가를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그린 사회는 이미 이상적인 노동자 중심의 사회가 전제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퐁피두 센터의 설명에 따르면 레제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노동자를 위한 유급휴가를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휴가는 이전까지 귀족이나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이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잘 느낄 수 있다. 프랑스 노동자는 마티뇽 협정 이전까지는 유급휴가를 즐길 수 없었다. 그런데 계급투쟁을 통한 자본가와의 타협, 기술진보로 인한 사회잉여의 증가 등이 노동자의 여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이 시기부터 만들어졌다. 그래서 자연히 이 작품에는 혁명까지는 아니어도 사회개혁을 통한 노동자 세상에 대한 낙관이 담기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가 오늘날 당연시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노동자의 유급휴가는 – 사실 잘 알다시피 그마저도 여전히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그렇듯이 이렇게 지난한 계급간의 갈등과 투쟁, 그리고 레제와 같은 예술가들의 선전선동에 의해 기틀을 다져온 것이다. 일단 무엇이든지 가지게 된 자들은 웬만해선 기득권을 잘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평론가는 그의 작풍을 “사회주의 이론의 결과이되, 전투적인 맑시스트라기보다는 열정적인 휴머니스트”적인 것이라 평했는데, ‘여가’는 이러한 평가에 잘 어울리는 작품일 것이다.

알베르토 코르다

알베르토 코르다(Alberto Korda). 작가 자신의 명성보다 더 유명한, 예술작품 중에 가장 빈번히 복제된 이미지의 창작자이다. 그가 찍은 쿠바의 영웅 체게바라(Che Guevara) 사진 한 장이 이탈리아 출판업자의 손에 건네지면서, 그 이미지는 수많은 변주곡으로 복제되었고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급기야 상업적으로도 변용되어 왔기에, 쿠바 혁명에 대한 그 어떠한 서술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Foto original del Guerrillero Heroico de Alberto Korda

얼터너티브락 밴드 Radiohead는 그들의 대표곡 Creep이 너무 대중적으로 유명해지는 바람에 자신들의 음악적 의도가 곡해되었기에 그 곡을 싫어했다는 미확인 에피소드가 있지만, 적어도 코르다는 체게바라의 사진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뭐 어쨌든 그로 인해 전 세계, 특히 유럽 권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얻었고, 이를 통해 다른 작품들도 소개할 수 있었으니 일종의 세상을 향한 깔때기의 역할은 충분히 한 셈일 테니 말이다.(그리고 역시 그 덕에 한국에서도 작품전이 열렸고…)

코르다의 전시장은 코엑스 전시장이다. 뭐 다른 전시장도 크게 유별난 상황은 아니긴 하지만, 나는 반(反)자본주의적인 작품들의 전시장소가 자본주의의 첨병의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인 코엑스에서 열린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어쩌면 다시 체게바라 사진으로 돌아가서, 그 작품이 지닌 이념적 지향성이 지속적인 복제를 통해 – 특히 상업적 복제 – 많이 희석화되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시장은 전시공간의 협소함 때문에 1관과 2관으로 나뉘어져 있다. 특별히 감상의 맥을 끊는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작품의 배치와 섹션별 공간 활용이 맥을 끊었다) 전시된 작품은 그가 스튜디오 코르다에서 찍은 광고사진들, 피델 카스트로, 체게바라, 기타 혁명영웅들을 찍은 사진들, 기타 쿠바 민중들을 찍은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양적으로는 일종의 비공인 관제 사진사였던 관계로 압도적으로 카스트로 사진이 많다.

하지만 카스트로에 대한 사진이 많은 것이 곧 그에 대한 우상화 내지는 편향된 시각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혁명>지의 고용사진사로 일한 혁명적 예술가를 자처한 이이기에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타의 사회주의 영웅의 사진과는 구별되는 시각이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작품이 바로 <군중에게 연설하는 카스트로>다.

이 작품은 혁명 영웅이자 지도자인 카스트로가 프레임에서 매우 희한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물론 그가 사진의 중앙에 있긴 하지만 황당하게도 연설을 듣는 이의 발아래 서있다. 자칫 불경한 사진으로도 읽힐 수 있는 이 도발적인 구도를 통해 코르다는 카스트로를 비롯한 혁명 영웅들이 인민들과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인민과 구분되어 있는 레닌의 연설 장면 이미지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주1)

이런 작품 이외에도 링컨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이랄지 군중 속에 파묻혀 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사진을 통한 개인의 우상화를 의식적으로 피하려 하였는지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자유로운 구도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기는 하지만 자유주의적 중산층의 삶을 누렸던 코르다 개인의 리버럴한 성향이 일정 정도 작품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코르다는 광고사진 작업으로 사진사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또한 이전에는 회계를 배워 쿠바에 있는 포록터앤갬블이라는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기도 했다. 여자를 좋아하고 파티를 좋아하는 젊은 미남 코르다에게 인민이니 혁명이니 하는 말들은 그리 와 닿지 않았다. 다만 어떤 이는 벤쯔를 몰고 다니며 호사를 누리는데 어떤 이는 아이를 데리고 구걸을 하러다니는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인민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어느 농장에서의 광고사진 작업 중에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었다. 코르다는 농장에서 한 소녀를 발견하였는데 그 아이는 작은 나무토막을 안고 있었다. 코르다는 그 나무토막이 어떤 용도인지 궁금했으나 놀란 아이는 도망가며 나무토막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아이야 울지마.” 그 나무토막은 소녀에게 인형이었던 것이다. 코르다는 이 상황에 큰 충격을 받는다.

해당 작품 La niña de la muñeca de palo, 1959 감상하기

그리고 쿠바혁명이 일어나자 그 혁명의 정당성을 받아들이고 자본주의의 분장사에서 사회주의의 선동가로 전향하게 된다. <혁명>지의 사진사로 활동하면서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 집권층의 일을 도맡아 하게 되고, 이 덕에 마침내 1960년 5월 5일 열린 아바나 항구에서 폭발한 프랑스 화물선으로 인한 사망자 추모식에서 전 세계에 잊히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로 남게 된 체게바라의 사진을 찍게 된다.

전시회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전시회는 이러한 삶의 질곡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알찬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20분짜리 다큐멘터리도 상영되는데 그의 인터뷰가 담겨져 있어 작품의도와 그의 삶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문제는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전시의 흐름이 그의 사상의 변화에 맞게 배치되지 않았다는 – 예를 들면 카스트로 사진은 전시회 전반부, 광고사진은 후반부에 배치되는 등 – 점이다.

몇 년 전에 지적재산권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의 존재를 처음 알았던 이래, 이번에 그의 작품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모든 작품이 그렇지만 사진예술 또한 작가의 삶, 그 작품을 창작할 당시의 환경, 작품의도를 알 때에 더욱 마음에 와 닿게 마련인데 이번 전시는 한국 땅에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중에서도 드문 경우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Karsh가 탐미적이라면 Korda는 유쾌하고 혁명적이다.

그의 작품들 감상하기

(주1) 물론 그의 다른 작품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이미지들은 기존의 지도자적 시각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고호를 괴롭히고 있는 것도 역시 ‘생활’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형의 존재가 단순히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저주스러운 짐짝’이 아닐 리 없다. 현세적인 가치관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은 필요하다. 이 단순한 모순이야말로, 옛날 옛적부터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를 괴롭혀왔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대지만, 그런 행위는 그 채찍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까지도 함께 쓰러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이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짐짝’인 것이다.[나의 서양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92년, p57]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술과 관련된 책치고는 그 내용이 조금 무겁다. 이는 글쓴이인 서경식의 개인적인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그를, 정확하게는 그의 형제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서승, 서준식, 서경식은 재일조선인 2세였다. 이들 중 서승과 서준식은 서울대에 다니고 있던 중 북한을 방문했다는 혐의로 이른바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의 주모자로 투옥된다. 이후 이들 가족에게는 기나긴 고통의 나날이 지속된다.

이 당시 서승은 고문에 못 이겨 난로를 껴안고 자살을 기도해 얼굴과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서슬 퍼런 독재에 대한 저항의 표시를 온몸에 새긴 셈이다. 서준식은 7년형을 마치고도 전향서를 쓰지 않아 감호처분을 받아 다시 10년을 더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의 부모들은 말년에 자식들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자식들의 출소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누이와 서경식 역시 크나큰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했다. ‘짐짝’이나 ‘채찍’이니 하는 단어는 바로 글쓴이의 이런 생생한 경험에서 나온 단어인 것이다.

사실 재일조선인에게 그 당시 조국이란 남과 북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북조선과 남한이 아닌 조국의 남쪽과 북쪽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양쪽은 한쪽으로의 굴종을 요구했고, 결국 북한방문 그 자체로 그들은 ‘혁명가’로 분류되어 창살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끔찍한 고문, 자살시도, 사상전향서 작성 거부 등 ‘혁명가적’ 삶은 가족들에게 채찍이고 짐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 때문에 그들을 탓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혁명가’에게 있어서의 ‘생활’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집단적인, 때로는 구조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된다. 혁명가 김문수가 왜 ‘혁명가’의 삶을 포기하고 경기도 지사라는 ‘생활인’의 삶으로 전향하였을까? 언젠가 그는 그것은 정치적 변절이 아니라 그냥 정치적 삶을 포기한 것뿐이라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진의는 알기 어려우나 뭔가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이 그의 태도변화에 한 몫을 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비단 그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어쩌면 같은 이유로 삶의 노선을 바꿨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활동가나 기타 진보단체 활동가 등 이른바 아직까지 ‘변혁적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러한 현세적 문제가 현재진행형이다. 비록 급여를 받는다고는 하나 현실적인 씀씀이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의 돈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소위 동지들은 여전히 암묵적으로 그런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민주노동당의 노조설립 시도에서 보인 지도부의 반동적 행태가 바로 그러한 강요의 전형이다.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진보정당의 득표수 증감보다 이런 현세적 문제가 더욱 당의 진로를 괴롭히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서경식의 이 책은 미술 감상문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그와 그의 가족들, 나아가 조선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를, 그가 감상한 미술작품에 투영시킨 수필집에 가깝다. 고흐, 벨라스께스, 고야, 삐까소, 고이소 료오헤이 등의 그림 등 다양한 그림이 소개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흑백 문고판이다. 다행히 2002년 칼라를 실어 개정 출판되었다고 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출옥한 두 형의 그간의 기록도 [서승의 옥중 19년]이란 이름을 출간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글쓴이의 통찰력 있는 서술을 한 문장 더 인용한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奔流)가 되지만, 대개는 맥 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는 열매는 흔히 낯 두꺼운 구세력(舊勢力)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나의 서양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92년, p91]

클림트

클림트하면 개인적으로 안 좋은 추억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십년도 훨씬 전 그가 우리나라에서 아직 유명세를 떨치지 못하던 시절, 나는 지금의 아내와 ‘친구’사이였다. 그리고 따로 애인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엔가 아내를 애인보다 먼저 오전에 만났는데 그 당시로서는 희귀한 클림트 달력을 선물로 줬다. 뒤늦게 애인에게 줄 선물이 없는 것을 깨닫고 그걸 도로 회수해서 애인에게 갖다 줬다. 그 뒤로 여태까지 아내에게 ‘선물 줬다 뺏어간 X’ 으로 낙인찍혀 있다. 아마 평생 갈 것 같다.

어쨌든 오늘 짬을 내서 동양에서 최초로 연다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의 전시회에 다녀왔다. 어렸을 적 수학여행에 가서 첨성대 실물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어 그 뒤로 유명작가의 유명작품들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을 보면 ‘역시 클림트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력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습작에서조차 느껴지는 놀라운 머리카락 세부묘사랄지(그림보기), 단색의 검은 옷에서의 풍부한 색감표현(그림보기) 등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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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039” by Gustav Klimthttp://www.belvedere.at/en/sammlungen/belvedere/jugendstil-und-wiener-secession/gustav-klimt.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사실 ‘키스’와 같은 그의 대표작 상당수가 이번 전시회에서 제외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면 홍보용 걸개그림을 장식하고 있는 ‘유디트 I’(그림보기) 정도다. 그렇더라도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그림들에서도 충분히 클림트의 실력과 화풍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작품은 오히려 우키요예를 연상시키는 그의 현란한 색채나 황금장식과는 거리가 먼 ‘마리 브로이니크 초상’(그림보기) 이다. 성공한 사업가의 부인이었던 이 여인은 차분히 옆을 바라보고 있지만 자신의 몸을 감싼 옷가지 중에서 오른쪽 장갑을 벗어 틀에서 벗어나 방종해지고픈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점이 오히려 홍조를 띤 하얀 얼굴과 함께 어울려 노골적인 전라의 여성보다 더 에로틱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클림트는 그런 여인을 극사실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치밀하게 표현해냈다.

옆 전시실에서 진행 중인 – 내일 끝난다 – 요섭 카쉬(Yousuf Karsh)의 사진전도 보았다. 명사들의 사진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담아낸 20세기 최고의 인물사진가라는데 역시 멋진 작품들이 많았다. 그의 작품들에서 주목할 것은 인물의 얼굴도 있지만 바로 손이다. 손이 어떤지, 어떤 손 모양을 하고 있는지가 그 인물의 됨됨이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사례 보기) 버트란트 러셀의 사진은 역광을 통해 아예 실루엣으로 처리했는데 그러한 과감성이 재밌었다.

사족 : 분리파의 다른 작가들 작품도 전시되어 있던데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은 웬 생뚱맞은 배를 그린 그림 한 점이 달랑 있었다.

“드랭 회사가자”

어제 휴가를 내고 아내와 ‘퐁피두 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 을 다녀왔다. 모레 끝나니 거의 끝물인 셈이다. 마티스, 샤갈, 후앙 미로 등의 작품이 반가웠고 브라크라는 화가는 거의 알지 못했는데 색감이나 구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피카소는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것들이 대개 그렇듯이 소품 위주여서 그리 와 닿지 않았다.

사실 아내와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앙드레 드랭 Andre Derain’이라는 화가의 작품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화가였다. 나중에 뒤져보니 마티스의 권유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야수파의 느낌이 나는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내가 감동받은 작품은 오히려 훨씬 구상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포도가 있는 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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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é Derain, circa 1903” by Musée de la Maison Fournaise.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André Derain“>Fair use via Wikipedia.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지 인터넷에서조차 이미지가 올라와있지 않고 겨우 찾은 것이 링크해놓은 이 이미지다. 보고 실망하시겠지만 사실 어이없게도 원작의 우아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원작을 보면 ‘적갈색의 마술’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적갈색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있다. 또한 기백 있는 붓놀림으로 포도, 포도나무, 수건을 멋들어지게 표현했다. 그 솜씨가 얼핏 동양화의 붓놀림을 연상시킬 정도다.

쓸데없는, 또한 작품 스스로는 별로 원치 않을지도 모르는 명성을 얻는 바람에 작품의 맛이 고갈되고 있는 – 대표적으로 클림트의 키스 – 작품들에 비해 이런 숨겨진, 그러나 참한 작품이 때로는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돌아오는 길에 봄 양복을 샀는데 때마침 적갈색이었다. 그래서 양복 이름을 ‘드랭’이라 붙이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마디 해주는 거다.

“드랭 회사가자.”

땡땡의 모험

이승환 동무가 요즘 직장을 구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야한 글은 안 올리고 뜬금없이 ‘좌빨 블로거가 추천하는 도서’라는 블로그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글을 올려놓으면서, 나를 좌빨 블로거라고 딱지를 붙인 후 책을 추천하라고 을러댄다. 이전에도 이미 한번 소위 양서(良書)를 추천한바 있는데 사실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나 같은 것이 책을 읽어봐야 세상 책의 1조분의 1도 안 읽었을 텐데 불특정다수에게 “니네 이 책 알아?”라고 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뭐 이승환 동무가 오랜 방황 끝에 취직도 한 것 같고 이제 자본주의의 마름으로 충실히 살아간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에 대한 작은 선물로 그의 부탁 – 강권 -을 들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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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me from Breaking Free” by Scanned from a copy of the book..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The Adventures of Tintin“>Fair use via Wikipedia.

내가 추천하는 도서는 꿈과 모험이 가득한 만화 ‘땡땡의 모험(영어 제목 : The Adventures of Tintin, 불어 제목 : Les Aventures de Tintin)’이다. 실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를 꼽으라면 이 만화 이외에 다른 만화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독서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만화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 만화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뚜렷치 않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유행하던 이른바 소년잡지에 단편적으로 소개되던 에피소드에서부터 땡땡을 처음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 국내에 출간된 하드커버도 구입하고 외국 사이트에서 영어판도 구입하면서 조금씩 컬렉션을 늘려갔고 총 24개에 달하는 에피소드 중 거의 전부를 구비하게 되었다.

‘땡땡의 모험’은 Herge(에르제)로 알려진 벨기에 작가 Georges Remi(1907-1983)가 창조한 작품이다. 그는 보이스카웃 신문이나 카톨릭 신문 등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가, 1929년 처음 카톨릭 신문  Le Petit Vingtieme 에 땡땡의 캐릭터로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에피소드는 ‘땡땡과 소비에트’로 그 후 첫 단행본으로 출시된다. 이후 사실상의 마지막 작품이랄 수 있는 – 1986년의 ‘땡땡과 알파아트’는 미완성 – 1976년의 ‘땡땡과 피카로스’까지 총 23편의 에피소드를 창작하여 땡땡을 유럽 최고의 인기 캐릭터로 성장시켰다.

1. Tintin in the Land of the Soviets (1929-1930)
2. Tintin in the Congo (1930-1931)
3. Tintin in America (1931-1932)
4. Cigars of the Pharaoh (1932-1934)
5. The Blue Lotus (1934-1935)
6. The Broken Ear (1935-1937)
7. The Black Island (1937-1938)
8. King Ottokar’s Sceptre (1938-1939)
9. The Crab with the Golden Claws (1940-1941)
10. The Shooting Star (1941-1942)
11. The Secret of the Unicorn (1942-1943)
12. Red Rackham’s Treasure (1943-1944)
13. The Seven Crystal Balls (1943-1948)
14. Prisoners of the Sun (1946-1949)
15. Land of Black Gold (1948-1950)
16. Destination Moon (1950-1953)
17. Explorers on the Moon (1950-1954)
18. The Calculus Affair (1954-1956)
19. The Red Sea Sharks (1958)
20. Tintin in Tibet (1960)
21. The Castafiore Emerald (1963)
22. Flight 714 (1968)
23. Tintin and the Picaros (1976)
24. Tintin and Alph-Art (1986, 2004)

나는 무엇 때문에 땡땡에 매료되었나? 우선 땡땡 시리즈는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닌 진짜배기로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의 모험’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20세기를 제대로 관통하고 있는 이 만화는 소년기자 땡땡과 그의 애견 밀루 Milou(영어 이름으로는 스노위 Snowy)를 등장시켜, 이미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은 자유로운 여행이 여의치 않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서의 모험을 선사하였다. 이러한 모험만화의 패턴은 하나의 전범이 되어 이 후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주1)

이것이 땡땡이 지닌 매력의 모든 것이라면 굳이 땡땡을 ‘가장’ 좋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 작품 말고도 ‘꿈과 희망’을 준 작품은 꽤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엄청난 매력은 반세기 동안 불과 이십여 개의 에피소드만을 만들었던 에르제의 지독하리만치 집요한 장인정신이다. 처음에는 흑백으로 그려졌던 작품은 서서히 칼라로 바뀌었고 이전 흑백 작품들 역시 칼라로 재작업 하여 출간되었는데(주2) 각 에피소드에서 그러한 작가의 그림체나 스타일이 발전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 매력적이다. 잘 그려진 우키요예를 연상시키는 색감과 선(線)의 풍요로운 조화, 풍경의 세밀함(주3)은 장면 하나 하나를 감상할 수 있는(주4) 재미를 안겨준다.(주5)

여기까지는 사실 굳이 땡땡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아동만화의 걸작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또 하나의 작품 ‘아스테릭스의 모험’ 같은 – 매력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선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바로 작가 에르제의 사상적 발전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카톨릭 신문에서 일했던 유럽의 작가는 사실 사상적으로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극우라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고 그는 백인우월주의에 유럽우월주의적인 보수우익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씩 변해갔고 이것이 각각의 작품에 알게 모르게 반영되어 간다는 점이 이 에피소드의 엄청난 매력이다.(주6)

그의 첫 작품 ‘땡땡과 소비에트’는 철저한 반공(反共)만화다. 땡땡의 눈에 – 에르제의 눈에 – 소련은 도적들이 지배하는 나라다. 그리고 땡땡은 이 도적들을 농락한다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다. 에르제는 후에 이러한 그의 맹목적인 반공주의를 반성한다. 그래서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작품을 흑백 버전으로 남겨두었다. 다음 작품 ‘콩고에서의 땡땡’도 사실 만만치 않았다. 콩고는 그 당시 벨기에의 식민지였다. 땡땡은 이 작품에서 제국주의적 사고를 하면서 동물들을 학살하는 등의 비상식적 –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원주민들로부터 영웅대접을 받는다. 요컨대 땡땡은 전형적인 유럽 백인 소년들을 위한 모험만화였다. 이렇게 계속 갔으면 땡땡은 걸작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에피소드 ‘미국에 간 땡땡’에서는 다소 발전이 있었다. 유럽인이 보기에 미국의 ‘자본주의자’들은 소련의 ‘공산주의자’만큼은 아니지만 여하튼 역겨운 돈벌레였다. 에르제는 이 작품에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다룬다. 약간은 공평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상전환은 ‘블루로터스’였다. 당초 이 작품은 일본인이 선한 세력, 중국인이 무지몽매한 미개인으로 다뤄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즈음 친구가 된 한 중국인 유학생 창총젠을 만나면서 작품의 내용이, 그리고 에르제의 사고가 획기적으로 변하게 된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창총젠은 아시아의 현실을 에르제에게 알려주었고 에르제는 여태까지의 유럽중심주의 편견이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블루로터스’의 기획을 통째로 바꾸었고, 작품은 의로운 중국소년 ‘창’과 땡땡이 친구가 되어 함께 모험하게 되는 줄거리를 갖게 된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야욕을 지닌 나라였고 땡땡은 그 야욕을 분쇄한다. 이전의 ‘콩고에 간 땡땡’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라 할만하다.(주7) 이후 ‘오토카 왕의 봉’ 등에서는 파시즘을 경계하는 소재를 다루기도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모험만화도 계속 이어진다.

그의 사상적 변화의 최고봉은 1976년 발표된 ‘땡땡과 피카로스’다. 이 작품은 분명히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성공시킨 쿠바 혁명으로부터 소재를 빌려왔다. 땡땡은 이 작품에서 우익독재에 고통 받고 있는 한 가상의 남미국가에서 혁명군을 도와 혁명을 승리로 이끈다. 이 과정에서 땡땡은 끊임없이 비폭력주의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소비에트에 가서 그들을 농락했던 1929년의 땡땡과는 근본이 틀린 땡땡이었다. 이 작품은 에르제가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우길만한 – 그렇게 우길 친구도 없겠지만 – 증거는 아니지만, 적어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옳은 것은 옳다고 인정할 줄 아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땡땡을 접하게 된 경로가 다양하고 접했던 에피소드가 앞뒤로 들쭉날쭉 인지라 그의 작품세계를 통시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 그에 대한 거부감도 없잖아 있었으나 그의 작품 대부분을 감상하고 관련 영상이나 연구서를 훑어본 후 어느 샌가 그가 가지는, 또한 그가 살았던 20세기 유럽이 가졌던 무게감이 상당히 묵직하게 다가오게 되었다. 너무나 완벽주의적인 작가정신 때문에 고뇌했고,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어야 했고, 파시즘 치하의 유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에르제는 – 그리고 땡땡은 – 만화 나부랭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 물론 다른 만화도 마찬가지다 – 문화유산이라 불릴만하다.

지루하게 잡설을 늘어놨는데 긴 말 필요 없다. 재미있으니 사보시라.

참고할만한 곳들
위키피디어 ‘땡땡의 모험’ 설명
위키피디어 ‘에르제’ 설명
tintinologist.org

p.s. 아 이승환 동무가 좌빨 블로거 세 명에게 이 짐을 넘기라고 지령을 내렸는데 사실 이런 토스는 행운의 편지같아 내키지가 않는다. 하지만 나만 행운의 편지를 쓰기는 억울하니 류동협, , 재준씨한테 숙제를 넘긴다. 순순히 응할 것 같지는 않다.

(주1) 한 예로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당시 많은 소년들이 그랬듯이 이 만화에 매료되어 자신이 창조한 최고의 캐릭터 인디아나 존스가 땡땡을 흉내 낸 것이라고 고백하였고, 지금 현재도 땡땡의 실사화를 위해 작업하고 있다.

(주2) 유일하게 첫 에피소드 ‘땡땡과 소비에트’가 칼라 작품으로 재작업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주3) 에르제는 사실성을 위해 엄청난 자료를 수집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주4) 예를 들어 중국의 항일투쟁을 다룬 초기걸작 중 하나인 ‘블루로터스’에서는 중국인 거리 묘사를 위해 항일투쟁의 의미가 담긴 한문을 거리 담벼락 곳곳에 배치해놓는다. 그 만화를 볼 이들의 0.1%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주5) 그런데 사실 이 집요함으로 말미암아 작가 스스로는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으며 이것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기도 했다고 그의 연구자들은 이야기한다.

(주6) 그를 존경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따라오지 못하는 매력

(주7) 이후 창은 ‘티벳으로 간 땡땡’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그가 티벳에서 조난당하고 땡땡이 그를 구하는 내용이다. 실재했던 창은 그 후 중국으로 가고 서로간의 연락이 끊기게 되는데 에르제는 오랫동안 그를 찾아 헤맨다. 이후 노년이 된 이들이 어렵사리 재회하게 되는데 그 당시 벨기에에서는 생방송으로 중계할 만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