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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의 진원지에 존재하는 여전한 위기

26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주택 재고는 이 나라의 주식시장의 총액보다 약간 더 많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자산 층이다. 11조 달러에 달하는 부채의 미국 모기지 금융 시스템은 여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금융 리스크가 가장 크게 집중된 곳일 것이다. 이 시스템은 여전히 약 1조 달러의 모기지 부채를 해외에서 보유하고 있어 국제 금융 시스템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이 시스템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가혹한 경기침체기에 폭발한 이래 10여년이 지나도록 개선되지 않고 있는 곳이다.[Comradely capitalism]

전 세계의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이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 여부에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면, 그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은 미국 주택시장의 부침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미국 주택시장의 자산 규모는 단일 시장으로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다.. 따라서 이 시장에는 당연히 수많은 투자자들과 그들을 돕는 여러 이해당사자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 풍경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전까지의 풍경이었고, 그 이후의 상황은 잘 아는 바와 같다.

두 번째의 큰 변화는 2008년 12월의 시스템에 대한 정부의 긴급 구제조치가 정부의 더 커다란 역할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 전에는 민간이 운영했던(비록 암묵적으로 보증은 하고 있었지만) 모기지 회사들인 프레디맥과 패니메의 대주주가 됐다. 이들은 이제 “후견체제(conservatorship)”, 종결될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는 일종의 명목상의 한시적인 국유화 체제 하에 있다. 다른 증권화 업자들은 퇴출했거나 파산하였다. 이는 대부분 민간 부문에서 이루어졌던 부채의 증권화가 이제 거의 완전히 국영화됐음을 의미한다.[같은 글]

이코노미스트의 저 기사 제목을 뭐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인용문의 맥락에서 보자면 저 제목은 “동지적 자본주의”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이코노미스트는 자본주의 형태를 띠고 있는 현 체제의 상류에 거슬러 올라가면, 즉 전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을 좌우하는 그 시장은 국유화됐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상황을 묘사한 기사의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것이다. 요컨대 2008년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가 가능하게 해주고 있는 체제는 사회주의라는 게 기사의 논지다.

한편 “동지적 자본주의” 성향은 채권자 현황을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는데, 정부 모기지 채권의 27%에 해당하는 1조8천억 달러의 채권을 Fed가 매입했기 때문이다. 즉, 이는 국영 모기지 회사들이 금융위기 이후 전체 채권 중 60% 이상의 – 심지어는 80% 이상까지 – 보증부 채권을 발행했고, 이를 다시 Fed가 매입하여 가동시킨 시장이 바로 미국의 주택 모기지 시장이란 의미다. 시장은 존재하는데 그 시장의 주요 공급자와 주요 수요자가 정부부문인 시장, 그렇다면 이 체제는 “시장 사회주의”인가?


미국의 모기지 신규 발행분 조달 재원(출처 : 이코노미스트)

사실 그동안 미국정부는 국영 모기지 회사들을 다시 민영화시키려했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1 Fed도 한시적으로 채권을 매입하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상시적 조치가 되었다. “국유화”란 표현조차 “후견체제”라는 표현으로 세탁하였지만, 근시일 내에 이런 한시적 체제가 해소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 와중에 미국 주택시장이 다시 호조를 보인다는 뉴스는 큰 의미가 없다. 리스크가 노출돼 폭락한 시장을 정부보증의 리스크 제로로 둔갑시킨 것은 닷컴버블의 변이인 닷거브버블(dot gov bubble) 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의 대안은 어쨌든 이들 국영 모기지 회사를 증자 및 수수료 인상 등의 방법으로 건전화시켜 민영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은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을 것이고 또다시 주택시장을 깊은 악순환의 수렁에 빠트릴 수 있다. 그리고 금융위기 이전부터 이미 프레디맥과 패니메는 “정부보증기업(government-sponsored enterprise : GSE)”이란 이름의 국유기업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리고 그들의 보증부 채권이 시장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었기에 민영화라는 대안도 사실 허상인 것이다.

미국의 주택시장은 민영화시키기에는 너무 크다.

“Too Big To Privatize.”

멘붕 상태인 영국의 상업용 부동산 펀드

The eastern part of the City of London, seen from the south bank of the Thames in February 2016
By 0x010C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8515449

총 90억 파운드 이상의 투자자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의 상업용 부동산 펀드(commercial property fund)들이 월요일 환매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중엔 AVIVA의 18억 파운드와 Standard Life의 29억 달러에 이어 영국에서 가장 큰 상업용 부동산 펀드 M&G의 44억 파운드 자산 포트폴리오가 포함되어 있다.[Brexit fears hit more UK property funds]

일종의 부동산 시장에서의 서킷브레이커랄 수 있는 상황이다. 이미 추락하는 파운드화로 인해 단기적으로 한차례 홍역을 겪었을 영국의 부동산 시장은 EU 시장의 접근성 하락으로 인한 금융 수도로서의 위상의 추락이라는 악재까지 겹쳐 중장기적으로 앞날을 한치 앞도 점치기 어렵게 됐다. 그러다보니 아마도 투자자와 펀드 간에 맺은 약정에 있지도 않거나 예외적으로 인정될 환매 금지를 발동시킨 것으로 보인다.

통상 상업용 부동산 펀드의 수익은 자산 취득 후 운영을 통해 얻어지는 영업수익(operating income)과 펀드 만기 시의 자산 매각을 통해 얻어지는 자본수익(capital gain)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상업용 부동산은 특히 자본수익이 수익 중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구조인데, 이 구조가 환매를 통해 망가지게 되면 펀드의 실패가 명확하기에 어쩌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될 수도 있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영국 부동산 시장에서의 서킷브레이커가 주식시장에서의 그것과 같은, 시장을 진정시키는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다시 환매가 허용되었을 때 부동산 시장이 진정 기미를 보일까? 혹시 브렉시트가 무효화되고 금융기관의 탈출계획이 무산된다면 모를까, 불특정다수가 많은 종류의 주식을 다루는 주식시장과 달리 영국 부동산이라는 한정된 시장이 쉽게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Brexit 단상, 혹은 술주정

우선 이 글이 지금 술을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집으로 들어와서 쓰고 있는 글임을 전제로 깔아두기로 한다. 왜냐하면 짐작컨대 이 글이 궤변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변명 아닌 변명으로 술 핑계를 대고자 함이고 쓰고자 하는 주제는 브렉시트에 관한 주제다. 술먹고 너무 심오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기 때문에 핑계거리를 만들어 둠을 감안하실 것.

또 하나 전제로 깔고 자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브렉시트의 역사적 맥락이랄지 최근의 논의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블로그에 브렉시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최근 브렉시트에 대해 조롱하는 한 트위터의 동영상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기에, 술기운에 갑자기 그 동영상이 생각났기에 쓰는 것이다.

그 동영상을 따로 링크하고 싶지는 않다. 내용은 아마도 미국의 어느 도시 – 아마도 뉴욕? – 인 것 같다. 막 출발한 지하철에서 승객이 아마 미처 내릴 역임을 모르고 있다가 차량이 출발한 후에 내리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문을 억지로 열고 얼마간 속도를 낸 차량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바로 승차장에 머리를 꼴아 박는 것으로 끝나는 동영상이다. 섬찟한 동영상이었다.

그 동영상을 올린 이의 의도는 십중팔구 브렉시트를 선택한 이들이 현재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고 비판하는 – 솔직히 조롱하는 – 의도였다. 원인과 결과를 알지도 못한 어리석은 유권자가 브렉시트라는 문을 억지로 열고 열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머리를 땅에 찢고 후회한다는 그런 의도로 동영상을 올렸을 것이다. 당연히 그 동영상은 리트윗도 꽤 많이 됐다.

하지만 과연 그 동영상이 브렉시트를 선택한 시각에 딱 들어맞는 동영상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리석게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 내린 그 승객의 관성의 법칙보다는, 정치적 협잡, 경제이론의 혼란, 그리고 노동계급이 이민자가 좀비처럼 자신을 위협한다는 망상에 시달리는 정치/경제/사회의 법칙이 좀 더 복잡한 변수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앞서 내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의 맥락을 거의 모른다고 했듯이 그 동영상을 올린 이나 또는 그 동영상을 리트윗한 이들이나 그 맥락을 지금의 영국의 유권자들보다 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 선거결과로 인해 전 세계 자산가치가 폭발적으로 하락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조롱한다. 마치 한때 남유럽을 돼지(PIIGS)라는 이니셜로 조롱했듯이.

하여튼 유럽연합은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유럽 중심주의의 우월감 쩌는 유럽 본토인들이 다시는 유럽내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끔 하도록 보다 공동체주의적으로 유럽인들끼리 살아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만든, 다소는 모순되고 다소는 혼란스러운 경제공동체 – 궁극적으로는 정치연방 – 인 것 같다. 그런데 참여주체들도 사실은 그 정체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들의 역사는 그들의 것이다. 나치 못지않게 추악한 제국주의 역사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늙은 영국인들이 브렉시트를 주장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미래의 역사를 꾸려나갈 이들은 영국 젊은이들이다. 유럽연합이 절대선도 절대악도 아니다. 왜 그들은 탈퇴를 주장했는지 – 순서는 잘못됐지만 – 지금이라도 스스로 논의하면 된다.

전쟁의 아이러니, 세제개편

일본은 1938년 전시총동원법이 제정된 이후 전면적인 전시체제에 들어섰는데 모든 산업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편되었고 국가 재정규모는 팽창하여 1936년에 약 22.8억 엔이던 것이 1940년에 109.8억 엔에 이르렀고 전쟁이 막바지이었던 1944년에는 861.6억 엔으로 급격히 팽창하였다. 한편 이들 각 연도에 군사비가 국가 총재정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36년에 47.2%이던 것이 1940년에는 72.4%, 1944년에는 85.3%까지 이르게 되었다.[역사 속 세금이야기, 문점식 지음, 세경사, 2012년, p231]

전쟁은 당연하게도 “큰 정부”를 만든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일본은 큰 정부가 탄생하는 극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서도 보듯 일본 경제는 1936년에서 1944년이라는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재정규모가 무려 37배 이상 늘어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군사비는 그 재정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군사비로만 놓고 볼 때에 그 규모의 증가추이는 68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이쯤 되면 당시 일본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쟁기계 그 자체였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참전국이 이렇게 재정규모를 극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배경에는 세금이 있다. 전쟁비용 조달은 자체비용, 침략국 수탈, 채권발행 등이 있겠으나 근현대에 들어서 일반화된 수단은 바로 조세다. 특히 양차대전은 각국이 세제 개혁을 통해 항구적인 재정조달수단을 확보하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된다. 세금이라는 것이 결국 국가가 국민에게 별도의 직접적인 반대급부 없이 돈을 걷는 방법인 만큼 전쟁이라는 엄중한 상황은 그런 인기 없는 정책을 – 특히 직접세의 경우 – 밀어붙이 좋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1940년까지 미국에서 소득세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소득세제도가 도입된 이후 30년 동안 전체 인구의 6% 정도만이 소득세를 납부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소득세제도가 국가 재정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 되었다. 재무부장관이었던 헨리 모겐타우는 전쟁기간 중에 라디오·신문을 통하여 만화가, 아나운서, 가수 등을 동원하여 전 국민을 상대로 세금 납부 촉구 홍보를 하였다. 이처럼 효과적인 홍보 전략과 국민들의 애국심에 힘입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2년간 연방정부는 전쟁비용의 약 반을 세금으로 충당하였다. [같은 책, pp225~226]

인용문처럼 당초 직접세인 소득세는 전체 세수에서 미미한 비중만을 차지할 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비용이 많이 드는 통치행위를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기에 정부는 정치권을 설득하고, – 의회가 있는 경우 의회 동의를 얻어 – 납세자를 설득하여 – 공권력과 애국심 호소 등을 통하여 – 세수를 확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법인세와 소득세 납부액이 1939년 기준 국민총생산의 1% 정도였는데 전쟁 중인 1943년도에는 8%까지 증가하였다고 한다.

현대의 세제개편은 이렇듯 소득세 납세자 수가 대폭 증가하며 간접세 중심 세제에서 직접세 중심 세제로 비중이 옮겨가게 된다. 한편 전쟁이 직접세의 당위성을 당연시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 징수를 가능케 하는 수단은 대공황과 전쟁 국면에 각국이 도입한 국민계정(national accounts)일 것이다. 국민국가 단위의 경제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이런 시도는 1920년대 소비에트 블록에서 시작되었고,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거시경제학의 득세와 세수 증대라는 목적을 위해 본격화되었다..

전쟁의 아이러니다. 파괴를 위한 존재가 세제개혁과 관료기구의 성장을 추동했고, 전후 이는 자본주의 진영 역시 야경국가가 아닌 적극적인 경제주체로 활동해야 함을 일깨워준 계기가 된 것이다. 그보다 더한 아이러니는 누진세 도입이다. 전쟁 당시 미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94%였는데 누진세 도입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이는 바로 칼 맑스였기 때문이다. 자본가에 의한 전쟁을 반대한 칼 맑스가 주창한 누진세가 전쟁을 통해 정착된 셈이니 가장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인 셈이다.

사회가 청년에게 각자도생 이외의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특히 젊은 층일수록 부동층의 비중이 높아서 정치권이 표심을 잡기 위해 열중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기사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으나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그 기사의 ‘베스트 댓글’이었다. (아래 참조) 이글을 쓴 사람들은 그 정치적 성향을 굳이 나누자면 “진보”측으로 여겨진다. 흔히 진보진영에서는 보수적인 투표성향의 노인층에 대항하여 청년층이 투표를 해야 한다는 – 즉 청년층은 야권을 지지할 것이라는 –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젊은 부동층은 벚꽃구경가느라 투표안한다. 지들 앞길을 지들이 망친다.”
“10대 20대에서 43%. 그러나 투표를 하는 사람은 4.3% 정도??”

실제로도 청년층의 대통령 지지도를 보면 反여권 성향이 강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관계를 제외하고는 위 베스트 댓글이 비아냥대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여태의 투표에서도 청년층의 투표율은 결코 낮지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투표해서 뽑은 정치권이 실제로 청년층을 위해 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1 이는 주요하게 이미 청년층의 비중이 갈수록 작아지는 과소대표성 경향을 보이고 있고, 정치권이 이를 간파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4년 ILO 보고서는 각국 청년의 교육 및 고용현황을 비교하였는데, 이를 보면 우리 청년의 열악한 처지가 잘 드러난다. 보고서에는 1996년 및 2006년 각국의 교육수준을 지수로 표현해놓았는데, 우리나라는 각각 5.96과 7.34를 기록하였다2. 이 수치는 각 년도 2위, 1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반면 성인소득 대비 청년소득과 고용률은 1996년 꼴찌에서 두 번째, 2006년에는 꼴찌를 기록했다. 요컨대, 남한은 최고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이 가장 열악한 고용수준에 시달리는 나라다.

각국 노동시장에서의 청년층의 교육수준

출처 : At work but earning less : minimum wages and young people, Damian Grimshaw, ILO, 2014, p13 에서 재구성

성인소득 대비 청년소득

출처 : 같은 보고서 p16 에서 재구성

청년고용률

출처 : 같은 보고서 p16 에서 재구성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가 보자.. 청년의 상황이 이러한데 앞서도 언급하였다시피 정치권이 청년층을 위해 한 일은 별로 없다. 많은 청년층 노동자들이 해당사항일 최저임금을 올리는데 인색하던 여권이 부랴부랴 총선공약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내놓았지만, 이런 그들이 또 지자체에서 실시하던 청년수당에 대해서는 예의 “포퓰리즘”이라고 맹비난한 바 있다. 보수층은 “흙수저”3, “헬조선”이란 유행어에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며 비난하고, 진보층은 투표를 안 해서 그런 것이라 비아냥댄다.

이 나라는 여태의 노동자와 자본가의 역학구도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 와중에 노년층은 정치4, 경제5, 문화6 등에서 권력을 잡고 기득권을 놓지 않고 있어 노자(勞資)간의 대립에 중층적으로 고통 받는 新노동계급이 형성되고 있다. 더군다나 젠더의 문제로 가면 한층 복잡해진다. 남녀간 임금차이는 세계최고 수준이고 문화적으로도 “여혐”문화가 일상화되고 있다. 고통 받는 청년, 여성, 노동의 이슈가 맞물려 피해의식을 특정계층에 쏟아 붓는 양상으로 추측되는 상황이다.

사회가 청년에게 各自圖生 이외의 대안을 내놓지 않으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이성적인 문명은 [ ]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긍정적인 점은 특정한 기술적 발전 단계에 도달한 지능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핵에너지를 발견했을 거라는 확신입니다. [중략] 그 문명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 일 없이 핵에너지를 평화적인 목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아냈나, 아니면 그 문명은 스스로 절멸됐나? 핵에너지를 발견한 후로 1000년을 존재해온 문명이라는 어느 문명이건 핵폭탄을 통제할 수단을 고안해냈을 거라고 짐작해요. 이 사실은 우리 인류의 생존을 위한 특정 가이드라인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과 더불어 엄청나게 큰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스탠리 큐브릭 장르의 재발명, 진 D. 필립스 엮음, 윤철희 옮김, 마음산책, 2014년, p101]

스탠리 큐브릭이 ‘2001 스페이스오디세이’에 관한 인터뷰에서 외계문명의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면서 그 근거로 든 사례다. 문명의 발전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발견될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찾아냈는지 아닌지가 그 문명이 이성적인 존재인지 아닌지의 기준점이 된다는 의견으로 여겨진다. 스스로 냉전 당시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구성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핵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부조리한 상황을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로 만들기도 했던 이인지라, 외계문명의 지적 수준에 대해서 이런 잣대를 갖는 것이 그답다는1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과연 2016년 현재의 지구 문명은 큐브릭의 기준에서 볼 때 스스로 안도감을 가질만한 문명일까? “냉전(冷戰)”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던 미-쏘 열강의 전선이 사라질 즈음, 인류는 다행히도 큰 격변 없이 핵무기에 대한 통제권이 어느 정도 유지한 것 같다. 하지만 지구적 관점에서, 특히 동북아 관점에서 핵에 대한 신경쇠약증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시도와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사고 등이 그 예다. 전자는 국지적 냉전의 결과고, 후자는 “평화적” 핵이용에 대한 기술과 제도가 실패한 결과다.

Nagasakibomb.jpg
By Charles Levy from one of the B-29 Superfortresses used in the attack. – http://www.archives.gov/research/military/ww2/photos/images/ww2-163.jpg National Archives image (208-N-43888),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6719

경수로 지원 사업에 관한 북미 간의 갈등에서 본격화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도는 형식적으로는 국지적인 규모에서의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 양상을 띠고 있다.(또는 적어도 각 이해당사자가 그런 식으로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 이에 따른 동북아의 정치상황은 적어도 큐브릭이 생각하는 이성적인 상태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야무진 핵의 평화적 용례라고 여겨졌던 일본의 원자력발전소는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와 이후 – 원인이 소유형태든 일본식 문화든 간에 – 부조리한 사태처리로 말미암아 핵의 평화적 이용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감을 일게 만들고 있다.

결국 큐브릭이 상정한 이상적인 핵개발의 상황은 핵을 전쟁수단으로 삼는 상황을 통제내지는 절멸시키고 평화적으로 안전하게 이용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기준에서 볼 때 현재의 상황은 그런 희망사항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여전히 서구열강은 비대칭적인 핵무기 보유상황을 상수로 인정하라 강요하고 이에 몇몇 “불량”국가는 사실상의 재래식 전력인 핵을 공포의 균형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미개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후쿠시마 사태로 핵의 평화적 이용의 기술적 발전이 미흡함을 깨달았지만 신재생 에너지 등 대체수단의 정착은 아직 요원한 상황이다.

큐브릭은 같은 인터뷰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냉소적인 영화가 결코 아니라면서 “미친 짓을 알아본다는 게 그걸 찬양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걸 치유할 가능성에 대해 절망감을 느끼거나 무익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2016년 핵을 둘러싼 동북아의 상황도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처럼 완전 미쳐 돌아가는 상황은 아닐지라도 –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대립구도를 어느 한쪽이 완전히 미쳐 돌아가고 나머지는 지극히 이성적인 상황이라고 보는 것도 유익하지 않다. 미친 짓 속에서도 일정 정도의 합리적 맥락을 알아본다는 게 그걸 찬양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사태가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에 대해 국민의 칠할이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아침에 다소 충격적인 기사를 접했다. 국민 중 일곱 명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에 찬성한다는 설문조사 결과에 대한 기사였다. 연합뉴스와 KBS가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 중 한 항목이었던 이 조사결과는 어쨌든 한미 양국의 사드 추진 여부에 결정적 변수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른바 “여론몰이”에는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사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응답자의 뜻이 어떠하든 간에 정당한 여론조사라면 당연히 결과에 수긍해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여론조사의 방식이 다분히 결과를 유도하는 방식이라 여겨진다는 점에서 여론조사 당사자들의 양식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보도에 근거해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응답항목인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사드를 배치해야 한다”와 “중국 등의 강경 입장을 고려해 배치하지 말아야 한다”다.

여론조사 기법에 대해 과문한지라 알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건데 저 항목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드의 배치 여부에 대한 설문이라면 그냥 “예”와 “아니오”로 응답항목을 정하면 될 것인데, 왜 “북한의 위협의 대비하기 위해”나 “중국 등의 강경 입장을 고려해”와 같은 단서 조항을 붙이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단서조항이 응답결과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은 억측에 불과한가?


갤럽의 ‘동성애자의 권리’에 대한 설문조사다. 응답항목은 “합법화되어야 한다(should be legal)”와 “합법화되지 않아야 한다(should not be legal)”로 단순하다. 만약 후자의 응답항목을 “자녀들에 대한 영향 등을 고려할 때 합법화되지 않아야 한다”라고 바꾸면 응답결과가 당초의 응답항목 결과가 같으리라 생각되는가? 부모는 ‘우리 아이가 게이라면?’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