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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나나 공화국 이야기

1983년에 국무원은 「도시 비농업 개체 공상업(工商業)의 몇 가지 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도시의 개체 공상업은 7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할 수 없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저술에 근거한 규정이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론을 설명하기 위해 8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가상의 공장을 예로 들었는데, 중국 당국은 이를 ‘노동착취’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중국 정부가 보기에 자영업이 7명 이상의 사람을 고용하면 사영기업이 되고, 사영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개혁과 개방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I, 조영남 지음, 민음사, 2016년, p228]

현실 사회주의 블록의 이념적 경직성 내지는 이념적 조악함을 설명하는데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인용해보았다. 언뜻 보아도 이는 자본론을 마치 종교경전 마냥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경직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큐란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여성의 몸을 위아래로 감싸고 순종을 강조하는 무슬림의 해석이나, 성경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극악하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도의 해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경전을 지킴으로써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는 기여한 바는 없으나 그 교리를 강요한 이의 권력이나 도덕적 순결성은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어쨌든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한 채 시장경제를 성공리에 – 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 도입하여, 오늘날 미국을 위협할 다음 국가로 평가받는 등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단순히 인용문에서처럼 「규정」이 교조적으로 끝까지 관철됐더라면 달성하지 못했을 위치라 할만하다. 중국이 경제에 있어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유연성을 가질 수 있도록 추동했던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정치체제는 유지하면서도 경제체제는 바꿀 수 있다는 – 1992년 10월 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라 할 수 있다.1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 계획경제”라는 도식을 포기한 것은 여러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계획경제/자원동원경제는 사실 戰後 경제개발을 가속화하여야 하는 대다수 국가들에서 체제와 관계없이 시도했던 개발전략이랄 수 있다. 혁명 후의 소비에트가 그랬고, 대공황을 겪은 미국이 그랬고, 10억 인구의 중국이 그랬고, 도시국가로서 살아남아야 할 싱가포르가 그랬고, 북괴와 체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남한이 그랬다. 국가 스스로가 하나의 거대기업으로 기능하는 것은 일종의 戰時경제체제랄 수 있고 체제경쟁에 직면한 많은 나라들은 어느 기간까지는 계획경제 요소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2


“제국주의 전쟁의 음모를 분쇄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아가자!”(출처)

하지만 경제가 전간기와 질적으로 다른 고도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상명하달식의 행정기능만으로 경제 시스템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됐다. 빅데이터 혹은 인공지능이 진정 시스템 전체의 원인과 결과를 예측하여 투입-산출을 조정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시장에서의 개별 경제단위가 경쟁하며 우열을 평가받고 진화-퇴보를 거듭하는 것 이외에는 딱히 더 좋은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국가는 경제발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역할에서 “정의로운 심판”의 역할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과 합당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 공유된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최근 트럼프의 행보는 역사의 퇴보를 초래할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느니, 그 재원을 멕시코로부터의 수입관세로 마련하겠다느니 하는 경제원론에도 안 맞는 소리를 해대는 것은 가장 천박한 수준의 “가부장적 아버지” 역할이다. 더욱 불행하게도 트럼프는 일당독재를 통해서가 아닌 대의적 민주제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라는 점이다. 즉, 그는 선거를 통해 일당독재 지도자보다 더 많은 정치적 자본을 얻게 됐지만,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집단적 논의를 통해 시행착오를 수정할 정치적 의지는 가지지도 가지려 하지도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면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현대사회에서 국가는 기간산업과 핵심 산업(예를 들면 금융업)은 공공적 기능이 관철되도록 “사령탑”적인3 통제를 강화하되 전 세계적 시장경제는 정의롭게 유지되도록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술이 잘못된 시장경제는 경제격차와 이념적 편견의 격차만 벌려놓아 보호주의, 인종주의, 독자주의 노선만을 강화시켰고, 그 가장 흉악한 결과가 트럼프의 당선이다. 그는 개별기업에 입지를 지정하고, 도드-프랭크법 규정을 무력화시키고, 이민을 통제한다. 7인 이하의 사영기업 허용이 희극이라면 이번 버전은 비극인가?

80년대 중국이 일당독재 바나나 공화국이었다면 현재의 미국은 민주적 바나나 공화국이다.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게 더 중요”가 아니고요

특검이 이재용 씨의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한 사실에 대한 브리핑의 캡처 이미지를 트위터에서 봤다. 자막에는 “특검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게 더 중요’”라고 쓰여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처음에는 무딘 칼날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특검의 결기를 느낄 수 있는 브리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아쉬움도 있는 발언이다. 오히려 “경제를 세우기 위해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식의 브리핑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어느 발언이 더 합당한가에 대한 물음은 정의가 경제를 희생하고서라도 이 사회가 지켜야 할 상보(相補)적 성격의 개념인지, 아니면 정의(正義)와 경제가 함께 가는 것이라는 – 또는 부정적 효과를 가지는 – 상관(相關)적 성격의 개념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우선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는 인문학 서적으로는 보기 드물게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그 저자가 내한공연(!)을 열만큼 신드롬을 연출했던 책이 있다.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다. 이 책은 명불허전 우리가 정의에 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많이 깨부수면서도 동시에 대중의 통념을 위로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정의는 공동체의 정서를 지켜내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공동체가 계급, 성별, 인종별 분화를 거듭하게 되면 정의의 정의(定義)가 달라지는 것이 문제다. 특히 분단 상황에서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1 체제를 유지한 남한에서는 특히 그렇다.


정의를 제멋대로 정의한 유신 시대의 포스터 (c) 민족문제연구소

이재용 씨의 혐의는 무엇인가? 뇌물공여를 통해 소위 “삼성그룹” 내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안에 대한 주주의 의사결정을 왜곡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 사태의 진행상황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글로 적은 바 있는데, 과연 합병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닌지는 우선 논외로 하겠다.2 문제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기능적 분화를 유지해야 할 현대사회에서 이재용 씨가 그 기능적 분화를 정치적 압력으로 무마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즉,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정부가 아닌 보통사람의 돈으로 운용되는 투자도구이니 만큼 그들에게 있어 “정의”는 보통사람의 경제적 이익에 복무해야 하는 독립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오히려 엉뚱한 “국익”을 내세운 사적이익 추구에 복무한 것으로 보이는 혐의다.

분화는 근대사회를 기술하고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근대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한 세계이다. 전체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의 다양한 영역으로 분화한다. [중략] 이렇게 분화한 각 사회적 단위들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기능이 주어진다. [중략] 그리고 다양한 영역이나 조직은 갈등하거나 투쟁할 수 있다. [중략] 아니 갈등하거나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다양한 국가기관과 그 기관들에 속한 수많은 국가관료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국가이성비판, 김덕영 지음, 다시봄, 2016년, pp121~122]

정의의 문제로 돌아가자. 근대사회의 한 기능인 기금운용본부에게 있어 정의는 무엇인가? 연금 납입자의 경제적 이익이다. 운용본부가 그 이익을 위해 결정을 했다면 본부가 합병을 찬성했든 반대했든 그 결정을 존중해줄 합리적 이유가 있다. 그런데 만약 외압에 의해 합병을 찬성했다면 정의가 무너졌다고 여길 합리적 이유가 있다. 이때 실현된 정의는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 상층부를 위한 정의다. 한편, 그렇다면 이 정의가 최소한 국가 단위의 공동체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재벌 체제에 내재화된 경제신문들은 하나같이 특검 때문에 나라 망한다고 곡소리가 났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주가로 관찰할 수 있는 시장은 별로 반응이 없다. 재밌는 일이다.

기금운용본부의 기능적 분화 무력화 시도가 경제에 장단기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다.3 하지만 원론적인 부분에서 살펴볼 때 이재용 씨의 혐의가 사실이라면 그는 시장의 본원적 기능, 즉 균형가격의 탐색을 방해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가 기금운용본부의 의사결정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본부는 시장의 합병할 양사의 합병비율이 균형가격에 부합하는지 독립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시장주의자들이 경제발전의 대전제로 여기고 있는 이상향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즉, 기능적 분화를 거친 독립적 기관의 각각의 정의가 서야 원론적 경제가 바로 서는 것이다. 이재용 씨는 시장의 균형가격 탐색을 방해한 자본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본가는 적어도 시장주의자가 아니다.

때가 되자 본색을 드러내는 조선일보

국회가 탄핵의 정치적 관문이라면 헌재는 탄핵의 사법적 관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 과정에 걸리는 시간 요소다. 최대 7~8개월을 잡는다면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는 상황이라 해도 임기는 거의 채우는 셈이 된다. 애초에 박 대통령이 ‘김병준 총리’ 카드를 내고 2선 후퇴를 제의했을 때 야권이 이를 받았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됐을 것을 문씨, 안철수씨 등이 ‘웬 떡이냐’면서도 더 먹으려고 반대했다가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야권의 과욕과 두뇌 부족이 빚은 결과다.[이제 ‘박근혜’는 과거다]

오늘자 김대중 칼럼 중 일부다. 그간 마치 반정부 투쟁의 선봉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살벌한 구호를 외쳐대던 조선일보의 본색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우선 김 씨는 그간 박 대통령의 탄핵을 미적거리던 야권의 우려사항 중 하나를 지적했다. 바로 탄핵절차를 밟자면 의도한대로 간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임기에 필적하는 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김 씨는 그런 현실을 지적하며 야권이 “과욕과 두뇌 부족” 탓에 김병준 총리 카드와 대통령의 2선 후퇴를 놓쳤다고 조롱한 것이다.1

하지만 그 상황은 조선일보가 원하는 상태일지는 몰라도 야권, 더불어 국민이 원하는 미래는 아니다. 대체 야권에 몸을 담은 적이 있던 총리와 대통령의 2선 후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2선 후퇴도 거국내각도 – 김병준 총리 체제가 거국내각도 아님은 물론이고 – 그 어느 것도 헌법적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박근혜를 보수 세력의 본류가 아닌 일탈자로 취급하여 골방에 처넣고 전열을 정비하여 보수 재집권을 노리는 조선일보나 원할 극히 어정쩡한 상태다.2

이 사태의 본질은 “저잣거리 아녀자의 국정농단”이나 “최태민 교주에 정신적으로 지배당한 위정자의 일탈”이 아니라 헌정 이래 지속되어 오던 사익추구집단의 정경유착을 기반으로 하는 상호 사익추구다. 지난번 수사결과 발표에서 검찰이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로 칭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내고 직접 정유라를 지원한 삼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다. 죄목도 현재까지는 뇌물죄가 아닌 강요죄다. 언급되지 않은 이가 바로 주범이다.

경제범죄가 악랄한 점은 그 범죄 구성요건을 입증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삼성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사안한화와의 방산 업체 거래에 있어, 최순실 씨등의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로비를 통해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심증은 있지만, 이러한 심증이 법정에서 실정법 위반으로 판결나기까지는 험난한 길이 예고되어 있다. 그리고 김대중 칼럼이 원하는 상황이나 검찰의 발표 내용은 그러한 길에 첫발조차 내딛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다. 그게 보수의 생존전략이다.

‘기승전순실’이라고 지금 교육, 의료, 재난구조, 인사, 경제운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가 최순실 씨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일 정도다. 믿기지 않기는 하지만 그 부조리의 신경망에서 최순실 씨만 걷어내고 보면, 그간 사익추구집단이 얼굴만 바꿔가며 해오던 짓이다. 김대중 씨가 원하는 김병준 총리 체제는 그렇게 얼굴만 바꾼 사익추구의 체제다. 따라서 야권은 이번 기회에 이 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정말 두뇌 부족이다.

한데 김용철 씨는 그들의 서술구조에서 한발 더 나아가 100% 실존인물이 100% 실제 벌어졌던 일을 꾸미고 저지르고 있는 양 이야기하고 있다. 등장인물도 화려하다. 국내 최고의 재벌 삼성의 이건희 가족, 현 대법원장인 이용훈 판사, 돌아가신 두 대통령과 현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검찰 등 지배계급들이 총망라되고 있다. 그런데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이다. 그 이유는 만약 이 이야기가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실화라면 이건 나라가 두 번 뒤집어질만한 대사건이고, 사실이 아닌 것을 김용철 씨가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건 사상최대의 인격모독이자 무고이기 때문이다.[‘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녹슨 지대(Rust Belt)”에서의 외침

출구조사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에 비해 58:37의 추세로 유권자의 70%를 차지하는 백인 유권자의 지지를 획득했다. 백인 유권자 중 대졸자가 아닌 이들의 유권자의 비율은 67:28이었다. 그러나 학위를 가진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49:45의 비율이었다.[‘Forgotten’ white vote powers Trump to victory]

이러한 눈에 두드러진 결과 때문에 결국 트럼프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가진 저학력의 백인 유권자의 몰표 덕분에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록 어떤 트위터 사용자는 “모든 트럼프 지지자가 인종주의자인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이 트윗에 다른 사용자가 “트럼프를 지지한 모든 이는 인종주의자에게 투표한 것이다”라고 응수함으로써 그의 볼멘소리에 돌직구를 던졌다.

성난 백인 유권자의 목요일의 외침은 오하이오와 인디아나와 같은 러스트벨트에서 가장 시끄러웠고 이전의 민주당 강세지역이었던 미시간이나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곳에서도 – 두 곳 모두 1988년 이래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승리한 적이 없다 – 작동하였다.[‘Forgotten’ white vote powers Trump to victory]

백인 투표자의 몰표가 더욱 극적으로 두드러졌던 지역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텃밭으로 여겨졌던 소위 “러스트벨트(rust belt)”였다. 트럼프는 위스콘신, 미시간,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오대호 주변 미국의 전통적인 공업지대인 러스트벨트에 위치한 5개주에서 승리함으로써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클린턴은 당초 이 중 적어도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에서 우세할 것으로 예측됐었다.

트럼프는 선거기간 내내 인종주의적 언행을 지속했고 이로 인해 많은 양심적 유권자들과 유색인종을 마음 아프게 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트럼프의 이런 공격은 주로 경제적 박탈감을 가지고 있는 백인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전략적으로 미국 정부가 정당에 불문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한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 응답자의 93%가 미국에서 “너무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 응답자의 74%가 “중국산 제조품”에 대해 비호감이었는데, “보수적” 응답자는 77%가 그랬다.
– 응답자의 96%가 “미국산 제조품”에 호감을 보였고, “공화당의 보수적 당원”중에서는 98%였다.
– 응답자의 92%가 “너무 많은 일자리가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86%는 “미국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것도 만들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Free Trade”: The Elites Are Selling It But The Public Is No Longer Buying]

올 초 한 단체가 오하이오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다. 러스트벨트의 유권자들이 무역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결과다. 이 결과 당시 민주당 예비선거에서는 역시 “자유무역”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던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미시간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압도하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민주당 유권자의 58%는 무역이 “미국에서 일자리를 없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제3세계로의 공장의 이전을 유혹하는 자유무역협정, 자동화 기술의 발전, 혁신을 거부한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 등등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이 중 어느 원인이 더 주되게 지역의 쇠퇴를 초래하였는지는 계속 논의할 주제이지만, 당연히 정치적으로는 자유무역협정이 가장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공격에서 외통수로 몰린 것은 단연 힐러리 클린턴이다. 그가 퍼스트레이디이던 지난 1994년, 남편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당초의 정치적 입장을 뒤집고 그 뒤 악명이 높아질 NAFTA에 서명한다. 힐러리 클린턴은 훗날 입장을 바꾸지만, 당시 이 협정에 찬성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는 자유무역협정, 특히 TPP지지하였다. 러스트벨트의 유권자에게는 무척 인기 없을 공약이었다.

외교관계협의회의 Edward Alden은 “NAFTA는 상징적일 뿐이다. 다만 그 협정은 미국이 자신보다 훨씬 임금이 싼 나라와 맺은 최초의 대규모 협정이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즉, 이전부터 이미 러스트벨트를 포함한 미국의 제조업은 쇠퇴하던 중이었고, NAFTA는 그러한 경향을 상징하는 하나의 변곡점이 된 것이다. 따라서 힐러리 클린턴은 적어도 이 지역에서 가장 인기 없는 민주당 후보가 될 운명이었다.

어쨌든 이 지역의 실제 경제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1999/2000년의 피크를 지난 후 이 지역의 소득은 – 아이오와를 제외하고 – 퇴보했다. 최근 다시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지만, 노동자들은 트럼프가 재건하겠다는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 시절의 노동자의 고임금 정규적 일자리가 아닌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에 만족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상황을 트럼프가 되돌릴 수 있을까?


트럼프는 집권 이후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제소하고 자유무역협정의 재협상에 나서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그의 자유무역에 대한 무모하리만큼 단순한 접근은 많은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다. 사실 미국은 러스트벨트가 쇠퇴하는 와중에 중국의 저가 제조품 덕에 고성장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던 골디락스 시절을 누렸었다. 트럼프의 현재 공약은 이 경제순환 고리를 대책 없이 끊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노동계급들은 골디락스라는 환상 속에서 자신들이 일하던 일터를 멕시코나 아시아의 노동계급에게 빼앗겨버리고 줄어든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빚을 얻고, 월마트에서 중국산 싸구려 상품을 구입하는 자기 파괴적인 소비패턴으로 버텨왔던 것이다. 물론 아시아 노동계급이라고 나을 것은 없었다. 약간의 실질소득 증가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잉여는 다시 자국 내 기업의 주주들에게 배당으로 돌아가거나 국가의 외환보유고에 쌓여 선진국에 재투자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다.[골디락스의 환상과 그 결과]

나는 자유무역협정의 위험성이 단지 트럼프의 지나친 허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자유무역협정이 그렇듯이 TPP역시 지적재산권에 대한 지나친 보호, 투자자국가소송제도 등 다국적 자본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독소조항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면에서 트럼프를 찍은 백인 노동계급도 일말의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꿈꾸는 위대한 미국이 “위대한 백인의 미국”일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리버럴은 – 브렉시트를 수세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의 리버럴도 마찬가지지만 – 전통적인 제조업 지역의 노동계급(또는 그 노동계급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노인들)의 외침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 표에 의존하던 서구의 리버럴이 이제 그들을 무시하고 사회문화적인 진보에 주력하는 동안, 이 (쇠퇴하는?) 계급은 트럼프와 같은 극우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백인 노동계급 남성은 현재의 시스템이 자신들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일하는 미국(Working America)’의 멤버인 ‘전미철강노동자(United Steelworkers)’의 부의장 Fred Redmond의 말이다. “펜실베이니아의 전역에 걸쳐 트럼프를 그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이 시스템의 대안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철회사의 매니저인 Matt Sell이 이중 하나다. “우리는 한번 흔들어 엎어줘야 합니다. [중략] 트럼프를 찍는 것은 진정 워싱턴에 있는 복도 양쪽에 있는 정치 내부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Labor Makes Clinton’s Case to Rust Belt Whites Curious About Trump]

하필 그 메시지의 전달자가 트럼프라니. OTL

어떤 주인의식 없는 주주에 관한 이야기

미국 재무부는 지난 달 씨티그룹에 250억 달러를 투입한 데 이어 이번에 200억 달러를 추가 지원하고 그 규모만큼 우선주를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지난 주말 씨티그룹의 종가는 3.77달러였고 [중략] 시가총액은 205억달러수준이다. [중략] 결국 개인이 주식시장에 200억달러를 투자했다면 씨티그룹의 지분을 99% 가까이 다 사들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선택은 결국 AIG처럼 국유화하지 않고 기존 경영진을 존중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美는 왜 씨티 살리기 도박 택했을까?, 아시아경제, 2008년 11월 24일]

금융위기 당시 미국 정부가 금융위기 당시 금융회사들에 자본을 투입한 이유는 금융회사들이 과도한 레버리지로 자산을 늘려놓는 바람에 자본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부실한 자본비율은 곧 파산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美정부는 (반대급부가 거의 없는) 재정지원 혹은 (반대급부가 배당인) 우선주의 형식으로 금융회사의 자본을 보충하였다.1 주식 중에서도 우선주의 형식으로 출자한 이유는 의사결정권이 없는 주식에 출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성지인 미국 경제에서의 금칙어인 “국유화”라는 이념적 공세를 피해가려 했기 때문이다.2

물론 재무부의 씨티그룹의 우선주 매입이 “국유화”에 대한 미국정치의 알러지 반응을 피하고자 함이라는 사실은 납득이 간다. 하지만 인용문에서 언급하듯 사실 재무부는 이미 AIG를 국유화한 바 있다. 그리고 주택 모기지 채권이라는 거대한 자산을 담당하고 있는 프레디맥과 패니메도 “후견체제(conservatorship)”라는 요상한 명칭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 회사들을 국유화한 것이다. 그럼에도 재무부는 유독 금융위기의 진원지로서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허울 좋은 이름만 남아 있는 씨티그룹은 기를 쓰고 국유화의 길을 피해갔다.

리 삭스가 지하실 체육관에서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운동을 멈추고 씨티의 완충 자본인 보통주 500억 달러를 추가하는 서명을 하였다. 우리가 국유화를 원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만큼이나, 쓰러지게 좌시하지 않는다는 모습도 중요했다. 우리는 “리먼 상황은 없다”는 의도를 진지하게 입증해야 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민간투자자는 금융시스템의 자본 확충이라는 위험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었고, 우리는 TARP 자금만으로 충분할지 알지 못했다.[스트레스테스트, 티모시 가이트너 지음, 김규진/김지욱/홍영만 옮김, 인빅투스, 2015년, p366]

한편 구제금융과 우선주 매입이라는 긴급수혈에도 불구하고 씨티그룹의 정상화 기미는 요원했다. 그래서 마침내 재무부는 자신들의 우선주와 민간투자자의 우선주 500억 달러를 보통주로 전환했다. 재무부가 이런 조치에 나선 것은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가늠하는 기준인 단순자기자본비율(tangible common equity)에서는 보통주가 보다 신뢰도 높은 주식이기 때문이다. 가이트너는 그야말로 국유화와 파산이라는 양쪽 낭떠러지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씨티그룹을 – 아니 주주와 경영진의 이익을 – 지켜주는 수호천사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당시 재무부는 보통주 전환을 통해 36%의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씨티그룹의 대주주가 됐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업의 대주주인 재무부는 이제 당연히 주주의 권리와 의무에 따라 회사를 정상화하고, 나아가 국가경제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조치에 착수했어야 했다. 애초에 구제금융의 명분이 금융시장 정상화였고, 금융회사에 대한 자금투입이 대출로 이어져 시중에 다시 돈이 도는 것이 바로 그 정상화의 첩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대주주이자 규제당국인 재무부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재무부는 250억 달러 규모의 정부 보유 우선주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민간 주주의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하는 데 동의했다. [중략] 놀랍게도 재무부는 씨티에 자구책을 모색하라는 요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보통주 전환을 통해 정부가 확보한 씨티 지분은 전체 주식의 3분의 1이 넘었다. 그뿐 아니라 연방예금보험공사에는 씨티그룹의 자회사이며 부보은행인 씨티은행의 영업을 정지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었다.[정면돌파, 실라 베어 지음, 서정아/예금보험공사 옮김, 곽범국 감수,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p302]

실라 베어는 “시장경제에서는 누구나 파산할 자유를 누려야 한다”(p341)고 주장하는 시장주의자였다. 그런 실라베어가 보기에 티모시가이트너는 항구적인 구제금융이 가능하게끔 논리를 펴는 재무부 백서를 내는 등 이른바 “구제금융주의자”였다. 그런데 실라베어가 보기에 가이트너의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씨티그룹의 대주주가 되었음에도 주주로서의 마땅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재무부는 구제금융만으로도 국유화할 수도 있었던 회사를 열등한 조건의 우선주로 수혈하고 급기야 대주주가 됐음에도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다.3

이념적 지형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실라베어는 명백하게 “자본주의자”다. 그는 저서에서 “자본주의자인 나는 정부가 우선주 투자라도 은행을 소유하는 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정면돌파, pp361~362)라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우선주 투입은 기업의 파산할 자유를 박탈한 것이다. 그러면 이 반대편에 서있는 가이트너는 어떤 주의자일까? “구제금융주의자”는 뭔가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는 “사회주의자”다. 소비에트식의 사회주의자는 아니고 “빈자를 위한 자본주의,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라는 당시의 이념적 공세의 맥락에서의 “사회주의자”다.

씨티는 완전히 다른 경우로 오랫동안 통화감독청과 뉴욕연준은행의 ‘최고’ 인가 은행 자리를 유지했다. 국제적인 인지도도 높았다. 따라서 씨티가 부실화된다면 두 규제기관 모두 국내에서만 비난받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가이트너의 멘토이자 영웅인 로버트 루빈이 씨티의 회장으로 있었다는 사실도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중략] 씨티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면 정부가 그토록 대대적인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시행했을까 하는 의문이 아직까지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정면돌파, p232]

하지만 어떠한 형식으로든 “국유화”라는 타이틀을 피하려 했던 가이트너 역시 그의 회고록과 실라베어의 회고록을 동시에 읽은 내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한 자본주의자다. 다만 가이트너는 “정실(crony) 자본주의자”다. 시장 전체의 이익이나 소비자의 이익이 아닌 일부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정부의 돈을 쓰는 관료라면 그를 세금을 낭비했다고 해서 “사회주의자”라 부를 이유가 없다. 그런 정의라면 개발도상국의 정치권은 온통 사회주의자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공직자가 주도하는 경제를 일컫는 표현으로 “정실 자본주의”란 표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금융위기 당시 공화당을 위시한 보수층은 이런 적절한 표현을 피하고 구제금융 자체를 “사회주의적” 조치라 맹비난하였고, 이런 이념적 혼란을 틈타 보수층 내에서는 티파티라는, 진보층에서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세력이 성장하였다. 즉, 부시 정권의 헨리폴슨이 시작한 정실 자본주의가 오바마 정권의 티모시가이트너에서 만개함으로써 보수층이든 진보층이든 초당적으로 이루어진 구제금융에 대한 – 그렇지만 그들은 거의 혜택을 받지 못한 – 분노가 정치지형을 더욱 더 양극화시켰던 것이다. 그 현재진행형이 도널드트럼프다.

금융위기의 진원지에 존재하는 여전한 위기

26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주택 재고는 이 나라의 주식시장의 총액보다 약간 더 많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자산 층이다. 11조 달러에 달하는 부채의 미국 모기지 금융 시스템은 여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금융 리스크가 가장 크게 집중된 곳일 것이다. 이 시스템은 여전히 약 1조 달러의 모기지 부채를 해외에서 보유하고 있어 국제 금융 시스템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이 시스템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가혹한 경기침체기에 폭발한 이래 10여년이 지나도록 개선되지 않고 있는 곳이다.[Comradely capitalism]

전 세계의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이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 여부에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면, 그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은 미국 주택시장의 부침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미국 주택시장의 자산 규모는 단일 시장으로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다.. 따라서 이 시장에는 당연히 수많은 투자자들과 그들을 돕는 여러 이해당사자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 풍경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전까지의 풍경이었고, 그 이후의 상황은 잘 아는 바와 같다.

두 번째의 큰 변화는 2008년 12월의 시스템에 대한 정부의 긴급 구제조치가 정부의 더 커다란 역할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 전에는 민간이 운영했던(비록 암묵적으로 보증은 하고 있었지만) 모기지 회사들인 프레디맥과 패니메의 대주주가 됐다. 이들은 이제 “후견체제(conservatorship)”, 종결될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는 일종의 명목상의 한시적인 국유화 체제 하에 있다. 다른 증권화 업자들은 퇴출했거나 파산하였다. 이는 대부분 민간 부문에서 이루어졌던 부채의 증권화가 이제 거의 완전히 국영화됐음을 의미한다.[같은 글]

이코노미스트의 저 기사 제목을 뭐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인용문의 맥락에서 보자면 저 제목은 “동지적 자본주의”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이코노미스트는 자본주의 형태를 띠고 있는 현 체제의 상류에 거슬러 올라가면, 즉 전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부침을 좌우하는 그 시장은 국유화됐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상황을 묘사한 기사의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것이다. 요컨대 2008년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가 가능하게 해주고 있는 체제는 사회주의라는 게 기사의 논지다.

한편 “동지적 자본주의” 성향은 채권자 현황을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는데, 정부 모기지 채권의 27%에 해당하는 1조8천억 달러의 채권을 Fed가 매입했기 때문이다. 즉, 이는 국영 모기지 회사들이 금융위기 이후 전체 채권 중 60% 이상의 – 심지어는 80% 이상까지 – 보증부 채권을 발행했고, 이를 다시 Fed가 매입하여 가동시킨 시장이 바로 미국의 주택 모기지 시장이란 의미다. 시장은 존재하는데 그 시장의 주요 공급자와 주요 수요자가 정부부문인 시장, 그렇다면 이 체제는 “시장 사회주의”인가?


미국의 모기지 신규 발행분 조달 재원(출처 : 이코노미스트)

사실 그동안 미국정부는 국영 모기지 회사들을 다시 민영화시키려했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1 Fed도 한시적으로 채권을 매입하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상시적 조치가 되었다. “국유화”란 표현조차 “후견체제”라는 표현으로 세탁하였지만, 근시일 내에 이런 한시적 체제가 해소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 와중에 미국 주택시장이 다시 호조를 보인다는 뉴스는 큰 의미가 없다. 리스크가 노출돼 폭락한 시장을 정부보증의 리스크 제로로 둔갑시킨 것은 닷컴버블의 변이인 닷거브버블(dot gov bubble) 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의 대안은 어쨌든 이들 국영 모기지 회사를 증자 및 수수료 인상 등의 방법으로 건전화시켜 민영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은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을 것이고 또다시 주택시장을 깊은 악순환의 수렁에 빠트릴 수 있다. 그리고 금융위기 이전부터 이미 프레디맥과 패니메는 “정부보증기업(government-sponsored enterprise : GSE)”이란 이름의 국유기업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리고 그들의 보증부 채권이 시장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었기에 민영화라는 대안도 사실 허상인 것이다.

미국의 주택시장은 민영화시키기에는 너무 크다.

“Too Big To Privatize.”

멘붕 상태인 영국의 상업용 부동산 펀드

The eastern part of the City of London, seen from the south bank of the Thames in February 2016
By 0x010C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8515449

총 90억 파운드 이상의 투자자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의 상업용 부동산 펀드(commercial property fund)들이 월요일 환매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중엔 AVIVA의 18억 파운드와 Standard Life의 29억 달러에 이어 영국에서 가장 큰 상업용 부동산 펀드 M&G의 44억 파운드 자산 포트폴리오가 포함되어 있다.[Brexit fears hit more UK property funds]

일종의 부동산 시장에서의 서킷브레이커랄 수 있는 상황이다. 이미 추락하는 파운드화로 인해 단기적으로 한차례 홍역을 겪었을 영국의 부동산 시장은 EU 시장의 접근성 하락으로 인한 금융 수도로서의 위상의 추락이라는 악재까지 겹쳐 중장기적으로 앞날을 한치 앞도 점치기 어렵게 됐다. 그러다보니 아마도 투자자와 펀드 간에 맺은 약정에 있지도 않거나 예외적으로 인정될 환매 금지를 발동시킨 것으로 보인다.

통상 상업용 부동산 펀드의 수익은 자산 취득 후 운영을 통해 얻어지는 영업수익(operating income)과 펀드 만기 시의 자산 매각을 통해 얻어지는 자본수익(capital gain)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상업용 부동산은 특히 자본수익이 수익 중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구조인데, 이 구조가 환매를 통해 망가지게 되면 펀드의 실패가 명확하기에 어쩌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될 수도 있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영국 부동산 시장에서의 서킷브레이커가 주식시장에서의 그것과 같은, 시장을 진정시키는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다시 환매가 허용되었을 때 부동산 시장이 진정 기미를 보일까? 혹시 브렉시트가 무효화되고 금융기관의 탈출계획이 무산된다면 모를까, 불특정다수가 많은 종류의 주식을 다루는 주식시장과 달리 영국 부동산이라는 한정된 시장이 쉽게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