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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룰렛 讀後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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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smond Shum – , Fair use, Link

나는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때에 태어났다. 공산당은 중국의 농민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모님을 시골로 보냈다. [중략] 상하이 주민 수십만 명이 중국판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것과 달리, 우리 가족은 상하이에 그대로 살 수 있는 허가를 받았는데 이는 행운이었다. 부모님 학교에서 우리 가족을 중국 농민들의 집에 돌아가며 살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외톨이 신세를 면했다. [레드룰렛, 데즈먼드 슘 지음, 홍석윤 옮김, 알파미디어, 2022년, p23]

작가 데즈먼드 슘은 1968년 11월생으로 문화혁명은 대략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진행되었던 역사적 사건이므로 그의 말대로 그가 태어난 해는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때”였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1960년대 말은 세계 어느 나라나 평화로운 곳이 별로 없긴 했지만, 중국도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격변을 거치고 있던 시기였을 것이고, 이 책은 그 이후 그 문화혁명만큼 또 하나의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던 중국사회에 인사이더로 활약했던 작가가 몸소 겪었던 체험담을 담은 책이다.

현대 중국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문화혁명 이후 작가가 걸어온 삶은 보통의 중국인과는 좀 다르다.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작가의 부모님은 각고의 노력 끝에 홍콩으로의 이주를 허락받아 그를 데리고 홍콩에서의 삶을 시작했고, 머리가 명석했던 작가는 미국으로의 유학에 성공하여 결과적으로 작가는 중국인, 홍콩인, 미국인이라는 메트로폴리탄적인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후 중국 본토 등에 투자하는 투자사 등에 근무하며 다시 본토에서 머물게 된 작가에게 운명 같은 만남이 있었으니 바로 후에 배우자가 되는 휘트니 단과의 만남이다. 보통의 순종적인 중국여성과 달리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하고자 했던 그는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고 둘은 결혼을 통해 경제공동체가 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을 만나는데 이후 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될 여성으로 바로 훗날 중국의 총리가 되는 원자바오의 배우자였던 장페이리다.

나는 휘트니와 하얏트 호텔 현관에서 나란히 차렷 자세로 서서 손을 흔들었다. [중략] 그녀가 떠나고 휘트니에게 다가가자, 휘트니는 그제야 장 이모가 중국 부총리 중 한 명인 원자바오(溫家寶)의 부인 장페이리(張培莉)라고 말해 주었다. 원 부총리가 이듬해인 2003년에 주룽지의 뒤를 이어 중국의 차기 총리가 되리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원 부총리는 곧 중국 정부의 수장이자 중국공산당의 이인자가 될 것이다. 휘트니가 그런 사람의 부인과 친구라니,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같은 책, p113]

작가는 이렇게 아내인 휘트니 단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최고위층과 인연을 맺으며 소위 ‘꽌시’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이후 그러한 친분을 이용하여 그들이 어떻게 여러 수익성 있는 프로젝트에 접근하여 엄청난 부를 쌓으며 중국 권력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몸에 익히게 되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거기에서 드러나는 중국 사회주의의 맨살은 사회주의 본래의 이상과는 달리 혁명세력 스스로가 또 다른 귀족이 되어 국가의 권력과 이권을 독차지하는 금권주의 사회였다는 것이 작가의 관찰이다.

이들 부부는 핑안보험의 주식 인수, 공항 프로젝트 등을 위해 원자바오 집안뿐만 아니라 왕치산, 쑨정차이 등 중국 정계의 주요 인물이나 중국 최고의 부동산 재벌인 헝다의 쉬자인 회장 등 정계와 재계를 아우르는 권력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치와 부패에 절어있는 꽌시 비즈니스를 영위한다. 또 한편으로 쩡판즈 등 잘 나가는 화가의 작품을 엄청난 작품료를 지급하며 사거나 노란 다이아몬드를 구매하려 전 세계를 찾아 헤매는 등의 광적인 소비에도 몰두하는, 전형적인 자본가의 삶을 만끽한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모든 것이 부부의 뜻대로 됐다면 이 책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고 순탄했던 그들의 삶에 먹구름이 끼게 된 이유가 결국 체제의 작동방식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 이었다는 사실 또한 이 책의 교훈이다. 그들의 꽌시는 결국 실정법과 도덕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중국의 권력자는 – 다른 모든 권력이 그렇듯 – 정적의 제거를 위해 그러한 부패 혐의를 활용했고, 이 과정에서 이들 부부의 비리가 외국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나면서 이들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2012년 2월, 휘트니와 나는 보시라이가 중국 기자와 학계의 인맥을 동원해 장 이모와 그 자녀들에 대한 악성 소문을 파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뉴욕타임스》의 바르보자 기자는 어떻게 해서 그 기사를 쓰게 되었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원자바오에게 복수하려는 보시라이파 인사들로부터 정부를 얻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장 이모는 보시라이에게 충성하는 보안요원들이 홍콩의 바르보자에게 여러 개의 문서 상자를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같은 책, p113]

즉, 당시 원자바오 총리가 현재 중국의 최고 권력자인 시진핑과 경쟁 관계에 있던 보시라이에 대한 수사를 지지하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중국 보안부 내의 보시라이파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는 것이 작가의 추측이다. 이 과정에서 보시라이파는 작가 부부와 원자바오 가족 간의 석연찮은 거래 등을 포함한 자료를 서방 언론에 제공하였고 이 기사가 터지면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중국공산당 권력과의 밀월 관계는 파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것은 부부의 사이도 결정적으로 틀어지고 만다.

이 책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은 부부의 이혼이 아니다. 작가는 2015년 휘트니 단과 이혼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그런데 그 이후 휘트니는 그들 부부가 지은 중국의 복합건물의 사무실에서 누군가에게 붙잡혀 끌려갔고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절망한 작가는 舊소련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다 비슷한 방식으로 탈출한 빌 브라우더(Bill Browder)의 회고록 「적색 수배서(Red Notice)」에서 힌트를 얻어 제목을 정해 바로 중국공산당의 비리를 고발하는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태어나, 혼합경제 도시 홍콩에서 자라고,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금권주의 화된 중국에서 부를 축적한, 그러면서 중국에서 서구식 자유주의의 도래를 꿈꿨던 어느 자본가의 회고록이다. 그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중국의 미래로 상상하였지만, 책에서 드러난 그의 행적은 아직 봉건적 시스템을 유지하는 중국공산당의 퇴행성을 악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가 중국의 퇴행적인 현재 권력 시스템에 저항하려 했는지 또는 기여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절차적 정당성을 넘어선 정치에 대한 상념

경제성장을 이룩하려면 무엇보다도 可用財源을 적절히 배분하고 어느 정도 경제를 정부 통제하에 두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물론 정부가 통제한다고 해서 예컨대 「인도식 5개년계획」을 따르자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런 정책은 인디커티브플랜(Indicative Plan)이어야 하며 민간기업을 최대한 참여시키고 그들의 역량을 활용해 가면서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 자금이 많이 드는 것, 민간이 투자하기를 주저하는 부문을 정부가 담당하는 식의 개발계획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일관된 소신이었다.[부흥과 성장, 송인상 저, 21세기북스, 1994년, p155]

이승만 정부 때 한국은행 부총재, 부흥부 장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재무부 장관 등을 지냈던 경제관료 송인상 씨의 회고록 중 일부다. 송 씨는 한국은행 부총재 시절 포드재단의 기금으로 운영되던 EDI(Economic Development Institute)에 6개월 연수의 기회를 얻었다. 이 기관은 각국의 고위 경제관료들을 모아 경제정책에 대한 교육을 시켰던 기관이다. 송 씨의 술회에 따르면 노벨상을 수상했던 경제학자 등 꽤 화려한 강사진으로 커리큘럼이 짜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가 이러한 교육과정을 마련한 데에는 당연히 개발도상국의 경제관료들에게 미국식 시장경제의 도입을 권장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겠으나 송 씨의 회고를 살펴보면 꼭 미국식 자유시장경제의 우월성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당시 각국 경제개발 과정에서 시행되고 있던 계획경제, 통제경제, 방임경제 시스템 등의 장단점에 대한 토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송 씨는 이러한 교육과정을 통해 인용문과 같은 경제정책에 대한 나름의 주관을 정립하게 된다.

어쨌든 민간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전후 개발도상국들에게 경제의 성장을 위해서는 경제체제를 불문하고 통제경제는 일종의 불가피한 조치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권력집중과 자원집중의 수단을 통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대의민주제 등 정치선진화는 체제를 떠나서 상당히 요원한 일이었고 부패는 필수적으로 뒤따랐다. 이승만 정권 역시 그러했고 냉철한 이코노미스트 행세를 하던 송 씨도 재무부 장관 재임 시절인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연루된 뒤 옥살이를 했다.

요컨대 그 와중에 한국이 더 이상 퇴행하지 않고 다행히 선진국 소리를 듣게 된 것은 제1세계가 도울 수밖에 없었던 지정학적 특수성과 독재정권을 절차적 정당성이 어느 정도 확보된 대의민주제로 전환시킨 국민적 저항의 존재 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요즘의 세계를 보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한 많은 선진국조차 다양한 모순으로 인해 뿌리가 흔들리는 광경을 보면 절차적 정당성을 넘어선 새로운 정치 체제라야 경제와 사회를 구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바쁜 시기도 있었고 나름대로 시련의 시기도 있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단 탓이다. 이제 좀 삶이 안정되었으니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까 한다. 예열 차원에서 역사학자 박태균 씨의 통찰력 넘치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강의 영상을 올린다. 한반도의 현대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 박정희에 대한 연구야말로 한반도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열쇠 하나를 제공하는 연구가 아닐까 싶다.

“영속패전론, 전후 일본의 핵심” 독후감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聡)의 전후의 기만적인 일본 정치 체제에 관한 비판적인 저서 “영속패전론, 전후 일본의 핵심(永續敗戰論 戰後日本の核心)”을 읽었다. 영속패전론이라는 낯선 용어는 얼핏 러시아의 혁명가였던 레온 트로츠키의 유명한 혁명이론인 “영구혁명론” 혹은 “연속혁명론”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혁명을 영구적으로 행하자는 것이라면 뭔가 직관적으로 이해되는데 패전을 영구적으로 반복하자는 것은(혹은 반복하게 된다는 것) 선뜻 이해되지 않는 표현이었다.

조악하게 요약하자면 그 용어는 전후 일본의 지배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패전’이라는 정치적 귀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p9) 체제라는 것이다. 이런 체제의 행태 중 한 예로 저자는 일본 정부가 8월 15일을 ‘종전 기념일’로 부른다는 사실(p52)을 들고 있다. 전쟁은 대일본제국의 패배로 끝났음에도 ‘패전(敗戰)’이 아닌 ‘종전(終戰)’이라고 부르는 기만이 전후 일본 체제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는(p52) 저자의 지적이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 패전을 부인하고 있다면 그 상대는 승전국 미국인가? 일본의 자칭 내셔널리스트들은 이런 일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p8). 그 대신 그들은 대미 관계로 좌절된 내셔널리즘의 스트레스를 아시아를 향해 분출한다(p9). 저자가 들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 중국, 러시아와 벌이고 있는 영토분쟁이다. 저자는 이 세 나라와 일본이 분쟁을 벌이고 있는 영토의 진정한 주인을 따지기보다는 영토분쟁 과정에서의 일본의 모순된 행태를 밝힘으로써 지배 체제의 기만성을 고발한다.

또한 저자는 북한 문제를 통해 일본이 어떻게 영속패전론, 즉 패전을 부인했는지를 분석한다. 어쩌면 일본이 미국의 의도와 상관없이 선도적으로 외교관계를 모색했던, 말하자면 일본이 전후 최초로 시도한 ‘자주 외교’였다(p122). 이에 북한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간 있었던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였는데 오히려 당시 고이즈미의 심복 아베 신조는 이를 반북(反北) 소재로 활용하여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납치 문제를 평화헌법 개정으로 연계시키는 ‘패전의 부인’ 완수(p126)를 시도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패전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 정치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어떠한가? 알다시피 미국의 진보적 세력은 일본의 뻔뻔함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미국은 현재의 동북아 정치 구도의 설계자다.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는 냉전의 최전선을 한국과 대만에 떠넘기고 얻은, 지정학적 여유에서 비롯한 허깨비다(p153). 따라서 저자는 미국이 일본의 친미 보수 세력의 반성하지 않은 모습에 분노를 느끼고 있으나, 그 저열한 세력이 제멋대로 자라게 놔둔 당사자가 바로 미국임을 지적하고 있다(p157).

최근 한국의 대통령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제3자 변제’ 방안을 변명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수십 차례 사과했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사과는 따지자면 겉마음, 즉 다테마에(建て前)다. 도쿄 한 복판에 A급 전범을 ‘호국의 영령’과 ‘신’으로 모시는 시설이 서 있고, 이곳의 참배가 정치 공약(p194)인 체제가 바로 그들의 속마음, 즉 혼네(本音)다. 일빠인 한국 대통령이 이를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이번 역시 지난번 “위안부 합의”처럼 미국의 동북아 패권구도 재편을 위해 급히 일을 추진하다 보니 아무 소리나 해보는 것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는 2013년에 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1쇄가 발간되었지만, 읽고 있자면 엊그제 읽은 한일 정상의 오므라이스 만찬 소식만큼이나 생동감이 있다. 그만큼 일본의 정치 체제의 혼네는 변함없이 굳건하고, 우리 정치권과 우익 세력의 이에 대한 대처도 변함없이 굴욕적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의 역자는 후기에서 저자의 ‘영속패전론’ 용어를 빌어와서 한국 현대사의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을 ‘영속식민지론’ (p212)이라고 표현했는데 정부가 요즘 하는 짓을 보니 더더욱 꽤 그럴싸한 표현이다.

냉전은 끝났지만 신냉전은 보다 다양한 전선에서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반(反)러시아 구도 강화, 중국의 대만 위협, 시진핑과 푸틴의 정상회담, 미국의 ‘칩4 동맹’ 추진, 북한의 핵도발 등 곳곳에서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다시 한번 한일 갈등을 임시로 봉합하고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나아가는 구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일본의 혼네로서의 자기성찰은 한동안 없을 듯하다. 이는 당연히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전체에 불행한 일이며 그 수혜자는 각국의 극소수 권력층에 불과하다.

세계화 혹은 ‘공간의 압축’이 만들어 놓은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은 대공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서로 다른 지방의 노동자들 상호간에 연계를 맺어주는 교통수단의 증대에 의해 촉진된다. 그런데, 이러한 연계만 맺어지면 어디서나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는 허다한 지방적 투쟁들은 하나의 전국적 투쟁,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지방도로를 갖고 있던 중세의 시민들이 수세기를 필요로 했던 단결을, 철도를 갖고 있는 현대 프롤레타리아들은 몇 년도 안되어 달성한다.[공산주의당 선언,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 1, 김세균 감수, 박종철출판사, p409]

맑스-엥겔스주의의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공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매뉴팩처에서 자본주의의 생산성 증대는 부르주아지가 개별 소규모 공장 혹은 가정에서 행해지던 생산기능을 대규모 공장에 모아서 분업화함으로써 가능했다. 대규모 공장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또한 노동자들에게도 중요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곳곳에 산재해있던 노동자들이 단일 장소에 모이고 소통하면서 이른바 “노동계급”이라는 의식이 고양된 것이라고 보았다.

교통수단의 발달도 마찬가지 이치다. 자본가에게 있어 교통수단의 발달은 시장의 확대라는 장점을 극대화시켜준다. 교통수단이 지방도로에서 철도로 바뀌게 되면 원료를 보다 안정적으로 빠르게 조달이 가능하며, 상품 역시 보다 더 많이 신속하게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있기에 자본의 거대화와 독점화는 더욱 촉진된다. 이것은 또한 인용문에서 분석한 것처럼 노동자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전국화된 투쟁을 보다 많은 규모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엥겔수주의의 뛰어난 점은 이렇게 서로 적대하는 계급이 흥미롭게도 같은 수단을 통해 갈등이 전국화되고 극대화될 수 있다는 통찰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공장은 노동력 수탈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철도는 시장의 확대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계급투쟁을 전국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그 폭발적인 생산성 증가만큼이나 같은 속도로 계급모순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것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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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author – Центральны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инофотофоноархив Украины им. Г.С.Пшеничного, Public Domain, Link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일당독재 또는 일인독재로 형해화되어 있는 21세기에 맑스-엥겔스의 통찰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 공간은 인터넷에 의해 그 한계가 더욱더 좁혀졌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세계의 자본가와 노동자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돈을 벌고, 소통하고, 동시에 가짜뉴스에 현혹된다. 자본순환, 계급의식, 또 반대로 혐오의식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극단화된다. 맑스-엥겔스가 바라던 바람직한 투쟁의 집중도 없잖아 있지만, 세계적 우민화도 동시진행형이다.

더불어 교통수단의 발달과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세계화로 – 즉, 공간의 압축 – 인해 지구인은 값싼 상품이라는 호재(好材)를 공유하게 되었지만, 더불어 악재(惡材), 이를테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 유행도 함께 겪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공간의 압축은 계급모순의 심화뿐 아니라 정치극단화, 유행병과 같은 부작용까지도 함께 공유하게 되는 상황을 불러온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의 압축은 자본주의의 축복이자 재앙인 셈이다.

그리고 공간의 압축은 맑스-엥겔스의 생각만큼 계급의식을 평준화하진 못했다. 세계화는 제조업의 저임금 국가로의 이전을 초래했고 선진국의 노동자계급은 일자리를 뺏기며 우경화되었다. 이는 해당 국가의 정치극단화를 불러왔고 세계는 다시 나홀로 금리인상, 전쟁, 에너지 쟁탈전 등의 양상으로 블록화되고 있다. 더불어 기후변화 등 자본주의 모순을 깨닫는 여론도 공간의 압축으로 실시간 공유되는 측면도 있으나 그 추동력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법복과 털외투는 악행을 감춰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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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win Austin AbbeyMetropolitan Museum of Art, online database: entry 10049, Public Domain, Link

넝마 옷 사이로 보이는 악행은 크게 보이는 법이지만, 법복과 털외투는 그 모든 걸 감춰주지. 죄에 황금 칠을 하면 강력한 정의의 창이라도 상처 하나 못 입히고 부러지는 거다. 누더기로 무장하면, 난쟁이의 지푸라기라도 뚫을 수 있다.[리어 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태원 옮김, 웅진씽크빅, 2014, p190]

아버지로부터 권력과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그러한 아버지는 섬길 마음은 없었던 두 딸에게 버림받고 황야에서 길을 잃어 정신이 온전치 못한 리어 왕의 독백이다. 이성의 끈을 놓은 와중에도 이렇게 문득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있어 동행하고 있던 에드가로부터 “광기 속에 이성이 있다”는 찬사를 받는다.

오 후보자는 2011년 12월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 재판장 재직 시절 800원을 횡령한 버스기사를 해임한 고속버스 회사의 해고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중략] 이는 2013년 2월 변호사로부터 85만원 상당의 접대를 받은 검사의 면직에 대해 “가혹하다”고 한 판결과 대비돼 입길에 올랐다.[800원 판결과 ‘윤석열, 술, 인연’…대법관 후보 오석준 청문회]

한 인물이 리어 왕의 그 촌철살인에 그대로 적용되는 두 가지 경우에 동시에 관여하고, 지금 대법관 후보로 행세하고 있다니 인간세상의 부조리는 문명의 진보와 무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이것이 문제다 저것이 문제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닌가 하는 염세적인 생각도 든다.

“치명적인 실수”를 수습해야할 한국 정부

“우리는 한국의 우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진지한 논의를 할 자세가 되어있다.” (美국무부 산하의) 경제성장, 에너지, 환경 차관 호세 W. 페르난데즈는 한 논평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음 달에 국내 규칙제정 과정을 시작함에 따라 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윤은 언급한 문제에 익숙한 두 번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美하원의장 낸시 팰로시가 지난달 남한을 방문했을 때에 직접 만나지 않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만남이 있었더라면 법의 통과 전에 조율을 시도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는 말했다.[South Korea Sees ‘Betrayal’ in Biden’s Electric Vehicle Push]

한국 대통령이 워라벨 추구하느라 내한중인 미국 정부의 2인자를 만나지 않아서 한국 정부가 한국의 전기자동차 수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인플레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IRA)1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조율할 수 있었을 기회를 놓쳤다는 美국무부 관리의 주장이다. 짧은 만남을 통해 해당 법안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가 가능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전화통화에서는 다룰 수 없었던 주제였다는 점에서는 아예 기회를 원천차단 해버린, 그럼으로써 美관리가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다”라고 주장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음은 분명하다.

This 1973 photo of a charging station in Seattle shows an AMC Gremlin, modified to take electric power; it had a range of about 50 miles (80 km) on one charge.
By Seattle Municipal Archives from Seattle, WA – Seattle Municipal Archives, CC BY 2.0, Link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한국산 차량을 전기차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이 한미FTA와 WTO규정에 위반될 소지가 높다고 밝혔다. 이 법이 한미FTA의 비차별 원칙을 위반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안덕근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해당법과 관련해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전 정보나 통보를 받은 것도 없다한다.2 FTA도 맺었고 기회 있을 때마다 “동맹”이라고 치켜세우던 초강대국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다. 하지만 동맹이고 뭐고 간에 늘 그렇듯이 미국의 자국중심주의적 행동이었을 뿐이고 우리는 뒤통수를 맞았을 뿐이다.

美정부의 유력자가 내한했어도 우리 권력자가 만나지 않을 자유는 있다. 그게 자주적(自主的) 정부의 권리일 것이다. 그래서 자주권을 가지고 FTA도 맺었고 주권도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상대방이 약속을 어겼을 때는 정당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찾아와야 오롯한 자주 국가라 할 것이다. FTA나 투자보호협정은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 안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도’ 조항 탓에 주권을 뺏긴 채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의 처분에 따라 거액을 론스타에게 뺏기는 험한 꼴만 당한다면3 FTA의 존재의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워라벨을 지켜낸 그 결기로 주권을 지켜야 한다.